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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새 걷기길이 생겼다. 이름 하여 ‘지질트레일’, 세계적으로 희귀한 제주의 화산 지질을 둘러볼 수 있도록 만든 걷기길이다. 80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제주 최고의 해안 경관지를 둘러보는 코스인 것이다.
서귀포시 안덕면을 도는 2개의 코스이며, 용머리해안을 기점으로 서쪽으로 도는 A코스(14.5km)와 동쪽으로 도는 B코스(14.4km)다. 코스를 개발한 제주관광공사는 지난 4월 5일 ‘지질트레일 개통식’을 열었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해안 주차장에서 열린 행사에는 우근민 제주도지사를 비롯해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국립공원관리공단·국가지질공원사무국·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한국지질환경연구원·한국지구과학회 등의 기관 관계자와 걷기 동호인 1,000여 명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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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 용머리해안을 걷는 개통식 참가자들. 지질트레일은 용머리해안을 한 바퀴 도는 코스를 포함하고 있다.
- 용머리해안 주차장에는 높은 기관장들과 많은 걷기 동호인들이 모였다. 무대에선 축하공연의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건 산방산이다. 기둥처럼 융기한 바위산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매력적인 산세다. 걷기길 내내 산방산이 보이는 것과 용머리해안이 가장 걷기코스의 비경이라 걷기길 공식 이름도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이다.
산방산의 거대한 직벽에는 무수한 등반라인이 있어 산꾼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395m 높이로 산에 150m 정도 되는 동굴이 있어 산속의 굴을 뜻하는 ‘산방(山房)’이란 이름이 유래한다. 화산 활동으로 생겼지만 정상에 분화구가 없고 돔 모양이다. 산방산에는 유명한 전설이 전한다.
옛날 한 사냥꾼이 한라산에 사슴사냥을 갔다. 사냥꾼은 화살로 사슴을 쏜다는 것이 실수로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맞추고 말았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서쪽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것이 날아와 박혀 산방산이 되었고 한라산 꼭대기의 패인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다고 한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산방산이 백록담에 쏙 들어앉을 크기와 형세를 하고 있단다. 이밖에도 산방산의 여신인 산방덕 전설과 진시황이 용 모양 꼬리를 잘라버렸다는 용머리 전설, 광정당 이무기 전설, 금장지 전설 등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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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산 아래의 대정향교.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 중 아이들을 가르쳤던 곳이다./용머리해안 입구의 하멜상선 전시관. (아래)제주도 지질트레일 A코스 개념도
- 조각품 같은 용머리해안과 하멜상선 전시관 거쳐
주차장을 출발해 지질트레일의 A코스인 용머리해안으로 간다. 이름처럼 산방산에서 보면 바다 쪽으로 머리를 내민 용의 머리 같다. 오랜 기간 퇴적과 침식에 의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80만 년 전, 이곳의 얕은 바다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출된 화산쇄설물이 차곡차곡 쌓여 층을 이루었는데, 그 지층이 다시 수만 년 동안 파도와 바람에 의해 침식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201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용머리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간다. 오묘한 조각품 같은 바위가 벽을 이룬 기묘한 해안이다. 파도에 의해 침식된 갖가지 울퉁불퉁하고 기괴한 모양의 절벽이 굽이치는 파도와 어우러진 절경이다. 형형색색 쌓이고 층층이 깎인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랜 시간 정성들여서 자연이 만든 조각품을 보는 것 같다. 중간중간 해녀들이 해산물을 팔고 있어 군침이 돈다. 기묘한 바위와 시원한 바다는 한 폭의 작품이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느라 바쁘다. 리지화의 밑창에 와서 착착 감기는 바위의 느낌도 마음에 든다. 간간이 거칠게 파도가 솟구쳐 오르지만 바위 해안이 좁은 곳도 바다와 5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원래 이곳 해안길은 바닷물에 잠기는 일이 거의 없었으나 최근 들어 바닷물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구멍바위를 통과하자 용머리해안 투어가 끝나고 유채꽃들이 노랗게 만개해 반겨 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상쾌해지는 봄을 닮은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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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산을 내려와 차도로 향하는 사람들. 지질트레일 내내 산방산의 잘생긴 모습을 볼 수 있다.
- 하멜상선 전시관이다. 1653년 제주도에 온 하멜의 범선을 재현했다. 네덜란드인 하멜이 13년간 조선에서 생활하다 모국에 돌아가 경위 보고차 쓴 <하멜 일지>는 조선 내부를 최초로 유럽에 알린 것이라고 한다. 하멜의 상선을 나와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간다.
기후변화홍보관을 지나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해변을 지난다. 바위해변을 걷다 모래 위를 걸으니 더 푹신하게 느껴진다. 이곳 해변을 주민들은 ‘설쿰바당’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눈이 와도 쌓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아스팔트길이 시작되는 사계포구에는 해녀체험 이벤트가 진행 중이다. 개통식 참가자들이 전통 해녀복을 직접 입어보고 있다. 현장에선 양정녀 지질트레일 해설사가 제주해녀의 전통에 관해 설명한다. 과거에는 물안경이 없어 문어 내장을 이용해 바다 속을 살폈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남자가 잠수해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여자는 해안가의 해물만 채취했다. 그러나 지배층의 착취가 너무 심해 나라에 바쳐야 할 해산물이 감당할 수 없게 늘어나자 일꾼이 점점 사라졌고, 결국 여자들을 교육시켜 해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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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제주 80만 년의 지질 흔적이 담긴 용머리해안./ 용머리해안의 독특한 화산 지형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 어촌마을에는 독특한 동상이 있다. 1991년 구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 방한 시 함께 왔던 영부인과 제주 해녀들의 모습이다. 고르바초프 영부인은 이곳 사계리를 방문해 해녀들을 만나 이야기했다고 한다.
