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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장군은, 신앙이 매우 독실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서부 해안 지대로 파견 나갔을 때입니다. 그의 친구들이 그를 축하하고자 수요일 저녁에 환영 만찬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비롯하여, 주변의 여러 지인들과 귀인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하워드 장군에게 선사할, 깜짝 행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장군에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마쳐진 뒤에, 그들은, 장군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미안하지만, 수요일 저녁에는 이미 선약이 있으니, 다음으로 미루어 줄 수 있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자네의 처지는 알겠지만, 수요일 저녁에 자네를 축하하기 위해, 대통령을 비롯하여,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올텐데, 그 선약을 미룰 수 없겠나?”라며, 장군을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고개를 저으며, “나는 기독교인이야.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갈 때, 수요일 저녁예배에 꼭 참석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했어. 그러기에, 어떠한 것도, 이 중요한 약속을 깨뜨릴 수 없네”라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은, 장군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굳은 것을 알고는, 축하시간을 다음날인 목요일로 연기했습니다. 그리고, 초청한 여러 인사들에게도 장군의 뜻과 함께 축하시간을 다음날로 연기하겠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장군의 뜻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은, 장군의 신앙을 비난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을, 장성이 되어서까지도, 지키는 모습에 크게 감동해서, 오히려 존경의 의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이 예화를 준비하면서, 그 동안,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것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또, 그 동안 만났던 성도들 가운데는, 이러이러한 조건을 들어주면, 수요예배에 빠지지 않겠다는 등 타협과도 같은 조건을 내세웠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았던 일들도 떠올랐습니다. 그러한 것이, 저와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지만, 참으로, 하워드 장군은, 그 명성과 함께, 그의 신실함을 볼 때, 그의 신앙에 존경을 표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약속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처음 믿기 시작할 때, 또는, 믿는 가운데, 하나님과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그 약속을, 우리는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이 있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삼상 2: 30을 보시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합니다. 하워드 장군의 친구들이, 하워드 장군의 선약에 대해 알기 전에는, 그 선약을 취소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선약을 취소하는 것은, 선약자보다 더 귀하거나 더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 행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한, 하나님과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 다른 어떤 일도 하나님과의 약속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무궁하신 분과의 약속보다 더 중요한 약속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취소할 만큼, 더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는 때때로, 그것과 타협을 합니다. 자신을 축하해 주는 친구들과 또, 초청받은 여러 인사들과의 약속 앞에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먼저 생각한 하워드 장군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며, 칭찬을 받은, 백부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기를 바랍니다. 만화가 신일숙씨의 “환타스틱 대 서사시 리니지”를 보면, “술로 한 맹세는 술이 깨면 사라지네. 물로 한 맹세 역시, 물이 마르면 없어지나 잉크 따위론 맹세하는 법이 아니지. 그러나, 피로한 맹세는, 온몸의 피를 모두 쏟아버리기 전엔, 깨지지 않네. 한 방울의 피가 이 몸에 남아 있어도, 기사는 맹세를 지켜야 하리. 그러기에, 피로 한 맹세는, 일생에 한 번도 많다네. 그러니, 피의 맹세는, 검을 쥔 자가 아니면 하지 못하리”라며, 기사도 정신에서, 피로 한 맹세가, 중요함을 말합니다. 우리도 성찬식을 통해, 우리와 예수님과의 약속이, “피의 약속”임을 되새깁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피로서, 세운 언약이 소개됩니다.
