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애굽기 34장
출애굽기 34:1-17
하나님은 모세에게 깨어진 처음 돌판과 같은 것으로 다시 만들라고 하신다. 이제는 돌판을 모세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 이는 돌판이 깨어진 책임이 인간 편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부터 모세 언약은 새로운 의미로 다시 주어지는 것이다. 성막이 없는 모세 언약에서 성막이 있는 모세 언약이 된다. 이 말은 본래 하나님 편에서는 성막에 대한 계획이 없었는데 계획이 돌연 변경되어 성막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즉 이제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성막이 이스라엘 속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이 확립되었다는 말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으로 계시되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살 수 있는 원인은, 금송아지의 형상이 있던 그 자리에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6절)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모세가 만든 돌판은 그냥 방치되지 아니하고 법궤라는 상자 안에 두게 된다. 그 안에는 돌판 외에도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가게 된다. 이런 점에서 법궤는 증거궤라고도 불리운다. 즉 하나님을 향해 불순종하며 원망하고 대적했던 증거물들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린 증거들이다.
그 인간의 죄에 대한 증거들 위에 매년 7월 10일 대속죄일에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이 희생의 피를 뿌린다. 이때 피가 뿌려지는 법궤의 뚜껑을 속죄소, 또는 시은좌라고 한다. 속죄소란 죄가 용서되는 자리라는 뜻이고, 시은좌란 은혜가 내려 앉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의 죄가 용서되는 자리라는 의미이다. 인간의 죄의 증거들 위에 피가 뿌리지는 것으로만이 모세 언약이 유지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셨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는 희생의 피에 함께 하는 형식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모세 언약은 희생의 피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피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산다는 그 정신으로 계속 유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이 곧 이스라엘 백성의 사회 정신으로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만 이스라엘이다.
모든 계명과 율례와 법도의 정신은 시은좌, 또는 속죄소에서 나와야 한다. 결코 형식적 제사만이 능사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피 뿌리는 것을 통해 날마다 실감해야 하는 것이다. 동시에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심을 또한 깨달아야 한다(14절).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친히 홀로 싸우실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가나안 땅의 족속을 쫓아내실 것이다(11절).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족속들과 언약을 맺어서는 안된다. 언약을 맺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 제단을 헐고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찍어 내버려야 한다(12,13절). 그들과 언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들의 신을 인정하고 그들의 신들과 타협하는 것이 된다. 이런 행위는 가나안 땅에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희생의 피를 무색하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5:1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러한 자가 되었기에 또한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자로 살게 된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전 6:15).
출애굽기 34:18-28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께서 홀로 친히 싸우신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이다. 애굽에서 시내산에 이르기까지는 전적인 하나님의 공로다. 이스라엘이 한 일이라고는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한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시내산 언약에서 맺어진 모세언약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해야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는 것은 언약을 인간 편에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차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언약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차원이다.
12절에 보면,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시기하고 삐쭉거리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것을 반드시 찾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자기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것에 빠졌다면 참지 못하시고 거기서 반드시 빼내오시고 건지시는 그러한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1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의 족속과 언약을 맺고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십중팔구 그들의 신을 도입하는 것이고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의식이 음란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언약을 맺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 18절 이하의 말씀은 이러한 근거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절기를 지킬 것을 명하신다. 무교절, 칠칠절, 수장절이 그것이다. 무교절이란 유월절을 7일동안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3:12이하에서 안식일에 대한 말씀과 함께 절기들을 말씀하신 것과 비교해 볼 때에 이 본문의 말씀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즉 모든 절기들의 기초는 안식일이다.
21절에서 “너는 엿새동안 일하고 제 칠 일에는 쉴지니 밭 갈 때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라고 하는 말씀으로 절기들을 설명하고 있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고, 또한 그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 그 절기들은 땅의 열매들로 지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열매들은 어디서 왔는가? 다시 말해서 누구로 말미암아 주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기억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절기들을 지키면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정신을 약속의 땅에 확산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궁극적으로 언약이 지향하는 것은 안식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절기는 첫날과 끝날을 안식일로 지키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계속적으로 이런 피의 정신으로 살 때에, 즉 절기마다 “매년 세 번씩 여호와 앞에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24절)고 하셨다. 반대로 절기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때, 곧 언약의 정신으로 살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가차없이 약속의 땅을 이방인들이 넘보도록 하실 것이다. 약속의 땅은 약속의 백성들만 수용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주술적인 어떤 것도 더해져서는 안되기에 하나님의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려서는 안되고, 염소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25,26절).
오늘날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있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다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땅의 유일한 모임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 양의 희생만 인정하고 그분께만 영광이 돌려지는 나라라면 그 나라에 가기 위해서 모여 있는 자들은 바로 그러한 천국의 모습을 부족할지라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자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를 주술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피의 언약 정신에 맞는 자들만 남기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34:27-35
이 언약의 말씀들을 하나님은 돌판에 기록하셨다(28절). 그것으로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이 반역한 증거로 삼아야 하고 또한 모세는 이 언약의 말씀들을 기록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낱낱이 기록해야 한다(27절).
그러면 여기서 모세의 위치는 무엇인가?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백성들의 마음을 동시에 아는 자로 있다. 그러나 33:21,22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것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대표상으로 백성들 앞에 서야 한다. 그것 때문에 당분간 모세의 얼굴은 광채로 비추어져야 한다.
모세 얼굴의 광채로 인해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 했다(30절).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다고 했다. 즉 모세가 수건을 벗는 경우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였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3:13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3-18).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3장에서 율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율법에 대하여 풀리지 않는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해결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보여주신 언약의 의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구약 성경(율법)을 보는 것은 수건으로 자기 눈을 가린 것과 같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의미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 밝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 안에서 모든 성경이 해석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주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요일 2:27). 그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자유함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공개될 때에 수건은 벗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모세가 하나님과 말씀할 때에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수건을 벗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교제가 이루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은 모세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결과로 얼굴에 광채가 나지만 언젠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긍휼을 입은 자는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나타내 주셨던 그 영광의 모습 그대로 주님과 더불어 살게 될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라보아야 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율법으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누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온갖 교회의 새로운 율법을 가지고 교인들을 제재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독생자의 영광으로 나타난 은혜와 진리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러한 영광을 누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요 1:14).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진리만이 참 진리요 그 진리 안에서만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요 8:32). 그 자유는 오직 예수님을 위해서만 살도록 되는 자유이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