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일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화려한 크리스마스를 구경하고서 오늘은 우돈타니로 떠난다. 우돈타니 공항으로 가신다는 여행광님의 렌트카를 얻어 타고 가는데 차 안에서 김이며 마스크팩이며 몇 가지 선물을 주신다. 이거 남았는데 필요하면 쓰세요 - 하면서 무심한 듯 건넸지만 짐을 싸면서 미리 빼놓았으리라. 우리는 아무 준비가 없었기에 미안한 마음으로 받기만 했다.
구글지도를 통해 점찍어 놓았던 숙소인 팍디맨션에 도착해 보니 한눈에 깔끔한 숙소라는 느낌이 온다. 여기서 내리면 되겠어요. 감사했습니다. 또 만납시다. 여행광님과 헤어지고 프런트에 가 보니 노부부가 주인인데 할머니의 영어가 또랑또랑하다. 450밧을 달라는데 얼른 아고다를 뒤져보니 이틀 750밧 특가가 있다. (다음날 하루 연장할 때는 432밧이었던 걸로 미루어 평소에는 아고다 가격과 워크인 가격이 비슷한 듯하다.) 예약을 누르고 체크인을 했다. 예상대로 방이 깨끗하고 침대나 욕실이나 다 훌륭하다. 손님도 주인을 따라 모이는 법인지, 무료 커피와 비스켓이 제공되는 프런트 앞 테이블들에는 서양 노인들이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곳 우돈타니에도 많이 산다는 그 '서양할배'들 말고 여행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오시는 숙소. (두 개씩 개별포장된 이 비스켓이 맛있다고 마트나 시장 갈 때마다 찾아 보았는데, 계속 실패하다가 결국 난까지 가서야 나라 백화점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오후에는 비가 계속 내려서 구경은 못 다니고 숙소 근처에 나가 밥만 사 먹었다. 점심 먹은 식당은 이름이 빵뻔이었던가, 깔끔하지는 않은 완전 로컬 분위기의 식당이었고, 저녁을 먹은 식당은 오리고기를 간판에 내세운 커다란 식당. 저녁 먹는 중에 마침 손흥민 경기가 중계되고 있어서 1골을 넣고 2골을 어시스트하는 활약을 실시간으로 구경할 수 있었다.
12월 27일
오늘 구경할 곳은 세계적으로도 오래된 편에 속한다는 청동기 유적지 반치앙이다. 가장 오랜 메소포타미아 지방보다는 몇백년 늦지만 중국 황하 유역보다는 훨씬 오래된 유적이란다. 터미널에 가서 반치앙 가는 버스를 물어보니 싸꼰나콘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리라고 한다. 요금은 45밧. 그런데 차 안에서 살짝 졸다가 깨서 보니 지도에서 보아 두었던 반치앙 입구를 막 지나친 다음이다. 깜짝놀라 운전기사에게 얘기하니 자기도 깜빡했다면서 다음 마을 입구에서 차르 세우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그러더니 길 건너를 가리키는데 그쪽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인다. 뚝뚝 기사다. 호? 일부러? 차르 내려 길을 건너가 물어보니 반치앙까지는 10킬로 정도라며 대기 요금 포함하여 왕복 300밧을 달라고 한다. 뭐, 듣던 바와 비슷하니 운전기사에게 낚인 건 아닌가 보네.
반치앙은 아주 작은 동네인데 청동기 유적 박물관 앞쪽에 기념품 상점과 식당들이 모여있다. 구석진 시골에 있어서 그런가 평일이라 그런가 관람객은 몇 명 안 보인다. 박물관 입장료는 150밧, 규모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웬만한 지방 박물관들보다는 확실히 잘 지어 놓았다. 유적에 관심이 많았다는 라마9세와 그 누이의 행적을 포함해서 전시물이 꽤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붉은줄무니 토기였다. 나중에 보니 이 토기가 반치앙의 상징인 모양이다. 우돈타니를 포함하여 이싼 여러 지역에서 이 토기 모양을 본뜬 조형물이 많이 보였다.
