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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 21:28~32
제목: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 기독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고, 행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뉘우치고 순종하며 실행하는 신앙입니다. 이는 참 회개를 하는 믿음입니다.
마21:28.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1.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2.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마21:32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머리와 생각으로만 믿는 믿음 정도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마7: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말로만 믿고 순종함을 실행하지 아니하면 말로만 존재하는 (가상)천국에 들어가고, 말로 믿는 것은 물론이고 마음으로 믿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에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자는 실제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마 21:29의 맏아들은 말로만 그럴 듯하게 약속하고 아버지의 뜻을 전혀 실행하지 않은 자입니다. 말로만 하고 순종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마7:21에 나오는 주님께 ‘주여! 주여!’하며 말만 지껄인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고 그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행함의 원인인 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21:30, 31의 둘째 아들은 뉘우치는 자, 즉 회개하는 자의 대표적 전형입니다. 구원파, 지방교회와 베뢰아 등의 율법폐기론 입장의 이단들은 회개기도(구원파 자백)와 실제 회개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시합니다. 이들에게는 회개기도를 했으면 회개가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예수님은 뉘우치고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회개로 여깁니다. 아래 말씀에서 회개기도와 실제 회개를 구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눅15: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 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
위 말씀은 탕자가 생각과 말로써 회개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 회개기도는 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회개하는 것(아버지께로 돌아옴)으로 이어지고 탕자는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회개)기도한 후에 아래 말씀과 같이 실행(회개)도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눅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
말(회개기도)과 실행(회개)은 구분되지만 연속돼야 합니다. 회개와 회개기도를 구분하지 않으면, 간음을 했어도 회개기도만 하면 간음을 계속해도 회개한 것이 되고 살인을 해도 회개기도만 하면 자수하지 않고도 회개한 것이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을 오열하게 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한 사형수는 회개기도는 올렸는지는 몰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뉘우치고 회개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그 사형수의 회개기도가 진실한 것이었다면 피살자의 엄마(전도연)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 사형수는 마21:32의 세리와 창녀와 같이 뉘우치는 믿음을 갖지 못하고 그와 반대되는 바리새인의 교만한 위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에서 비롯된 참 회개기도는 기도의 멘트로만 끝나지 않고 둘째 아들, 세리와 창녀처럼 뉘우치고 끝내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실천합니다. 구원파, 지방교회와 베뢰아 등의 율법폐기론 입장의 이단들은 회개기도(자백)가 최대한이고요.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는 정통 신앙에서는 회개기도가 최소한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끝내는 뉘우치고 믿는 것을 실천하는 최대치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강조한 것이 아래 말씀입니다.
마21:33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 하였도다 |
뉘우쳐 믿는 것은 참된 실제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마21:32)고 묻는다면 직접적으로는 둘째 아들이고, 넓히면 세리들과 창녀들처럼 겸손하고 진실하게 회개한 자들이며, 현대의 우리에게 적용하면 말뿐인 회개기도로 끝나지 않고 뉘우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참 성도들입니다. 신자들도 믿음이 연약하거나 시험에 들었을 때 실수하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들은 회개기도로 끝나지 않고 실제 회개에까지 나아갑니다. 간음을 진실로 회개한 자는 회개기도를 드린 후 간음을 중단할 것이고, 술 취했던 것을 회개한 자는 회개기도를 드린 후 술을 끊을 것입니다. 그러한 실행이 있기 전까지는 말로만 하는 회개기도만 한 것이지 실제 회개(아버지께로 돌아옴)를 한 것이 아닙니다.
● 혹자는 이 말씀을 듣고 엉엉 울며 절망할 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불효를 했는데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셔서 회개기도밖에 못하고 효도를 실천할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도 참된 회개기도를 드린 후에 진실한 회개의 실행을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 중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을 향한 의무입니다. 5계명을 지키는 자는 6~10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비록 부모님이 돌아가셨을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대신(對神) 의무인 1~4계명의 아래에 있는 대인(對人) 의무의 계명은 얼마든지 행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회개한 성도는 부모님이 남겨 놓으신 형제자매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그것을 넘어서 만나는 이웃에게 사랑과 인자를 실천하며 회개할 수 있습니다. 위선자의 대표 주자가 누구입니까? 말로만 잘 믿는 위선자들입니다. 이러한 위선자들이 아래 말씀에 나옵니다.