부드러운 모래와 투명한 물빛이 매력적인 형제해안을 느리게 지나며, 봄바다의 낭만을 만끽한다. 데크가 깔린 형제해안 전망대에는 트레일 개통을 기념해 제주 지역 예능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흥겨운 음악 소리와 일정한 자유로운 운율의 파도소리가 잘 어울린다.
사람 발자국 화석이 있는 해안을 지난다. 난간이 있어 아쉽게 구경할 수는 없지만 고고학 분야에서 가치가 높다. 트레일은 여기서 해안을 벗어나 내륙으로 이끈다. 사계리의 밭과 집들 사이로 난 길을 따른다. 사람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것처럼 마을 곳곳에 신석기시대와 철기시대 유물이 꽤 발견되었다.
멀리 길쭉한 산이 나타나는데 단산이다. 158m의 낮은 오름이지만 다른 곳처럼 부드러운 곡선 형태가 아닌 뾰족한 능선 형태다. 드넓은 밭 사이를 가로지르며 단산으로 다가간다. 검은 밭담 안에는 노란색 유채밭과 초록색 마늘밭이 바둑판처럼 펼쳐진다. 단산 아래의 대정향교는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 중 학생들을 가르쳤던 유서 깊은 곳이다. 대정향교 옆에 있는 ‘세미물’은 단산의 산기슭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우물로 추사는 이곳의 물을 길어 차를 끓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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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제섬이 보이는 형제해안을 걷는 참가자들.
- 단산 코스는 1km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파른 오르막이고 바위가 많아 만만치 않다. 단산은 산방산과 함께 제주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화산체로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사계리 쪽에서 보면 박쥐가 날개를 펼친 모양이지만 인성리에서 보면 ‘山’자를 닮았다.
제주도 유배 전 추사 글씨가 획이 두텁고 윤기가 흘렀다면 유배시절에 완성된 추사체는 기름기가 다 빠지고 메말라 대단히 명상적이었다는 평이 많다. 단산의 바위 골격만 남은 모습을 보고 추사체를 완성했다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불미노래’와 불미공예 맥 잇는 덕수리 주민들
단산을 내려와 산방산탄산온천을 돌아 나오면 돌담이 아름다운 덕수리다. 덕수리는 불미공예로 유명한 마을이다. ‘불미’는 풀무를 뜻하는 제주어로 무쇠솥, 쟁기의 보습, 낫, 호미 등 쇳물로 농기구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무쇠솥과 쟁기가 사라지면서 기구를 만들 일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덕수리에서는 기능보유자를 중심으로 작업할 때 부르던 ‘불미노래’와 불미공예가 맥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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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채꽃이 만발해 평범한 아스팔트길도 지루하지 않다. /길쭉한 산세의 단산을 향해 걷는다. /(오른쪽)꽃이 핀 형제해안은 누구라도 걷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 아담한 모습의 덕수초등학교에 닿자 마침 마을 사람들의 불미노래가 한창이다. 방아돌을 굴리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조상들의 협동정신이 묻어난다. 마침 운동장 한켠에는 마을 주민들이 제주산 나물로 만든 비빔밥을 원가에 가까운 2,000원에 팔고 있다. 찬바람을 맞으며 오래 걸었기에 시장하기 이를 데 없어 두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웠다. 시장이 반찬이지만 주민들의 후한 인심과 손맛에 더 맛있게 느껴졌다.
걷기길은 산방산을 끼고 출발지였던 용머리해안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멀리 용머리해안 일대와 형제섬, 마라도 등이 드러난다. 산방산의 깎아지른 절벽에는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생달나무, 돈나무, 풍란 등 암벽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산방산 암벽식물지대는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3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절정의 유채꽃을 양 옆에 두고 길을 따라 해안가로 내려서니, 출발지였던 용머리해안 주차장이다. 지질트레일의 개통으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용머리해안, 산방산, 단산, 형제해안, 돌담길의 아름다움이 대중들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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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계리 마늘밭에서 본 산방산. 옥황상제가 한라산 꼭대기를 뽑아서 던진 것이란 전설이 전한다.
- 지질트레일 정보
지질트레일 A코스는 14.5km로 하루 걷기에 짧지 않은 거리다. 안덕면 일대는 바닷바람이 세고 오르막 코스도 있어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길찾기는 쉽지 않다. ‘지질트레일’이라 적힌 표지기와 안내판이 있지만 개수가 적은 편이라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용머리해안과 단산을 제외하면 대부분 도로를 따르는 코스라 하멜전시관, 사계포구, 대정향교 등의 주요 기점만 순서대로 찾으면 어렵지 않다. 단산은 우회 코스가 있으며 도로를 따르게 되어 있어 자신의 상황에 맞게 코스를 단축할 수 있다.
용머리해안은 입장료 2,000원을 받는다. 제주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모슬포행버스를 타고 사계리에서 하차하면 된다. 20분 간격(06:00~22:35)으로 운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