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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묵상글 들 ( 연중 13주 화요일-왜 겁이 많을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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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3주 화요일-왜 겁이 많을까?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로 어딘가를 가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이 따라 오릅니다.
그런데 호수에 큰 풍랑이 일고 배는 파도에 뒤집힐 지경입니다.
당연히 제자들은 겁이 나고 그래서 허둥지둥, 갈팡질팡인데
주님께서는 태연히 주무시다가 살려달라는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하고 나무라십니다.
많은 것을 생각게 합니다.
‘주님이 함께 타셔도 풍랑이 없는 것이 아니네? 주님이 계서도 할 수 없군!’
이런 느낌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왜 겁을 내느냐 말씀하시다니, 제자들의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신앙수준을 요구하시는 것 아냐?’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런 생각에 머물지 않고 겁에 대해서 묵상코자 합니다.
제 생각에 겁은 화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가 나고 그래서 화가 내 안에 있고 그래서 화를 내는 구조 말입니다.
겁도 마찬가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겁이 나고 그래서 겁이 내 안에 있고 그래서 겁을 내지요.
겁이 생기고 겁을 내 안에 지니고 있으며 상황이 되면 겁을 내는 순서지요.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종종 ‘저 인간 겁이 없어!’라고 얘기하곤 하지요.
그러니까 겁이 없는 인간이 있다는 얘긴데 어떤 사람이 겁이 없습니까?
반대로 어떤 사람은 겁이 있고 또 많을까요?
화의 경우, 자기 원의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화가 나기에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하려는 이는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화가 나고
이미 난 화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해도 내 안에 쌓이게 되며
그러다가 쌓이고 쌓인 화는 바로든 나중에든 폭발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니까 화를 내지 않는 근원적인 처방은 화가 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건데,
화의 근원인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예방이요,
내 마음대로 또는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교만이 깨어져야 하는 거지요.
겸손한 사람은 감히 내 뜻대로 되기를 다른 사람에게 바라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겁은 왜 나는 걸까요?
제 생각에 겁은 힘이 없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그래서 힘이 없을수록 겁이 많고, 힘이 없어질수록 겁이 많아집니다.
옛날 30대 때 결핵환자들과 일할 때 저는 면역력이 강해서
별 조심을 하지 않았는데도, 심지어는 결핵환자에게 영해준 성체를
그분이 삼키지 못해서 제가 영했는데도 결핵에 걸리지 않았고 그래서
저는 무용담처럼 그런 균들에 대해 겁 없었음을 자랑했었는데
제가 이번에 대상포진을 앓고 나니 전보다 겁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잖아요? 힘센 사람이나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누구도 겁내지 않지요.
그래서일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코로나에도 겁 없이 막 돌아다니고,
반대로 나이 먹거나 병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은 겁을 내고 조심합니다.
그러므로 겁이 나고, 겁이 많고, 겁을 내는 것은 면역력이든 체력이든
권력이든 설득력이든 힘이 없는 사람에게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겁이 많은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인 거지요.
그런데 힘이 있는데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힘이 있는데도 겁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제가 볼 땐 능력이 있는데
어떤 일을 맡기면 그는 자기가 능력이 없다며 그 일에 겁을 냅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고 하시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힘이 없는 제자들로서 거센 풍랑에 겁을 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그런데도 왜 겁을 내느냐 하심은 능력과 힘의 하느님이 함께 계시고,
너희 안에 계신데 왜 그 힘을 입지 않고 겁을 내느냐 하시는 거지요.
믿음이란 개방이기에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믿는 사람은
그 힘을 입어 겁이 나지도, 겁을 내지도 않게 됨을 깨닫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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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이영근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앞 장면>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도 그 배에 오르시어 동행하십니다.
