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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의 금석문 이야기5>
무장사아미타불조상기비 鍪藏寺阿彌陀佛造像記碑
석야 신웅순
무장사 아미타불 조성기 비문 탁본
무장사는 신라 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여 지은 절이다.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묻었다하여 무장사라 했다. 이 절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 무장산에 위치했던 절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서울 동북쪽 20리쯤 암곡촌 북쪽에 무장사가 있었다. 신라 제38대 원성대왕의 돌아가신 아버지 대아간 효양, 즉 추봉된 명덕대왕이 숙부 파진찬을 추모하여 세운 절이다. 그윽한 골짜기는 너무 나 험준하여 마치 깎아 세운 것 같고, 절이 있는 곳은 깊고 어두워서 저절로 마음이 텅 비고 순박 해질 것이니,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었다.…중략… 세속에 전하기를,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묻었기 때문에 무 장사(鍪藏寺)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삼국유사』권 제3 탑상 무장사미타전조
『삼국유사』가 씌어질 무렵(1281-1283,충렬왕 799년)엔 사찰이 있었으나 이후 무슨 이유로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사찰에는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 왕후가 먼저 떠난 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미타전이 있었다.
절 윗쪽에는 아미타를 모신 오래된 전각이 있으니, 곧 소성대왕의 왕비인 계화황후는 대왕이 먼 저 세상을 떠나자 수심에 가득 차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피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하였다. 그러다 왕의 밝고 아름다운 업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서 방에 아미타라 하는 큰 성인이 있어서 지극한 정성으로 귀의하면 구원하여 맞이한다는 말을 듣고 는, ‘이것이 참말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왕후가 입던 여섯 벌의 화려한 옷 을 희사하고 궁중에 있던 재물을 다 내어서 이름난 장인을 불러 미타상 한 구를 만들게 하고 아 울러 신중(神衆)도 만들어 모셨다. 이에 앞서 이 절에는 노승 한 명이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진인이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향해 대중을 위해 설법하는 꿈을 꾸었다. 노승은 이곳이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음 속에 숨기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바위가 험준하고 계곡의 물이 격 하게 흐르는 곳이라 장인들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모두들 좋지 못하다고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터 를 닦을 때에는 평탄한 곳을 얻어 집을 세울 만하여, 완연히 신령스러운 터와도 같았다. 그래서 보는 이들마다 깜짝 놀라며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미타전은 허물어졌고 절만 홀로 남아 있다. -『삼국유사』권 제3 탑상 무장사미타전조 이 전각에는 801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가 있었는데 이 비문의 발견으로 이 곳이 무장사터라는 것이 알려졌다. 지금은 이 무장사터에 삼층 석탑 하나와 비석을 잃어버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다. 거북이 등에 홈을 파고 비신을 얹었던 것으로 비좌에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이수에는 구름 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무장사아미타불조성기비 이수와 귀부 머리는 귀부의 양식이 귀두(龜頭)에서 용두(龍頭)로 변화되어가는 중간 단계의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무장사비가 알려진 것은 이계 홍양호에 의해서였다. 홍양호는 금석학에 조예가 깊어 이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18세기 초 이미 행방불명 상태에 있었던 이 비석은 1760년 경 이계 홍양호에 의하여 그 편석이 발견되어 그 일부나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가 경주부윤으로 있을 때 일을 그의 『이계집』 권16 ‘제무장사비조’에서 무장사비의 비편을 발견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여 고적을 찾아다니다가 ‘신라 무장사에 김생이 글씨를 쓴 비석이 있 었으나 지금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고노의 말을 듣고 마음으로 개연히 여겨 읍지를 살펴보 고 아전을 보내에 찾아보게 하였다.아전이 산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니 조그만 절이 있었는데, 절의 승려가 이렇게 말했다. “이 곳이 무장사 옛터인데 옛날부터 전해오기를 신라 여주가 이곳에 다 병기를 갈무리했다고 합니다만 비는 보이지 않은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아전이 돌아와서 사실 대로 아룀에 내가 듣고 말했다.“이미 무장사의 옛터를 찾았으니 비석은 아마도 수풀 속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다시 가서 찾아보도록 하라” 며칠 뒤에 아전이 돌아와서 말했다. “절 뒤에 콩가는 맷돌이 있었는데 脈理가 평범한 돌과는 달랐으므로 세워 일으키고 그 뒤를 살펴보니 바로 그 절 반이 부러져버린 오래된 비석이었습니다.”내가 듣고 기이하게 여겨서 장인을 보내어 몇 본을 탁본 하여 오게 했더니, 과연 무장사비였다.……뒤에 어느 장서가가 일찍이 무장사비의 전면과 후면이 모두 있는 탁본을 소장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지금 내가 탁본한 것은 전면의 절반뿐이고 후면은 콩을 가느라 마별되어버렸으니 더욱 더 안타깝다 (이종문,한문고전의 실증적 탐색,계명대,2005,261 쪽)
추사도 이 무장사비탁본을 입수하여 옹방강에게 보냈는데 옹방강은 김육진이 쓴 것이 아니라 왕희지의 「난정서」와 회인이 집자한 「왕희지성교서」의 글씨를 그대로 본받은 동방의 훌륭한 비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아들 옹수곤 또한 신라의 비편에서 “왕희지의 좋은 글씨 283자와 반자(半字)를 얻었다”는 글귀를 남길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다. (유홍준의 완당평전,85쪽) 추사 김정희는 깨진 비편 하나라도 있을까 해서 암곡동을 찾았다. 풀섶에서 비편을 발견하고는 기쁜 나머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추사는 깨진 그 비석 옆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겼다.
무장사 아미타불 부기 탁본
이 비의 서품은 당연히 「낭공대사백운서운비」보다도 위에 있다할 것이며, 난정첩에 나오는 ‘숭’자 머리가 점 3개로 씌여진 것이 오직 이 비석에서만 완전하다. 옹방강 선생은 이 비를 고증하 기를 동방 문헌에서 중국이라고 칭하는 것에 이 비만한 것이 없다고 하셨다. 나는 두세 번 다시 쓰다듬어 보았다. 정축년 4월 29일 김정희쓰다.(유홍준의 완당평전,85쪽)
두 번째 찾아낸 비편의 부기
그리고 나서 또 다른 비편 하나를 더 찾았다. 거기에도 추사는 ‘저승의 옹수곤을 일으켜 금석의 인연을 함께하지 못함이 애석하다“라는 글귀를 새겨놓았다. 이 두 비편은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유홍준의 완당 평전 85,6쪽)
월간서예,2016.1,142-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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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