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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16편 6절-8절: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찌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6절: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자기에게 재어준 구역을 아름다운 기업으로 끊어서 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너의 것이다’ 하고서 주었다는 것이다. 줄로 재어서 주었다는 의미는 ‘이것은 아무개의 것이니 건들지 말아라’ 이런 이미도 들어있고, ‘특별히 너에게 주려고 해놓은 거다’ 라는 의미도 있고, 신앙 면으로 본다면 자기가 정복한 구역이라는 말이고, 자기의 경계이고 자기가 통치할 곳이라는 의미다.
‘아름다운 기업’이라고 했는데, 죽음의 선을 넘어 신령천국을 말한다. 이곳은 최고의 좋은 곳이다. 이곳은 꼴 보기 싫은 것이나 꼴 보기 싫은 사람은 보이지 않고, 죄악적인 것이나 고통이나 슬픔이나 걱정은 따라오지 못하고, 아름답고 의롭고 선한 것, 예수님으로 닮아진 것만 따라오는 곳이니 최고로 좋은 곳이다.
성도가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받는 이 아름다운 기업은 천국에 간 성도라면 누구든지 전부는 자기의 것이다. 그런데 ‘행한 대로 따른다. 뿌린 대로 거둔다. 앞선 자가 있고, 뒷선 자가 있고’ 라고 했으니 이건 실력의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실력만큼 누리게 되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천국에 가면 어디든지 다 다닐 수 있다. ‘이곳은 내 것이니 못 들어온다’ 그런 게 아니라 실력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어디든 다 다닐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자기의 영능의 실력에 따라서 자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사용하지 못할 것이 있게 된다. 내가 실력이 있으면 사용을 할 텐데 실력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사용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선이 그어진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진 것이 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밖에 모른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선의 범위까지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영능의 실력을 말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선을 모르는 거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얼마든지 신령천국의 영능의 실력으로까지 범위를 넓힐 수 있는 거다. 이것이 아름답다 그 말이다.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진리와 아가페 사랑을 가지고 정복을 하는 것마다 다 자기의 기업이라. 그 실력 그대로 가지고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써먹는 거다. 이 땅에서 영능의 실력을 쌓게 되면 신령천국에 들어가서 그 실력대로 천국을 누리는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걸 모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만 알고 있으면 범위가 좁아진다.
이 세상에는 보여지는 물질의 세계가 있고, 그 다음에 일반적인 정신계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영계도 알고 있다. 이 영계란 장차 갈 천국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천국의 질과 똑같은 영능의 실력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영계로서의 신앙 정신계에서 되어지는 거다. 이렇게 보면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이 세상에서 보면 눈에 보이는 것만 아는 머리보다 좀 더 들어가서 일반 정신적인 차원을 보는 머리가 좀 더 고상하다. 그래서 미련한 전쟁은 무기를 가지고 피를 흘리면서 쌍방에 피해를 보면서 쟁취를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면 무기가 아닌 정신적으로 정복을 하는 전쟁도 있다. 이를 테면 책을 써서라든지 언론을 통해서 하는 전쟁이 있다. 무기가 없어도 책을 써서 상대의 정신을 빼앗기만 하면 그 상대를 이길 수가 있는 거다. 이 세상은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 정신계는 세상에 속한 정신계일 뿐이지 영계 신령계는 아니다. 질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범위를 물질계만 알 것이 아니라, 정신계만 알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런 것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신령계 영계까지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움직이는 건데 이 세상에서 물질이나 사람이 움직이는 그 배후에 어떤 정신이 들어서 그렇게 움직이는 것인지를 알아서 그 정신을 붙잡아서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간다면 이게 얼마나 능력자냐?
이 세상에는 물질만 가르치는 선생도 있고, 정신계를 가르치는 선생도 있고, 영계 신령계를 가르치는 선생도 있는데, 영계 신령계를 가르치는 것이 최고의 선생이다. 이 세계를 정복하는 자가 최고의 능력자다. 성경은 이걸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가 영계를 정복할 줄 안다면 정신계는 쉽게 정복할 수 있는 거다.