마23:2.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
위에서 위선자들이 한 말은 틀리지 않고 오히려 합당한 것이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한 예수님조차도 그들이 말한 것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마23:3). 위선자는 옳은 말은 하지만 행동은 옳지 않고 립 서비스로 끝내는 자들입니다. 이 위선자들이 제1 문단에서 말한 회개기도(말)는 하지만 회개(실천, 행동)는 하지 않는 자들이지요. 위선자들도 겉으로 보기에 옳은 행동을 할 때가 있는데요. 그 때는 쳐다보는 남의 눈이 있을 때뿐입니다(마23:5). 혼자가 되면 그 위선마저도 집어던지고 악한 본색을 드러냅니다. 몰래 카메라가 있다면 그들의 불의한 행위를 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선자들 중에는 세리∙창녀가 없고 랍비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 절대 다수입니다. 이들은 잔치에서 대접받고 랍비라고 칭함을 받는 것에 매우 집요한 자들입니다. 최근 들어서 이단 조직들이 계속 와해되고 있습니다. 베뢰아∙만민중앙∙다락방 등에서 이탈한 부교역자들이 이전에 섬기던 교주를 헐뜯고 이단 조직에서 이탈한 교인들에 대해 소위 ‘이삭 줍기’를 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단이었음을 전혀 회개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교주 밑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힘을 빌려 거만하게 잘난 체하며 경솔하게 행동함)하던 악한 행실을 뉘우치고 회개해도 부족할 판인데, 기존 조직에서 이탈한 교인들을 이삭처럼 주워서 계속 (이단)목사 호칭을 들으려고 하다니요? 랍비라고 호칭되는 것에 중독되고 집착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못지않게 또는 더 가증한 자들입니다. 이단 조직에서 파생한 신흥∙군소 이단자들은 이전에 배웠던 사악한 이단 교리를 그냥 유지합니다. 나무가 이단이니 열매도 이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특한 자들이 들어야 할 경고와 훈계가 아래에 있습니다.
마12:33.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34.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
선한 말은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는 말입니다. 반면에 악한 말은 교만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이단 교주와 그 밑에서 호가호위 하던 자들이 얼마나 교만하였으며 이단 교리로 불쌍한 영혼들을 얼마나 미혹했습니까? 이들에게는 현실적으로 회개할 기회가 희박하게 적거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이 아닌 다른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성령을 받은 자는 아버지의 뜻을 단번에는 아닐지라도 점차적으로 알아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점진적 성화가 가능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해주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
진리의 영을 받은 자들은 연약하고 부족하여 일시적으로 이단 교리에 노출되고 미혹될지라도 끝내는 뉘우치고(회개하고) 진리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성령이 이단을 회피케 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영어 성경들은 가이드(guide) 하신다고 표현했습니다.
