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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백수 4권
제1장 미끼
영세오천의 최강자들이 모여 무성을 세우고, 그 무성 무인들이 세운 대야벌은 시작부터 최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한 무력과 권력은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떨어뜨려 놓아도 언젠가는 하나로 합쳐진다는 누군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대야벌과 힘을 합친 곳은 권력의 최정점에 선 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황실이었다.
진나라 삼십일 대 왕인 영정은 열세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권력을 쥐지 못했다. 그때 그가 눈을 돌린 곳이 바로 대야벌이다.
대야벌과 손을 잡은 그는 황실의 권력을 쥐고 흔들던 태후의 측근을 제거하면서 친정을 시작하였고, 결국엔 대륙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운다.
그 영정이 바로 진시황이다.
대륙 최초의 제국을 세운 일등공신이었지만 대무천자 패를 비롯한 대야벌 무인들은 모든 공을 황제에게 돌리고 여양 산맥으로 돌아갔다.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대야벌 무인들의 행동에 감동한 시황제는 천상천 옆에 위치한 커다란 호수에 진호라는 이름을 내린 것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였고, 신하를 상주시켜 대야벌의 어려움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제위기간 동안 다섯 번이나 찾아올 정도로 대야벌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황실과 대야벌의 동맹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시황제가 서거하고 새롭게 등극한 황제는 대야벌을 껄끄럽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양측은 소원해졌다.
하지만 대야벌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애초에 황실에 크게 바란 것도 없었기에 그들의 냉대에도 섭섭해하지 않았다. 대신 제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황실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는 걸로 그 빚을 갚았다.
두 번째로 대야벌에 손을 뻗친 사람은 한 고조 유방이다. 이번에도 역시 대야벌은 진나라를 세울 때와 다르지 않았다. 유방을 도와 한 제국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칩거를 택했고, 한 고조 유방은 시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호수의 이름을 지어주고 신하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황궐 탄생의 시작이었다.
황실에서 파견나온 관리들은 대야벌의 어려움을 황실에 전하는 역할과 동시에 감시하는 임무도 함께 수행했던 것이다. 대야벌의 힘이 워낙 강하여 황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황실 관리들이 늘어나고 대야벌 소속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친목과 견제의 역할을 하는 황궐이 됐다.
대야벌에 대한 황실의 견제에서 비롯된 황궐의 창설은 대야벌에 속하지 않았던 무인들을 자극하였고, 당나라 말기에는 정사를 대표하는 무인 집단이 대거 대야벌로 들어와 무궐을 창설했다.
그 무궐이 기폭제였다.
황실과 정사마를 대표하던 무인들마저 대야벌로 들어가자 너도나도 대야벌로 향했다. 묵야련, 철무련, 구중련, 금황련, 풍운련, 군마련, 녹사련, 사자림, 생사림, 만마림 등 다수의 단체가 자생적으로 생겨나면서 대야벌은 점점 세를 확장해 갔다. 그렇게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대야벌은 외부에서는 결코 깨트릴 수 없는 철옹성으로 변했다.
단 한 번의 정복 전쟁도 없이 무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특이한 단체. 그곳이 바로 대야벌이다.
“ 우리 대야벌은 지금껏 욕심을 부려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네, 도도히 흐르는 황하처럼 우린 천오백 년 동안 이 자리만 지켰네.”
나직한 목소리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만인을 압도하는 위업이 담겨 있었다. 찻잔을 든 채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사람은 천하제일 세가인 범천담대세가의 가주이자 대야벌의 벌주 천우 담대만승이었다.
담대만승은 다시 입을 열었다.
“ 나 또한 대야벌의 영역은 여양산맥으로 제한한다는 선대의 율법을 어길 생각은 없네.”
“ 과유불급입니다. 벌주님.”
담대만승 건너편에 앉아 있던 노인이 덤덤히 말을 받았다.
