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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의 금강경 핵심강좌 (4회)제3 대승정종분(대승의 바른 가르침)
<사상(四相)을 버리고 살아라>
대승이란 시대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해서 어느 시대 어떤 사람들에게도 다 해당되는 진리를 뜻한다. 모두를 다 저 언덕에 실어 나르는 큰 법문인 것이다.
보살은 이렇게 마음을 써라. 이를테면 온갖 여러 가지의 중생들을 다 제도하되 실은 제도한 것이 없어야 한다. 보살이란 어떠한 경우라도 상이 없어야 한다. 만약 상이 있으면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 반야의 인생이 아니다. 부처의 인생이 아니다. 사람의 참모습이 아니다. 사람의 본래면목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부처란 것도 중생이란 것도 나눌 수 없는데 무슨 제도한다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누가 누구를 제도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제도에 대한 상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보살의 조건은, 사람의 조건은, 사람의 참모습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입장이야말로 가장 크고 바른 가르침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도 다 해당되는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3. 대승정종분(제삼 대승의 근본 뜻)
<사상(四相)을 버리고 살아라>
불고 수보리 제보살마아살 응여시항복기심.
佛告.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소유일체 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
'알에서 태어난 것이나, 태에서 태어난 것이나, 습기에서 태어난 것이나, 변화하여 태어난 것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온갖 중생들을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
여시멸도 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
如是滅度 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열반을 얻은 중생이 아무도 없다.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에게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금강경의 가장 무게가 나가는 제목이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입니다. 제삼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이게 이제 금강경32분 중에서도 제일 무거운 제목이거든요.
아니, 전 경전, 팔만대장경을 통틀어서 그 제목의 무게를 달기로 하면 마, 이 제목이 제일 무겁지 않겠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 ‘대승(大乘)’이니까, ‘가장 위대한 가르침’!
그 중에서도, 그냥 대승만 해도 큽니다. 그 중에서도 정자야 바를 정(正), 또 종자가 으뜸이야!
대승의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고, 바르고 으뜸이 되는 것, 이런 내용이에요. 사실 이 참, 너무 무거운 그런 제목을 만난 게 됩니다.
왜 이와 같이 무거운 제목을 달았는가? 이 32분 해석은 자고로 부처님 이후는 모두가 부처님 말씀을 해석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 이 소명태자(昭明太子; 501년 ~ 531년), 양 무제의 아들 소명태자란 분이 32분을 가지고 금강경을 해석한 거예요. 요 넉자로 한 단락을 해석을 한 겁니다.
이게 꼭꼭은 맞는 게 아니라도 거의 90%는 맞는 제목이에요. 그런데 이 넉자로 한 단락을 해석한다. 이게 해석한 거죠. 결국은. 이것이 천하의 명해석이란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이라고 하는 말이나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이라고 하는 말이나 너무 정확하죠.
짧은 말속에 깊은 뜻을 다 함유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유의를 해야 됩니다. 왜 이와 같이 무거운 낱말을 썼는가? 글을 쓰다보면요 좋은 말이 생각이 나도 ‘아 여기에 이런 말을 쓸까? 뒤에 가서는 어떻게 책임을 지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껴 둘 때가 있습니다. 아껴뒀다가 적절한 장소에서 그 말을 써야 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서두에 벌써 이런 아주 중요한 낱말을 써버렸습니다.
第三 大乘正宗分
제삼 대승정종분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불 고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第三(제삼) 大乘正宗分(대승정종분)
佛이 告須菩提하사대
불 고수보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고하사되
諸菩薩摩訶薩이 應如是降伏其心이니
제보살마하살 응여시항복기심
제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되나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되나니
저 앞에서 금방
應如是住하며 如是降伏其心이니라 唯然世尊하 願樂欲聞하노이다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 유연세존 원요욕문
여시항복(如是降伏), 응여시주(應如是住)하며 응여시항복기심(應如是降伏其心),
여기에 옛날 선사들은 하..별별 이야기를 다 붙였는데 이거 아주 가볍게 봐야됩니다.
이와 같이 머물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된다.
말의 서두예요. 여기서도 똑 같잖아요.
응여시항복기심(應如是降伏其心),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된다, 라고 했으니, 그건 이제 앞으로 이제 설명되어질 내용이란 뜻입니다.