학술적 의미를 따질 것은 아니니 (능력이 없으니) 대략 아주 옛 시절에 우리 조상들이 - 우리가 아니고 아니 태국 사람의 조상인가? 아니 타이족이 태국에 정착하기도 훨씬 이전 시대의 유적이니 그들의 조상도 아니군 - 살았던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저 채색 토기와 함께 이곳에서 발견된 볍씨도 학문적으로 중요하다고.
돌아올 때는 뚝뚝을 탄 동네까지 가지 않고 반치앙 입구라고 써 있는 곳에서 내려서 우돈타니 가는 버스를 잡아 탔는데, 중간에 동네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완행버스라 그런지 올 때보다 요금이 싸다. 40밧.
숙소로 돌아와서 잠시 쉬다가 유디타운(UD는 아마도 우돈타니의 우돈일 듯. 기차역 근처에 있는 상가 지역인데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핫플레이스란다.)을 한바퀴 둘러보고 제법 근사해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서 저녁을 먹었다. 서양 음식과 타이 음식을 파는 누워어라는 식당인데 여기서 땀탓(쟁반쏨땀)을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화려한 하얙남푸(오거리 분수대)의 밤풍경)
12월 28일
오늘은 일찍 일어나서 우돈타니의 명물인 탈레부아댕으로 향했다. (탈레는 바다, 부아는 연꽃, 댕은 붉다는 뜻이니, 합치면 붉은 연꽃의 바다라는 이야긴데, 실제로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이고 연꽃이 아니라 수련이다.) 게으른 여행자들이 일찍 일어난 이유는, 오후가 되면 수련이 꽃잎을 다물기 때문이다. 어제 반치앙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버스를 타고 가서 뚝뚝을 갈아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나중에 들으니 미니밴을 타고 가는 투어도 있는 모양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탈레부아댕을 보러 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숙소에서 확인해 보시길) 거리는 어제와 비슷한 것 같은데 (방향은 약간 다르다. 어제는 동쪽, 오늘은 동남동) 버스 요금은 20밧밖에 안 받는다. 싸면 좋지, 뭐.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열심히 구글 지도를 보면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차장이 부른다. 쿰파와피(원숭이 마을로 알려진 곳. 호수의 남쪽에 있는 이 마을에서 뚝뚝을 탄다고 들었었다.)가 아직 멀었는데 왜 내리라지? 탈레부아댕 가는 걸 재확인하며 내리라고 하니 일단 내릴 수밖에. 가까운 데서 내려주니까 버스 요금이 싼 건가? 지도로 보니 여기서 내리나 쿰파와피에서 내리나 탈레부아댕 선착장까지 비슷한 거리다. 아니 이쪽이 약간 가까우려나? 그런데 3거리에 뚝뚝이 보이지 않는다. 설미 잘못 내려준 건 아니겠지?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할아버지 두 분이 나타나 탈레부아댕 가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뚝뚝을 찾는다고 하니 한 할아버지가 옆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뚝뚝을 끌고 나오시는데 척 봐도 우리가 만난 최고령 뚝뚝 기사다. 70은 확실히 넘으셨고 80대? 왕복 400밧을 달라고 하는 걸 350밧으로 깎았다. (결국엔 400밧을 다 드림) 가다보니 어제보다 확실히 먼 곳이다. 15킬로 정도 되려나? 한참을 달려서 호숫가에 도착하니 보트들이 주루룩 대기중이고 한 쪽에 표파는 곳이 있다. 할아버지의 안내에 따라 300밧짜리 표를 사서 작은 배에 올라탔다. (6명 정도 탈 수 있는 큰 배는 400밧)
처음에는 그냥 엄청나게 넓어 보이는 호수였다. 멀리에 붉은 꽃들이 보이기는 하는데 별달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배를 타고 한참을 달려서 호수 반대편이 보일 무렵에야 드디어 연꽃 (수련도 넓은 의미에서는 연꽃이지 뭐) 바다가 나타난다. 아아, 듣던대로 아름다운 경치다. 꽃 사이에 배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우리도 물론 열심히 찍었다.
