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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조선 제17대 왕 효종 (孝宗 1619∼1659)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9 14.02.17 16: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 제17대 왕  효종 (孝宗 1619∼1659(광해군 11∼효종 10))


 

조선 제17대 왕(1649∼59). 휘는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이며,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나 청(淸)나라와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 1645년 소현세자가 먼저 귀국하였으나 2개월 만에 죽자 곧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자 즉위하였다. 즉위한 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北伐)을 위한 준비에 착수, 친청파를 파직시키고 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 등 반청파를 등용시켰다. 그러나 친청파로 파직당한 김자점(金自點) 등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적극적인 준비를 하지 못하고, 다만 일본의 재침이 우려된다는 핑계로 남부지방에서 군비(軍備)를 하게 되었다. 1651년(효종 2) 인조의 후궁 조귀인(趙貴人)의 옥사를 계기로 친청파를 완전히 숙청하고, 이듬해 이완(李浣)·원두표(元斗杓) 등을 등용하여 본격적인 북벌준비에 착수하였다. 군제를 개편하고 영장제도(營將制度)와 속오군(束伍軍)에 보인(保人)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에 내실을 기하고자 하였으며, 성지(城池)의 보수도 서둘렀다. 또한 조선에 표류해 온 H. 하멜 등을 훈련도감에 배치하여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 보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러시아 정벌을 위해 조선의 원군을 요청함으로써 나선정벌(羅禪征伐)에 나서게 되었으며 청나라 세력이 더욱 강해짐에 따라 북벌계획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외침으로 인한 경제질서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김육(金堉)의 건의로 충청도·전라도 연안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유통시키는데 노력하였다. 또한 역법(曆法)을 개량하여 시헌력(時憲曆)을 제작, 사용토록 하였다. 《인조실록》 《국조보감(國朝寶鑑)》 《농가집성(農家集成)》 《내훈(內訓)》 《선조수정실록》 등을 간행하였다. 능은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능서면(陵西面) 영릉(寧陵)이다. 시호는 명의(明義).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볼모생활에서의 차이

 

소현세자는 서양 신부 아담 샬과 사귀면서 천주교를 알았고, 또한 서양의 과학 문명에 눈을 떴다. 아담 샬은 그에 게 천주상과 서양의 역서 및 과학서들을 선물로 주었고, 그 덕택으로 소현세자는 서양의 역법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역법이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는 한편 조선의 천문학이 초보 단계에 있음을 알았다. 소현세자와 마찬가지로 봉림대군 역시 청에서 많은 서양 문물들을 대하고 있었지만 소현세자만큼 깊이 심취하거나 경탄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는 형 소현세자를 적극 보호하고 청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여 본국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청의 대명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이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패 전국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로부터 멸시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이같은 경험들은 반청 사상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하게된 원인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한 것은 반청 감정 때문이었다. 원래 인조의 정치적 기반은 대명 사대주의였다. 반정을 일으 켜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대모화 사상은 병자호란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왕인 자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하는 치욕까지 겪게 했으며 자식들을 볼모로 보내야 했다. 그 때문에 인조의 반청 감정은 그 어떤 실리주의 노선으로도 무마시킬 수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항상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청나라에서는 인조보다도 소현세자를 더 신뢰하였던 것이다. 인조는 이같은 소현세자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현세자의 행동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뒤흔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기만하는 행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독살 의문성

 

이 의문사에 대해 학자 이식은 소현세자 묘지문에 '환궁 이후 계속해서 한증과 열기가 있었는데 의원의 시술이 잘 못되어 끝내 죽음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인조실록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에 집을 지어 단청을 하고 포로된 조선 사람들을 모아 밭을 일구어 곡식을 쌓아놓고 진기 한 물건들은 사들여 세자가 머무는 관소가 시장과 같았다. 임금이 이를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임금이 총애하는 궁 녀 조소용(귀인 조씨)이 예전부터 세자와 세자빈을 미워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금 앞에서 세자빈이 임금을 저주 했다거나 몹쓸 말을 했다는 따위로 헐뜯었다. 세자는 환국한 지 얼마 안돼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지 며칠 만에 죽 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 천으로 죽은 세자의 얼굴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 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의 사람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때 종실인 진원군 이세완이, 그의 아내가 인조의 전비인 인렬왕후의 동생인 관계로 염습에 참 여해 그 광경을 보고 나와서 남에게 말한 것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소현세자는 인조에 의해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추론의 증거는 사건에 대한 사 후 처리와 소현세자의 장례식에서 잘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왕이나 왕자에게 의술을 잘 못 사용하면 의관이 국문을 당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인조는 의관의 추고에 대한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그래서 대사헌 김광현이 인조의 주치의 이형익이 연일 세자에게 침을 놓은 잘못을 따져야 한다고 말하자 인조는 이형익을 옹호하면서 김광현에게 몹시 화를 냈고, 나중에 그가 세자빈 강씨의 조카사위라는 이유로 좌천시켜버린다. 또 소현세자의 장례식도 일반 평민의 장례에 준하는 절차를 밟았을 뿐만 아니라 기일을 단축시켜 초상을 치르게 하 였고, 참관 인원을 일부 종실로 제한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조는 묘지를 홍제동으로 하자는 신하들의 중론을 무시하 고 멀리 고양의 효릉 뒤쪽에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더욱이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지 3개월 후에 갑자기 대신들을 불러들여 자신은 병이 깊으니 새로운 세자를 책봉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첫 아들 석철로 하여금 왕위를 잇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으나 인조 는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세손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왕실의 관례를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이 후 소현세자의 주변 세력과 세자빈 강씨의 친정 오빠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마지막 남은 세자빈마저 후원 별장 에 유폐시켰다가 결국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두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죽게 하고, 나머지 셋째 아들은 귀양지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그의 가족과 주변 세력을 모두 제거해버렸다. 인조의 이같은 일련의 행 동들은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이유