사실, 배는 항구에 메여 있을 때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항구에 가만히 정박해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항해하라고 만들어졌습니다. 항해하면 당연히 풍랑을 만나고 표류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항해하라고 배는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배, “가정”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런데 배 안에 그분이 함께 계시는데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세시풍랑에 배가 흔들릴 때도 있고, 방향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몰리는 바람에 휘청거릴 때도 있고, 기울어 져 위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킬 수 있으면서도 그 풍랑 속에서도 잠들어 계십니다. 그러니 그분은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도 곁에 함께 계십니다. 곧 우리가 눈을 떠야할 때가 바로 이때 인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뢰하지도 의탁하지 못한 까닭에 그만 겁에 질려버렸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의혹에 빠지는 순간 겁에 질려 물에 빠졌듯이 말입니다.
사실, 그분은 암과 치매 온갖 질병을 고치실 수 있으면서도 그 고통과 수난을 몸소 지시는 분이시고, 부서진 뼈와 마음의 상처를 새롭게 하고 죽은 이마저 살리면서도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어 죽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의 유황불로 도시를 휩쓸어버리고 하늘 군대로 평화롭게 하실 수 있으면서도 무능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지니고도 결코 우리의 응답이 없이는 이루시지 않으시는 무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순수한 의탁과 신뢰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도 유혹이나 악을 제거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아버지께 의탁하고 신뢰를 두도록 가르치십니다. 곧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께 의탁하고 신뢰를 두는 일입니다.
실상, 지금도 당신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우리와 함께 풍랑에 휩싸이시고 흔들리면서 항해를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상, 마치 물고기들이 맘껏 물속을 헤험쳐 다니면서도 물 밖에 나와 숨을 깔딱거리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헤험칠 수 있었음은 물이 있는 까닭이었음을 알게 되듯이, 또 새들이 맘껏 하늘을 날다가도 새장에 갗치고 나서야 하늘이 있어서 날 수 있었음을 알게 되듯이, 그렇게 우리는 풍랑을 맞고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내가 키잡이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물결이 들이치고 배가 흔들려도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그분이 아니라 나 자신일 뿐,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신 그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니 깨어나야 할 이는 그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분이 함께 계시건만 두려워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일 분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배가 가라앉으면서야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키잡이 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결코 겁낼 일이 없습니다. 두려워 할 일이 없습니다.
오늘도 그분께서는 배가 하늘항구에 닿기까지 우리를 이끄시고 동반하십니다. 단지 동반하실 뿐만 아니라 배를 인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주무셔도, 깨어 계셔도 우리의 키잡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믿으라 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주님!
당신은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시지만,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고통과 수난을 몸소 겪으시지만,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분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려 죽임당하지만,
부서진 뼈와 마음의 상처를 새롭게 하고
죽은 이마저 살리시는 분
잠들어 계서도 깨어 계서도
저의 키잡이이신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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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연중 13 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는 만큼 보게 된다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보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굳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믿음이 큰 만큼 하느님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의탁하는 만큼 강하게 만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믿음은 삶의 모든 순간들을 빛내주는 예수님의 자비를 경험으로 알게 되는 그분과의 살아 있는 만남을 통해 태어나고 또 새로워집니다. 예수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매일 접할 수 있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을 읽고 침묵의 기도 안에서 주님의 사랑에 들어가십시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성장과 견고함을 위해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한 배를 탔는데 어떤 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겁에 질려 허둥거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에 무서울 것이 없으며 절박한 생존의 난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는 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시 하십시오.' 믿음이 없으면 믿음을 더해달라고 매달리면 됩니다. 그냥 덮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을 보면 아직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품 안에 있었으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철저히 맡기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위험에 처했더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움에 맞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완전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있어야 하나요? 두려워 말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허둥대던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 주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풍랑과 파도를 지배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무서움의 차원을 넘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접하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따른다기보다 따름으로써 성장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있기보다는 두려움과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어려움에 직면할 때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면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1베드5,7).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25.3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주님께 떠맡기고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성경을 보면 롯의 가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하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21,9).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까롤로 까레또). 믿음 안에서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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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23-27: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배에 타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하신 일도, 터무니없는 위험과 맞닥뜨리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주님은 그들이 위험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겸손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래서 군중을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만 옆에 있게 하시고는 풍랑에 휩쓸리게 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시련을 인내심 있게 견디도록 훈련하신다. 