허옇게 샌 머리가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을 반쯤 덮고 있는 그는 천상천의 군사이자 담대만승의 말벗인 뇌천 만우량이었다.
“ 과하면 넘친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벌주님. 만일 대야벌ㄹ에서 상계까지 장악하게 되면 황실과 척을 지게 됩니다. 그 상황만은 피해야 합니다.”
“ 시기가 이르단 말이군.”
“ 명 제국은 현재 욱일승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반격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 그들의 반격은 이미 시작됐네, 뇌천.”
“ 시작됐다 하심은..”
“ 전대 묵사를 기억하는가?”
“ 주선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렇네.”
“ 그는 이십 삼년 전에 죽었습니다.” 을 하지 않았겠지.”
“ 하지만 성이 주씨지.”
“ 제가 알기론 황실 종친 중 주선엽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 지금까지는 없었지.”
“ 설마 조만간 황실 종친으로 주선엽이란 이름이 등재될 거란 말입니까?”
만우량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이십 삼년이 지났고, 주선엽이란 이름은 이곳 대야벌에서조차도 잊혀졌다. 그런 그의 이름을 이곳 대야벌도 아니고 황실에서 되살려 내 종친으로 등재시킨다는 말은 곧 황실 종친의 죽음에 대한 죄를 묻겠다는 뜻이다.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황실의 목표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네. 조사관 또한 대야벌로 들어와 있고.”
“ 누가 들어왔단 말입니까?”
“ 잠룡의 신분으로 들어와 있네.”
“ 설마 구림세가의 이지약이란 말입니까?”
“ 맞네. 바로 그 아이네.”
“ 으음!”
급기야 만우량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 더불어 황실에서 노리는 곳은 대야벌이 아니라 우리 범천담대세가네.”
“ 그렇군요.”
만우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에서 대야벌이 아닌 벌주의 가문을 노리는 이유는 벌주를 선출하는 방식 때문이다.
대야벌의 벌주 선출은 추천과 투표로 이루어진다.
삼궐칠련십림 수뇌들로 구성된 백인위원회는 벌주 후보자를 추천하고, 그 후보자들을 놓고 투표를 하여 칠십 명 이상의 표를 얻는 후보가 벌주에 올라 십 년 동안 대야벌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즉 대야벌의 주인이 되고 싶으면 대야벌이 아니라 벌주를 배출한 가문이나 단체를 몰락시키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황실에서 범천담대세가를 노리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테다.
“ 그럼 상궐 창설에 대한 것도 그 때문입니까?”
“ 난 두 가지를 다 노렸네. 황실을 압박하는 건 물론이고 대야벌의 내실도 도모할 참이네.”
“ 황실에서 협상을 원할 거라고 보십니까?”
“ 상궐 창설만으로는 협상을 이끌어내기 힘들다는 건 자네도 알지 않는가.”
“ 벌내쟁투를 묵인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천마삼경으로 인해 벌어진 벌내쟁투.
사실 이번 벌내쟁투는 임기가 오 년밖에 남지 않은 벌주의 입장에서는 실책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마삼경을 얻은 걸로 알려진 유명계는 만오천 명의 부하를 거느린 단체의 수장이 아닌가. 그 정도 위치에 있으면 설사 천마삼경보다 더한 마공이라도 해도 가질 자격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벌주가 먼저 나서서 조율을 했더라면 벌내쟁투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벌주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 그렇네. 뇌천. 벌내쟁투는 시작에 불과하네. 이번 벌내쟁투를 시작으로 강호 무림은 혼란에 휩싸일 거네. 무림의 안정을 원하는 황실은 결국 우리에게, 아니 내게 부탁을 할 수밖에 없네. 그때 난 주선엽에 대한 걸 꺼낼 참이네.”
“ 강호의 혼란이 극심할수록 유리하겠군요?”
“ 그렇다고 봐야지. 그보다 벌내쟁투는 어떻게 돼가고 있는가?”