그 이상 더 보면 안 돼요. 옛날 조사스님들은 ‘여시’라고 하는 이 말 속에 팔만대장경의 의미를 다 갖다가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가볍게 그냥 ‘아래와 같이’이런 뜻입니다. 그 내용이 뭔고 하면은
所有一切衆生之類인 若卵生과 若胎生과 若濕生과 若化生과 若有色과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若無色과 若有想과 若無想과 若非有想非無想을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호리니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所有一切衆生之類인
소유일체중생지류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일체 중생의 종류인
若卵生과 若胎生과 若濕生과 若化生과 若有色과 若無色과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란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若有想과 若無想과 若非有想非無想을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
이런 구류중생(九類衆生)이죠. 구류중생들을, 이건 육조스님 해석에 의하면 무슨 무슨 동물이나 다른 그 어떤 생명의 종류를 해석하지 않고,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이 제한안에서 이 구류가 다 존재한다.
맞는 거예요, 사실. 우리 인간이 중심이고 인간 위주로 설명되어져야 됩니다. 이것도 뭐 멀리 가서 찾아올 게 아니라, 바로 인간 속에서도 인간의 다종다양한 그런 신성에서 이걸 찾아야 되지 않겠나, 그건 각자 과제로 남겨 두겠습니다.
아무튼 이 구류중생(九類衆生)들은,
我皆令入無餘涅槃하야 而滅度之호리니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내가 다 무여열반에 들어가게 해서 이멸도지하리라.
멸도(滅度), 멸도(滅度)란 말이 이제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멸(滅)은 열반(涅槃) 또는 소멸(消滅),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도(度)자는 제도(濟度), 이런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가 깨달음도 멸도라고 표현을 하고, 열반, 죽음도 멸도라고 표현을 해요. 불교에서의 죽음은 열반(涅槃)이니까, 열반이라고 표현을 하니까, 그래서 이것을 열반, 죽음, 깨달음, 깨달음도 결국은 번뇌가 다 소멸한 멸(滅)자가 해당되기 때문에 그래서 멸도란 말이 이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 의미가 있음을 이해해야 되고, 여기에서는 무여열반에 들어가게 해서 다 번뇌를 소멸하고 제도하게 하겠다, 멸도하게 하겠다. 이건 이제 결국 깨달음을 이루게 하겠다, 그 말입니다. 하리니,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호대 實無衆生得滅度者니라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 득멸도자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호대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이와 같이 멸도하되, 제도하되, 깨닫게 하되,
實無衆生得滅度者니라
실무중생 득멸도자
실로 어떤 중생도 멸도를 얻은 사람이 없다.
이게 제일 중요한 말입니다. ‘실무중생 득멸도자(實無衆生得滅度者)’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다 내가 제도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사람도 제도를 얻은 사람은 없다.
‘득멸도자 (得滅度者)’제도를 얻은 사람은 없다. 그 어떤 사람도 실은, ‘실(實)’자가 또 중요합니다. ‘ 그 어떤 사람도 제도를 얻은 사람은 없다. ’
이게 말하자면 ‘대승정종(大乘正宗)’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이 뜻 때문에, 이 구절 때문에 사실은 ‘대승정종(大乘正宗)’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 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해놓고 실은, 사실에 있어서는, 그 실상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제도된 사람이 없다. 제도를 얻은 사람이 없다.
그러면 뭐란 말인가?
‘본래 다 제도되어 있다.’‘본래 다 제도되어 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이 뜻입니다. 아~무것도 난 한 게 없다.
그저 ‘모든 중생의 진정한 가치, 기존의 가치, 본래 이미 갖추고 있는 그 가치를 나는 깨우칠 뿐이다’
예를 들어서, 다이아몬드를 돌덩어리인 줄로 알든, 다이아몬드인 줄 알든, 그 다이아몬드의 값은 똑 같습니다. 그 가치는 똑 같은 거예요. 물론 가르쳐 준 건 중요하죠. 가르쳐 준 건 중요합니다. ‘아 이건 돌덩이가 아니고 다이아몬드다!’라고 가르쳐 준 것, 중요하긴 하지만 그 가르쳐 준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다이아몬드라고 가르쳐 준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예요! 가르쳐 준건 다이아몬드의 본래의 그 지니고 있는 가치에다가 비교를 해보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아니야!
다이아몬드라고 하니까 그래도 그 가르쳐 준 것이 상당하지 않겠나, 가르쳐 준 것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이 부처다!’ ‘중생이 본래로 부처다!’라고 하는 이 사실을 가르쳐 준 데 대해서는 별 의미 없어요.
왜냐? ‘본래로 중생이 부처인이라고 하는 그 사실’이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사실을 뭐 가르쳐 줬든 안 가르쳐 줬든, 또 가르쳐 줘도 모르고 있으니...