NIV) But when he, the Spirit of truth, comes, he will guide you into all truth. KJV) Howbeit when he, the Spirit of truth, is come, he will guide you into all truth: NASB) "But when He, the Spirit of truth, comes, He will guide you into all the truth; 현대인의성경)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
왜 둘째 아들처럼 회개기도를 넘어서 뉘우치고 참된 회개의 실행을 하지 못합니까? 왜 서기관∙바리새인들과 대비되는 세리∙창녀들처럼 뉘우치고 참된 회개의 실천을 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결정적으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가이드(guide)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이 묵상을 읽고 마음이 덜컥 내려앉거나 불편하고 찔림이 있거나 후회가 되고 뉘우침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가이드(guide)를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안심하시고 감사한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을 하나로 합쳐서 회개기도를 하고, 기도 후에 회개의 실천과 실행을 하시면 됩니다. 회개기도(말)에 머물지 않고 실제 회개(돌이킴의 행동)로 나아가며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고 살아가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초신자와 바쁘신 분들은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됩니다. 중급자 이상과 여유가 되시는 분은 아래 주석의 추가 설명을 읽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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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 헨리 주석>,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마태복음 21:28-3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보다 쉽게 교훈하기 위하여 비유로 가르치셨으며, 또한 이와 같이 대적하는 자들을 보다 완벽하게 반증하시기 위하여 종종 비유를 사용하여 깨닫게 하셨는데, 이를 위하여 사람들을 등장시키거나 그들이 알고 있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와 같이 나단 선지자도 비유를 사용하여 다윗을 깨닫게 하였고(삼하 12:1), 또한 드고아의 여인이 그와 같이 하여 다윗을 놀라게 하였다(삼하 14:2). 책망하는 비유가 대적하는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 자신의 입으로 심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의도하시는 바가 바로 이것인데, 첫 번째 말씀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28절)
이 구절에는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보냄을 받은 "두 아들"에 대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유의 목적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은
이것을 알고 인정한 세리나 창기에 의해서까지 창피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Ⅰ. 두 종류의 사람을 나타내는 비유 그 자체. 맏아들(역주:한글개역 성경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음)은 자신이 약속한 것보다 더 낫게 실행한 사람으로 표현되었고, 둘째 아들은 실행한 것보다는 약속한 것이 더 나은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1. 그들은 동일하면서 오직 하나인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아버지가 되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그에게서 은혜를 받았으며 또한 똑같이 그에게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가 모두 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냐?" 그렇다. 그러나 사람들의 성격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2. 그들은 동일한 명령을 받았다. 즉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라고.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를 게으르게 길러서는 안 된다. 젊은이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즐겁고 그러면서도 귀찮은 것은 없다(애 3:27). 하나님께서는 비록 상속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자녀들을 일하러 보내신다. 이 명령은 우리들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우리가 종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종교적인 일은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인데, 이는 믿을 수 있고 유익하며 즐거운 일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황무지에서 일하도록 내쫓김을 당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들의 목초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2) 복음은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부르고 있으며,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얘, 오늘 가서 일하라." "오늘"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 누구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은 게으름을 피우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에게 낮이 주어진 것은 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일찍이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어떤 일을 하기로 작정하였었다면 왜 지금 하지 않는가? 왜 오늘 하지 않았는가?
(3)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권고는 마치 "어린 아이"에게 말하듯이 말씀되어지고 있다(히 12:5). "얘 가서 일하라." 그것은 권위와 애정을 가진 아버지, 즉 자기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는 아버지의 명령이며 또한 그들의 체질을 알고 과도하게 일을 시키지
않으시는 아버지, 즉 "자기를 섬기는 아들"(말 3:17)을 잘 보살피시는 아버지의 명령이다. 만일 우리가 아버지의 포도원에서 일한다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일해야만 한다.
3. 그들의 행위는 매우 차이가 있었다.
(1) 그 아들 중의 하나는 그가 말한 것보다 더 낫게 행동하였으며, 그가 약속한 것보다 더 낫게 실행하였다. 그의 대답은 나빴지만 그의 행동은 좋았다.
[1] 여기에 그가 그의 아버지에게 했던 퉁명스러운 대답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단조롭고 솔직하게 "싫소이다"라고 말하였다. 아버지의 명령에 "싫소이다"라고 말한 것은 실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우리나온 거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아버지의 이러한 명령에 "싫소이다"라고 대답하다니! 굽히지 않으려는 자들은 정녕코 부끄러워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일말의 겸손을 가지고 있었던들 차마 "싫소이다"(렘 2:25)라는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변명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노골적인 거부는 더욱 나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만한 거부가 종종 복음의 부르심을 얻게 할 수도 있다.
첫째,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안락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물 속에 사는
악어와 같이(시 104:26) 세상에 살며 그 속에서 놀려고 한다. 그들은 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둘째, 그들의 마음은 자신들의 들판에 너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직무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직무를 사랑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감각의 즐거움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의 직업 때문에 그들이 세상으로 일하도록 보냄을 받은 그 큰 일들을 행하지 않으려고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온 종일을 빈둥거리며 노는 것이다."