그러면 정신계를 아는 사람이 영계를 정복할 수 있느냐? 그건 안 된다. 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영계는 하늘의 것으로 이게 최고의 것이고, 정신계는 땅의 것이다. 그래서 영계에 든 사람은 위에서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훤하게 보는 거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뭐냐? ‘예수 믿고 축복 받아 세상에서 잘 살자’ 하는 것은 저 밑이다. 말하자면 저 밑에 있는 지렁이를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수준이다. 이걸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성경을 깨닫는 것을 우습게 여기지 말아라. 네가 세상에 살지만 네 앞에 영원한 것이 순간적으로 흘러가 버린다.
우리가 영계의 영권이 있으면 자기 앞에 흘러가는 모든 물질 활동 행동 사건 속에서 하늘나라 신령계를, 신령성을 정복할 수 있는 거다. 많이 정복을 한 사람일수록 이 사람은 영계 신령계에서는 물론이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신령계의 지도자가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원하신다. 이런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고, 이런 사람을 인도자로 세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노래를 불러라 그 말이다.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진리성도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훈계를, 가르침을 받으며 산다. 그러니까 다윗은 최고의 스승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거다.
이 땅에는 여러 갖가지 선생이 있다. 학교에 가면 국어선생, 영어선생, 체육선생 등이 있다. 사람은 만능이 아니기 때문에 종목적인 선생이 있는 거지만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이니까 모든 면에 최고의 선생이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느 목사가 최고다’ 하면 안 된다. 목사도 성경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존재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존재다.
우리가 최고의 스승을 모시면, 최고의 선생을 모시면 자기가 최고자가 되겠느냐, 최저자가 되겠느냐? 최고자가 된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보면 최고의 선생님을 만나려고 ‘어느 선생이 최고냐? 그 선생이 어느 학교에 있느냐?’ 하면서 찾아다닌다. 물건을 살 때도 ‘누구의 물건이 최고의 물건이냐?’ 하고 찾아다닌다. 병원도 그렇게 찾아다닌다. 성경을 깨닫는 것도 ‘어디서 최고로 가르쳐 주지?’ 하며 찾아야 한다.
나도 젊었을 때 ‘어디서 최고의 것을 가르쳐 주지?’ 하고서 막 찾아다니다가 스승목사님을 만나서 성경을 깨닫기 시작했다. 지금도 내가 알기로 이 스승목사님 이상 없구나. 물론 하나님보다야 못하지만 아직까지 나에게는 최고의 스승이다. 그런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 가르침에서 내가 또 깨달아지니 안양에서도 목사님들을 가르치고 대전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거다. 내 자랑이 아니라 그곳에 대학원 나온 목사님들도 많고, 노회장도 많고, 나보다 나이 많은 분도 많고, 큰 예배당을 가진 목사님도 많고, 박사학위 정도의 학문을 많이 배운 목사님도 많다. 그런데 이 분들이 성경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니 나에게 배우러 오는 게 아니냐?
세상에서는 뭘 배우던 조금만 배우려고 해도 돈이 들어가는데 우리는 최고의 스승이신 주님으로부터 배우는데도 돈도 안 들이고 배운다. 자기만 마음을 기울이고 머리를 쓰면 잘 배울 수가 있다. 세상의 스승은 자기가 아는 것으로 물질의 것, 임시적인 것, 불타질 것을 가르치면서 돈만 많이 받으려고 하고 자기 주가를 올리려고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것, 영원한 것, 영에 속한 것,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기능과 지능을 가르쳐 주더라.
주님으로부터 이런 것을 배우면 하나님을 닮는 거다. 속 성품 인격 정신이 하나님을 닮는 거다. 그래야 신령천국에 올라갈 수가 있고, 그것을 가지고 그곳에서 써먹을 수가 있는 거다. 하늘나라에 가서는 하늘의 것을 가지고 써먹는 거지 세상의 것은 써먹지를 못한다. 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것은 아무리 최고의 것이라고 해도 그 질이 신령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가지고 들어가지를 못한다.
