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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고는 울진(蔚珍) 사람으로 조선 중기에 역학(易學)·참위(讖緯)·감여(堪輿)·천문(天文)·지리(地理) · 관상(觀相)·복서(卜筮길흉따위을 판단하는점괘)에는 조선 제일이라고 알려져 있는 그는,명종때 조정에 천거되어 사직서(社稷署) 참봉(參奉)에 제수되었고 말년에 천문학 교수(종6품)을 역임한. 성리학자였습니다.그런 그가 젊어서는 .향시(鄕試)에는 계속 급제했으나 대과 급제는 실패했다고합니다.그러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남의 길흉인 점은 잘 치면서 자기가 급제하는 것은 왜 모르느냐고 비꼬았다고 하는데, 이에 남사고는 “사사로운 뜻이 들어가면 점괘가 성립도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성리학자인 남사고는 울진 수곡리에서 이조 좌랑 (吏曹佐郞: 정6품 전랑) 남희백(南希伯)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는 유학(儒學)에 심취, 중년에는 역학, 천문, 지리 등에 통달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조선제일의 된 것은 남사고가 젊었을 때, 그가 큰 뜻을 품고 책 보따리를 들고 부모의 곁을 떠나서 불영사(佛影寺)로 공부하러 가는데, 그때 길에서 무거운 짐을 진 스님이 나타나, 자기 짐을 좀 지고 가자고 하드란 겁니다.
"울진에 있는 불영사"
그러나 남사고가 불평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스님의 무거운 짐을 지고 절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과 같이 지내게 되었는 데,하루는 함께 부용성(芙蓉城)으로 유람을 갔습니다. 그런데, 큰 소나무 아래에서 스님이 바둑을 두자고 해 바위 위에다 바둑판을 그려놓고 바둑을 두었는 데...? 갑자기 스님이 큰소리를 지르드니 없어지는 거였습니다. 그러고 난후 얼마 있으니, 스님은 코부터 차차 나타나기 시작하드니 완전히 몸체가 되어 그리고는 남사고 앞에 앉아 있는 거였습니다.
그래도 남사고가 놀라지 않고 태연하자, 스님은 “무거운 짐을 불평 없이 져다 주고, 사람이 사라졌다가 나와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가르칠 만하다.”고 말하고, 자신이 숨겨온 비술(秘術)들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서 2권을 주면서... 스님은 말했습니다. “자네 골격이 다른 사람 보다 더 비범하니 열심히 하면 신선이 될수도 있을 것 같으니 더 힘써 정진하고 공부하라.”고 말하면서 더 자세히 가르쳐줘서 남사고는 그 스님으로 부터 모든 신통 술(術)을 다 전수 받을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남사고가 조정에 있을 때, 당시(중종 초기) 나라의 일이 엉망이라...? 그래서 언제쯤 안정되겠느냐고 물으니, 남사고는 “동쪽에 태산(泰山)을 봉(封)한 뒤에 안정된다.”라고 말했는데,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문정왕후가 사망해 서울 동부에 봉분(封墳)을 만들어 ‘태릉(泰陵)’이라 이름하고, 중종이 직접 정치를 맡으니... 나라가 안정되어가는 것을 본, 대신들이 남사고의 예언이 이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는 모두가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런 남사고가 하루는 영동 지역을 지나다가 갑자기 하늘을 우러르고 보드니 깜짝 놀라면서 말에서 떨어지면서 말하기를, “오늘 조선을 해칠 자가 태어났다.”라고 말했다고 하드란 겁니다. 그래서 후일 임진왜란을 일어킨,일본 평수길의 생년월일을 맞추어보니 그날 출생했다는 겁니다. 또 동쪽을 향해 주문을 외우면서, “살기(殺氣)가 매우 성하니 곧 왜구가 몰려올 것이다. 하드니, 나는 그것을 못 보지만 모두 조심하라.”고 말했다는데, 그의 말대로 그는 죽어서 임진왜란을 보지 못했으나 그의 예언대로 임진왜란은 일어났고 또 기묘사화도 예언대로 일으나서 조광조는 죽었다고,합니다.
이런 쪽집게 점술사이기도 한 남사고가 하루는 달빛을 받으며 산길을 걷는데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구룡쟁주(九龍爭珠)의 명당(明堂) 형국이 눈에 들어와서 천하의 명당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부친의 묘소를 그 자리에 당장 이장하기로 맘먹고 밤새 옮겨와 이장을 마치고 나니 날이 훤히 밝아졌는데 그는. 명당자리를 볼 때마다 계속 부친의 묘를 이장 해왔었는데 이 이장이 열 번째 이장이였다고 합니다..
"구천십장(九遷十葬)의 뜻"
이른바 '구천십장(九遷十葬)'을 한 것입니다. 이장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면서 안개가 걷히고 해서 뒤돌아보니, 새로 쓴 묘 자리가 드러나는데 자세히 보니 '구룡쟁주(九龍爭珠)'의 형국이 아니라 '구사쟁와(九蛇爭蛙)'의 형국이었다. 즉 요말은? 아홉 마리 뱀이 개구리를 놓고 다투는 형국이라? 명당이라 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말을 돌리려는 순간 타고 온 말이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낙상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사고는 구천십장을 하고도 상복도 벗지 못한 채 상복을 입은채 ,죽었다하여 "구천십장한 남사고도 복중절사(服中絶死)하였다"는 말이 생겨 났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