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自意識)이란
자의식(自意識)은 자아의식(自我意識) 혹은 자기의식(自己意識)의 준말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라면 자의식(自意識)이라는 것을 갖기 시작한다. 즉, 자의식, ― 자기 자신이 처한 위치나 자신의 행동, 성격 따위가 형성된다.
이에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남과의 관계, 집단이나 공동체와의 관계, 혹은 이를 초월한 종교적 세계와의 관계, 이런 따위의 모든 외적인 관계 및 타인과 구별되는 자아로서의 자기에 대한 의식을 말한다.
어린아이의 경우, 태어나서 18~24개월 되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할 정도로 자의식이 발달하면 아이는 다른 사람들을 독립적인 인격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하기 시작하고 공감적인 행동을 보인다. 아이는 15개월이 되면, 가족의 기쁨, 슬픔, 고통에 반응하고 동감한다.
어린아이의 첫 번째 공감 대상은 손위 형제이다. 그래서 손위 형제가 울면 어린 아이도 따라 우는 것이다. 어른들이 우는 시늉을 하면 따라서 울려고 한다. 그러다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의 고통, 슬픔에도 공감을 표시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서서히 자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죽음과 삶의 상대적 관계 대해서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이 갖고 있는 의식을 일컬어 자의식(自意識)이라고 한다. 물론 동물도 엷은 자의식은 있다. 그래서 새끼를 보호하고 욕심을 내고, 위험에 처하면 보호본능이 작용한다.
인간은 “의식(意識, Consciousness)”을 가지고 있는 반면, 기계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아가 자기를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意志)하고, 행위하는 다양한 작용을 통일하는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인 주체로서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반성적 의식이며, 유년기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계에는 없다.
그런데 인간은 의식보다 한 단계 위의 ‘자기인식(self-awareness)’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자기를 ― 돌이켜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을 말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자신을 인식 속에서 대상화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수행이 없이는 현실화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이기적인 자의식을 순수한 자의식으로 착각을 해서 매사에 때 묻은 인식을 하게 되므로 스스로 번뇌를 짓고, 더불어 나쁜 업을 짓는 것이다.
• 불교와 자의식
그런데 불교에서 자의식에 대한 개념 정의는 다소 색다르고 주로 부정적 의미에서 정의된다. 불교용어로서 자의식에 해당하는 것을 골라보면, 우선 <금강경>의 4상(相)에서 ‘아상(我相)’이 떠오른다. 아상이란 브라만교에서 주장한 영원불멸의 존재인 ‘아트만(atman)’에 근거한 견해로서 ‘나’ 혹은 ‘자아’라는 생각을 말한다. 아상(我相)에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아(나)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아트만(atman)은 다분히 존재론적 자아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나믜 몸뚱이, 나의 이름, 나의 육신, 나의 학력, 나의 직장, 나의 사회적 위치, 나의 능력 등이 포함된 의미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불교관점에서 볼 때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변화하기 때문에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空)하다고 한다.
인간이 ‘나’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구성요소로서의 아(我)가 색⋅수⋅상⋅행⋅식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연기법으로 임시로 이루어진 가아(假我)의 존재이지 궁극적으로는 실체가 없는 공(空)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오온(五蘊)이란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나’라는 의식이다. 즉, 오온은 아(我)를 구성하는 5가지 구성요소가 아니라, 자아의식(自我意識)을 형성하는 5가지 의식작용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오온이란 5가지 의식작용이 쌓이고 쌓여서 ‘나’라고 하는 의식(에고)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오온’이란 것은 존재가 아니라 5가지 의식작용이 쌓인 의식이다.
다시 말하면, 오온이 바로 ‘나’가 아니고, 오온이 ‘나’라고 하는 의식이란 말이다. 이와 같은 오온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어야 무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죽게 되면 모두가 해체돼버리고 육신도 결국 화장하거나 땅에 묻히고 만다. 그러니 오온도 결코 아(我)일 수가 없다. 이뿐만 아니라 철학적 이념, 종교적 신념, 스스로 세운 진리의 근거 등도 실은 포장된 이기심(利己心)에서 나온 자아의식(自我意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함을 꿰뚫어 보고 아는 수행이 지관(止觀)이다.
불교는 의식의 문제요, 생각의 문제에 귀결된다. 자아(自我)란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요, 생각이 만들어 낸 결과일 뿐 자아란 존재가 아니다. 자아라는 의식일 뿐이다. 만일 ‘자아(自我)’가 존재라면, 만들어진 존재는 반드시 파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견해가 된다. 실제로 ‘자아’는 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자아를 의식으로 본다면 얼마든지 의식은 바꿀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의식을 바꾸어버리면, 해탈하게 된다. 해탈한 그 맑은 의식은, ― 청정한 의식은 영원하다. 이 영원한 의식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요, 불성(佛性)이요, 참 자아의식(=참 나)이다.
• 유식학(唯識學)과 자의식
그리고 이런 자의식을, 심리적 측면에서는 유식학에서 말하는 제7식 말나식(末那識, 산스크리트어 Manas-vijnana)이라 할 수 있다. 이 말나식은 이기적인 자아의식으로서 욕심의 뿌리이다. 즉, ‘나의 것’이란 생각으로서 바로 아소(我所―나의 소유)를 말한다. 좀 더 깊이 말한다면, ‘나(我)’란 생각, ‘자아(自我, atta)’라는 생각이다. 주변의 사물을 볼 때, 이것은 나의 것, 내 몸, 내 물건, 내 남편, 내 명예, ‘나의 의견’, ‘나의 주장’, 이렇게 끊임없이 ‘나의 것’이라는 본능적 잠재의식이 곧 자의식이다.