학교에 교과서가 있듯이 믿는 우리의 교과서는 성경이다. 이 성경에서 영적인 것을 깨달아서 세상에 나가서 실습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세상은 우리의 실습장이다. 그러니 얼마나 좋으냐? 자기가 영권 영능의 실력이 있고 많이 깨달으면, 자기만 능력이 있으면, 자기만 많이 알면 이 세상 전부를 써먹을 수 있는 거다. 그래서 다른 교회 교인들은 몰라도 우리교회 교인들은 정말 잘 배우고 잘 자라서 천국의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천국의 영권을 가진 실력자를 보기가 드물다. 거짓적인 목사님들은 많고.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하나님의 훈계는 우리의 가슴에 박히는 거다. 가슴에 박혀진 이 가르침은 밤에도 들을 수가 있다. 모세가 호렙산, 즉 시내산에 올라가서 받은 하나님께서 새겨주신 두 돌판이 있었는데, 이 돌판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걸 말한다. 돌판에 새겨진 것은 비바람에 씻겨 내려가지를 않는다. 그런 것처럼 가슴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밤에도 들을 수가 있다. 낮에는 세상 사람들과 일을 같이 하면서 그 일로 통해서 가르쳐 주시고, 밤에는 들판에 나가서 별을 통해서 또 가르쳐 주시고. 알고 보면 세상은 전부가 교과서다.
밤에 나가서 별을 보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밤에 달이나 별마저 없으면 땅이 어떻게 될까? 길을 찾을 수 없다. 옛날에는 나침반도 없어서 등대도 안 보이는 망망한 바다에서 별을 보고 목적지를 찾아갔다.
노래도 있는데,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하얀 쪽배란 초승달을 의미하는데, 푸른 하늘을 바다로 생각을 한다면 이 초승달이 뭘 보고 길을 찾아갈까? 이 노래에 보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한다. 어릴 때 이 노래를 배웠는데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부르면서 성경을 깨닫는 거다. 참 정말 노래를 잘 지었다.
마지막 시대에는 이 땅에 하나님의 옳은 종들이 서서히 사라진다. 그러니까 영계의 신앙정신 면에서 어두워진다. 어두워지면 거짓 스승이 많아진다. 진리의 스승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이처럼 진리가 어두운 환난의 밤에는 주님이 우리의 신앙양심을 통해서 교훈을 하신다. 옳은 것을 받아서 깨달음을 잘 받으면 신앙양심을 통해서 교훈을 하신다. ‘아무개야, 존재적으로 순서적으로 가치적으로 하나님 다음에 바로 너니까 너와 나 사이에 아무 것도 끼우지 말자’ 라고 하신다. 통하자 그 말이다. 얼마나 훈훈한 느낌이 드느냐?
천국의 기업은 누림의 기업이다. 세상에서 잘 살 목적으로 살게 되면 그 정신은 세상 속화된 것이고 마귀에게 마음이 빼앗긴 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극히 아름다운 그곳을 얼마나 주고 싶었으면 나를 따라다니면서 신앙양심을 통해서 교훈을 하실까? 심지어 내가 자는 밤에도. 자기의 양심을 통해서 말씀을 하신다 그 말이다.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는도다.’ 하나님께서 자기 심장을 통해서 교훈을 하신다 그 말이다.
진리성도 다윗은 환난과 핍박과 박해를 받는데도 진리의 옳은 길을 가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한다. 이방 불신세상은 환난이 오면 모두 자기 육신의 목숨에 신경을 쓰고 육신의 배부를 자리를 마련하느라고 하나님을 피해서 세상 속으로 달아난다. 그러나 진리성도 다윗은 환난이 오니까 하나님 품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의 지도를 받더라. 도대체 죽음 저 너머의 영원 궁극적인 세계가 어떤 세계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까지 간섭을 하시고 교훈을 하시는 것일까?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어디에 모셨다? 내 앞에 모셨다. 그리고 또 ‘내 우편에 계시므로’ 라고 했고, ‘내가 요동치 않겠다’고 했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의 주시요, 인간과 세상만물을 만드신 분이요, 그리고 세상을 섭리 진행하는 분이시요, 역사를 진행시키는 분이시요, 심판자이시다. 그리고 또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키워주시고, 신령천국을 상속으로 주어서 누리게 하는 분이시다. 다윗은 친근성에 있어서 이 하나님을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적으로 첫째로 삼고 살았다 그 말이다.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가르치는 교훈에 있어서 순위적으로 첫째요, 그러니까 이걸 지금으로 말하면 세상공부를 하지만 제일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이다. 제일 먼저 순종을 해야 할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주일날 학교에서 오라고 해도 다윗은 안 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버리고 어디로 도망을 가느냐? 그래, 도망을 가거라. 하나님께서 갈고리로 목덜미를 탁 잡아채서 뱅뱅 돌리다가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지면 어떻게 할 거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이 말씀으로 가르침을 못 받으면 커서도 제 멋대로 사는 거다. 그러면 제 멋대로 산다고 해도 얼마나 살겠느냐? 끽 해봐야 백 년인데, 이 백 년이 얼마나 긴 것 같으냐? 금방 지나간다.
