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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 관악교회
본문: 고린도후서 2:14-17
제목: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설교개요
I. “하나님은 승리의 개선식을 이끄신다”(14절)
1. 바울은 하나님께 정복당하였다.
2. 바울은 노예가 되었다.
3. 바울은 죽음에 내몰리게 되었다.
II.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신다” (14절)
1. 하나님은 복음으로 승리를 이끄신다.
1.1 개선식에서 뿌려지는 꽃의 냄새가 세상에 퍼진다.
1.2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향기가 세상에 퍼진다.
2. 하나님은 사도가 전하는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신다.
3. 사도는 죽음을 짊어질 때 그리스도의 향기이다.(15절)
III.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누가 이 일에 적합합니까? (16절)
1. 말씀을 순전함으로 전함 (17절)
2. 자신의 조건이 주는 적합도를 의존하지 않음(3장 5절)
3. 사도의 표 (12장 12절)
생각할 문제
1. 하나님은 자신의 승리의 개선식에서 바울을 어떤 자리에 두십니까?
1.1 자신은 하나님께 정복당하고 하나님의 노예가 되었습니까? 어떻게 이것을 증거합니까?
1.2 자신은 하나님께 정복당해 때로 죽음의 자리까지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14절)
2.1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할 때 그 뜻은 무엇입니까?(15절, 고린도전서 4장
9절이하)
2.2 나는 어떨 때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스스로를 말할 수 있을까요?
3. 누가 이 일에 적합한가? 에 대한 바울의 답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 직분에 합당한 두 측면을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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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해안이 펼쳐진 화려한 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대신에 힘을 다하며 지치는 육아를 감당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여행가고 즐기는 삶 대신에 실험실의 한 구석 자리를 지키고 묵묵히 연구를 수행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화려한 축제, 술자리, 미팅처럼 낭만적인 대학생활이 아니라 시험, 과제를 하면서 창조세계를 맡겨주신 사명을 다하는 자리에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평생 자녀와 가정 그리고 생업을 위해서 고난 받았지만 구석구석 치료받아야 하는 몸을 안고도 여전히 어떤 일을 맡아야 하는 현실의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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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임무에 누가 적합하냐? 라고 했을 때 그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자,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자, 죽음에 넘겨지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고난을 사용해서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는 자, 예수 생명이 죽을 육체에 나타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봉사하는 고려신학대학원에는 돌로 된 큰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 비석은 크기가 클 뿐 아니라 중심에 있기 때문에 학교를 방문하거나 학교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은 꼭 마주치게 됩니다. 여기에 무엇이 새겨져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입니다. 저는 아침에 출근할 때, 식사하러 갈 때, 식사하고 같이 잠시 걸을 때, 도서관에 갈 때, 퇴근할 때등등 최소한 하루 5-6번은 이 비석을 봅니다. 어제 는 제가 활동하는 학회의 임원회의가 있어서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를 갔는데 거기는 한 수 더 떴습니다. 돌로 된 큰 비석만이 아니라 운동장 옆에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에 키가 낮은 조경수 나무들로 Coram Deo, 비석보다 더 크게 조성해 놓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 이렇게 신학교들의 중심에 항상 강조되어 있는 걸 보면 이 말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Coram Deo는 원래 Homo Coram Deo를 줄여 놓은 것입니다.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그것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지 않기 시작하면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질문은 항상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15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7절에서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이렇게 두 번 하나님 앞에서를 직접 두 번 말하고 있습니다. 3장을 가운데 두고 3장의 내용을 건너 2장 17절을 다시 반복하는 구절이 4장 2절에 다시 나오는데 여기서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또 하나님 앞에서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곳곳에 비석으로, 글로, 나무로, 마음에 새겨 놓는 것처럼 바울도 오늘 본문의 곳곳에 하나님 앞에서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내가 누구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생각 앞에서 절대적인 기준, 곧 나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I. “하나님은 승리의 개선식을 이끄신다”
1. 바울은 하나님께 정복당하였다.
2. 바울은 노예가 되었다.
3. 바울은 죽음에 내몰리게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두 가지 일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승리의 개선식에서 바울을 이끌고 계시다.”
