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할머니 울할머니,,, 요즘 가끔 고향에 들를 때는 할머니 생각을 한다. 친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시고 그 후에 새로운 할머니가 내 할머니다. 성인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멸치 배 서기로 일해왔다. 정확하게 몇 년을 일했는지는 알길이 없다. 부모님이 살아 있을 때 어느 정도 부모의 삶에 대한 노정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195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는 시골에서 학교 다니고 학교 갔다 오면 소 먹이러 가고, 때론 토끼도 키우고, 돼지 밥도 주고 닭 먹이도 주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생 시절에 아버님이 장목에서 모구리배를 했기에 내가 자란 고향에는 할머니와 내가 있었다. 동생둘은 장목으로 가서 부모님과 같이 생활하며 학교에 다녔다. 고로 할머니와 나는 깊은 인연이란 연결고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도 집에서 통학했기에 밤낮으로 할머니를 보면서 살아왔다. 나의 할머니는 작은방께 출신으로 옥씨가문으로 시집와서 그 많은 농사를 머슴과 함께 지으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우리 집 수준이면 쌀밥을 먹어도 되지만 맨날 보리밥에다 고구마뺏떼기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쌀을 한 톨이라고 아끼기 위해 고구마밥, 무시 밥, 등을 자주해 먹었다. 먹기 싫기는 했어도 큰 불평은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해 재수를 하면서도 고향을 지켰다. 일이 지겨워서 대학을 가야겠다고 늦게서나마 다짐을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우리 집안이 살기에 넉넉한대도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누에를 키워 고치를 생산하고 고구마를 썰어 절간고구마로 말려 농협에 판매하기도 하였다. 쌀을 판매할 때도 대를 깎는 나무도 모서리를 두어 조금이라도 적게 가져가도록하였다. 요즘 생각해버면 할머니의 절약정신과 부지런함은 몸에 베여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모고리배가 운영이 잘되어 해마다 논을 사 보태기도 하고 우리 형제는 모두 부산으로 대학에 다니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밥만먹어도 잘사는 집이라 불렀다. 대회지 잘사는 집안에 비해서는 보잘것 없지만 삼시세끼 밥은 굶지 않고 먹고 살았으니 호강이라 할 수 밖에... 세월이 흘러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낙향하여 시골학교 선생을 하면서 자아에 도취되어 할머니는 어떻게 사는지 돌보지도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 간후 후회를 했으나 흘러간 물이다. 요즘 가끔 할머니를 생각하면 후회가 막급이다. 할머니 생전에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드렸으면~~~. 오늘 감난골에 들러 어느 가정집에 핀 할미꽃을 보며 다시 한번 할머니를 생각해 본다. 할머니 정말로 후회스럽습니다. 살아생전에 마음에서 울어나는 밥 한 그릇이라도 해 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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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저도 친할머니는 뵌 적도 없고 외할머니의 모습은 눈에 선합니다.
봄철이면 율포리 재를 넘어서 오시던 꼬부랑 외할머니 마중 다니던 기억이 어제 같습니다.
사진과 글 잘 감상하였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어요
딸이 옆에 살아서 마누라가 애기 둘
어릴때부터 육아보조를 했어요 지금도
덕분에 마누라는 많이 늙었어요
그래도 애기들이 주는 기쁨은 말도 못하게 큽니다
저도 일찍 명퇴해서 몇번이나 실패해서
좌절하고 우울증을 앓았는데 애기 둘이가
약보다 더 치료효과가 좋았습니다
살기척박한 그때 그시절 거제도에서 부잣집
도련님이셨군요
저는 거제도가 갈때마다 정들고 참좋습니다
우리 애기들도 나중에 외할매 외할배
좋게 생각하고 많이 그리워해줬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