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追記> 백령도 이야기
<Episode 1> 해병대 땅굴
여단본부 뒤쪽 산을 오르면 하늬바다를 건너 북녘 땅이 빤히 내려다보이는데 산 전체가 온통 땅굴이다.
해병 여단의 안내로 백령도에 근무하는 기관장들이 땅굴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구불구불 땅굴이 계속 이어지는데 북녘을 향한 곳마다 구멍을 뚫고 엄청나게 큰 포신(砲身)이 북녘을 향하고 있는 모습인데 포(砲)가 거치된 옆에는 엄청나게 많은 탄약(彈藥)도 보관되어 있다.
안내자의 설명으로, 이곳은 안개가 심하다보니 탄약이 쉽게 녹슬어서 오래두면 사용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록 비닐로 꽁꽁 싸매 놓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가져다가 사격훈련을 한다고 한다.
탱크나 155mm 포탄은 물론이려니와 사병들이 사용하는 기관총이나 소총의 탄약도 포함된다.
이 개미굴같이 뚫어놓은 땅굴은 전투식량도 비치하고 있는데 이 땅굴 속에 있는 식량과 탄약만으로도 3개월은 전쟁을 버틸 수 있다고 하니 대단하다. 예전 이곳에서 해병생활을 했던 내 친구들의 말을 빌리면 처음 이 땅굴을 파기 시작했을 때 해병들은 이곳으로 배치 받는 즉시 망치 하나씩을 지급 받는데 그 망치가 다 닳을 정도가 되어야 제대할 때가 되었다니 땅굴을 파느라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을까....
백령도의 특징이라면 거의 매일 저녁 탱크나 장거리포의 연습사격 훈련으로 가슴 밑바닥까지 울리는 포 소리가 항상 ‘꽝꽝...’ 들려온다.
<Episode 2> 해병정신
내가 근무하던 북포초(北浦初)를 비롯하여 백령도의 학교들은 방과 후 활동으로 여러 가지를 하는데 특히 영어회화나 태권도 교육 등은 해병부대에 연락하면 무상(無償)으로 강사를 보내준다.
우리학교에도 태권도 교실을 열었는데 부대에서 강사를 보냈는데 몸이 호리호리한 병장(태권도 4단)과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일병(태권도 4단)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일병이 훨씬 나이가 많아보여서 내가 슬쩍 물어보았더니 한국체대 태권도 학과를 나왔는데 국가대표선수였고,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입대하느라 지금 26세라고 한다. 그런데 병장은 올해 21살이라 하고....
병장녀석은 일병을 부를 때 무조건 ‘야, 김일병...’ 하면 일병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피일씅! 네 병장님’
내가 기막혀서 병장녀석한테 ‘저 일병은 26살로 너보다 다섯 살이나 많고 국가대표 선수였다잖아?’ 했더니 이 녀석 하는 말... ‘아.. 다 알고 있죠. 그렇지만 일병이자나요? 우리는 그런거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아들 녀석이 일병을 달고 휴가를 나왔을 때 이야기인데 친구를 만나러 전철을 탔다고 한다.
우리 아들은 항상 해병대 정복차림에 아무리 자리가 텅텅 비어도 절대로 자리에 앉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가는데 해병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한다.
전철 안에 듬성듬성 자리가 비었는데 한쪽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인상을 찡그리고 외면을 하더란다.
아들 녀석이 보았더니 한 공군 병장이 옆에 아가씨를 앉혀놓았는데 아가씨가 사람들이 본다고 몸을 뒤틀어도 병장은 계속 주무르며 히죽거리고....
참다못한 아들 녀석은 그 앞으로 걸어가서 두 발을 모으며 철거덕 발을 구르며 섰다고 한다. 해병들은 바짓가랑이 끝부분에 스프링을 넣어서 걸어갈 때 철거덕철거덕 소리가 난다.
공군 병장 녀석이 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바로 철썩 따귀를 후려갈겼다고 한다. 깜짝 놀란 공군 병장 녀석이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서더니 ‘필승!’ 하고 거수경례를 붙이고는 아가씨 손을 잡고 옆 칸으로 가더라고 한다. 육군은 거수경례할 때 ‘충성!’인데 해병대와 공군은 ‘필승!’으로 같은 구호를 사용한다.
옆에서 인상을 찡그리고 쳐다보던 한 신사는 ‘자네 몇 기인가?’ 하기에 ‘네 ○○○기입니다.’ 했더니 ‘나는 ○○○기네. 고맙네.’ 하더니 용돈에 보태 쓰라고 만원인가 주더라고 한다.
아들 녀석은 입대 전에는 보신탕을 먹지 않았었다. 그런데 첫 휴가를 나왔을 때 무엇이 먹고 싶냐고 했더니 보신탕이 먹고 싶다고 한다. 아들의 달라진 모습을 신기해하며 아들을 데리고 내가 이따금 가는 보신탕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들은 휴가를 나오면 어디를 가나 사복은 입지 않고 해병대 정복을 입고 다녔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주인은
‘어이구, 선생님 오셨네요. 선생님도 보신탕 하세요?’
‘아들이 휴가 나왔는데 보신탕을 먹고 싶다고 하네요.’
