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 선장, 첫 승선에서 1등 항해사까지] 당시 수산고는 4개의 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어업과와 수산과, 증식과, 기관과가 그것이었는데 빈병선씨는 어업과를 선택했다. 수산고를 졸업하면 어선 5급 면허를 자동으로 취득하게 된다. 빈 선장은 어선보다 상선을 타기로 결심하고 목포해양전문대에 진학하려 하였으나, 고교 진학에 이어 두 번째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래서 또 부득불 고교 졸업 후 동네 삼촌의 소개를 받아 울산 연안을 운행하던 소형 유조선을 탔다. 이것이 빈 선장의 첫 항해였다. 항해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면허가 있어야 한다. 일종의 운전면허 같은 거다. 그 면허를 해기사 면허라고 한다. 해기사는 선박의 운항, 선박 기관의 운전, 선박 통신 업무 등을 수행할 수 있는 면허를 받은 자로 정의할 수 있다. 해기사 면허에는 항해사 이외에도 기관사, 통신사, 운항사, 소형 선박 조종사가 있다. 항해사 자격의 등급은 1급에서 6급까지 있으며, 승선 경력이나 학력에 따라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다르고 자격의 등급에 따라 선박의 크기나 수행할 수 있는 직책이 다르게 부여된다. 하는 일과 직책에 따라 선박의 최고 책임자인 선장, 1등 항해사, 2등 항해사, 3등 항해사가 있다. 면허 등급에 따라 승선할 수 있는 선박의 크기와 하는 일이 달라지며 시험 과목도 다르다고 한다. 빈 선장처럼 해사 고등학교나 수산 관련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각각 상선 혹은 어선 분야의 항해사 4급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데, 빈 선장은 실습 항해사로서 1년 정도 근무하고 4급 상선 항해사 시험에 응시하여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90년대 초반에 일본 선박 회사에서 근무하였다. 이 선박은 원양 구역에만 종사하였는데, 일본인과 한국인이 함께 근무하는 형태였다.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배운 일본어가 여기에서 요긴하게 쓰였다. 여기서 3등 항해사로 1년 정도 근무했는데, 이 기간에 빈 선장은 배에 대한 전문 지식을 생애 가운데 가장 많이 습득하고 체험했다고 한다. 빈 선장은 일본 소유의 선박 회사를 거쳐 냉동 운반선에 승선하였다. 여기서는 2등 항해사로 근무하였다. 냉동 운반선은 남미의 파나마 등지에 과일이나 냉동 육류 등을 싣고 선주사의 지시에 따라 이동하는 형태였다. 여기서 11개월을 승선하였다. 냉동 운반선은 기존에 빈 선장이 탔던 유조선이나 다른 선박에 비해 스트레스가 거의 없고, 술에 대한 제재도 없었다. 단지 급료가 적다는 것이 흠이었다. 업무의 경중과 수입은 역시 정비례 관계인가 보다. 빈 선장이 네 번째로 이동한 곳은 다시 유조선이었다. 미국 선주사 MOC였는데, 미국을 본거지로 해서 중남미의 콜롬비아나 멕시코 등지에서 원유를 싣고 미국 동부로 순환하는 회사였다. MOC는 최고 급료를 지급하였다. 이 회사는 목포해양대나 한국해양대 졸업 후 승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입사하는 회사였으나, 빈 선장은 이전의 많은 승선 경험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빈 선장은 3등 항해사로 근무를 시작하여 2등 항해사를 거쳐 1등 항해사 자격까지 취득하였다. MOC에서 10년 동안 근무하였는데, 이후 MOC는 영국 국적 OSG로 넘어갔다. 영국 선박 회사가 관리하면서 선원을 교체하고, 기존 직책도 하향 정리하는 구조 조정을 단행하였다. 따라서 선장으로 진급할 무렵이던 빈 선장 입장에서는 허탈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고, ‘여기서는 비전이 없다’고 생각해서 2005년 싱가포르에 관리사를 둔 선박 회사에 취직하였다. 이곳에서 빈 선장은 30만 톤급의 초대형 유조선에서 1등 항해사로 근무하였다. OSG에서 근무한 경험은 자타 공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선원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그런 시선을 받는 빈 선장은 자부심을 느꼈다. 빈 선장은 해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 기간에 직간접으로 얻었고, 이후 선장이 되어서도 이때의 경험은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