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서울 도심의 낡은 탐정 사무소 창문으로 빗줄기가 유리를 두드렸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다 꺼졌다. 탐정 이준혁은 담배 연기 속에서 사진 한 장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태블릿 하나.
얇고 매끄러운 그 기계 위에,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 얹혀 있었다.
증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숨겨질 뿐이다.
그는 사진을 서랍에 넣고 외투를 걸쳤다. 오늘 밤, 오래된 사건의 실이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사무소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단정한 코트,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오랜 시간 무언가를 짊어진 사람의 것이었다.
"이준혁 탐정님이시죠?"
"그렇습니다. 앉으시죠."
여자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저는 강미래라고 합니다. 오래된 사건을 다시 조사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사건입니까?"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태블릿 조작 사건입니다."
준혁의 손이 멈췄다. 커피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그 사건은…"
"알고 있어요. 위험하다는 거. 하지만 제 아버지가 그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준혁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빛바랜 문서들과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작은 메모지 하나.
판때기는 거짓말을 한다.
준혁이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여의도였다.
한도준 의원. 날카로운 눈매와 유려한 말솜씨로 정계에서 빠르게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다. 그는 늘 박 전 대통령의 30년 구형 이야기를 꺼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양.
준혁은 의원실 앞 복도에서 그를 기다렸다.
"의원님, 잠깐 여쭤봐도 될까요?"
한도준은 준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탐정? 무슨 일로."
"태블릿 조작 사건에 대해 의원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순간, 한도준의 눈빛이 변했다. 불과 0.3초였다. 하지만 준혁은 놓치지 않았다.
"그건 이미 끝난 사건이오."
"끝난 사건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아직 끝나지 않은 진실에 관심이 있죠."
한도준은 대답 없이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저 사람은 뭔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다음 단서는 부산에 있었다.
준혁은 KTX에 몸을 실었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의뢰인이 건넨 문서를 다시 읽었다. 태블릿이 처음 발견된 경위, 감정 결과, 그리고 석연치 않은 수사 기록들.
누군가 중간에 손을 댔다. 하지만 누가, 왜.
부산에는 박민혁 후보의 유세가 한창이었다. 광장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준혁은 군중 속에 섞여 무대를 바라보았다.
박민혁은 열변을 토했다. 지역 발전, 민생, 미래. 하지만 단 한 번도 태블릿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준혁 옆에 서 있던 낯선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 왜 핵심을 말 안 하는지 알아요?"
준혁이 고개를 돌렸다. 오십대 초반의 남자였다. 눈빛이 예리했다.
"누구시죠?"
"송기자라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이 사건을 추적해왔어요."
두 사람은 광장을 빠져나와 좁은 골목 카페로 들어갔다.
송 기자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박민혁이 태블릿 얘기를 꺼내지 않는 건, 꺼낼 수 없기 때문이에요. 누군가 그를 막고 있거든요."
"누가요?"
송 기자는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걸 알아내는 게 탐정님 일 아닌가요?"
서울로 돌아온 준혁의 사무소에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다. 태블릿 사진은 그대로였지만, 문서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읽었다는 뜻이었다.
준혁은 창문을 닫고 생각했다.
이 사건에 손댔다는 걸 알면서도 건드렸다. 경고인가, 아니면 실수인가.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준혁 탐정?"
굵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태블릿 사건에서 손 떼시오. 아직 늦지 않았소."
"늦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준혁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건드릴수록 반응이 온다. 즉, 진실은 아직 살아 있다.
뜻밖의 단서는 대양 너머에서 왔다.
준혁의 오랜 지인, 워싱턴 특파원 차민정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준혁아, 미 의회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있어."
"어떤 움직임?"
"한국의 태블릿 사건 관련 문서가 미국 쪽 채널을 통해 흘러들어왔다는 소문이 있어. 청문회 안건으로 올라갈 수도 있대."
준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국내에서 막힌 진실이 태평양을 건너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 문제를 제3국에서 처리하겠다는 발언을 던진 것처럼, 때로는 문제의 해법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나는 법이었다.
"민정아, 그 문서 출처가 어디야?"
"아직 몰라. 근데 준혁아, 조심해. 이 사건, 단순한 국내 정치 문제가 아니야. 훨씬 더 깊어."
전화를 끊은 준혁은 지도를 꺼냈다. 서울, 부산, 워싱턴. 세 도시를 잇는 선을 그렸다.
삼각형이 완성되었다.
사흘 뒤, 의뢰인 강미래가 다시 사무소를 찾아왔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탐정님, 저한테 연락해온 사람이 있어요."
"누굽니까?"
그녀는 손을 떨며 메모지를 내밀었다. 거기엔 이름 하나가 적혀 있었다.
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이름은 오래전 이 사건의 수사 기록에서 딱 한 번 등장했다가 사라진 인물이었다. 태블릿이 처음 발견된 현장에 있었던 사람. 그러나 이후 모든 기록에서 지워진 이름.
증인은 살아 있었다.
"언제 만나기로 했습니까?"
"오늘 밤이요."
장소는 한강변의 낡은 창고였다.
준혁은 강미래보다 한 시간 먼저 도착해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빗소리가 철제 지붕을 두드렸다. 참새 한 마리가 어딘가에서 날아올랐다. 비둘기 한 마리는 처마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발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것은 칠십대 노인이었다. 굽은 등, 지팡이. 하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강미래가 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노인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날 밤, 나는 봤어요. 누가 그 태블릿에 손을 댔는지."
준혁은 숨을 죽였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노인은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 두려움과 결심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말하면… 나도, 당신들도 위험해요."
"이미 위험합니다. 숨어 있는다고 안전하지 않아요."
긴 침묵이 흘렀다.
빗소리만이 창고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노인의 진술은 녹음되었다.
준혁은 그 파일을 세 곳에 나눠 보관했다. 송 기자, 차민정, 그리고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미 의회 관계자.
한도준 의원은 다음 날 아침 예정된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박민혁 후보의 캠프에서는 갑자기 태블릿 특검 요구 성명이 흘러나왔다. 워싱턴에서는 청문회 일정이 잡혔다는 소문이 돌았다.
강미래는 사무소를 떠나며 말했다.
"아버지가 이제 좀 쉬실 수 있을까요?"
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창밖을 바라보았다.
참새 한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비둘기는 여전히 땅을 걸었다. 어떤 새는 날아오르고, 어떤 새는 버틴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결국,
땅 위로 떠오른다.
탐정 이준혁은 다음 의뢰를 기다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의 서랍 속 태블릿 사진은 이제 사본이 수십 장이었다. 증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숨겨질 뿐이다. 그리고 역사는, 반드시 진실을 밝히는 자의 손을 들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