무수한 소리, 그런 이야기를 우리가 다 듣고 살아옵니다, 지금.
‘본래 부처야!’‘사람이 본래 부처야!’‘불성이 다 있는 존재야!’‘부처와 똑 같은 존재야!’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말도 전부 우리 개개인을 보고, 개개인의 본래 가치를 두고 하는 소리야! 너나 할 것 없이 절 집에 석 달만 들어와서 살면 다 그 정도 말은 할 줄 압니다.
가르쳐 줘도 소용이 없잖아요. 우리 보면 알지, 그렇게 여러 수 천 번 들었지만 소용없잖아요. 가르친다는 건 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실은.
‘본래 부처’라고 하는 이 사실이 너무 위대하니까! 너무 중요하니까!
그래서 ‘대승정종’이야. 불교의 이론 중에서‘본래 부처’라고 하는 이 사실보다 더 위대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더 위대한 가르침은 없어요.
그래서 ‘대승정종’이야!
‘바르고 으뜸가는 가르침’이란 이 내용!
그런데 거기에 무슨 부처님이 상 낼 수가 있어요?
어떤 선지식이 거기에 상낼 수가 있어요?
그 알량하게 뭐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금강경 조금 이야기해 놓고 그것 가지고 상 낼 수가 있어요? 상 못 내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소리가
何以故오 須菩提야 若菩薩이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면 卽非菩薩이니라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 유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비보살
보살이 있다고 하자! 만약에 유아상(有我相), 아상이 있고, 인상(人相)이 있고, 중생상(衆生相)이 있고, 수자상(壽者相)이 있으면 그 사람은 보살이 아니야!
부처님이 그 무수한 중생들을 전부 깨닫게 했는데, 멸도를 시켰는데, 제도를 했는데, 그 제도했다고 하는 사실을, 그 내막을 다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부처님이 아무 한 게 없어.
0.0001%도 나에게 보탬이 된 게 없어. 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에는!
본래불성에는 부처님이 보태준 거 없어! 보탤 수도 없어!
들어갈 틈이 없어! 그러니 거기에 무슨 상을 내겠어요? 아무 상을 낼 수가, 알고 보면 상을 낼 수가 없도록 되어 있어요. 이치가.
그래서 실무중생 득멸도자(實無衆生得滅度者), 우리는 제도해야 된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뭐,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 별별 제도에 대한 말을 하고 있지마는 본래 부처라고 하는 이 사실을 그저 아는 것, 이 사실이지, 그 외에 더도 덜도 아니란 것입니다.
또,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나왔는데, 금강경은 모든 경전이 그렇듯이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 ‘병에 의해서 약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보면 중생에게서 많고 많은 병 중에 무슨 병이 가장 무서운 병인가? 이제 그걸 이제 금강경의 안목으로 보면은 ‘상병(相病)’이 가장 무서운 병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암도 아니고, 무슨 폐병도 아니고, ‘상병’이 가장 무서운 병이다. 금강경에선 중생을 그렇게 진단을 했어요. 그렇게 진단이 나온 겁니다.
내가 금강경의 안목을 가지고 보니까 중생에게는 이 상병이 차~암 무서운 병이야.
그래서 이 병 하나 내가 제도해야 되겠다. 여기 ‘상(相)’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무상, ‘무상(無相)으로 으뜸을 삼는다’,
‘무상(無相)으로 위종(爲宗)한다’고 하는 그 말이 또 가장 금강경을 해석을 잘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뒤에는 법상(法相), 비법상(非法相)이 나옵니다만
금강경에서 사상(四相), 하면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걸 이제 이야길 합니다.
아상(我相), 흔히 우리가 아상, 아상, 그런 얘기를 하죠. 아상 정도는 다 느낍니다. ‘아, 저 사람, 아상이 많아. 아상이 많아.’그걸 이제 현대용어로 ‘자아의식’, 그렇게 해요. ‘자아의식’,‘자아의식’이라.
자아에 대한 그런 관념이 아주 그 좀 진한 사람들이 있죠. 큰 차이는 없습니다마는 좀 더 두드러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다음 인상(人相)은 뭐냐?
사람·인(人), 모양·상(相)자야. 인상(人相), 이 인상은‘나와 남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차별의식’입니다. 나하고 남하고 다르다, 현대 용어로 하면 ‘차별의식’이다 그래요.
