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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보는 눈
다니엘서 7장 13~18절, 누가복음 2장 25~38절
한 문 덕 목사
[행복을 만드는 경험]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총회교육원에 나온 대림절 묵상집을 하나씩 구입하셨지요! 저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이번 책은 매우 짧은 말씀들이지만 깊이 묵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묵상집의 오늘 날짜를 보면, 제가 지난주에 설교했던 본문 중 하나인 누가복음 7장 22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이 성경구절에 대해서 이 묵상집을 쓰신 김성룡 목사님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계시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바로 천국잔치였다.”
이 말을 비종교인들의 일상 언어로 바꿔 보면 “예수라는 분과 함께 했을 때 나는 참으로 의미 있고, 행복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최인철 교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센터장으로 “행복하게 사는 삶”에 대해 전문가입니다. 이 분이 말씀하시는 행복의 비결은 무척이나 간단합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행복한 사람 옆에 있어야 행복해 진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지요.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환경은 바로 사람입니다. 그러니 행복한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중에 저는 우리 교우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화요일에는 성탄절 장식을 하러 온 3 여신도들과 만났고, 수요일에는 칸타타를 준비하러 온 성가대원, 그리고 황덕형 장로님과 황혜성 집사와 함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는 청빙위원들과 자리를 함께 했고, 목요일에는 봉사부장이신 김영자 권사님과 함께 입원하신 정정순 집사님을 찾아뵙고, 또 점심에는 5구역 식구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금요일에는 라디오에서 소은이의 열창을 듣고, 토요일에는 남성중창단과 찬양제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중학생 친구들과 함께 탁구를 쳤지요^^ 우리 생명사랑교인들의 특징은 모두 활기가 넘친다는 것입니다. 열정이 가득하지요. 그래서 저는 일주일 내내 행복한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를 더 행복하게 만든 한 장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어린이부 2학년 예람이가 지난 주일에 제게 준 것입니다. 메모장 선물과 자신이 직접 만든 인형과 함께 예쁘게 포장해서 제게 편지를 썼는데요. 예람이의 허락을 받아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생명사랑교회 담임목사님께
안녕하세요. 저 예람이에요. 저희 교회에 목사님이 되신 걸 축하 드려요. 아직까진 낯설고 어색하지만 나중엔 친해지고 사이가 좋아질 거라고 믿어요. 제가 오지 못하는 날,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많이 없더라도 목사님은 용기를 내 끝까지 가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사랑해요 ♡~ ”- 예람 올림
억만금을 주고도 사지 못하는 사랑과 격려의 편지는 돈으로 행복을 사려는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우리 생명사랑가족들 때문에 행복합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해 볼까요? (이름이나 직분을 부르며) “집사님 덕분에 참 행복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
오늘 누가복음서에는 오래도록 행복하지 못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시므온입니다. 성서는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려 왔고, 성령께서 늘 함께 하셨으며, 죽기 전에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보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설명은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다는 것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삶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나서는 삶이 망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이들에게 황제를 숭배하라고 하고, 돈을 빼앗아 가고, 저항하면 심한 매질을 하거나 옥에 가둡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적 종교적 자부심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폐한 삶 속에서 인간다움조차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식민지를 겪어 봐서 그 시절이 어땠는지 압니다. 19세기말 20세기 초(1879~1944)를 사셨던 독립 운동가이자 시인이자 스님이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26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합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1919년 삼일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한국 민중들이 좌절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 아픔을 절절히 느끼는 지식인의 고뇌가 이 시에 담겨져 있습니다. 식민지의 백성이기에 갈고 심을 땅이 없습니다. 땅이 없으니 추수할 것도 없지요. 저녁거리가 없어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거지는 인격도 없고, 생명도 없으니 너 같은 놈을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주인이 말합니다. 식민지 백성이기에 집도 없고 민적도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라며 능욕하는 일본의 순사들 앞에서 조선 민중들은 수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시므온도 이런 모욕과 능욕을 당하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썼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머물러 계셨다는 것은 시므온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성령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견디어 냈음을 나타내 줍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죽기 전에 꼭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되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아기를 보게 되는데 그 순간 자신의 기대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은 이 아기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보았던 환상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그리고 하늘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면서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옵니다. 사자 얼굴에 독수리 날개를 가진 짐승, 곰 같이 생긴 짐승, 세번째는 표범 같이 생겼는데, 얼굴이 네 개에다가 날개도 네 개나 있는 짐승, 넷째 짐승은 뿔을 열 개나 달고 있는데 사납고 무섭기가 이를 데 없고, 쇠로 된 이빨로 무엇이나 으스러트리고 발로 짓밟아 버리는 아주 포악한 짐승이었습니다. 이런 짐승들이 나타난 후에 맨 마지막에 모든 짐승들의 권세를 빼앗고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인자 같은 이가 오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읽은 부분이지요.