 

봉림대군은 소현세자와 함께 8년여를 심양에 기거했지만, 소현세자가 거기에서 서양 문물을 배우고 실리 외교를 주 창했던 것과는 달리 오히려 대명 사대주의에 더 집착하여 반청 사상을 한껏 고조시킨 인물이었다. 그의 이같은 반청 감정은 인조를 흡족하게 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봉림대군의 반청 감정이 자신의 대명 사대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큰 아들을 죽이고 차남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봉림대군은 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북벌론을 내세우며 국력 강화에 전념했던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다.
김자점의 역모사건

 

김자점, 그는 인조반정의 공신이라는 입지를 바탕으로 한 때 정권을 장악해 권세를 누리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바 있으며, 이 후 김류와 제휴하면서 다시 정계에 나선 인물이었다. 김자점은 사은사로 수차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 궁 조소용과 결탁하여 인조의 의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를 비난하여 인조와 이간을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조소용 이 낳은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 세룡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 관계를 보다 강화시켰다. 그러나 김자점은 자신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여 김상헌, 송시열 등 반청 인사들을 중용 하자 그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당했다. 그는 유배 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역관 이형장을 시켜 새 왕이 구신 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고 한다고 효종을 청에 고발하였다. 그는 그 증거로 조선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문서를 보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군대를 압록강 근처에 배치하고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 등의 외교 능력에 힘입어 이 사건은 무마되었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광양으로 유배된 김자점은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한다. 아들 이익으로 하여금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리 폭 로되어 아들과 함께 죽었으며, 그를 후원하던 인조의 후궁 조귀인도 사약을 받았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모두 축출당했다.
효종의 북벌 강화정책

 

1652년에는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하는 동시에 1655 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에 통합하고 군사도 600여 명에서 1천여 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남한 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한성 외곽의 방비를 보강하였고,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강시키고자 하였으나 재정이 빈약하여 실현하지 못했다. 한편 1654년 3월에는 지방군의 핵심인 속오군의 훈련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조 때 설치되었다가 유명무실화된 영장 제도를 강화하고, 1656년에는 남방 지대 속오군에 정예 인력을 보충시켜 기강을 튼튼히 하였다. 그리고 한양 외곽과 강화도 군력을 증강시켜 수도의 안전을 꾀했다. 효종은 이러한 군비 증강을 바탕으로 두 번에 걸쳐 나선 정벌을 감 행하기도 했다.(나선은 러시아를 가리킨다) 나선은 흑룡강변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흑룡강 우안의 알바진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 집하는 등 불법적인 탈취행위를 하였다. 그 때문에 주변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잦았으며, 나아가서는 청나라 군대와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청은 누차에 걸쳐 나선인들의 국경 진입을 막았지만 그들은 점차 송화강 유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노략질을 일삼 았다. 청나라 정부는 군사를 보내어 영고탑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축출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총포에 번번이 당하곤 하였다. 청은 별 수 없이 조선 조총군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청은 조선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하여 영고탑에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은 심의 끝에 조총군 사 100명과 여타 병력 50명을 파견하여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격퇴시켰다. 이것이 1654 년 4월에 있었던 제1차 나선 정벌이다. 조선은 1658년 6월 청의 요청에 따라 다시 조총부대 200명과 초관 및 여타 병력 60여 명을 파견해 제2차 나선 정벌 에 나섰다. 나선 정벌에 나선 청군과 조선 조총군은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지접에서 적을 만났다. 이 때 나선 군은 10여 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다가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어 감히 그들을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 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 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되었다. 이 두 번의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 후에도 나선 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 기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이런 집념어린 군비 확충 작업 은 번번이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쳐 중단되곤 하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군비 확충에만 주력한 나머지 민생을 곤란하 게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효종의 업적

 

두 번에 걸친 외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 질서 확립을 위해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 근해 지역에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고,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한편, 문화면에서도 역법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태음력과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 을 계산하여 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또 '국조보감'을 재편찬해 치도의 길을 바로잡고, '농가집성' 등의 농 서를 마련해 농업 생산을 늘리려 했다. 또한 흐트러진 윤리를 바로잡기 위하여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 김정국이쓴 '경민편' 등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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