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랑아 루치아(미국 휴스턴한인본당)
연애의 기쁨이 이럴까,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어릴수록, 자만할수록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나이가 들어 겸손해질수록 '더 알아가야 할 것이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중심에는 신앙의 신비가 있었다.
내 묵주가 내 손에 들려지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인 여동생이 2006년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평소 나보다 훨씬 건강한 체질이었던 동생에게 병마의 손은 너무도 크고 급작스럽게 덮쳤다. '왜 이런 일이…' 라는 생각을 되뇌면 더욱 괴로워지기만 했다.
기적을 바라며 매일미사 책을 열심히 읽은 지 1년쯤 지났을까. 사람들은 나에게 달라졌다고 했다. 좋은 글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같다. 난 하느님의 딸로 사는 일이 남자와의 연애보다 더 즐거웠고 내 안의 변화가 기뻤다.
그 후로 3년쯤 됐을까. 어느 날 밤 난 묵주를 손에 들게 됐다. 미국에서 세례받을 때 대모님께서 주신 투박한 나무묵주. 여러 개의 예쁜 묵주들이 있었지만 막상 내 손에 들려졌을 때는 그 투박한 나무묵주가 너무도 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신앙이 한 단계 성숙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날은 근무 후 졸린 눈을 비비고 책상에 앉아 서툰 묵주기도를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밤이었다. 묵주기도를 시작하며 난 우연히 작은 내 방 창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갑자기 어떤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창가 쪽에서부터…. 슬픈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공기의 흐름이 방안을 돌다가 내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픈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닌데 졸음을 참고 있던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뜨거웠다. 내 언어의 한계를 탓할 뿐이다.
눈물은 흐르는데 내 심장은 어루만져지는 것처럼 왜 그리 기쁘던지, 기도만 외우고 있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그 이후로 그때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자 묵주를 잡고 기도해도 다시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신비로 남으려나 보다. 하지만 그날 밤의 형언하기 어려운, 위로받은 듯한 체험은 몇 년이 지나도 더욱 그립고 생생하기만 하다.
며칠 전 내 동생은 일생에서 네 번째 수술을 받았다.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길…. 나는 한국 시각에 맞추느라 동생이 수술방에 들어갈 때까지 밤을 새우며 문자를 주고받고 묵주기도를 했다. 그 다음 날 동생이 회복실에서 마취가 깬 후 이런 말을 했다.
"언니, 언니 덕이었어. 확실해. 언니 기도 덕에 수술실 들어가기 전에 너무도 좋은 주치의 선생님과 인턴 선생님을 만나 따뜻한 담요도 덮어주시고 손도 계속 잡아 주시고." 추운 수술방에서 떨고 있는 동생에게 심전도 검사기를 붙이기 전 차가울까 봐 입으로 호호 불어가며 의사 선생님들이 잘 해주더라 했다.
나는 성사의 신비를 믿는다. 기도의 힘을 믿는다. 내 동생이 차가운 수술실에서 만난 친절한 의료진이 우연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그 축복을 여러 번 경험하게 되니, 이렇게 부족한 기도도 부족한 영의 기도도 내치지 않고 귀담아들어 주시는구나,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고난도 축복이라 했던가. 내가 나이를 먹어서인가, 기도 안에서 성숙해서인가, 어째서 아픈 가슴이 축복이 될 수 있는지 이제는 안다.
나는 최근 동생이 말한 언니 '덕'에 다시금 묵주를 열심히 잡게 된다. 그렇다. 나는 기도의 '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 그것이 내 가족이 은총을 필요로 할 때 힘을 발휘할 것을 믿는다. 특히 부모님이 신앙의 기쁨을 알 수 있게, 또한 내 주변 이웃에게 따뜻함을 전할 수 있게, 더 나아가 얼굴도 모르는 그러나 좁은 세상에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을 위해 다시 묵주를 소중히 손에 들고 영의 대화를 무한히 나눠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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