앞의 네 짐승은 바벨론 제국, 메대 제국, 페르시아 제국, 마지막으로 알렉산더 왕의 헬라 제국을 뜻합니다. 이러한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는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짐승이 다스리는 것처럼 포악하고 험악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진짜 영원히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 받을 왕국에서는 “인자(人子) 같은 이”즉 사람의 아들, 정말 사람다운 사람,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산동성의 명산인 태산 기슭을 지날 때 일이었습니다. 어떤 부인이 무덤 앞에서 너무나도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수제자였던 자로를 시켜 어떤 이유인지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자로가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부인의 울음소리가 너무나 슬퍼서 괴로운 일을 연이어 당하신 것 같습니다.”부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옛날에 시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 돌아가셨고, 또한 남편도 그렇게 보내고, 이번에는 자식마저 또 죽고 말았습니다”이 이야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공자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이 곳을 떠나지 않으시는지요?”부인이 대답했습니다. “이 곳에는 가혹한 정치는 없으니까요.”(孔子過泰山側, 有婦人哭於墓者而哀. 夫子式而聽之, 使子路問之. 曰:“子之哭也, 壹似重有憂者.”而曰: “然! 昔者吾舅死於虎, 吾夫又死焉. 今吾兒又死焉.”夫子曰: “何爲不去也?”曰: “無苛政.”이하 생략『禮記』「檀弓」)
“호환(虎患)마마”라는 말이 있듯이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나 전염병이 제일 무서웠던 시절도 가혹한 정치보다는 낫다는 얘기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국가가 생긴 이래로 세상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권력 가진 사람이 힘 없는 사람들을 폭력으로 내리 누르는 일들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시므온은 모든 사람들이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형제, 자매, 한 가족처럼 지내는 일들을 늘 꿈꾸었지만 그렇지 못한 세월을 보내 왔던 것입니다. 시므온 뿐 만이 아닙니다. 안나라는 여예언자도 거의 60년의 세월을 과부로 살면서 금식과 기도로 예루살렘의 구원과 이 땅의 평화를 꿈꾸었고 그러던 차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많은 노래들이 등장하는데, 천사들이 부른 노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더 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누가 2:14)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염원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 번도 단절되지 않았던 바램이었습니다. 공자는 정치군사적 통치자를 뜻했던 “군자(君子)”라는 말을 도덕적 감화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군자”로 바꿔 춘추(春秋)시대의 환란을 없애려 했고, 노자는 왕을 도와 책략을 세우는 진정한 조력자는 군대로 천하를 강압하지 않는다고 역설했습니다(爾佐人主者, 不以强兵天下. 『道德經』 30장). 그러나 고대의 문명사회는 전쟁을 통해 얻은 물자와 노예 노동력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쟁과 불평등으로 가득한 세상]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잘살고 힘센 나라는 미국이지요. 바로 미국이 세계 제1, 2차 대전을 통해 오늘날의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초강대국이 됩니다. 남들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국은 그 전쟁 물자를 대주면서 경제가 살아난 것입니다. 1차 대전 막바지에 전쟁에 뛰어든 미국은 전쟁비용 지출로, 수출 전체가 2년 만에 7억 달러에서 190억 달러까지 늘었고, 공업생산량은 40%나 증가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은 23%에 달했던 실업률이 1%로 떨어지고, 워싱턴 근로자의 실질소득이 42%나 늘어났습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는 일본이 성장하고, 베트남 전쟁 때는 한국이 급격한 발전을 했습니다. ‘전체주의’를 내세우는 독일이든,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이든 적어도 ‘주류’에 속하는 대중들이 ‘경제를 살리고 자국의 위세를 높이는’대량학살에 열광했다는 사실은 정말 고민해야 하는 부분입니다.(박노자, “자본가에게 전쟁은 ‘축복’”한겨레 21, 제789호 74-76.)
중동의 보석, 또는 중동의 뉴욕이라고 불리는 두바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원래 두바이는 대부분의 영토가 사막인데, 석유 산업으로 발전해서 지금은 중동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알려져 있지요. 그러나 두바이는 동남아 저임금 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아 이룩한 것입니다. 두바이 220만 인구 중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8분의 1에 불과하며, 인구 60%는 동남아 출신 노동자인데, 이들은 평균 12시간 노동에 하루 5달러, 한 달 약 15만-25만원을 받습니다. 연간 노동재해 사망자 수는 900여명에 이르고, 두바이 외곽에 지어진 ‘노동자 캠프’라는 집단 수용소에선 컨테이너 같은 좁은 방에 8-30명이 몰려서 생활합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수용시설 때문에 자살률도 높아 한해 자살하는 노동자가 80-100명에 이르고, 취업 사기를 당하거나 여권을 빼앗기고 강제 구금되는 일도 흔한데, 노동조합도 불허되고, 국제노동기구의 노동 규정은 무시됩니다(시사 IN, 제117호, 25-26. 2009년).