[2] 여기에 다시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마음과 길을 바꾼 행복한 변화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처음에는 사악하고 악의적이며 장래성이 없는 사람이 후에 뉘우치고 고쳐 정신을 차리게 될 때가 많이 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어떤 사람이 잠시 동안 함부로 날뛰며 반항하는 경우가 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고전 6:11). 이러한 것들을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고"있다(딤전 1:16). "그는 후에 뉘우쳤다." 회개는 metanoi,a─즉 때늦은 지혜(an after-wit)이다.
또한 metamelei,a) ─즉 병 치료후의 몸조리(an after-care)이다. 나중이 오히려 더 좋은 회개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그는 회개하였을 때 즉시로 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전에 항거하던 것에 대해 회개한 오직 유일의 증거는 즉시로 순응하고 일하러 나가는 것이다. 바로 그때에 지나간 것은 사함을 받게 되며 모든 것은 잘 되어질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친절하신가를 살펴 보라. 그는 당연히 우리들이 그의 명령을 거부해버린 무례함에 대하여 분을 내셔야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고 있다. 아버지 면전에서 자기는 그 아버지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한 자는 마땅히 문 밖으로 내쫓김을 당하고 또한 상속권을 박탈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기다리시며" 또한 우리가 전에 저지른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회개하여 고치기만 한다면 우리를 호의적으로 영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우리는 이러한 회개를 할 수 있는 계약 아래에 놓여 있다.
(2) 다른 아들은 그가 행한 것보다 더 잘 말했으며, 그가 실천한 것보다는 오히려 더 잘 약속하였다. 그의 대답은 좋았지만, 그의 행동은 나빴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같이 말하였다"(30절). 복음적인 부르심은 비록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며 또한 대등한 목적을 가지고 수행한다. 우리는 모두 동일한 명령과 계약과 격려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어떤 사람에게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가 되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죽음의 향기가 된다. 다음의 사실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다른 아들은 얼마나 명백하게 약속하였는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어르신님"(sir, 역주:개역 성경에는 아버지로 되어 있음)이라는 존칭을 붙이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녀가 그 부모님께 존경하여 말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가겠소이다"라고 순종할 채비가 다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내가 점차적으로 가려고 합니다"가 아니라 "아버지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 말을 믿어도 좋습니다. 나 지금 곧 가겠습니다."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답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또한 그의 말씀의 명령에 대하여 진심에서 우러나오도록 해야만 한다(렘 3:22; 시 28:8 을 보라).
[2] 그는 이렇게 이것을 실천하지 아니했는가?
그는 가지 않았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많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종교적으로 분명한 약속들을 하며 그 당시에는 몇 가지 좋은 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거기에 그냥 머물러 버리고 말며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헛일만 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말한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 경우는 특별히 바리새인에게 해당된다(마 23:3).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많이 사랑을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졌지만 때로는 매우 힘든 것을 행해야만 하며 때로는 가장 소중히 하는 것을 떠나야만 할 때도 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목적 은거의 예상 밖의 것이 될 때가 있다. 새로 돋아나는 싹이나 또는 꽃은 열매가 아니다.