어떠한 어려움이나 박해도 견디어 낼 수 있게 하신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24절)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신 듯이, 폭풍에 대해, 그 절정의 순간과 위험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으셨을까? 또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깨어 있고,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완전한 파멸의 위험 속에 있는데도 당신 혼자만 잠이 드셨을까? 폭풍을 이겨나가기 위해 고도의 기술의 키잡이가 필요한 이때에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그때 일어난 일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하려고 주무신다. 배를 모는 제자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허사였다. 그들은 겁에 질려 우주의 통치자이며, 창조주이신 세상의 키잡이 예수님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께 풍랑에 죽게 되었다고 자신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26절) 그리고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랬더니 잠잠해졌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운 것은 그분이 누구신지 그들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이 깨어 계실 때는 물을 꾸짖는 권능을 지니신 것은 알았지만, 잠들어 계실 때도 같은 권능을 지니셨다는 사실은 아직 몰랐다. 많은 기적을 보고서도 아직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주님, 구해주십시오.”(25절) 이렇게 제자들이 외친 것은 잘한 것이다. 그 말은 믿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어려움에 부닥치자,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25절) 하였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꾸지람을 듣는다. 그들은 결코 믿음이 없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위험이 닥쳤을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자들’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신다. 당신의 교회라는 배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 세상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으시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이 안전한 항해로 하늘 본향에 도달하도록 이끄신다. 그리스도께 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배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거룩한 키잡이가 있어야 교회라는 배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할 수 있고 목적지 항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27절) 예수님께서는 명령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재우셨다. 그래서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바로 그분이야말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믿었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따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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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기도 ♣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3-27)”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큰 풍랑 때문에 곧 침몰할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의
‘작은 배’를 교회로, 또는 각 개인의 인생으로 해석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경우, ‘큰 풍랑’은 ‘박해’와 여러 가지 위기로 해석됩니다.
개인의 인생이라면, 종교 박해를 포함해서 인생살이의 고통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상황은, 마치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의
상황으로 해석됩니다.
(아무리 간절하게 기도해도 응답을 얻지 못할 때...)
우선 이야기 속의 상황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모습은 지쳐서 잠든, 대단히 인간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큰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만물의 주님이신 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노련한 어부들인 제자들을
믿으셨기 때문에 아무 걱정 없이 주무셨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실력을 믿으셨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실력을 못 믿은 상황.)
또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모습을, 제자들이 얼마 동안은 풍랑 때문에 고생하겠지만,
배가 침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중간에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았어도, 그냥 계속 주무셨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잘못했을까? (무엇이 부족했을까?)
예수님께서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라고 꾸짖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옆에 계신데도 그들의 믿음이 약했던 것, 그래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겁을 낸 것, 그런 것이 그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했던 말,
‘주님, 구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 아닌가?”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라고 제자들이
말한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큰 풍랑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
이라고 믿고서 예수님을 깨운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이 그냥 다급하니까 예수님을 깨웠다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구해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고,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라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4,38).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걱정을 하시거나,
아니면 아버지께 기도하시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코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제자들의 말에서,
‘요나서’에 나오는 선장의 말이 연상됩니다.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소?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나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 주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요나 1,6)”
제자들의 심정은 그 선장의 심정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23절의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라는 말이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믿으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면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자면 됩니다.
살든지 죽든지 간에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 말은 사도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 이 말을 예수님의 입장에서,
“나는 살아도 너희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너희를 위해서 죽는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전부를 너희를 위해서 내놓았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신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과
주무시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모두 직접 볼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우리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일하시는지 주무시는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예수님께서 정말로 나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들으셨지만 무시하셨는지, 주무시느라고 못 들으셨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나는 정말로 ‘믿음’을 갖고서 기도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으로서, 나의 모든 사정을 알고 계시고,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나를 위해서 결코 주무시지 않고 나를 보살펴 주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 없이 바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2) “내가 바치는 기도의 지향이 정말로 올바른 것인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나에게만 좋은 것이고, 남에게는 해로운 것은 아닌가?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나쁜 것을(악한 것을) 청하는 것은 아닌가?