우리를 그리스도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번역은 좀 정확도가 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승리하도록 하신다는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어떻게 대합니까?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을 당시의 왕이나 로마 황제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거두시고 승리의 개선식을 치릅니다. 당시 거대한 제국이었던 로마 황제는 많은 이방민족들과 전쟁하고 그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서 수도인 도시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 개선식의 절정은 백마 4마리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로마황제가 개선식을 인도하고 그 뒤편에 전쟁에서 승리해서 포로가 된 적의 왕이나 지도자, 장수들을 비참한 모습으로 전리품들과 함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승리의 개선식으로 이끌고 계시다고 말할 때 승리한 황제와 함께 하는 부하 장군들이나 병사들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포로로 잡힌 정복당한, 대적자로 자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이 개선식에서 앞서 이끌고 계시고 자신
은 하나님에게 정복당한 포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자신을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라고 말합니다. 이때 폭행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자 (유대문헌, 사도행전 5:39)를 말한다.)를 의미합니다. 곧, 바울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로마 황제를 대항하여 싸웠던 이방민족들의 지도자처럼 앞장서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강렬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정복당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8절에 보면 사울은 아무 것도 보지도 못하고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정복당해서 무장해제 당했습니다.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모습은 로마 황제의 개선식에 그 개선식을 이끌고 있는 황제의 뒤를 따라 오는 무장해제당한 포로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곧 노예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종이라고 자주 말합니다.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5절에서 자신을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이자,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노예된 자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로마 황제에게 정복당해서 개선식에서 황제에게 이끌려 갔던 포로들은 개선식 후에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정복당한 포로이고 이 포로들은 대부분 노예가 되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께 정복당한 원수는 하나님의 노예가 되었고 나아가 고린도 성도들에게도 종이 되었습니다. 이웃들에게도 피차 복종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정복당한 포로들은 대부분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포로 중 일부는 사형에 처했습니다. 사실 정복당했지만 그들은 이방인들중에서도 유력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노예가 되는 것 자체가 죽음과 같은 고통입니다. 포로들 중 상징적인 존재들은 사형에 처하여 죽음에 내 몰렸습니다. 그러니까 정복당한 포로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노예 아니면 더 심하면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완전히 정복하여 굴복시켰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 노예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심지어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당하다가 죽음까지 내몰리는 자리에 나갔습니다. 바울은 승리하신 왕 하나님의 옆에 서서 행진하는 황제의 동료 장군이 아니라 하나님께 정복당한 포로, 하나님의 노예가 된 자, 하나님의 종의 형체와 삶을 살다가 죽음까지 내몰리는 포로로 자신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정복하신 하나님 앞에서 죽음에 내몰리는 자신의 모습을 고린도전후서에서 빈번하게 언급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9절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그리고 이어서 그 내용을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고, 우리는 약하고, 우리는 비천하고,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수고하며,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박고, 비방을 받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묘사하는 이 모습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승리의 개선식에 함께 영광을 누리는 하나님의 동료 승리자, 장군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개선식을 이끄는 황제의 뒤에서 찌거기 같이 완전히 정복당해 노예가 된, 죽음에 내몰린 모습으로 그 뒤를 따르는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II.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신다” (14절)
1. 하나님은 복음으로 승리를 이끄신다.
1.1 개선식에서 뿌려지는 꽃의 냄새가 세상에 퍼진다.
1.2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향기가 세상에 퍼진다.
2. 하나님은 사도가 전하는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신다.
3. 사도는 죽음을 짊어질 때 그리스도의 향기이다.(15절)
“하나님은 승리의 개선식에서 바울을 포로로 이끌어가고 계시다.” 자신은 하나님께 정복당한 포로로서 노예이자 때로 죽음에까지 이르기도 한다....이것이 첫 번째 모습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서 하신 두 번째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울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십니다. 로마 황제의 개선식에는 유황을 태워서 승리한 황제에 대한 제사와 경외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개선식을 치르는 황제 앞에 여성들이 꽃을 뿌려서 축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꽃에서 향기가 퍼져 나가기도 했습니다. 승리한 왕의 개선식에는 냄새가 퍼져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곧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각처에서 전파하십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사용하십니다.
14절에서 냄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전파되는 것을 비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울을 통해서 세상에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에서는 자신이 곧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인격, 삶 자체가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을 증거하고 보여주는 향기입니다. 어떤 점에서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향기입니까?
그것을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삶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고린도후서 11장 23절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나타내는 냄새였습니다. 곧, 복음을 전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의 향기였습니다. 그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냄새가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 역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11절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12절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바울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자로서 죽음에 넘겨지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을 드러내는 냄새였습니다.
III.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누가 이 일에 적합합니까? (16절)
1. 말씀을 순전함으로 전함 (17절)
2. 자신의 조건이 주는 적합도를 의존하지 않음(3장 5절)
3. 사도의 표 (12장 12절)
바울이 감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바울을 정복하셔서 종의 모습으로 노예와 죽음으로 내모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전파하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사도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죽음에 넘겨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향기를 풍기게 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묻습니다. 16절에서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정확하게 번역하면 “누가 이 일에 적합하겠습니까? 누가 이 일에 어울리고 이 일을 할 만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바울은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순전하게 전하는 자신의 직무를 다합니다. 17절에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포도주에 물을 섞어 팔거나 잘 익고 큰 과일들 사이에 썩은 과일을 넣어 함께 파는 상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듣게 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 질만한 내용이나 방법을 섞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상대방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잘 설득하려면 어떤 수단을 쓸까요?
자신의 화려한 수사나 말재주, 혹은 그럴듯한 외적 조건을 내세웁니다.
학벌, 학위,
경력(세미나 참석, 년수),
성과(부흥을 시켰다),
수려함,
체험담,(위대한 영적 은사나 체험-꿈, 예언),
유명세(많은 책을 출판, 미디오 노출, 출현)
자신을 셀럽처럼 포장합니다. (셀럽) 연예나 스포츠 분야 따위에서 인지도가 높은 유명 인사
바울은 자신의 어떤 것을 섞어서 말하거나 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포도주를 묻게 하는 물, 혹은 잘 익은 상품의 과일들 속에 숨겨진 섞은 과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께 받은 것만을 말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5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여기서 만족은 2장 16절에서 말하는 누가 이 일에 적합한가?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적합도는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임무의 적합도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자신의 직무를 다하는 같은 바울의 또 다른 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정복당한 노예, 죽음을 짊어지는, 날마다 죽음에 넘겨지는 수고, 환란이 동반한 바울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향기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이 일에 적합합니까? 말씀을 전할 때 자기 자신이라는 약을 팔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난 어떤 것으로 이 일에 적합하다고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난 말씀의 순전함만을 전합니다. 다른 한편 그의 외형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육체에 짊어진,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고난 중에서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임무, mission을 주셨습니다. 누가 이 일에 적합합니까? 부모가 되기 위한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백시간 이상의 교육이수, 애통령 오은영씨를 능가하는 정신심리학 지식을 갖추었습니까? 부모라는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지혜가 필요하고 이를 얻기 위해서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임무의 적합도를 측정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께 정복당한 대적자, 하나님의 노예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고 있는가? 그 가운데서도 썩은 과일인 자신을 썩어 팔지 않고 하나님만을 권면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