“ 유명계는 아직 생사림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 전투가 아직 생사림에서 진행 중이란 말인가?”
“ 역대 벌내쟁투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아마 벌내쟁투가 끝나면 생사림은 멸문하게 될 겁니다. 더불어 지금 상황으로 보면 유명계가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 그러면 안 되지.”
“ 유명계의 탈출을 도울 참입니까?”
“ 크게 한판 벌이려면 천마삼경을 지닌 자가 강호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좋겠는가?”
“ 무면천군단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우량은 말끝을 흐렸다.
무면천군단은 천상천의 비밀세력으로 그들의 존재를 아는 자는 자신과 벌주밖에 없기 때문에 벌내쟁투의 한복판에 풀어놓는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천마삼경을 찾아 벌내쟁투를 종식시키라는 명을 내리게.”
“ 그것도 방법이군요.”
만우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삼경을 대야벌 밖으로 내보내는 게 목적일 뿐 유명계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설사 그가 벌내쟁투 와중에 죽는다고 해도 시체 속에서 천마삼경이 나오지 않으면 그만일 터였다.
“ 서두르게, 뇌천.”
“ 알겠습니다. 벌주님.”
만우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뇌천!”
문으로 향하는 만우량을 담대만승이 불러 세웠다.
“ 말씀하십시오.”
“ 방금 자네와 내가 나눴던 이야기는 천호도 모르는 일이네.”
“ 비밀로 하겠습니다. 벌주님.”
“ 그렇게 해주게.”
“ 그럼.”
고개를 꾸벅 숙인 만우량은 밖으로 나갔다.
다시 창문을 향해 돌아앉은 담대만승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식었군.”
차를 한 모금 들이면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 수면이 정지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물속을 보지 못해서다. 물속을 제대로 본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수면 아래 있는 물이 위쪽으로 뛰쳐나올 때 그것을 폭풍이라고 한다.”
담대만승은 어둠 속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식은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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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인 변의 오른 획에 위치한 생사림은 위로는 사자림이 아래로는 만마림이 그리고 동쪽응로는 야장이 있개 때문에 탈출로는 서쪽이 유일하다.
연우강이 발이 딛고 있는 곳도 생사림 서쪽이었다.
똥지게들이 다니는 길은 무인들이 다니는 길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가 생사림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죽은 자의 몸 안으로 혼을 불러들여 살려낸다는 뜻을 지닌 입혼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챙! 챙챙챙! 챙챙!
“ 크아악!”
“ 아아아!”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죽어가며 지르는 비명이 메아리처럼 들려오고, 곳곳에서 충천하는 화광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 쯧! 싸우고 싶으면 전쟁터로 갈 일이지..”
연우강은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입혼문을 들어선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왼편으로 향했다. 잠시 후 멈춰 선 곳은 후미진 곳에 있는 작은 건물 옆이었다. 뒤에 야트막한 동산이 배경으로 서 있는 그곳은 무사대 대원들이 사용하는 숙소였다.
숙소 왼편에 위치한 화장실 옆으로 자리를 옮긴 뒤 작업 준비를 했다. 화장실을 덮고 있는 판을 젖히고, 분관 뚜껑을 열고는 분뇨를 퍼 담았다.
분뇨가 얼추 절반 정도 차자 긴 자루가 달린 바가지를 내려놓았다.
“ 이 정도면 미끼는 충분한 것 같고.....”
다시 주변을 살핀 그는 작업복을 벗어 야트막한 동산 위쪽에 뿌리내린 나무에 걸었다.
“ 이제 고기만 걸려들면 되네. 월척이 걸려들면 좋을 텐데.”
미소를 짓고는 담을 향해 걸었다. 잠시 후 담을 훌쩍 뛰어올랐다.
“ 흥! 나쁜 인간.”
조금 전 연우강이 서 있던 곳 옆 허공에서 뾰루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허공 중에 얼굴만 내밀고 있는 자는 몽요였다.