Ⅱ. 이 비유에 대한 평범한 호소.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31절) 그들은 똑같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하나는 무례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릇된 것이었다. 부모들은 때로 그들의 자녀들의 기질에 따라 이러한 다양한 실천이 행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그들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어느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가를 알 수 있는 많은 지식과 은혜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둘 중에서 누가 더 낫고 덜 잘못했는가? 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결정되었다. 첫째 아들이 바로 그 사람이다(역주:개역 성경에는 둘째 아들로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의 행동이 그의 말보다 더 나았으며 그의 나중 결과가 처음 것보다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인간의 상식으로부터 배웠다. 즉 사람이란 자신의 말에 거짓된 자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말에 앞서 실천하는 사람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심판에 대하여 제시하신 규칙에 근거하여 이 사실을 배웠는데(겔 18:21-24), 그것은 곧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난다면," 그는 사함을 받게 될 것이며, 또한"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한다면" 그는 거절당하게 될 것이다. 모든 성경의 취지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 즉 비록 그 뜻을 거역했을 지라도 회개하고 더 나은 행동을 하는 자가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Ⅲ. 특별히 이 사실을 가까이 있는 일에 적용하심(31, 32절). 이 비유의 원래적인 목적은, 메시야를 크게 기대하였고 그의 분량에 충분히 이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세례요한을 업신여기고 또한 그의 사명의 목적들에 대하여 반대하였지만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해 결코 이야기된 것이 없는 세리들과 창기들은 어떻게 그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교훈을 환영하였으며, 그 훈련에 복종하였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즉 이방인은 "종종 불순종하였으며 맏아들과 같이 오랫동안 불순종의 자녀였다"(딛 3:3, 4). 그러나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그들은 믿음에 대해 순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아버지여, 가겠나이다"라고 말하면서 분명히 약속했던 유대인들(출 24:7; 수 24:24)은 가지 않았다. 그들은 입으로 하나님에게 아첨하였다(시 78:36).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에 대해 적용하신 사실에서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그는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로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만일 너희가 단정하여 말할 수 없더라도 추론해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1) 그의 사역의 목적에 의해. "요한의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요한이 그의 사명을 하늘로부터
받았는지의 여부를 알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시험의 법칙, 즉 "그들의 열매, 즉 그들이 교훈의 열매, 그들의 행위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들의 방법(또는 길)을 살펴보아라. 그리하면 그들의 기원과 그들의 경향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이 "의의 도로" 왔다는 사실은 명백하였다. 세례요한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과 의의 일을 할 것을 가르쳤다. 그는 대화에 있어서 엄격과 진지함 그리고 세상을 멸시하고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에서 큰 본을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이 세례에 순종하신 것은 "그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한이 이와 같이 의의 도로 왔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그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그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겠는가?
(2) 그의 사역의 성공에 의해.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그는 가장 나쁜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선을 행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의 표를 가지고 자신의 사도직을 입증하고 있다(고전 9:2). 만일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보내지 않으셨다면 자신의 수고에 대하여 이러한 놀라운 성공의 면류관을 쓰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한 영혼을 회개케 하는데 도구로 사용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세리와 창기들이 그의 설교를 믿었다고 한다면 이는 정녕 하나님의 팔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소득은 사역자들의 최고 기념품이다.
2. 그는 요한의 세례에 대한 그들의 멸시에 대해 어떻게 책망하고 있는가?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요한의 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이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불신앙과 패역을 더욱 악화시켰던 세리들과 창녀들의 신앙과 회개 그리고 순종을 말씀하고 계시다. 그가 마태복음 11장 21절에서 보여 주신 대로 모자란 듯하게 보이는 자가 회개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과 같이 여기에서 모자란 듯하게 보이는 자들이 회개하였다.
(1) 세리들과 창녀들은 이 비유에서 맏아들과 같았는데, 그들에게서는 종교적으로 아무 것도 기대될 수 없었다. 그들은 선한 것에 대해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들을 아는 자들도 그들과 더불어 아무런 선한 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들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사악하였으며, 그들의 대화는 난잡하고 퇴폐 했었다.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왔던
세례요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인도되었다. 누가복음 7장 29절을 보라.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의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휘트비 박사가 생각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세리들을 이방인과 같은 계열에 두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창기나 또는 창기에게서 태어난 자들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요 8:41).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대제사장과 장로들, 그리고 참으로 일반적인 유대국가는 말만 하게 하였던 둘째 아들(역주:개역 성경에는 맏아들)과 같았다. 그들은 특별한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정작 메시야의 왕국이 요한의 세례에 의해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것을 업신여겼고 등을 돌려댔으며, 아니 "그들에 대항하여 발꿈치를 들어올렸던 것이다. 위선자는 악한 죄인들보다도 죄를 깨닫거나 회개하기가 더 어렵다. 사탄은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그것으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
[1] 요한은 탁월한 사람으로서 "의의 도"로 그들에게 왔다는 사실이 그들의 불신앙을 더욱 짙게 하였다. 수단이 좋으면 좋을수록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가치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2] 그들이 세리들과 창기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을 보고도 그 후에 회개하고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불신앙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로 말미암아 거룩한 경쟁 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아니하였다(롬 11:14). 세리들과 창기들은 은혜와 영광을 가지고 달아나 버릴(go away with) 것인가? 그러면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우리보다 더 거룩하고 행복하게 될 것인가? 그들은 동생 야곱의 본을 따라 그가 행하였던 것보다는 다른 조처를 취하려고 했던 에서의 재치와 매력도 가지지 못하였다(창 28:6). 지도자로 자처했던 이 거만한 제사장들은 그것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세리들을 따라가는 것을 업신여기고 말았다. 그들은 거만한 얼굴 때문에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찾지 않으려고 하였다(시 10:4).