정복을 입은 채, 모자를 벗어 옆에 놓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있는 아들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자네 몇 긴(期)가?’
아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네 ○○○깁니다.’
‘어, 그래? 나는 ○○○기네.’
아들은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서는 모자를 쓰더니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이며
‘피~~~~일 씅!’
보신탕집 주인은 히죽이 웃으며 거수경례로 답례를 하고는
‘오늘은 내가 낼 테니 마음 놓고 실컷 먹고 가게.’
그리하여 돈도 안내고 보신탕은 물론 수육까지 배가 터지도록 먹고 왔다.
<Episode 3> 백령도 콘크리트 방파제 구멍낚시
백령도에서는 낚시를 할 때 배를 타고 두무진 인근의 바다에서 낚시를 하거나 더 잘 잡히는 대청도로 가고는 한다. 또 해안마다 밀려오는 파도를 막으려고 방파제(防波堤)를 쌓는데 배를 대는 접안 포구에는 대체로 시멘트로 일직선으로 쌓지만 그렇지 않은 해변은 콘크리트로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운 세모꼴 덩어리를 만들어 겹겹이 던져 넣는데 아무리 거친 파도가 밀려와도 끄떡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 콘크리트 덩어리 사이에 잘 찾아보면 구멍이 보이고 그 밑으로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이곳이 낚시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내가 백령도에 부임하고 처음 낚시를 갔을 때 교무부장이 나에게 한 구멍을 가리키며 전근가신 교장이 낚시하던 구멍인데 제일 잘 잡힌다고, 나더러 전용구멍으로 하라고 한다.
낚시를 넣었더니 넣자마자 연달아 올라오기를 시작하는데 이곳에서 깜팽이라고 부르는 우럭 새끼이다.
이곳에서는 이 깜팽이가 너무 많이 잡히니 다 먹을 수가 없어 내장을 끄집어내고 망에 넣어서 말리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른 깜팽이를 한 자루씩 만들어서 인천으로 갈 때 가지고 간다.
<Episode 4> 하수오(何首烏) 담금주
학교에서 아이를 통학버스 기사를 한 명 고용해야 했는데 몇 사람이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우리학교 방호원이 나와 같은 천주교인으로 항상 백령성당에 함께 가서 미사를 올리고는 하는데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한다.
지금 너무 불쌍한 한 젊은이가 있는데 부모가 없고 망나니짓만 골라하며 다니는 녀석으로, 강제로 잡아다가 영세를 받게 하였더니 지금은 백령성당의 복사를 하고 있는 저 녀석인데 직장이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운전면허가 있으니 학교 통학버스 기사로 채용해 주시면 안될까요??
데리고 왔길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닥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정식 통학버스 기사로 채용했고, 교육청에 보고하여 일거에 준공무원이 된 셈이다.
기사로 채용된 후 며칠 있다가 담금주를 한 병 가지고 왔는데 바로 백령도에서 유명한 하수오주였다.
그것도 1m가 넘는 둥그런 담금통에 넣었는데 뿌리의 덩이가 굵을뿐더러 길이도 엄청 길었다.
하수오(何首烏)는 뿌리를 캐어 술을 담그는데 이 술을 마시면 흰 머리도 까마귀처럼 까맣게 변한다고 알려진 담금주이다. 그런데 그렇게 큰 하수오 뿌리는 처음 보았으니 귀한 것이리라.
그런데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하니 그저 떨떠름.... 인천 집으로 가지고 와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 친구들이 놀러왔기에 이 술을 보여주었더니 깜짝 놀라며 좀 마실 수 없겠냐고....
나는 마실 줄 모르니... 친구 네 명이 그 많은 술을 몽땅 다 마셔버리고 고주망태가 되었다.
그 친구들이 누구였는지, 머리가 새까매졌는지 모르지만 훗날 들으니 그 술값이 100만원도 넘으리라는..
백령도에는 이 하수오가 제법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언젠가 마을 사람이 산 밑을 지나다 보니 철조망 안쪽에 하수오줄기가 보이더라고 한다. 백령도는 가는 곳마다 철조망이 있고 ‘지뢰주의’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하수오를 캐고 싶은데 철조망 2~3m 안쪽이라 망설이다 하수오 줄기가 너무나 튼실하여 엄청 큰 하수오일 것이다.... 철조망을 넘어 조심스레 다가가다가 ‘꽝~!’
사람들이 달려가 보니 시체는 흔적도 없고 철조망에 피 묻은 옷가지만 걸레처럼 걸려있었다고 한다.
인천 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성당 구역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기로 했는데 여름방학 후라 가능했다.
어찌하다 방호원에게 자랑삼아 얘기했는데 내가 인천 집에 오고 구역모임 전날 백령도에서 소포가 도착해서 깜짝 놀랐다. 상자를 열어보니 바다에서 금방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삼, 전복이 하나가득이다.
방호원과 버스기사는 해산물 채취하는데 전문가들이니 당연히 직접 건져 올린 것이리라.
우리 집에 모였던 성당 가족들은 싱싱한 해삼과 전복을 배터지게 먹어 본 것은 난생처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