20220710 시편 56편 1-13절 신뢰 속에서 거하라
주님과의 계약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연일 무더위로 잠을 쉽게 청할 수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어딜봐도 마음의 시원함을 주는 곳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여름의 열기와 습도 속에서도 건강하시길 빕니다. 유세 도중 총기 테러로 사망한 아베 전 일본 총리 소식이 일본 열도를 큰 충격에 빠지게 했습니다. 뉴스를 접하는 순간, 별거 아닐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몇 시간 뒤에 사망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면서 세계 각국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한편 마음 깊은 곳에서는 또다른 감정이 일어나는 제 자신을 보면 저의 그림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최근 할례를 받으러 병원에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은 저에게 할례가 지닌 상징적 의미에 대하여 깊이 숙고하게 했습니다. 할례는 구약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을 드러내는 신성한 표식입니다. 자아가 신성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계약 당사자인 자아의식은 자기(Self)가 부과한 책임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고대부족에게는 성인식에서 이런 과정이 이루어졌고, 이런 할례의식은 변환과 발전을 위한 과정입니다. 인간의 충동을 희생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에 부합하도록 더 높은 의식의 차원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고 위대한 창조자라면, 인간은 작은 창조자로의 변환입니다. 이런 할례는 심리적으로 무의식은 자아의식으로 하여금 협력을 요청하고 있으며, 새로운 계약관계 속에서 더 높은 책임을 부과합니다. 저에게 중요한 변화의 순간을 위해 마음의 태도를 준비시키는 듯 합니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겸손하게 우리 내면의 소리, 꿈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인생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불쌍히 여김
오늘 시편의 표제는 “지휘자를 따라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다윗의 믹담, 블레셋 사람이 가드에서 다윗을 붙잡았을 때에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요낫 엘렘 르호김’은 관주에 보면 ‘먼 느티나무 위의 비둘기 한 마리’라는 뜻입니다. 지휘자를 따라서 먼 느티나무 위에 앉은 비둘기 한 마리에 맞추어 부르는 찬양입니다. 지금은 그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음악 기호가 매우 시적으로 서술되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시의 표제의 부연설명에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혔을 때 지은 시라고 서술합니다. 앞의 음악기호의 평온함과는 다르게 뒤에 설명된 부분은 위태롭고, 다급하고, 힘겨운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짓밟습니다. 온종일 나를 공격하며 억누릅니다. 나를 비난하는 원수들이 온종일 나를 짓밟고 거칠게 나를 공격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아지고 있습니다(1-2).” 시인은 사방으로 자신을 짓밟는 적들과 점점 더 거세지는 공격 앞에서 놓여 있습니다. 그때 자신을 불쌍히 여기 주십시오 기도합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김받을 존재임을 철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우리 자신이 불쌍히 여김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고 고백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께 잇대어 살 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여전히 긍휼을 기다리고, 불쌍히 여김을 받을 존재임을 아는 자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의 머리를 조아리고 연약함과 한계, 고통을 아뢸 수 있습니다. 자아가 왕이 되면 하나님과 연결될 이유를 상실하고 맙니다. 모든 재화가 풍족해지면, 인간은 더이상 자기 반성을 하지 않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종교적 삶이란 세속적인 삶에 뭔가를 덧붙이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생각에 종교란 지속적으로 마음을 지배하는 습관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모양을 회복하는 것이며, 마음과 삶을 지극히 거룩하신 구원자의 마음과 생각과 계속해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케네스 콜린스, 이세형 옮김(2016) : 《존 웨슬리 톺아보기》, 신앙과 지성사, p68.]
종교란 마음과 삶을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계속해서 접속시키는 것이라 일러줍니다. 이것이 종교의 본령입니다. 세속적 성공과 부와 연결되고, 자기 만족과 쾌락에 잇대어 가는 것은 기독교를 달지 않아도 가능한 일입니다. 온전한 신앙과 종교를 위해서 주님과의 연합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이 긍휼함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 받을 존재임을 고백하며 주님과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치료제 – 눈물
시인은 절박한 간절함을 눈물로 호소합니다. “나의 방황을 주님께서 헤아리시고, 내가 흘린 눈물을 주님의 가죽부대에 담아 두십시오(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개역개정).”
시인은 불안정하고 불확실함 속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자신을 옥죄어오는 고통 속에서 집을 잃고 방황하며 헤매였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방황 속에서 시인은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은 감정의 결정체로서 일종의 정신적 찌끼를 씻어내는 정화수로 작용합니다. 복잡한 정서 속에서 흐르는 눈물은 정체된 응어리를 해소하는 치료제가 됩니다.
그림 형제 민담의 “라푼젤”에 보면, 마녀의 탑에서 쫓겨난 라푼젤은 눈이 멀어 있는 왕자를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이 왕자의 눈에 닿자 왕자는 눈을 뜹니다. 여성(아니마)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은 남성의 맹목을 치유하는 치료제가 됨을 시사합니다. 한 여성에게도 깊은 공감 능력과 동정심으로 흐르는 눈물이 에로스의 본성을 강화하며 진정한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고통받는 남성적 세계를 구원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흘린 눈물을 가죽 부대 혹은 주의 병에, 두루마리에 담아두시길 간청합니다. 주님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은 주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노래합니다. 주님 앞에서 흘린 눈물은 주님이 기억하고 계심을 시인은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외적 내적 고통으로 흘린 눈물을 주님이 알고 계시며 그 눈물이 주님을 일하게 하실 것입니다. 온갖 쾌락에 탐닉된 세상에서 눈물은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눈물은 약자나 여성의 값싼 전유물로 취급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서 고통받는 자신과 타자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를 통하여 세상은 치유를 경험할 것입니다.
신뢰 속에 거하라
사방으로 거세지는 적들로 인하여 몸서리칠 때 시인은 하늘을 주시합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두려움이 온통 나를 휩싸는 날에도, 나는 오히려 주님을 의지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만 찬양합니다(2b-4a).”
현실이 암담하고 두려움이 옥죄어 올 때면 우리의 시야는 좁아지고 마음은 안절부절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들어보면 내 위로 별이 반짝이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위에서 바라보면, 지금 나의 절박한 상황이 절대적 조건일 수 없습니다. 가로막힘과 답답함 너머에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외롭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며 나를 든든하게 지키고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두려움이 온통 나를 휩싸는 날에도 나는 오히려 주님을 의지합니다라고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시인은 두려움이 온통 나를 휘두르는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때 두려움이 물러났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자는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확신 속에서 노래합니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4b, 11b)
"하나님은 나의 편이심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9b)
이런 확신이야말로 인생의 절박한 상황에서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줄 지지대입니다. 볼온하기 짝이 없는 세상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주님을 노래하며 이제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다고 고백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을 노래하며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자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련과 고난은 자신의 눈을 맑게 하였고, 이전에 보이지 않던 삶의 차원에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든든함이 하나님의 은총임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내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가 생명의 빛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닐 수 있게, 내 발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13)
절망의 심연을 건넌 후 시인이 하나님께 바치는 고백입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하나님의 구원이 네 가지 동사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건져 주심, 생명의 빛을 비추심, 하나님 앞에서 걷게 하심, 그리고 지켜주심입니다. 이것이 시인만의 고백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은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은혜 안에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당당하게 인생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