@장코뱅 끈기를 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임을 알려 줍니다.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 `그러나'의 뜻인 접속사 '데'(* )는 앞의 문장에 대한 반대 내용(역접)을 연결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알라'(* )와는 달리 앞의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내용(전환)을 전개해갈 경우에 사용된다. 따라서 이 문구는 '한편 다음과 같은 비유에 대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주장과 반대되는 사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계속 확증시킬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라는 말은 마태가 예수의 비유를 소개할 때 혼히 사용하는 표현(17:25;18:21)이다. 본 비유에서 이 말은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역할 뿐만 아니라 비유의 내용을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므로써 이 산헤린의 공회원들로 하여금 비교적 객관적인 대답을 하도록 유도한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 두 아들과 포도원을 가진 그 `사람'은 하나님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아버지'가 세리들과 창기들이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후에는 믿고 따랐던 세례 요한을 상징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전자가 더욱 적절한 해석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아들'이라는 표현을 법적 상속권이 강조된 용어 '휘오스'(* )가 아니라 이 보다 훨씬 부드러운 단어인 '테크논'(* )을 사용함으로써 아들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비유의 이 두 아들들에 대해서 (1) 맏아들은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도 세례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과 그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을, 둘째 아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 나아온 세리와 창기를 상징한다는 견해(Bruce, Calvin), (2) 맏아들은 이미 선민으로 선택받았음을 자랑하는 유대인을. 둘째 아들은 새이스라엘 백성이 되려고 주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하는 주장(Plummer)이 있다. 어찌되었든 본문에서 마태는 이 두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세례 요한과 예수를 거절한 유대지도자들과, 율법을 완전히 실행할 수 없음으로 인해서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으나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서로 상반(相反)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 구약에서는 흔히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 되었는데(사 5:1;렘 12:10), 신약에서는 교회 혹은 세상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든지 간에 그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다. 한편 '오늘 가서 일하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령은 긴박성(緊迫性)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아들들에게 이미 어떠한 개획(schedule)이 있든지간에 이에 상관없이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야 할것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웃 사랑을 통한 복음전파의 사역은 그 일을 맡은 주의 성도들에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부여(附與)되고 있는 긴급명령이다.
=====21:29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순종이 표현되고 있는 이 대답에는 '내가(* ) 틀림없이 가겠다'고 하는 확신과 자발적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맏아들은 부르심이 있자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응답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복종할 생각도 없었고 이에 대해 뉘우칠 마음의 변화도 전혀 없었다. 이 모습은 바로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성전 밖에서는 그 맹세를 이행치 않는 서기관, 바래새인들의 위선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21:30
싫소이다 - 아버지의 면전에서 그 명령을 단호히 거절하는 이 표현은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공공연한 죄를 짓는 것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 아버지의 명령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의 명령은 다른 모든 해야할 일보다 우선 순위에 있는 것이므로 '싫다'고 거절한 태도는 어쨌든 잘못된 것이었다.