본문 1 – 2을 보시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여호와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 너 모세만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고 그들은 가까이 나아오지 말며 백성은 너와 함께 올라오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모세만 하나님께 나간 것이 아니라, 아론을 비롯해서,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70명의 장로들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론을 비롯한 사람들은, 멀리서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까지는, 나가지 못한 겁니다. 구약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께 나갈 때는, 하나님이 불러주실 때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가 되는, 제사장을 통해서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하나님께 나감에 있어서, 이렇게 제한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에덴에 있던 두 사람을 보면, 언제든지, 원할 때에, 자유롭게 나갔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순간, 하나님께 나가는 자유가 사라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첫 사람과도 다르고,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과도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가는 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 26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모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을 했지만, 겟세마네에 가서 기도하실 때는, 그들 모두를, 예수님이 기도하는 장소까지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 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기도하는 장소 근처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이들은 변화산에서도 동행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무리가 많았지만, 그들은, 모두가 같은 자리, 같은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즉, 똑같이 따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어떤 이는, 말씀에 충실하여 경배하지만,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요 4: 24을 보시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합니다. 또, 롬 12: 1을 보시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들려지지만, 똑같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드리는 사람마다, 성도마다, 그의 신앙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신앙적으로 준비된 만큼, 경배하며, 준비된 만큼, 은혜의 자리, 예배의 자리로 나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엡 3: 12을 보시면,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면, 모세든, 아론이든,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70명의 장로들이 왜? 하나님이 임재하신 시내산으로 올라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본문의 9 - 11절을 보시면,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런데, 왜? 사울이 있고, 다윗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찢으신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인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놓였던 장벽이 완전히 제거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언제든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또, 어떤 중재자의 도움없이, 자유롭게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 은혜입니까? 찬302장을 보시면,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라고 합니다. 왜? 못 갑니까? 왜? 맘이 조립니까? “닻줄을 끌러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띄워 속히, 깊은 데로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의 바다로, 그 은혜의 깊은 자리로 “네 맘껏 저어가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풍성한 생명과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껏 자유롭게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이 사실을 기억하시어, 날마다 주께로 가까이 나가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 - 4절을 보시면,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긴 성도를 통해, 일을 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과 율례들을 백성들에게 선포하자,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랬기에, 7절에서도,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서를 낭독할 때, 이 대답이 반복됩니다. 비록, 나중에는, 이 고백이 유명무실이 되기도 했지만, 이 당시로서는 철저했고, 확고했습니다. 수 24장에,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 나오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고백을 하죠? 이러한, 신앙고백적 결단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도들의 신앙적 결단을 통해, 언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마 9: 28을 보시면,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합니다. 맹인이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또, 요 11: 26을 보시면,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며, 영생에 대해서도,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20: 29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며, 진정으로 믿는 다는 것, 곧, 믿음이 무엇인지, 이에 대한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이를 볼 때, 우리 신목교회가 하나님을 위해서, 더 큰 사역을 하길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더 큰 일 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습니다. 불순종 속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의 백성들이, 두려움 속에서, 경외 속에서, 결단을 했다고 하지만, 만약, 결단의 고백이 없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발적이고, 온전한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이고, 결단입니다. 왕하 5장을 보시면, 아람의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린 상태에서, 이스라엘로 치료차 옵니다. 이 때,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엘리사에게 거만을 행했습니다. 곧, 엘리사가 자기에게로 나와, 굽신거리며,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자신의 병을 치료해 줄 줄 알았는데, 엘리사는 그의 사환을 통해,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을 전했기 때문에, 몹시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곧, 사환을 통해 전해진, 엘리사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치료되었습니다. 또, 눅 5장을 보시면, 베드로가 동료들과 밤새도록 투망을 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한 곳을 더 보시면, 요 9장입니다. 여기서는, 맹인의 눈에, 침으로 이긴 진흙을 바른 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맹인은 불평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자, 성경에서 증거된 이러한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풍자입니까? 은유입니까? 비유입니까? 사실입니까? 오늘날도,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왜 이루어집니까? 본문 속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에 의해, 사람만 바뀔 뿐, 하나님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3, 7절의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는 고백은,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할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현실 사이에서, 머뭇거리며, 회색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순종의 길이 비록 힘들더라도, 순종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시면, 모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않고, 영구히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잠 7: 3을 보시면,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기록된 말씀은 갖고는 있었지만, 그들 마음판에는, 새기지 못했습니다. 즉, 형식은 있었지만, 내용이 없었던 겁니다. 마 21장을 보시면,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두 아들을 둔 사람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더니, 큰 아들은 대답만 할 뿐,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만 할 뿐, 마음에 새기지 않는다면, 이 큰 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경험이 있던가, 암송하여, 지식으로만 쌓았을 뿐, 우리의 손발에 새기고, 마음판에 새김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 6: 6을 보시면,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하며, 잠 3: 3을 보시면,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고 합니다. 또, 약 1: 25을 보시면,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이겁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집니다.
본문은, 마침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민으로 체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5절에서 희생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제물의 피 가운데,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에게 뿌림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민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증거합니다. 이렇게, 구약의 이스라엘은, 제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의 피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오늘의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성민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 26: 27 – 28에서 말씀하는 새 언약입니다. 보시면,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찬식은 조각난 카스테라나 또는, 맛없는 빵을 먹고, 와인을 마시는 친교의 시간이 아닙니다. 히 9: 15을 보시면,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준비하는 자나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준비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참여해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족한 나, 죄 많은 나를 하나님의 백성인 성민으로 삼으심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은혜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이 보다 더 큰 은혜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영원한 기쁨의 향연을 예비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전 1: 9을 보시면,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큰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도 새로운 의무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 지내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지켜야 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