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의 한쪽에는 룸메이트와 함께 쓰는 2층 철제 침대가 놓여 있고 침대와 창가 사이에는 작은 책상이 있으며 벽에는 여러 개의 선반을 걸어 책을 꽂아놓았다. 창가에는 연두색 리넨 커튼이 걸려 있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보이는 다른 방들도 남학생들이 꾸민 것치고는 꽤 센스 있는 데코레이션을 보여준다(원작 소설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속에서 지저분하다고 묘사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와타나베가 선배인 나가사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보이는 기숙사생들의 휴게실도 예쁘다. 둘이 앉은 3인용 소파는 프레임은 나무, 시트는 블랙 가죽 소재인 팔걸이가 있는 디자인이고, 그 뒤쪽의 흰 벽에는 온갖 포스터와 엽서들을 빼곡하게 붙여 놓았는데 그 나이 대에 잘 어울리는 젊은 느낌의 이미지 월 같아 보인다. 휴게실 벽에는 미드 센트리(Mid-Century)각주 시대의 기하학적인 그래픽 패턴의 연두색 벽지가 발라져 있는데, 이런 복고풍 패턴의 패브릭이나 컬러풀한 소품은 영화가 전개되면서 점점 눈에 띄게 많이 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와타나베는 도쿄 한복판에서 우연히 나오코를 다시 만나고, 둘은 주말마다 만나서 말없이 그저 어디로든 걸어 다닌다. 과거에 대한, 특히 기즈키에 대한 얘기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둘이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보이는 나오코의 집은 크게 부엌 겸 다이닝 룸, 거실 겸 침실 용도의 두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무 살을 넘겨 독립한 도쿄의 젊은이들이 흔히 얻는 크기와 구조의 집으로, 이런 작은 집들로 구성된 공동주택을 ‘맨션(Mansion)’이라고 부른다(원래 대저택을 뜻하는 단어지만 그런 유의 건물들을 대거 건설하던 당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 그렇게 호칭했다고 한다). 벽을 기준으로 하나의 공간을 정확히 이등분한 듯 두 방이 같은 크기인데, 그 사이에 미닫이문이 있어 문을 열면 하나의 공간으로도 쓸 수 있는 실용적인 구조다.
작은 집이라면 이처럼 여닫이문보다는 미닫이문을 설치해야 문을 열고 닫을 때 생기는 작은 데드 스페이스까지 살뜰하게 줄일 수 있다. 거실에는 나무로 된 작은 좌식 원형 테이블이 있고 그 주위로 각기 다른 패턴의 방석이 몇 개 놓여 있다. 창가에는 연두색 1인용 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같은 색의 커튼이 진하게 들어오는 햇살을 막아주고 있다.
유리 소재 여닫이문이 달린 긴 수납장도 보인다. 부엌이 있는 방은 미니 사이즈라고 해도 될 만큼 작은 크기의 빛바랜 흰색 싱크대와 찬장, 냉장고가 있고 찬장 아래 선반에는 향수를 자극하는 오렌지색 법랑 냄비들이 놓여 있다. 그 옆의 벽에는 벽걸이 행어(Hanger)에 청소 도구들을 걸어 놓았다. 노란 플라스틱 펜던트 조명 아래에는 하얀 식탁보가 깔린 2인용 식탁이 있다. 등받이와 좌판이 나무로 되어 있는 철제 의자와 식탁은 오래전 학교 책걸상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다.
비 오는 어느 날, 나오코의 집에서 둘은 그녀의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나오코는 아직 스무 살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 다시 열여덟 살이 되어서 스무 살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다면 좀더 편안해질 텐데, 라며 울음을 터뜨리고 오랫동안 묵혔던 감정을 와타나베에게 내보인다. 그걸 보일 사람도, 알아줄 사람도 그밖에 없으니까.
그러고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둘은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그녀의 말에 의아한 와타나베는 그만 암묵적으로 금기시된 기즈키의 이름을 말하고 나오코는 다시금 열일곱 살 이후로 겪었던 절망의 늪에 빠져버린다. 자책감을 느낀 와타나베는 날이 밝자 집을 나서고 얼마 되지 않아 나오코는 아무 말 없이 이사를 가버린다. 와타나베는 고베의 고향집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기다리던 답장이 온다. 교토 근처의 요양원에 있으며 아직은 그를 볼 용기가 없다고.
언제나처럼 학생 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던 와타나베 앞에 짧은 단발머리의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미도리. 사람에게 실망하기 싫어 친구를 만들지 않았던 와타나베에게 그녀는 묘하게 친근하게 굴고 둘은 친구가 된다. 미도리의 초대를 받고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와타나베. 미도리는 2층집의 2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데 별도로 부엌도 있고 베란다도 커다란 벤자민 화분, 라탄 소재의 정원 의자와 테이블을 놓을 수 있을 정도니 꽤 넓은 집인 것 같다(그것도 도쿄에서! 하지만 원작에서는 미도리의 집이 넓다거나 그 정도로 부유하다고 나오진 않는다). 2층 벽에는 연두색 벽지가 발라져 있고 분재가 놓인 나무 수납장과 플루어 스탠드도 있다.