그녀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벌내쟁투 때문이다. 과연 대야벌 무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러 왔다가 황금빛 광채를 발견했다.
한밤중에 황금빛 광채가 나는 옷을 입고 다닐 만한 사람은 연우강밖에 없었다. 벌내쟁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연우강이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몽요는 그를 데리고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러다가 연우강이 무공을 펼치는 담을 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 그동안 감쪽같이 속았잖아!”
다시 허공으로 녹아 들어간 몽요는 연우강을 따라 나섰다.
“ 잘 생긴 얼굴, 준마 같은 몸매, 침을 뱉으면 떨어지는 금덩어리만 해도 최곤데 이젠 초극의 무공까지. 멋진 걸로 도배를 했네. 도배를 했어. 만일 우리 우강이 초극 고수란 사실을 고 앙큼한 것이 알게 되면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 텐데... 킥킥킥! 바보, 혼자 비밀로 하면 되잖아. 일단 합궁을 한 다음에 알려진다고 해도....”
이제는 ‘우리 우강’이라 부르며 몽요는 상상의 날개를 한껏 펼쳤다.
“ 흐릅! 에궁! 칠칠맞게 침을 흘리고 그래.”
그녀는 손등으로 턱을 닦아내며 몸을 배배 꼬았다.
연우강을 따라 몸을 날린 그녀가 도착한 곳은 대야벌 서쪽에 위치한 당호 앞이었다.
“ 완전히 용담호혈이네.”
천리지청술을 펼쳐 당호 주변을 살피던 몽요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로 인해 대기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 그나저니 이 인간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날렸다.
연우강 또한 무인들의 기척을 감지한 듯, 어두운 장소만을 골라 소리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연우강이 상당한 고수라는 사실을 확인하긴 했지만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바로 뒤까지 접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십여 장 뒤에서 멈췄다.
‘ 뭐하는 거지?’
한껏 자세를 낮춘 채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는 연우강을 보며 몽요는 고개를 갸웃했다. 언덕을 타고 올라간 그의 신형이 뱀처럼 스르르 미끄러져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급하게 호수로 몸을 날렸다.
‘ 저기에 뭔가 있는 모양이네.’
문득 몽요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뱀처럼 미끄러져 내린 연우강의 신형이 수초가 무성하게 자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헤엄쳐 연우강이 사라진 곳으로 갔다.
‘ 비밀통로가 있었네?’
하늘거리는 수초 사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구멍으로 들어갔다.
연우강과 몽요가 수초로 가려진 비밀통로로 사라지는 그 순간, 당호 서편에 검은 옷을 걸친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검은 복면과 검은 옷을 걸친 삼백여 명의 무인은 천상천 벌주의 비밀 세력인 무면천군단이었다.
“ 당호 주변에도 무인들이 은신해 있습니다. 단주님.”
주변을 정찰하고 온 듯한 복면 사내 한 명이 당호를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단주라고 불린 사내가 입을 열었다.
“ 우리 목표는 천마삼경을 얻어 벌내쟁투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방해가 되는 자들은 전부 처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 상대를 구분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복면 사내가 물었다.
“ 그렇다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천마삼경이지, 천마삼경을 쥔 자의 신분이 아니다. 방해하는 자는 무조건 척살하라!”
“ 존명!”
복면 사내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 조별로 은신하라.”
“ 알겟습니다.”
복면 사내들은 일제히 흩어졌다.
한편.
비밀 통로로 들어간 연우강은 통로 끝에 도착해 있었다.
연우강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희미한 불빛이 수면으로 비춰들고 있었다. 천리지청술을 펼쳐 밖을 살폈지만 아직 이곳까지는 발견되지 않는 듯 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물 밖으로 나왔다.
물 밖은 천장에 야명주가 박혀 있는 석실이었다. 석실은 좌우 폭이 삼 장 가량 됐는데, 방금 나온 비밀 통로는 연못으로 위장돼 있었다.