3)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전부 다
해 달라고 떼를 쓰는 기도를 하지는 않는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면 되고,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고, 해야 하는 일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하는 것은 대단히 오만한 태도입니다.
4) 믿음을 갖고서 올바른 지향으로 또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다 하면서 기도를 바치고 있는데도 응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의 침묵’은 조금 더 기다리면서 계속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결코 미적거리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루카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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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새벽을 열며.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빠다킹 신부님.
돈의 개념이 없는 아직 없는 아이에게 5만 원짜리 지폐와 크고 화려한 사탕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까요? 돈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크고 화려한 사탕을 선택할 것입니다(저도 어렸을 때는 이러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돈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성인에게 이 5만 원짜리 지폐와 사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했을까요? 당연히 지폐일 것입니다. 이 지폐를 통해서 사탕을 더 많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이 중요하다고 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신앙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이렇게 따져보면 어떨까요? ‘1천만 원’과 ‘미사 참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단, 1천만 원을 선택하면 미사 참석을 할 수 없습니다.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까?
주님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분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들이 늘 먼저였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가치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기에 그 가치도 당연히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주님께 굳은 믿음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에서 커다란 풍랑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커다란 풍랑에 허둥지둥 댑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편안히 주무실 뿐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대다수는 제자가 되기 전에 어부였고, 그에 반해서 예수님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배 안에서 누가 전문가입니까? 당연히 어부였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지금의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겁을 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하면서 그 힘을 이미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주님이 참 하느님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삶보다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삶을 이야기해 주셨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직 이 세상의 삶을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도에 흔들리는 배처럼, 그들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세상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힘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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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꿈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가엾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말 가엾은 것은 한 번도 꿈꿔보지 않은 사람들이다(에센 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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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사람
어느 방송기자가 95세 생신을 맞이한 할머니께 물었습니다.
“할머니,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게 뭐예요?”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셨습니다. 사람들은 9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의 할머니께서 과연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돈일까? 건강일까? 그런데 할머니는 간단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남자 친구”
단순히 이성을 원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겠습니다.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일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내 이웃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 외로움을 해결해 줄, 또 내 어려움을 풀어줄 나를 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일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더 앞을 바라보십시오. 결국,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 역시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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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의 묵상
2005년 외국의 어느 극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최소 30명이 숨지고 45명이 부상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극장 안에는 천여 명의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는 중이었는데, 무대 커튼에서 불씨가 피어올라 화재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대형 참사로 번진 것입니다.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화재에 놀라 긴급히 대피하는 과정에서 발에 밟혀 숨졌다고 합니다.
화재 자체보다도 발에 밟혀서 죽은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왜 발에 밟혀 숨진 사람들이 더 많았을까요?
어쩌면 화재보다도 화재에 따른 지나친 걱정과 공포심이 오히려 더 큰 인명 피해를 낳았는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고 하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22%는 걱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며,
4%는 자신이 전혀 손쓸 수 없는 일들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걱정 가운데 96%는 지나치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결국 걱정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나머지 4%에 불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지나친 걱정을 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풍랑이 이는 것을 보고 ‘죽을 지경’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닐는지요?
지나친 걱정에 사로잡혀 ‘지금 죽을 지경이야.’ 하고 신음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걱정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걱정으로 신음하느니, 그럴 때일수록 하루하루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지나친 걱정이 불러일으키는 화를 면하지 않겠습니까?
-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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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연중 제13주간 화요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2년 1월 5일은 대한민국에서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 된 날입니다. 당시 저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통행금지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먼 일입니다. 통행금지를 해제 한 이유는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치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정부는 88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몇 가지 조치를 발표하였습니다. 학생들의 두발 자유화와 교복 자율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기에 해당되지 않았지만 동생은 자율화 시대에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었고, 생맥주가 판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생맥주 한잔이 500원이었던 때였습니다.