부엌에는 연한 노란색 싱크대가 있고 하수구 파이프 부분을 작은 커튼으로 가렸는데 이게 나름의 포인트가 된다. 그 앞에서 요리하는 미도리도 노란색 체크 미니스커트를 입어 공간과 썩 잘 어울린다. 그녀는 하늘색 호마이카(Formica)각주 식탁 위에 와타나베를 위한 식사를 잔뜩 차리고 둘은 얇은 오렌지색 커튼이 하늘거리는 창가에 앉아 밥을 먹는다(여기서도 나오코의 집에서 보였던 복고풍의 주황색 꽃무늬 법랑 냄비가 등장한다). 환한 햇살이 창가에 드리우는 오전에 미도리의 집에 왔던 와타나베는 오후에 그 햇살이 비가 되어 내릴 때까지 머무른다. 둘은 얼결에 키스를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곧 시인한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나오코에게서 다시 편지가 온다. 의사가 외부인과 만나는 것을 허락했는데 생각나는 사람은 너뿐이라고. 와타나베는 그녀를 만나러 숲 속을 걸어간다. 이 영화 속에서는 숲과 식물의 녹색 이미지들이 자주 보인다. 주인공들의 방에서도 다른 색보다 연두색 인테리어 아이템이 유독 도드라질 정도로 많다. 나오코가 머무르는 요양원도 마찬가지인데 현관 입구에 드리워진 발을 시작으로 창가의 커튼, 벽지 패턴, 작은 카펫, 침대에 깔린 담요, 테이블 위의 찻잔, 나오코가 어깨에 걸치고 있는 블랭킷까지 모두 연두색이다.
후에 등장하는 와타나베의 아파트 커튼과 의자, 플루어 스탠드의 색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가 쓰는 목욕 수건조차 연두색인 걸 보고 나면 마치 작전이라도 짠 듯 다들 같은 색이라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진다(영화를 보며 연두색 아이템을 발견하는 재미가 추가될지도). 트란 안 훙 감독의 전작인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도 느낄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녹색이 스크린 속에서 발연하는 싱그러운 환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아마도 원작과 영화의 영제가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사실 또한 연두색의 향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요양원에서 함께 머무른다. 둘에게는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시간이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 숲 속을 거닐다 그녀는 기즈키의 이름을 꺼낸다. 서로의 마음과는 달리 육체적인 관계는 잘 되질 않았다고. 하지만 와타나베와는 달랐다고. 나오코는 머리가 아닌 몸이 반응하는 일련의 일들이 신기했고 과거의 자신에게 더욱 의아해지며 화가 났던 것이다. 첫눈이 오는 날, 둘은 다시 관계를 가지려 하지만 나오코는 끝내 거절한다. 자신이 짐이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에게서 떠나라고 한다. 와타나베도 스무 살이 되었으니 그럴 때가 됐다고. 와타나베는 기숙사를 나와 아파트를 얻을 거라며 그곳에서 함께 살자고 한다.
하지만 그 후 나오코의 상태가 악화되고 결국 오래전 기즈키가 그랬던 것처럼 자살로 그 끝을 맺고 만다. 와타나베는 동굴에서 폐인처럼 살며 쉽게 받아들일 수 없던 그녀의 죽음을 조금씩 힘겹게 인정한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집으로 돌아온 와타나베는 ‘그를 기다릴 것이고 돌아온다면 나만 생각해 달라’던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그녀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나오코와 미도리를 오가며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그들을 사랑했던 와타나베는 이제 미도리에게 머무를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아니 살아내야 한다. 기즈키는 영원히 열일곱 살, 나오코는 영원히 스물한 살이지만 와타나베와 미도리는 언젠가 스물한 살을 넘어 서른이 될 테니까. 원래 죽은 친구의 연인이라는 불안하고도 불완전하게 시작한 관계였으니 어찌어찌 지탱하고는 있지만 어쩌면 나오코와는 해피엔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쯤은 그도 상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몸과 마음이 온통 흔들리면서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랑이고, 스무 살이 아니던가. 또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연둣빛처럼 빛나는 것이 바로 청춘이고.
첫댓글 '왜 사냐건 웃지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역시 달관세대이십니다.
네 달관해야 사는 세상인가 봅니다 ㅋㅋㅋ
어느 덧 세모입니다.
하늘마음님 한 해 갈무리 잘 하시옵고 건안 건승을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