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은 남도답사 일번지라 불린다.
우리 역사에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적도 없고, 대단한 유적이 남아있지도 않은 조용한 이 시골마을을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남도답사' 를 넘어 '남한 답사 일번지'로 부르고 싶을 정도라며 극찬했다. 과연 강진 곳곳 어디나 '남도답사 일번지'라는 문구가 흔하게 보인다. 군청을 비롯해 강진의 모든 기관에서 일심단결하여 강진을 남도답사 일번지라 적극 홍보하고 있다.
한국 땅 구석구석 안가본 곳 없는 문화재 대가를 홀린 강진의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강진은 다산 정약용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지역이다. 다산이 무려 18년간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강진 곳곳에 다산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강진에 오면 다산의 흔적을 쫓기위해 가장 먼저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가장 많은 시간인 11년을 보냈다.
하지만 다산이 강진에 유배와서 가장 처음 머문 곳은 읍내에 있는 한 주막집이었다. 일반인들은 다산을 죄인으로 배척할때 꺼려했지만 그를 가련하게 여기고 돌봐준 이가 바로 주막집 노파였다. 주모는 다산에게 주막 한켠 오두막을 내줬고 다산은 이곳에서 4년을 보냈다.
그는 이곳의 당호를 '마땅히 지켜야 할 네가지'라는 뜻의 사의재라 불렀다. 마땅히 지켜야할 네가지란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의 네가지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유배생활에서 스스로 도리를 지키고자 했던 다산의 고결함이 느껴진다. 당시 주막집은 사라졌지만 강진군은 그곳을 사의재한옥체험관으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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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강진에서 가장 처음 머물렀던 사의재. 지금은 한옥체험관으로 운영된다
한옥체험관에 도착하니 시끌법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주말에만 열리는 마당극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
모란방에 짐을 풀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유배령을 받고 강진에 막 도착한 다산이 주막에 들러 아욱국을 먹는 장면이 공연되고 있었다. 주모는 처음에는 이 죄인에 겁을 먹었지만 아욱국 한사발을 들이키는 모습에 측은지심을 느낀다. 실제로 다산은 주모가 해주는 아욱국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의재 한옥체험관 내 주막에서는 점심 메뉴로 아욱굿을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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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온 정약용을 따뜻하게 보살펴줬던 주막집 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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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학의 정수 다산초당은 사의재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다. 지금은 시원하게 길이 뚫려있지만 그때만해도 책과 옷을 짊어지고 이곳으로 향했을 다산의 모습이 어땠을까.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은데, 그래서 정약용의 호인 다산(茶山)이 여기에서 유래됐다.
꽃은 스스로 향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향기로운 것처럼 유배생활 동안 다산의 학문에 매료된 제자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다산초당 또한 윤문거 세형제 덕분에 마련됐다. 안정적인 거주공간이 생기자 다산은 이곳에서 학문의 꽃을 피우게 된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 중 추사체와 세한도를 남긴 것처럼 다산 또한 유배기간이 정치적으로는 '실패'의 시간이지만, 학문적으로는 '이룸'의 시간인 셈이다.
그런데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이 특별하다. 나무 뿌리가 얽히고 섥혀 그대로 땅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모습이 기이하고도 신비롭다. 마치 '돌아보니 내가 도달한 공부의 끝은 이미 어릴때 모두 배운 것들이다'라는 다산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큰 나무도 뿌리에서 시작한 것처럼 우리는 기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시인 정호승은 이길을 '뿌리의 길'이라 불렀다.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 정호승 <뿌리의 길> 중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뿌리의 길
정약용은 그의 능력을 아끼던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이후 천주교를 빌미로 한 당파싸움에 희생되어 강진으로 귀양생활을 떠난다. 자그만치 18년이라는 세월이었다.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먼 외가쪽 고향이긴 하지만 연고 하나 없는 땅끝으로 유배를 떠났다고 상상해보라.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마 18년은 커녕 18일도 맨정신에 보내기 힘들 것이다.
세상에 버림받았다는 참담함. 그 깊은 절망감속에서 다산은 마음공부의 싹을 틔었다. 기본으로 돌아가 삶을 돌아보았고, 삶의 희망을 만들어나갔다. 진흙속에 피어나는 연꽃처럼 그의 학문은 성숙해갔다. 복숭아뼈에 세번이나 구멍이 날정도로 하루종일 앉아 책을 보고 글을 쓴 덕분에 <목민심서><여유당전서> 등 주옥같은 저서 500여권을 남겼다.
다산초당에 오르는 뿌리의 길처럼 꼿꼿하고 강인한 다산의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 나이 예순
한 갑자를 다시 만난 시간을 견뎠다.
나의 삶은 모두 그르침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어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빈틈없이 나를 닦고 실천하고
내 본분을 돌아보면서
내게 주어진 삶을 다시 나아가고자 한다.
- 정약용 <자찬묘지명>에서 -
현재의 다산초당은 다산이 머물던 그 모습이 아니다. 작은 오두막집이었던 초당은 번듯한 기와집과 넓고 긴 툇마루와 방으로 복원됐다. 자칫하면 '아 이런곳에서 아무생각없이 몇달 살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쾌적하다. 조금은 아쉽기도 하지만, 동백숲과 잡목들에 둘러싸인 어둠침침한 공간에서 학자의 품격을 지켰던 다산의 향기만큼은 그대로 남아있는 듯하다.
다산학의 정수가 탄생할 수 있었던 다산초당. 지금은 복원된 모습이다
추사 김정희가 쓴 다산초당 현판이 보인다
정약용의 글씨를 모아서 만든 다산동암
다산이 손수 쓰고 새긴 각자인 '정석'
후에 세워진 천일각. 이자리에서 다산은 정조를 그리워하고 유배중이던 형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다산 박물관
자신의 호처럼 차를 굉장히 좋아했던 다산은 초당앞 다조에서 차를 즐겨 마셨다
다산 초당 뒷쪽 오솔길을 걸어가면 백련사에 다다른다. 이 길은 차나무와 동백나무숲이 호젓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색의 길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길은 기쁨과 설렘의 길일 것이다. 백련사의 혜장선사는 다산과 오랜 친구사이로 그들은 수시로 이 길을 통해 만나 학문을 논했다. 이들은 학문적으로 서로를 흠모했다. 혜장스님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두었을 정도였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이어주는 오솔길
백련사
백련사에서는 저 멀리 바다를 볼 수 있다
다산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다산은 귀양살이는 끝냈지만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권력자에게 청원의 편지를 보내서라도 귀양을 풀어보자고 부탁하는 아들 학연에게 다산은 이런 편지를 남긴다.
내가 살아돌아오는 것도 운명이요, 끝내 돌아가지 못하는 것 또한 운명이다.
그러나 사람의 도리를 닦지 않고 천명만 기다린다면 이치에 합당치 않다.
나는 사람의 도리를 이미 다했다.
그럼에도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 또한 운명일 따름이다
어느 곳하나 사소하게 지나칠 수 없는 다산의 흔적들. 강진 여행은 한 위대한 학자의 여정을 쫓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영혼을 만나는 일이야말로 강진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