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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세계관
나라와 종교를 떠나서 대부분의 종교, 사상, 철학이 ‘이 세계는 삼라만상이다’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삼라만상’이라는 말은 이 세계가 만 가지 모양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별 존재의 집합이라는 겁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세상을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바라보면 하나가 없어져도 나머지에 별다른 영향을 안 준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무한 경쟁이라는 개념이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무한 경쟁이 성립하려면 개별 존재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또한 종교에서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고, 좋은 일을 하면 천당에 가거나 다음 생에는 더 나은 존재로 태어난다고 봤습니다. 지옥이나 천당에 간다든지 윤회한다든지 하는 개념 역시 개별 존재라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합니다.
죄를 짓고 벌을 받거나 복을 받을 주체가 있어야 하니까요. 존재 하나하나가 독자성과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어야 종교가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질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근본 알갱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구성하는 근본 알갱이를 ‘원자’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자신의 근본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을 인도에서는 ‘아트만(ātman)’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늙고 병들어 죽지만, 영혼은 영원해서 지옥에도 가고 천당에도 가고 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교든 철학이든 심지어 과학까지도 세계관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개별 존재들의 집합이라는 생각이 모두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표현을 조금씩 달리했을 뿐이지 이것이 세계관의 주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가 살기 위해 하나가 죽어야 할까?
그러나 부처님은 기존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봤을 때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12살 때 농경제에 참석했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 하나가 죽어야 할까?’,
‘둘 다 같이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런 의문이 든 것입니다.
부처님의 고민은 아마도 청소년이었기에 가질 수 있는 의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져서 의문 자체를 가지지 않았을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학문은 대부분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옆 사람보다 운동을 더 잘할 수 있을지,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을지, 돈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을지,
이렇게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의 학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이 세상 만물을 다 창조했고, 그 창조물 중에 하나인 인간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신을 믿고 소원을 빕니다.
그런데 신이 소원을 다 들어준다면, 왜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생기고,
왜 자기 형제를 죽이고 왕이 되어 호의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생길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 신이 있어 죄를 묻는다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지 않고 위대한 왕이라고 칭송합니다.
심지어 ‘한두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한두 푼 훔치면 도둑이 되고, 많은 돈을 훔치면 사업가가 되는 거예요.
부처님은 세상에 이러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아신 겁니다.
부처님은 이런 의문을 당시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던 두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들은 질문에 대답을 못 하고 오히려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답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더 이상 물을 데가 없어서 탐구를 시작한 거예요.
이렇게 답을 찾는 행위가 탐구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향해 구도의 길을 떠난 출발점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존재한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눈을 떠서 세상을 보니, 지금까지 상상으로 알던 세상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개별 존재의 집합이었다면 깨닫고 보니 실제의 세상은 모든 것이 연기되어 있었습니다.
연기(緣起)라는 말은 한자로 말미암을 연(緣) 자와 일어날 기(起) 자를 합한 말입니다. 모든 것이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A로 말미암아 B가 일어난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A와 B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마치 그동안은 구슬이 그냥 바구니에 담긴 것 같았는데, 구슬과 구슬 사이가 다 연결이 되어서 그물처럼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생태 연못을 예로 들어봅시다. 연못 주위에 뱀이 몇 마리 살고 있어요.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고,
개구리는 물속 벌레를 잡아먹고, 벌레는 물속에 있는 플랑크톤을 먹고살아요.
그런데 개구리가 생각해 보니 이 연못에는 먹이가 무한히 많아서 아무리 먹어도 끝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더 이상 번성하지 못하는 게 모두 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뱀만 없으면 자신들이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신한테 저 뱀을 좀 잡아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신이 뱀을 싹 다 없애버렸습니다.
천적이 없어졌으니 개구리에게는 천국이 온 것처럼 마음껏 번식할 수가 있게 된 거예요.
이런 상태가 지속되자 그들의 시간 개념에서는 무한히 발전할 것 같았어요.
처음에 개구리가 100마리였을 때는 생태 연못에 사는 물벌레의 개체수가 개구리한테 먹히는 개체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하지만 개구리의 수가 500마리, 1,000마리, 점점 늘어나면서 새로 생겨나는 물벌레 수보다 개구리한테 먹히는 물벌레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개구리가 볼 때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어느 날 순식간에 굶어 죽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이런 순간은 일순간에 옵니다. 어제까지 문제가 없었는데 오늘 딱 닥치게 되는 거예요.
개구리가 사는 데는 과연 물벌레만 필요할까요? 정말로 뱀은 불필요한 존재일까요?
개구리가 사는 데는 물벌레만 필요한 게 아니라 뱀도 필요한 것입니다.
뱀이 있음으로 해서 개구리의 지속적인 삶이 보장되는 거예요.
하지만 짧은 시간에서만 보면 개구리에게 뱀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그래서 뱀만 제거하면 영원한 번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플랑크톤, 물벌레, 개구리, 뱀이 어떻게 보면 하나하나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생태 연못 전체를 보면 모두가 어우러져서 생명 현상을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이라는 말은 부처님 이전에는 없는 말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과 저것은 개별 존재가 아니고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앞 문장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는 것은 공간적 연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관되어 있고, 어떤 것도 고립적이며 독립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공간 안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고,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공간 개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아(我)’라고 하는 단독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아(我)’가 있다고 주장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나라고 할 것이 없다’ 라는 뜻에서 ‘무아(無我)’를 이야기하신 겁니다.