자아의식에서 또 한 걸음 다 나아가니까 딴 사람이 있거든. 나 말고 딴 사람이 또 있더라고. 그건 차별의식이야. 나하고 남하고의 차별의식,
그러니까 자아의식,
중생상(衆生相) , 이것은 부처님과 중생, 이건 상대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여기서는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열등의식’.
여기서는 열등의식, ‘아, 중생이 그러면 그렇지.’우리 잘 쓰는 소리죠.
‘아, 중생이 그러면 그렇지 뭐 얼마나 기대해서’, 이게 열등의식이에요. 그 참 많이 가진 사람이나,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나, 아무리 벼슬이 높은 사람이나, 이 열등의식 이거 참 무서운 거예요.
이 대단한 상입니다. 이 열등의식도. 그게 뭐 어떻게 보면은 하심하는 것 같고, 겸손한 것 같지마는 그건 열등의식이에요. 어떻게 보면.
수자상(壽者相), 이건 시간, 생명 아닙니까, 목숨, 이건 ‘한계의식’입니다. ‘한계의식’.
생명입니다, 나이가 몇 살이다, 이거 나이가 몇 살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식이 수자상(壽者相)이란 말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한계의식이야.
예를 들어서 10대면 10대라고 하는데 대한 한계의식을 가지고 있고, 20대면 20대라고 하는 한계의식을 가지고 있고, 30대면 30대라고 하는 한계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나이 많은 사람은 나이 많은 대로 한계의식을 가지고 있고.
신기한 것이, 남자들은 나이가 젊으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좀 이렇게 낮게 생각해요. 어른으로 생각하고 그런데, 여자들은 반대야. 나이 든 사람은 나이 젊은 사람에게 꼼짝 못해. ‘늙은 게, 늙은 게’하면 꼼짝 못해. ‘나이 많은 늙은 게 ’하면.
우리하고, 남자하고 반대야. 남자 ‘저 젊은 놈이..’이렇게 하면 젊은 사람이 꼼짝 못해. 우리 보통 상식선에서 보면. 그 참 이상하죠.
아무튼 그 나름대로 자기의 나이에 따라서 한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상을 없앤다, 라고 하는 이 말, 무상이니까.
보살이 만일 이런 상이 있다면 그건 보살이 아니다, 불자가 아니다, 발심한 사람이 아니다. 이거 보살이란 말 속에는 수행자, 불교 공부하는 사람, 불교를 믿는 사람,
발심한 사람, 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 이런 의미가 보살이란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고 참 인생을 빛나게 근사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 이런 의미도 보살이란 말 속에 들어있습니다. 아주 그 인생을 빛나게, 괜찮게 살아보고자 하는, 그 사람이 보살 아닙니까? 뭐 어떻게 사는 게 괜찮게, 빛나게 사느냐?
뭐 거기엔 여러 가지 길이 있겠습니다마는, 아무튼 보살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려면 이 상이 없어야 된다, 그래요. 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상이 없어야 된다, 그래요.
여기서 이제 경중(輕重)이 있어요.
제일 밑에 수자상, 한계의식, 요게 이제 제일 가볍습니다, 사실은. 제일 가벼워요.
그 다음에 열등의식은 그 다음이야. 열등의식은.
그 다음에 차별의식은 보다 더 깊어.
그 다음에 아상, 이게 제일 마지막으로 끊어질 건데, 더 무거운 상이예요.
이거 한계의식, 이건 뭐 나는 불교 만나서 아상(我相)도 못 없애겠고, 인상(人相)도 못 없애겠고, 열등의식[중생상(衆生相)]도, 요것도 못 없애겠고, 수자상(壽者相), 이것 하나만은 없앨 수 있지 않겠는가?
나이에 대한 그런 어떤 관념, 그걸 없애는 것, 이건 성공하고 가야 되지 않겠나 싶어요. 나이에 대한 관념.
또 특히 절 집안에는 그 승랍(僧臘) 좀 높고 낮은 것, 옛날 보면 큰 방에서 좌차(座次), 좌차가지고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는데. 다른 때야 그냥 마 날아다니고, 많이 봤어요, 우리는. 그게 뭐예요? 그게 나이에 대한, 승랍(僧臘), 나이에 대한 의식이야.