자유의 땅 미국에서 통행금지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경찰의 연행과정에서 안타깝게도 흑인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이야기하였고, 거리로 나와서 희생자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대부분의 행진은 평화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과격한 시위가 있었고, 방화와 약탈이 있었습니다. 과격한 시위를 막고, 방화와 약탈을 막기 위해서 정부는 야간통행금지를 발표하였습니다. 첫날에는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였습니다. 다음날에는 저녁 8시부터 야간통행금지가 시작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야간통행금지를 발표하는 것도 문제 해결의 방법이겠지만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016년 가을부터 한국에서도 행진과 시위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였습니다.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시위가 끝난 현장은 쓰레기를 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하였습니다. 정부는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야간통행금지도 없었습니다. 방화와 약탈은 없었고, 일상의 생활은 자유롭게 이루어졌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하였고,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탄핵을 인정하였습니다. 2017년 대한민국은 대통령 선거를 하였고, 지금의 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국민은 바다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부라는 배가 안전하게 목적지로 갈 수 있도록 하지만, 정부가 잘못된 길을 가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습니다.
신부님 중에서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가 Lockdown되었고, 성당에 미사도 중지되었습니다. 걱정이 많으니 소화도 잘 안되고, 잠도 잘 못 잔다고 하였습니다. 운동을 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요즘 자전거를 타면서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코로나19와 불면증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면증은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근심, 걱정, 분노, 원망, 불평,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것들은 우리의 마음에 큰 풍랑을 일으키곤 합니다. 함께 맞서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은 더욱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내 마음을 비워버리면 용서와 이해 그리고 겸손과 사랑의 자리를 깔고 누우면 마음은 곧 평온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조용하게 하셨습니다. 거친 풍랑에 제자들이 무서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조용하게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왜 믿음이 약하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라는 배가 흔들리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신앙이라는 배가 흔들리는 것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6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장자의 ‘빈 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빈 배가 그의 작은 배와 부딪치면
나쁜 성격의 사람일지라도 빈 배를 보고는 화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그 모든 일은 그 배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의 배가 비어 있는데도 사람들이
화를 낸다면 그들이 어리석은 것이다.
배가 비어 있다면 그대는 다른 이들이 화내는 것을 즐길 수 있다.
함께 화낼 사람이 그것에 없기 때문이다.
텅 빈 공간이 되라
사람들이 지나가게 하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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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배움의 여정
-무지, 회개, 앎, 겸손, 믿음-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자 어제 삼종기도후 교황님의 짧은 강론 말씀 제목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비결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배워 깨달아 하느님을 알아가는 예닮의 여정은 바로 행복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에서 기인하는 두려움입니다.”
어제 고백성사를 보던 어느 사제의 말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두려움은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모르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무지함으로, 또 사람도 무지로 인해 알 수 없어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배우려는 공부에 대한 욕망은 무지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같기도 합니다. 무슨 공부보다도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하여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은 무지에 대한 근본 처방이기도 합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배움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분도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학원’이라는 단어보다 ‘배움터’라는 말이 호감이 갑니다. 샘터, 쉼터, 일터든 참 정답고 순수한 우리 말입니다. 공자의 논어 중심 개념 역시 호학好學이라 합니다.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학습學習을 즉 배우고 익히는 것을 강조하는 공자입니다.
배움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배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해법으로 배움에 대한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는 평생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어야 인생 학교 졸업인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하여 제 좋아하는 말마디가 주님의 평생 학인, 주님의 평생 전사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평생 영적 전쟁중인 주님의 평생 전사라는 것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배움의 여정에 우선 적인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무지와 겸손, 믿음의 단초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야 비로소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 때 비로소 참된 겸손, 참된 믿음의 선물입니다.오늘 제1독서 아모스 예언서도 결국은 회개의 촉구입니다. “나는 땅의 모든 씨족 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실망을 반영합니다.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여 아시는 주님을 모르는 무지로 인한 죄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서의 일곱 개의 반어적 의문문들의 결론은 마지막 7-8절, 11-12절에서 드러납니다.