무아(無我)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단독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뒷 문장인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것은 시간적 연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변합니다. 변하기 때문에 시간 개념이 생기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신을 말할 때 ‘성스럽고, 영원하고, 실체가 있고, 즐거움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영원하다는 것을 한자로 항상할 상(常) 자를 씁니다. 그래서 앞에 없을 무(無)를 붙여서 ‘무상(無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항상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은 연기법이고, 연기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아(無我)와 무상(無常)입니다.
하나는 공간적 개념에서 설명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시간적 개념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둘은 사실 분리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은 공간만 갖고 살 수도 없고, 시간만 갖고 살 수도 없습니다. 공간과 시간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4차원 세계에 대한 이론들을 보면, 시간이 공간으로 변하고, 공간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면 집착할 바가 없다
우리는 살면서 영원하다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생명, 이런 것은 없습니다.
천당에 가면 영원히 복을 누릴 것 같지만 그런 건 없어요.
시간이 좀 길면 영원하다고 상상하는 것일 뿐이지 불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불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지 변하는 줄 알면 집착을 안 하겠죠.
사랑이 불변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랑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고, 결혼할 때와 결혼한 뒤의 마음이 다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항상 같다고 생각해요. 부부가 싸울 때를 보면 ‘당신 그때 나한테 뭐라고 약속했어?’
이런 소리를 많이 합니다. 이런 얘기는 해봐야 싸움밖에 안 돼요.
그때는 그때의 마음이고, 지금은 지금의 마음입니다.
‘지금의 마음이 이러한데 어떡하겠냐?’라는 관점에 서야 합니다.
▪️결합되어 있지 않은 단독자는 없다
그러면 무아(無我)에 대해 과학이 발견해 낸 사실을 가지고 한번 살펴볼까요?
먼저 물질세계를 한번 봅시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의 입자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돌턴의 원자설입니다.
이 말은 원자는 단독자로서 그 안에 어떠한 결합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이 전제에서 화학 변화의 모든 법칙이 성립합니다. 그래서 원자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습니다.
원자는 아주 작아서 지름이 10에 ‑8승 미터예요. 이것을 센티미터로 바꾸면 100억 분의 1센티미터가 됩니다.
그만큼 작아서 이 작은 알갱이인 원자가 단독자라고 오래도록 생각해 온 겁니다.
또 이런 단독자들이 세상에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연구해 보니 이런 원자들이 92개가 있고, 그것을 무게로 배열한 것이 처음 만든 주기율표입니다.
그런데 원자 안에 전자가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핵력의 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간자를 발견했는데, 이것을 소립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립자가 물질의 근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 연구해 보니 쿼크(quark)와 렙톤(lepton)이라는 입자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물질에도 단독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쿼크가 단독자가 아니냐고 하지만 쿼크는 단독으로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결합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는 단독자는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과학이 밝혀낸 사실이에요.
과학이 밝혀낸 것에 기초하면 우주의 생성 원리도 같습니다.
우주가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살펴보면, 물질의 근원과 우주의 생성은 그 원리가 동일합니다.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가 모두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태양이 있고, 그 주위를 지구와 행성들이 돌고 있는데, 그런 태양계가 모여서 은하계가 되고,
은하계 같은 수많은 소우주가 모여서 대우주를 이룹니다.
생명 세계는 어떨까요? 생명 세계에서는 종자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벼 종자, 감자 종자 등 하느님이 종자를 따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과학을 통해 밝혀진 바로는 유전자가 있고, 유전자를 조작하면 종도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종자는 단독자가 아닙니다.
정신세계는 어떨까요? 정신세계의 연관은 물질세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중중첩첩으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정신세계를 연구해서 연기법을 발견하셨지만, 연기법은 이렇게 우리의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생명 세계, 물질세계에도 모두 적용이 됩니다.
과학자들은 자연의 연관을 밝힌 것이고, 부처님은 정신적 연관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기적 관점에서 본 기후 위기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은 엄청난 화근을 초래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발이 손에게 ‘좀 씻어 달라’ 고 요청했어요. 그런데 손이 ‘발은 한 번도 나를 씻어 준 적이 없어’라고 하며
그냥 잘라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손과 발은 모두 똑같이 나의 일부입니다.
만약 일본에서 후쿠시마 방사선에 오염된 물을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하고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일본에서 북태평양 해류를 타고 캘리포니아 해류, 적도 해류로 돌아오면 우리나라 서해에도 들어오고 남해로도 들어옵니다.
오염된 물을 먹은 물고기를 우리가 먹게 됩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오면 몸속 모든 장기로 가는 것처럼 자연도 마찬가지예요.
지구 안에서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어디로 나갈 데가 따로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기초 위에서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지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해결책이 나오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자비심’을 말할 때 그 앞에 뭐가 붙습니까?
동체가 붙어서 ‘동체대비(同體大悲)’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나와 상대가 떨어져서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내 몸의 일부로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연기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해서 불교의 모든 수행 방법이 나오고, 각종 사회 현상에 대한 해법이 나오게 됩니다.
연기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어떤 사회 현상도 논쟁거리가 될 뿐이에요.
존재의 참모습인 실상을 기초로 세상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사회사상입니다.
<법륜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