이런 이야기는 사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비약적 발전은 사실 두바이와 같이 노동자/농민의 피땀의 결과임을 기억해야 하고, 오늘날도 여전히 빌딩 꼭대기 광고판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 있고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대기업의 사장들은 주식배당금으로 몇백억원을 받지만,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해 공부방에서 혼신을 다해 가르치는 사회복지사의 실질소득은 한 달에 100만원 남짓한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이 억울하여 노동자/농민들이 집회라도 하면 경찰들이 물대포를 마구 쏘아 대고, 검찰은 복면을 쓰면 무조건 잡아가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
이렇듯 오늘날에도 2000년 전과 다를 바 없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소리가 들리고, 불평등 또한 여전하기 때문에 평화와 평등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아기 예수의 엄마 마리아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된 구원과 평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수많은 사람을 넘어뜨리면서,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많은 비방과 반대를 무릅쓰면서 옵니다. 세상의 평화와 평등을 가져오는 아기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부모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면서 오는 것입니다.
개인이 되었든, 공동체가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자부하는 교회가 되었든 진정한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넘어질 수도 있고, 또 일으켜 세워 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넘어질 준비를 해야 하고, 우리가 넘어져 있다면 용기를 내어 일어서야 할 것입니다. 구원을 보는 안목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시므온과 안나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준비된 이에게 생기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중(時中)의 몸짓으로 희망을]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댄스 동영상 한편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이 영상 속에서 작은 기쁨과 구원의 희망을 보셨으면 해서입니다. 최근 10여 년 동안 전 세계의 각종 비보이 대회에서 한국팀들이 우승을 휩쓸다시피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팀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갬블러 크루(Gemblerz)입니다. 이들은 2004년 독일에서 열린 대회(Battle of the Year)에서 우승했고, 우승자 자격으로 자동 출전한 2005년에는 3위를 하였고, 2009년 또 우승을 했습니다. 2002년에 창단해서 창단 10년 동안 전 세계를 돌며 30회나 우승한 최고의 팀인데 오늘 동영상은 2005년도에 보여주었던 춤입니다.
남한과 북한을 상징하는 파란 옷과 빨간 옷을 나눠 입고, 개성 넘치는 춤(스타일무브)을 통해 남쪽의 유연성을, 힘이 가득한 동작(파워무브)을 통해 북쪽의 경직성을 표현했고, 그것이 서로 대비되어 대결의 양상을 보이다가 결국 하나가 되는 춤사위를 역동적이고 아름답게 그려냈습니다. 6분 정도 되는 동작 속에 과거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과 분단의 현실을 그려낸 뒤 서로 화합되는 미래를 압축적으로 상징화해서 1만 여명의 세계 젊은이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자 이제 한 번 보시겠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0P2ngCd_bWE)
비보잉은 흔히 뒷골목 애들이나, 학교생활에 적응 못하는 소위 문제아들이나 하는 춤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팽배해 있는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서도 한국 비보이들은 이렇게 잘합니다. 피겨 스케이팅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김연아 선수를 배출하고, 수영의 박태환 선수를 내 놓은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별로 후원이 없는 비보잉의 세계에서 한국 젊은이들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세계 젊은이들의 감각을 익혔다는 것은 세계적 삶의 양식에 한국의 청년들의 감성이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비보잉은 모든 춤의 신체적 가능성을 결합한 것으로 즉흥성, 표현성, 안무의 시공성과 몸의 훈련에 있어서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합니다.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이기 때문에 모든 춤사위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하고, 여럿이 함께 추기 때문에 서로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배려와 협력이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춤입니다.
전 세계 국가대표가 참석하는데 전체 상금이 겨우 3천불도 안되기 때문에 1인당 10만원 정도나 받을까 하는 대회이지만 많은 청년들이 참가합니다. 오로지 춤을 추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기쁨, 참가하여 서로 실력을 겨루는 모든 과정에서 인간애를 만끽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젊음을 불사르는 청년들의 이러한 순수함이야말로 돈에 찌든 세상에 또 하나의 빛입니다. 발칙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아마도 이 청년들과 함께 춤을 추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또한 예수님과 함께 어떻게 멋지게 춤을 추면 좋을 지 생각하는 대림절 되시면 좋겠습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평화의 하나님! 구주 예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세상은 여전히 전쟁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천사들이 “저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라고 노래하였듯이 주님 오시는 소식으로 이 땅에 평화 가득하기를 빕니다. 오래도록 평화를 기다려 온 시므온과 안나처럼 우리 또한 평화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평화의 일꾼이 되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빛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를 알아보는 혜안을 허락하시고, 그래서 우리가 주님에게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우리 안에 평화를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참 평화를 갈구하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삶 터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