“정녕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회개로 주님께 돌아 와 주님을 맞이하는 주님을 환대하는 참 좋은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돌아와 주님을 맞이하여 배워 알아갈 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 제자들의 무지가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역설이 주님을 지근 거리에서 따르는 제자들의 무지라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의 숱한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보고서도 주님을 몰랐다는 무지가 놀랍습니다.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태평하게 주무십니다. 무지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며 외칩니다. 그대로 무지의 믿음 약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몰라 무지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어찌보면 인생 항해중인 공동체의 모습같습니다. 그대로 세상 파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인생 항해 중에 난파된, 조난 당한 배같은 공동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가정공동체를 지탱해온 무수한 ‘믿음의 어머니들’을 보면서 얼마나 힘들고 거친 풍랑의 세상 바다 인지 깨닫습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이런 기도와 더불어 주어지는 구원이자 믿음의 선물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무지에 기인한 두려움임을 말해 줍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제자들은 물론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같은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아주 고요해집니다. 사람들의 놀라움의 고백도 그대로 무지의 반영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평생 화두로 주어진 파스카의 예수님이심을 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평생 회개를 통해 예수님을 깨달아 배워 알아갈 때 주님께 대한 믿음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의 풍랑을 가라앉히신 이런 주님을 체험하면서 이들의 믿음도 새로워지고 깊어졌을 것입니다.
밖의 풍랑보다 우선적인 것이 마음의 풍랑입니다. 오늘 호수가 상징하는 바, 우리 마음의 호수입니다. 참으로 일희일비 변화무쌍한, 두려움과 불안에 흔들리는 마음의 호수입니다. 이 모두가 무지로 인한 마음 호수의 풍랑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음을 깨달아 알 때 비로소 무지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의 풍랑은 고요해지고 비로소 마음의 평화입니다. 마음이, 내 존재가 평화로우면 주변도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니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에게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시며, 우리 안팎의 풍랑을 가라 앉히시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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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두려움을 묻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마태 8,24).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과 파도에 휩쓸립니다. 제자들은 겁이 나 죽을 지경인데 예수님은 천하태평 주무시고 계시네요. "그런데도"라는 접속사에는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불만스런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당신을 깨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한마디 하십니다. 꾸짖으신다기보다 안타까워하시는 음성입니다. 꾸짖음은 뒤이어 바람과 호수에게 내리실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참 편안하고 좋으신가 봅니다. 저리도 맘 편히 잠드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반면 제자들은(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댈 곳 없는 사람처럼 동동거립니다. 조금만 들썩해도 겁에 질리고 두려움에 떨지요. 주님과 그분 현존에 대한 존재적 믿음이 부족해서인 것 같습니다. 사실 배를 뒤흔드는 풍랑과 파도도 하느님 품 안의 일인데 말이지요.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인과관계를 나열합니다.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니냐?"(아모 3,6)
이스라엘이(우리가) 겪는 자연재해나 천재지변, 외세의 침략과 내분 모두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시고 사랑을 쏟으시는 이 세상, 이 백성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지요.
그것이 당장 비극처럼 보일지, 행운처럼 보일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풍랑이나 파도 건, 따사로운 햇살이나 미풍이건 하느님 마음은 하나입니다. 풍랑과 파도에 질겁하고 햇살과 미풍에 흐믓해하는 건 인간의 가볍고 얕은 반응일 뿐이지요.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아모 4,11).
바로 이 말씀에 하느님의 속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도"라는 접속사에는 사랑하는 존재에게 버림받고 외면 당한 하느님의 상처 입은 마음이 숨어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시는 모든 자애와 축복, 징벌과 재앙에까지도 당신 백성과의 사랑을 회복하시려는 그분의 간절한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 백성을 마음껏 사랑하고 또 그들에게 한껏 사랑받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 바람은 번번이 좌절되고 꺾이지요. 당신 백성이(우리가) 도무지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 앞에서 그저 겁에 질리고 두려움에 휩싸이거나, 행운 앞에서 만족해 즐기는 정도로 삶을, 삶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가벼이 대하니까요.
