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20:29-34)
마태복음 20장 29절에서 23장 46절까지 한 단락을 이룬다.
여기의 주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 아들임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종말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모세율법이 주지 못하는 영생을 주시는 참된 구원자이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지 못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시다.
이처럼 본문은 예수께서 모세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이 단위는 반복적인 평행구조이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a.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20:29-21:17).
b. 열매를 맺지 않은 무화과 나무와 이스라엘(마21:18-22:14)
a’ 시험하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심(마22:15-46)
b’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불순종하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심(마23:1-39)
이 단위의 주제는 예수의 정체성이다.
여리고의 두 소경과(마20:29-34)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호산나가 그 증거이다(마21:1-11).
여리고 소경 사건은 모든 공관복음서에서 언급한다.
그런데 각 복음서에서 기록하는 내용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이다.
예수께서 가나안 첫 성인 여리고에서 행하신 일은 예루살렘 입성의 선취이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이스라엘 정탐꾼을 영접한 여리고 기생 라합의 이미지를 사용한다(수2:1-24).
기생 라합은 여호와만이 천지간에 권세를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두 정탐꾼을 숨겨서 구원을 받았다(수6:16-23).
따라서 여리고 정복과 기생 라합의 구원은 가나안땅 정복의 시작이며 선취이다.
이처럼 여리고에서 두 소경을 치료하신 일은 예루살렘 입성의 선취적인 일이다.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나실 때 큰 무리가 좇았다(마20:29).
그런데 길가에 앉은 소경 둘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함을 듣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거듭하여 외쳤다(마20:30).
성경에서 반복은 강조법이다.
두 소경은 예수를 주이시며 다윗의 자손이라고 반복하여 부르짖어서 구원을 받았다.
소경은 율법 아래에서 여호와의 성전에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주이시며 다윗의 후손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다.
이전에는 성전에 나아가지 못한 두 소경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셔서 구원을 베푸신다.
이처럼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이 주지 못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모세율법 아래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구원을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일 자체가 율법 아래에서는 누릴 수 없는 은혜 위의 은혜이다.
이처럼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셔서 참되고 온전한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다.
여리고 소경 사건은 복음서마다 차이가 있게 기록한다.
여리고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대하여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여리고에 도착하신 후 허다한 무리와 함께 나가실 때라고 기록한다(막10:46).
이러한 내용은 마가복음이 권세가 있는 하나님 아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권세가 있는 전도단으로 훈련하셔서 가는 곳마다 승리하심을 말한다.
그 결과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날로 더해진다.
따라서 마가복음에서는 여리고에서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따르며 소경 바디메오를 고치신다(막10:46).
바디메오는 소경이며 거지이다.
예수께서는 멸시받는 소경 바디메오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료하셔서 구원하신다.
그 결과 바디메오는 예루살렘 수난 현장으로 향하는 다윗 후손의 군병에 합류한다(마10:52).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길에 앉아서 구걸하는 소경을 구원하셨다고 기록한다(눅18:35).
소경은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비참한 처지이다.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를 지른다(눅18:38).
이에 사람들이
“잠잠하라”
고 하나
그는 더욱 크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부르짖는다(눅18:39).
이에 예수께서 그를 가까이 오게 하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하신다.
이러한 말씀이 끝나자 그는 곧 보게 된다(눅18:40-42).
이에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눅18:43).
그후에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삭개오를 구원하시고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신다.
이는 삭개오도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누가복음에서 여리고는 잃은 백성을 되찾는 구원의 장소이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예수께서 두루 다니면서 자기 백성을 해방하심을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나실 때 큰 무리가 따랐다고 기록한다(마20:29).
그런데 길에 앉아 있던 두 소경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소리를 질렀으며 구원을 받는다(마20:30).
그런데 예수와 제자들이 떠나는 모습은 여리고를 심판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이신 하나님과 천국의 서기관들이 여리고를 떠나기 때문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떠남은 종말의 계시가 중단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자들은 천국의 서기관이며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구원을 받은 천국 백성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서기관과 백성들의 호위 가운데서 예루살렘을 향하신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서 부르짖는 두 소경을 만나신다.
두 소경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르짖었다(마20:30).
이처럼 마태복음만 두 소경이 예수를 주라고 부르짖었다고 기록한다.
주라는 호칭은 다윗의 주이신 여호와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이는 예수께서 다윗의 주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말이다.
또 마태가 소경 둘이라고 언급한 것은
둘은 율법에서 확실함을 나타내는 증인 숫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태복음에서 소경은 다른 복음서처럼
비천한 거지거나 구걸하는 처지에 있는 상황이 아니다.
마태복음에서 두 소경은 예수의 긍휼하심을 입은 확실한 증인을 의미한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을 거역하는 자는 심판하시나
자신에게 나아온 자에게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두 소경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거듭하여 부르짖는다(마20:30).
이에 무리가 꾸짖어서
“잠잠하라”
고 하나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러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짖는다(마20:31).
이처럼 소경들은 예수를 주이시며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외침은 두 번에 걸쳐서 이루어진다(마20:30-31).
이에 예수께서는 저희를 불러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신다.
그들은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말한다(마20:32-33).
예수께서는 불쌍히 여기셔서 저희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서 예수를 좇는다(마20:34).
당시에 소경은 유대 사회에서 멸시를 받는 부류이다.
율법 아래에서 신체 불구가 있으면 여호와의 성전에 나아가지 못한다.
이처럼 율법 아래에서 병든 자나 신체 불구가 있는 자는 작고 나중 된 자들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많은 사람이 소경을 꾸짖는다(막10:48).
그러나 예수께서는 소경을 데리고 오라고 명하신다.
무리가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고 하매
그는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간다(막10:49-50).
이에 예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물으시니
소경이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대답한다(막10:51).
예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시니
곧 보게 되어서 예수를 좇는다(막10:52).
이처럼 마가복음에서 소경은 무리의 제지와 방해를 이긴 믿음을 가진 자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부르자
그는 겉옷을 팽개치고 뛰어 일어나서 나아가는 예수의 군병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여리고를 떠나갈 때
따르는 큰 무리와 길에 앉아 있는 두 소경을 언급한다(마20:29-30).
예수를 따르는 큰 무리는 천국 백성이 된 여리고 백성들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 아들로 믿는 백성들이다.
예수께서는 두 소경의 눈을 만지셔서 보게 하신다.
예수의 만지심은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만지심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은혜이다.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께서는 휘장의 장벽을 두고 백성들을 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 때나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 소경의 눈을 손을 대셔서 온전케 하신다.
이는 율법이 주지 못하는 큰 은혜와 자비이다.
이처럼 종말에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다.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께서는 휘장의 장벽을 두시고 백성들을 대하셨으며,
율법 아래에서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교제할 수가 없었으나,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거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성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는 율법 아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율법 아래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온전한 구원이며 은혜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며,
자신에게 나아온 자들과 부르짖는 백성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종말의 구원자이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마태는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에게 나아오라고 권고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주지 못하는 참되고 온전한 구원과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