즉, 제7식 말나식의 작용으로 인해 무아(無我)에 반하는 아상(我相)이 생기고, 아견(我見)이 생기며, 강력한 자의식에서 탐(貪)⋅진(瞋)⋅치(癡) 삼독심이 발생한다. 욕심은 바로 자의식에서 생겨나는 이기적 잠재의식이다. 이것이 아집(我執)에 연결된다.
이러한 자의식에 갇히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無我)를 알 수 없고, 악업을 쌓게 된다. 따라서 구경열반을 얻을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적인 자의식은 무의식에 속하므로 스스로 감지하기가 힘들다.
부처님께서는 존재론적 자의식의 특성을 세 가지로 요약해 말씀하셨다.
첫 번째 나 ― 아(我) ― 이것은 아상(我相)을 의미한다.
두 번째 나의 것 ― 아소(我所) ― 아상의 연장선상인 욕심에서 생기한 것이다.
세 번째 나의 본질 ― 아체(我體) ― 체성을 의미한다. ― 존재론적 의미이다.
여기서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말은 나의 실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헌데 불교에서 말하는 자의식은 나의 본질 아체(我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말은 나의 실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나의 실체’라는 것은 인도 말로는 아트만(atman)이다. ‘나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아체(我體)를 말하는데, 후대 부파불교시대에 개체(個體, 푸드갈라)나 법체(法體), 이런 말은 모두 이 아체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헌데 자아의식에서 자아(自我)란 존재론적인 실체로서의 ‘나’, 불생불멸의 본체인 자아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우리들의 인격적 주체가 되는 나(자아)를 의미한다.
부처님도 이러한 자아는 인정하셨다.
거듭 말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는 외도들이 말하는 실체적 본체론으로서의 아(我, atman)을 부정한 것이다. 오온(五蘊)에서 대상을 아는 것, 대상을 식별하는 것을 식(識, vinnana)이라 한다. 여기서 식별, 확실하게 알아차리는 주격을 부정한다. 없다는 말이다. 다만 알아차리는 방식의 동사적 능력만 인정한다.
‘자등명(自燈明)’ 하는 동사적 능력은 인정하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자등명(自燈明)하고 법등명(法燈明)하라고 하신 것이다.
• 공(空)과 자의식
자아-오온(五蘊)이란 의식의 덩어리, 환상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의식의 덩어리, 환상의 덩어리에 불과한 의식은 허망한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온을 ‘나’라고 믿고, 온 인생을 그곳에 다 쏟아 넣는다. 이는 잘못된 자아의식, 이기적인 자아의식이며, 탐욕, 분노, 고집 그리고 자기중심적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고정관념 또는 아상(我相=atta)이라 한다. 따라서 아상(我相)을 가진 사람에게선 실체론적 자아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다.
불교는 의식의 문제요, 생각의 문제에 귀결된다. 자아(自我)란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요, 생각이 만들어 낸 결과일 뿐, 「자아란 존재가 아니다. 자아란 의식일 뿐이다.」
<반야심경>에서 중점을 둔 것이 공(空)인데, 이는 바로 부파불교시대 대두된 개체(個體)⋅법체(法體)라는 것을 부정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탐⋅진⋅치라는 번뇌도 자아라고 하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자의식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아라고 하는 자의식이 해체되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도 소멸된다. 부처님도 말씀하셨다. 땔감이 다 타고 나면 꺼져버리는 것과 같다. 그 땔감은 결국 자의식이다.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해체돼 버리면,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자의식이란 아체(我體)라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이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자의식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문제이지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다.
무정물(無情物)은 자의식이 없다. 자의식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의식이 있다. 때문에 상처받고, 화나는 것이다. 우리가 자의식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하기 어려운 것이다. 부부싸움이 왜 생기느냐, 자의식 때문이다. 서로가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자의식을 해체하는 것이 해탈로 가는 길이다. 인간의 근본의식(根本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6세까지 유년기에 외부에서 입력된 정보에 의해 형성된다. 이 근본의식이 발전해서 자의식이 되지만 결국 자의식은 이와 같이 연기적으로 형성된 가아(假我)에 지나지 않는다.
• 자의식의 극복
그리고 자의식이 해체된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식이 지워지고, 새로운 의식이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연기에 의해 새로운 가아(假我)가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굳이 윤회의 주체를 찾는다고 하면 자의식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자의식이 해체된 상태를 말한다.
불교는 괴로움의 소멸 주체를 ‘나(의식)’로 본다. 존재의 근원을 의식(意識)이라고 보는 것은 나에 의해 인식되는 대로 내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수준을 높임으로써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자아를 만들어 그것에 집착하는 것도 우리 마음이고, 동시에 집착을 끊는 것도 바로 우리 마음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나'조차도 인식되어진 것[자아의식(自我意識)]이지 존재가 아님을 인식하는 수준까지 높임으로써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집착을 끊어서 마음이 고요한 물처럼 안정된 것이 바로 진여(眞如)의 마음이다. 결국 생멸의 마음이 자의식이
지배하는 마음이라면, 진여의 마음은 자의식을 극복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경>에는 사상(四相)을 떨치면 무아(無我)를 안다고 했다. 즉, 그릇된 자아의식에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바로 무아(無我)를 인식하는 불안(佛眼)을 성취함으로써 자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의 정체성을 자의식을 극복한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이다. 무아를 인식하는 불안(佛眼)을 성취한다는 말은 공관(空觀)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의식을 극복한 무아라는 것이 곧 필경공(畢竟空)을 말한다. 그리하여 공관을 확립함으로써 확실한 불안(佛眼)을 얻게 돼 해탈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