아쉽게도 영혼이 이 상태라면 삶의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풍에서도, 또 충만한 축복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기는커녕 그분을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심을 잃고 허둥대는 우리에게 왜 겁을 내느냐고, 믿음은 어디 갔느냐고 물으십니다.
자, 이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봅시다. 우리는 배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평화로이 계십니다. 호수가 요동쳐봤자 하느님 안에 있고요. 지금 필요한 건 믿음이지 호수 저편의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평화는 환경이 아니라 믿고 의탁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무엇을 두려워하시는지요? 여러분 각자가 안고 가는 두려움이 무엇이든, 그 두려움을 거두어, 내 품에서 편히 주무시는 주님 발 앞에 내려 놓읍시다. 그분의 편안하고 평화로운 쉼 안에 우리 몸을 누이고 마음도 기대어 봅시다. 풍랑은 잠시 잊고 그분 숨소리에 나의 호흡을 맞춰 봅시다. 그대로 그분께 머무릅시다. 그분이 내 옆에, 내 품 안에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울까요. 이 코로나19 상황도 우리 각자가 처한 위기 상황도 주님과 함께 하기만 한다면 그냥 다 지나갈 겁니다.
이 관상기도 안에서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마태 8,26)는 말씀을 체험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깊은 의탁의 잠을 함께 누리며, 더불어 평안하고 평화롭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올해의 반이 지납니다. 전반기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후반기는 더욱 말씀 안에 기쁨 누리시길 빕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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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8,27)
'바람과 호수!'
우리는 종종 우리네 버거운 삶을 빗대어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을 들여다 보면 이것 저것 신경써야 할 일도 많고, 걱정할 것도 많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마음 아파하는 일도 많습니다.
그야말로 '가지 나무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삶의 모습입니다.
혹시 삶의 나무가지가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는 아닌지?
너무 많은 근심과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매일 주님께 이렇게 외치고 있는 우리들은 아닌지?
"주님, 구해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8,25)
우리 주위를 겸손한 마음과 작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불평할 일 보다 감사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눈으로, 성령님의 눈으로 너와 세상을 바라보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던 것처럼 기쁨의 찬가를 부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설령 크고 작은 힘듬과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그 힘듬과 고통의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우리를 위해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힘듬의 표징인 바람과 호수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 바람과 호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입니다.
바람과 호수를 가라앉히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굳건한 믿음이 내 안에 있느냐가 큰 문제입니다.
주님께로 향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은 넘쳐나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아모4,11)
다시 돌아갑시다!
다시 시작합시다!
다시 사랑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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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아모스 3,1-8; 4,11-12
마태오 8,23-27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생각은 옳은가?
유명 성과향상 코치인 앤서니(토니) 라빈스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란 책이 있습니다.
그가 말하려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 안에 잠들어있는 거인이 있음을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 안에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한 번도 문질러보지 못한 채 먼지만 쌓이게 내버려 둡니다.
우리 안에 잠든 거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서 문지르기만 하면 거인은 무엇이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줄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거의 배가 침몰 될 위기가 닥치자 비로소 예수님을 깨웁니다.
이 배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각자 자신 안에 잠든 거인인 예수님이 사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못 하시는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우리 안에 잠든 거인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만 있다면 당연히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니 혼자 힘으로 해보려고 하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그 동굴에 들어가기 위한 “열려라. 참깨!”의 주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술램프는 동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굴의 입구를 통과하려면 올바른 주문을 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 주문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문을 외우면 바위 문은 반드시 열립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나, 기도의 힘을 믿지 않는 것이나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기도하면 다 돼요.”라고 말하면,
“기도해도 잘 안 되던데요?”라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이런 경우는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하려고 하면서 청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나를 봉헌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힘을 빼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을 때는 예수님을 깨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는 예수님을 깨우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힘을 완전히 빼지 않으면 기도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아기가 부모에게 온전히 맡기듯이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 기도가 시작됩니다.
두 번째는 될 때까지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열려라. 참깨!”하고 ‘안 되네!’라며 뒤돌아섰을 수도 있습니다.
문을 열고 동굴 깊숙한 곳에서 램프를 찾아내어 손으로 문질러야 합니다.