뉘우치고 갔으니 - 뉘우친 것에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다. '뉘우치다'라는 말에 사용된 '메타멜로마이'(* )는 마음과 생각과 의지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가리키는 '메타노에오'(* )보다 약한 의미로 감정적인 차원에서의 후회, 뉘우침, 나중에 유감(遺憾)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메타멜로마이', 즉 '뉘우치고'가 꼭 회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도 뉘우쳤으나 스스로 목매어 죽어 버렸다(마 27:3-5). 그러나 본문의 둘째 아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동시에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장소로 가지 않고 '아버지의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포도원으로 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동 전체, 즉 '뉘우치고 간' 바로 그 행동 자체가 올바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에오'가 되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에 의하면 '뉘우침'이란 말에는 '때늦은 지혜와 병 치료 후의 몸조리'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 두 아들은 모두 죄인이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은 거짓과 위선의 죄를 범했으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은 완전히 거절하는 무례를 범하였다. 맏아들은 예의바른 자이지만 정직하지 않은 자이고, 둘째 아들은 정직하지만 고집이 세다. 예수께서는 이 물음을 유대교권주의자들에게 제기하심으로써 그들이 답변을 통해 스스로의 정죄를 선언하게 하셨다.
세리와 창기들이 - 일종의 이스라엘의 천민 계층으로 그들은 완진히 죄인들이요 소외받는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 사회의 쓰레기들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해지던 부류이다. 한편 '세리'라는 말인 '텔로네스'(* )는 '통행세 등을 착복하는 자들'(RSV, tax collector)로 보통 '강도'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로 취급될 정도였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 '앞서가다',
'앞으로 인도하다'의 뜻인 '프로아고'(* )를 '너희 보다 먼저 들어가리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세리와 창기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만 '너희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Bonnard, NIV도 이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말이 유대종교지도자들, 율법주의자들에게도 여전히 소망이 되는 말씀이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즉 먼저 회개하는 자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따라서 나중에 회개하는 자들은 나중에라도(시기가 너무나 늦은 경우가 아니라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도 암시하고 있다.
=====21:32
요한이 의(義)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 두 아들의 비유와 23-27절의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과 연결시키는 구절이다. 요한은 회개한 죄인들이 지금 들어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쳤었다. NIV는 '요한은 의의 길을 너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왔다'고 번역하였으나 '의의 도로 왔다'(John came to you in the way ofrighteousness)고 함은 아마도 (1)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는
의미와 (2) 요한은 의로운 일을 행한 자, 즉 '의인'이었다고 하는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하겠다. 사실 `의'를 뜻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 )는 '실행되는 의'(rightousness that is peacticed),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을 의미한다(Hill, Przybylski). 따라서 요한이 의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요한의 사역과 죽음을 의로운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요한이 증거한 예수의 사역조차도 의로운 것임을 믿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의'는 좁은 의미의 윤리(倫理)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넓게는 예수를 믿고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장코뱅 호크마 주석이 매튜 헨리 주석의 내용을 언급하는 게 조금 신기합니다^^
@노베 네 저도 좀 신기했네요.
@코람데오 스펄전도 매튜 헨리 주석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장코뱅 매튜 헨리, 호크마 주석으로 같이 보니 더 유익하네요. 감사합니다.
좋은 묵상의 내용에 공감하고 은혜를 나눕니다. 첨부된 주석의 내용은 여유를 두고 읽겠습니다.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고 분별을 주는 좋은 묵상입니다.
의롭다 인정받는 것은 말로만 그럴싸하고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순종하는 거라는 걸 짚어 주셨습니다.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 기독교 위선자들이 말로는 옳은 말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이 직접 순종하는 것은 없기에 주님의 질타를 받고, 천국에서 배재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양심의 찔림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순종하고 실천하는 믿음, 회개기도로만 끝나지 않고 회개의 열매를 맺기까지 온전한 믿음을 가지도록 우리들에게도 도전하는 말씀으로 받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가도록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아멘!!
핵심을 잘 짚어 주셨네요. 매우 공감합니다.
좋은 묵상을 읽고 은혜를 받고 통찰력도 얻습니다.
공감합니다.
말뿐인 회개가 아니라 실제 순종으로 회개하는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