그런데 사실 불교 사상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나이가 어디 인정이 됩니까? 나이가 인정 안 되잖아요. 우리는 수많은 생을 거듭거듭 살아가는데 나이 지금 내보다 많은 사람은 죽어서 나중에 금방 또 내 보다 더 밑에 어린 사람으로 올 거고, 나는 또 나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고,
내가 죽어서 오면 그 사람은 늙은 사람이 되어 있고, 난 또 젊은 사람이 되어 있을 거 아닙니까? 이게 불교 상식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한 생을 딱딱 잘라가지고 나이가 많다, 적다, 중노릇을 일찍했다, 늦게 했다, 자르는 것은, 거기에 사로잡히는 것은, 최소한도 사로잡히는 것은 우리가 뭐 윤리 도덕상 예의상 그런 것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거기에 집착해서 그것을 딱 잘라서 고집하고, 서로 괴로워하고, 서로 상처주고 하는 것은 이건 보통 불교 상식에서도 어긋납니다.
그리고 나이 들었다고 해서 배울 것 포기하고, 자기 어떤 인생의 꿈을 접고 더 이상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 이것도 큰 문제예요. 절대 그거 없어야 돼요. 정말 우리 스님들도 마찬가지고, 스님들이 신도들에게 교육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하나는 정말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또 남에게 교육도 시켜야 되요.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내일을 위해서, 아니면 내생을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발전시키고, 노력해야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열정이 제일 중요해요, 그래서.
사람이 사는데, 내가 살아보니까 건강도 중요하지만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게 열정이야!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기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돼요.
뭐 예를 들어서 이 ‘난’자(字)도 처음 본 것 같으면 하~ 옥편을 찾아서 적어놓고, 단어도 처음 본 단어 같으면 또 찾아서 적어서, 그 금방 잊어버리더라도 그렇게 알고자 하는 그런 노력, 그리고 또 시대가 얼마나 많이 발전했습니까?
그 요즘 참 따라가려니까 너무 힘들지마는 그래도 따라가려고 하는 거야.
그 뭐, 아이폰 같은 것도 사용하는 방법 다 배우고, 컴퓨터도 배우고, 세상의 발전하는 그런 그 발전상을 우리가 활용도 하고 말이야.
세상이 그렇게 많이 발전시켜놨는데, 과학도. 그리고 또 활용도 해야지.
이런 것들이 말하자면 수자상을 없애는 첫 걸음입니다. 수자상을 없애는.
한계의식을, 제발 우리 한계의식 하나만이라도 정복해야 돼요.
그다음에 열등의식도 이것도 이제 ‘하~ 내가 중생인데, 나는 재주가 없는데, 나는 못 배웠는데, 나는 타고나기를 어떻게 타고 났는데...’
부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모두가 불성(佛性)을 가진 불성인간이야.
이걸 나는 천재다, 수재다 이렇게 표현 안 하고, 불교에서는 ‘불재’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부처의 재능, 부처의 재주. 부처의 재주을 다 가진 사람인데 노력만 하면 되게 되어 있어요. 그 열등의식이 있을 필요가 없다구요.
단, 열정이 부족하고 노력을 안 기울여서 그렇지, 못할 것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그게 이제 열등의식이에요. 그런 문제를.
그래서 여기는 사실은 우리 본래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는데, 없는데 또 여기 ‘상은 본래 없다’ 라고 하는 말이 뒤에 또 나와요.
사상(四相) 그거 본래 없는 거야. 본래 없는 것인데 거기에 환영처럼 우리 의식 속에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환영(幻影)과 같이, 그림자 같이 왔다 갔다 할 뿐이야, 이 사상 자체가. 그래서 없앨 수 있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없앨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게 이 사상(四相)이야.
이 세상에 제일 큰 공로가 뭐겠습니까?
중생을 부처로 만든 것, 몽매한 중생을 깨달아서 부처로 만든 것 이보다 더 큰 공로는 없어!
세상에서 뭐 천만 금을 갖다 주더라도 거기에, 그 공로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큰 공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그것도 한 사람에게가 아니고, 무량·무수·무변 중생들을 다 해결해서 그런 공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알고 보면 ‘전혀 내 공로는 거기에 개입될 여지가 없더라’ 하는 것입니다. 전~혀 개입될 여지가 없어,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재능인데, 본래 갖추고 있는 그 보석인데 그것은 ‘너는 보석이다, 너는 다이아몬드다!’ 라고 내가 말해줬을 뿐인데, 말 해준다고 다 믿나? 다 아나? 다 깨닫나?
깨달은 사람도 있고, 못 깨달은 사람도 있는 그런 부처님의 설법을 뭘 그걸 가지고 상낼 까닭이 있느냐 이거야. 상낼 까닭이 없어요.
그래서 상도 본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없다는 사실을 알면은 상 내는 것은 없다. 그래서 이것이 이제 ‘본래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그래서 ‘대승정종(大乘正宗)’이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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