믿으면 끝까지 하게 되어 있습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는 인디언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기도가 들어지지 않은 때가 없는 이유는 비가 올 때까지 기도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믿음을 신학교 때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제가 보답하기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
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시험 기간이 되어도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이상하게 공부하는 시간이 부족한데도 성적은 잘 나왔습니다.
유학 가라고 했을 때도 이탈리아어로 인사할 줄도 몰랐지만 두렵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 다 될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자마자 ‘하루 세 시간은 성체조배 한다.’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한국에까지 “전삼용 신학생은 공부는 안 하고 성체조배만 한다.”라는 소문이 났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공부도 빠르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했다면 훨씬 힘들었고 훨씬 늦어졌을 것이 확실합니다.
강론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성체조배 한 시간만으로 부족할 것 같아서 미리 걱정합니다.
그러나 한 시간 묵상할 때 강론 거리를 안 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기도하면 다 됩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내 안에 잠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깨우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내 힘을 빼고 믿고 꾸준히 기도하면 다 들어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내 안의 잠든 거인은 바람과 호수까지도 꾸짖어서 복종시켜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다 된다는 생각은 옳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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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0.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아모스 3,1-8; 4,11-12
마태오 8,23-27
“그렇게도 믿음이 없느냐?”
입원한 환자들을 방문하기 위해 병원에 다녀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저까지 컨디션이 안 좋아지고, 어딘가 아픈 것 같고, 불안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병원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겠지요.
다들 직면한 최대과제(투병과 쾌유)와 싸우느라 힘겹습니다.
환자나 그 가족들의 고통이야 두말할 것이 없겠지요.
병원종사자들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습니다.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감정의 기복도 심해집니다.
걱정도 대단합니다. 안절부절 못합니다.
다들 정말 고생들이 많으십니다.
그런 와중에도 정말 특별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환자를 만났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현재 상황이 꽤 비관적이고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얼마나 의연한지 모릅니다.
자신의 현재 상황을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저 같았으면 불안해서 죽을 지경인 그 순간에 마치 소풍 나온 얼굴로 그렇게 지냅니다.
모든 것을 초탈한 신선 같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오히려 찾아간 저를 걱정하고 격려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그토록 거센 풍랑 앞에서 평온함을 유지하는 비결이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그분이 하느님과 맺고 있는 굳은 결속력 때문이겠지요.
그분이 온전히 하느님의 품안에 머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영원한 안식처가 있음을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그분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시기에, 그런 모진 고통도 기꺼이 참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다시 한번 미성숙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과 한 배에 타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바닥 수준인 제자들의 믿음 앞에 무척 속상해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 같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매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안에 주님이 항상 현존해 계신데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주님이 어디 계신가?’ 하고 외칩니다.
그분께서 늘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기에, 그 어떤 풍랑이 다가와도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걱정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이 시대, 우리를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걱정거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걱정 때문에 조급히 서두르지만 그럴수록 더욱 공허해집니다.
그 공허함은 또 우리를 분주함으로 내몹니다.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이지만, 바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신이 무슨 특별한 일이라고 하고 있는 듯이 여기지만 사실은 큰 의미 없는 우스꽝스런 것들에 빠져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쿠르트 투골스키라는 학자는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으로 현대인을 묘사합니다.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으면서
언제나 초조해하고 안달하며 몸부림치는 존재”
하루 온종일 산적한 걱정거리들과 두려움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한 구도자가 이런 편지를 쓰셨네요.
“네 마음을 잘 지키는 문지기가 되어 어떤 생각도 미리 물어보는 일 없이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들어오려는 생각에게 이렇게 물어보아라.
<너는 우리 편에 속하느냐, 아니면 반대편에 속하느냐?>
네 마음 안으로 들어오려는 생각이 네 편이라면
그것은 너에게 평화를 가득히 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반대편이라면 그 생각은 너를 분노케 할 것이고 네 마음 안에 온갖 종류의 탐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안셀름 그륀, ‘다시 찾은 마음의 평안’ 성바오로 참조).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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