(배를 타러)
(배를 타는 것까지 챙겨주시고, 내릴 때도 미리 와서 도와주셨다.)
(수련 줄기 - 식용이란다.)
구경 잘 하고 돌아와서 400밧을 드리니 아주 좋아하신다. (악착같이 깎을 땐 언제고? 내가 쫌 친절한 할아버지긴 하지. 흐음 - 하셨을까?)
할아버지는 우리더러 우돈타니로 돌아갈 거냐고 묻더니 따라오라면서 집안으로 들어가신다. 집에는 왜? 물어보기도 전에 반대편 문으로 나가시네? 따라 나가니 도로를 건너가는 곳이다. 올 때는 이쪽에서 내렸으니 갈 때는 건너가서 버스를 타야 하는데, 신호등도 없고 횡단보도 표시도 없다. 그나마 중앙분리대 근처에 큰 나무 토막들을 놓아서 건너기 좋게 해 놓은 정도. 편하게 건너라고 여기까지 데려다 준 거구나.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넓은 길이지만 뭐 이런 데 한두 번인가? (보행자보다 자동차를 우선시하는 동남아 국가들, 하긴 우리나라도 보행자 배려가 시작된 게 얼마 안 되었지.) 우리끼리도 잘 갈 수 있어요, 안녕히...... 그러나 할아버지가 베푸시는 친절을 거절할 수도 없어서 잠자코 (인사는 속으로만) 할아버지를 따라 길을 건넜다. 컵쿤캅! 이번에는 진짜로 인사를 하고 허름한 벤치를 찾아 앉으려는데 할아버지는 돌아갈 생각이 없으신 것 같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라고 했더니 우돈타니 가는 차를 잡아 주어야 한다며 벤치에 같이 앉으신다. 차를 기다리며 물어 보니 올해 나이가 80이란다. 근처에 살고 있다는 가족들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 중국 관광객과 찍은 사진을 자랑하신다. 그 나이에 매우 즐겁게 일을 하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얘기하느라 썽태우 하나는 놓쳤고 두 번째 썽태우를 세워 주시면서 요금이 25밧이라고 강조하신다. 혹시 바가지 씌울까봐 걱정되시는 듯. 그런데 왜 썽태우가 버스보다 비싸지?
우돈타니로 돌아와서 5거리(하얙남푸) 근처에서 내려 맛집을 찾아가다 보니 신발 가게가 모여 있는 곳이 보인다. 옆지기님 신발 한 켤레 사고 (350밧) 카오삐약을 주메뉴로 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농쁘라짝 호수 공원까지 걸어가서 잠시 구경하다 보니 날이 덥다. 어디 시원한 까페 없나? 검색해 보니 호수 북쪽에 하나가 걸린다.
호숫가에 붙어 있는 건 아니고 길 하나 건너편에 있다. (그래서 비욘드까페?) 꽤 큰 가게인데 손님이 가득하다. 안쪽 조용한 홀에는 공부하는 젊은이들로 가득찼고 2층에도 밖에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줄을 서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하나(50밧, 이건 별로 안 비싸네?)와 망고빙수(179밧, 빙수 가격은 좀 쎄다. 350밧짜리도 보인다.)를 주문해 놓고도 자리를 못 잡아 어슬렁거리다가 빈 테이블이 생기자마자 얼른 차지하고 앉았다. 다시 보니 꼭 젊은 손님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맛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손님이 많을 수가 없겠지.)
시원한 곳에서 맛있는 것 먹으며 쉬다가 나와서 정처없이 걷다 보니 커다란 청과물 시장이 나타난다. 모처럼 두리안이 많이 보이길래 한 덩어리 사서 냠냠. 생두리안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듯하다. 두리안이 많이 나오는 동남아를 가면서도 꼭 겨울에만 가다보니 먹기가 쉽지 않다.
(쎈탄 백화점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분위기, 우리는 간단히 아이쇼핑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