다윗은 소원 목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면에 있어서 둘째가 아니라 첫째다. 말씀을 첫째로 놓고, 또 순종을 첫째로 놓고 살았다. 그래서 다윗 왕이 유명하게 된 거다.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타락된 자기 주장이 먼저 첫째다. 또 잘못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나님보고 도와달라고 한다. 얼마나 잘못됐느냐?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심이여’ 했으니까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 첫째로 모셨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그걸 받는 면에 첫째요, 말씀을 듣고 움직일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하고 나간다. 하나님을 앞에 모신 사람은 그렇다. 그 어떤 인간이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첫째다. 하나님의 말씀이 첫째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첫째다. 이렇게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앞에 모신 거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제 생각대로 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잘못 배우고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내 뒤로 따라오라’고 하며 자기 욕심대로 살며 자기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세상 모든 역사를 하나님께서 진행을 시키시는 건데 인간 자기가 하나님처럼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걸 휘 저어놓으면 자기가 어떻게 수습을 할 거냐?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보호해준다는 의미다. 보호를 해주니 다윗의 마음이 요동치 않는 거다. 아무리 가난하고 어렵고 환난 핍박 속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를 않는다. 마음이 흔들거리면 믿음이 없는 거다.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며, 죄와 죽음과 상관이 없이 계시고, 그 뜻이 변치 않으시고, 사랑도 변치 않으시고, 우리와 계약하고 약속한 것도 변치 않으시고, 소원도 목적도 변함이 없으시다. 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다윗은 세상이 아무리 떠들고 진동을 하고 요동을 해도 그 마음이 절대로 움직이지를 않는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도 어려움에 닥쳤을 때 그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은 왜 그렇게 잘 흔들거리느냐? 이런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 큰 실수를 할 수 있다. 세상바람에 ‘이래볼까. 저래볼까’ 하면서 그만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은 믿을 사람이 못 된다. 이런 사람이 혹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믿을 사람이 못 된다.
사건 환경에서 자기의 시선이 흔들리게 되면 자기의 몸도 흔들리게 된다. 자기의 의지가 약하면 강한 세력이 다가올 때는 흔들리게 된다. 인간 자기는 불완전한 인간인줄 알아야 한다. 유행에 흔들리고, 세상바람에 흔들리고, 사람에게 흔들리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만 마음이 흔들리고 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의 사랑의 제일로 모시지 않으면 흔들려 버린다.
이처럼 자기의 마음이 흔들릴 때 무엇을 붙잡을까? 몸이 움직이고 흔들릴 때는 전봇대나 나무라도 붙잡으면 괜찮겠는데 마음이 흔들릴 때는 뭘 붙잡을까? 나이가 들어서 시집갈만한 처녀가 마음이 잘 흔들린다. 마음이 흔들릴 때 한 총각에게 마음이 접착이 되면 그 마음은 유리방황하지를 않는다. 물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시집을 가기 전에도 주님을 잘 붙들고 있어야지 안 그러면 마음이 막 흔들린다. 그리고 이 마음을 따라서 밖으로 나가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의 경우에 정신과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이 될 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안 그러면 세상바람, 세상파도에 휩쓸려서 떠돌다가 죽고 만다. 항상 여호와 하나님을 제일로 모셔야 한다.
모든 면에서 아무렴 안 믿는 사람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래도 낫다. 더 나아가서 진리의 정신이 영적으로 들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사람은 그 마음이 주님께 딱 정착이 되어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곧게 올라가고 정신이 곧게 올라가야 한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