“ 굳이 야명주가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는 천장으로 시선을 주며 마라천력을 끌어올렸다.
퍼억!
“ 이런 바보 같은 놈.”
스스로 빛을 내는 야명주는 깨트린다고 해서 빛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불을 깨트린다며 아무 생각 없이 야명주를 깨트린 것이었다.
“ 흩어진 건 주우면 되고.”
그는 사방으로 흩어진 야명주들을 마라천력으로 끌어 모아 지고 있던 사망궤 안으로 집어넣었다.
‘ 뭐야 저 인간.’
물속에서 연우강을 보고 있던 몽요는 깜짝 놀랐다.
일반적으로 무인이 내기를 이용하여 뭔가를 당기거나 부수는 경우에는 대기의 흐름이 바귄다. 비록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다지만 강한 내공을 가진 무인은 그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조금 전 연우강은 천장의 야명주를 깨트리고, 그것들을 쓸어 담고, 지고 있던 궤짝 안으로 집어넣는, 네 가지 무공을 거의 동시에 펼쳤다. 그런데 아무런 흐름도 감지하지 못했다.
궤짝 뚜껑만 해도 그렇다. 부서진 야명주 조각이 궤짝 근처로 오자 기다렸다는 듯 뚜껑이 열렸고, 야명주 조각은 안으로 사라진 것이었다.
놀란 눈으로 연우강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의 신형이 멀어졌다.
‘ 설마 나보다 강한 거야? 에이 설마....’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연우강도 그랬지만 수로를 통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몸에는 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툭!
그녀가 안으로 들어선 순간 앞쪽에서 뭔가가 떨어져 나가며 어둠이 주변을 덮쳤다. 이번엔 야명주를 부수지 않고 그대로 떼어내는 모양이었다.
‘ 잘 생각했어. 야명주도 팔면 돈이라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강을 따랐다.
그때 연우강은 두 번째 공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들어선 곳은 연못이 있던 곳보다 훨씬 넓었는데 약초 냄새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연우강은 품속에서 뭔가를 펼쳤다. 그것은 생사림 지하에 조성된 비밀 통로의 지도였다.
막장을 비롯한 야장의 정보력을 총동원하여 조금씩 알아낸 것들을 조합해 만든 지도라 정확도는 약간 부족하지만 움직이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 조제실이... 여기네.”
그는 지도 한 곳을 흘끔 쳐다보고는 곧바로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몇 번에 거쳐 이리저리 방향을 튼 그는 튼튼해 보이는 문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그리고 천리지청술을 펼쳐 안쪽을 살폈다.
“ 이사 준비를 하는 모양이네.”
그는 차갑게 웃으며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 누, 누구냐?”
한창 의원들을 독려하며 의서를 챙기고 있던 노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는 생사림 수석 의원이자 의약 부분을 총괄하고 있는 절세신의 유장계로, 림주 유명계의 친동생이었다.
유장계는 긴장한 얼굴로 사내를 보았다.
검은 철립과 검은 옷을 걸친 사내가 들어온 곳은 지상과 연결된 문이 아니다. 그 통로를 따라가면 약제실이 나오고, 약제실은 비밀통로와 이어져 있다.
이곳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형님은 적을 다른 장소로 유인해 갔는데, 모르는 자가 들어왔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사 준비로 바쁠 텐데, 미안해.”
연우강은 안쪽을 살폈다. 물건이 꽉 차 있는 자루가 여러 개 놓여 있었는데, 물이 새지 않는 방수포로 만든 자루가 여러 개 놓여 있었는데, 물이 새지 않는 방수포로 만든 자루의 입구는 초로 밀봉이 돼 있엇다.
“ 누구냐고 물었다.”
연우강이 태연하게 대답하자, 유장계를 비롯한 안쪽에 있던 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들의 무기는 검이나 도가 아닌 손가락 길이의 침이 대부분이었다.
“ 이사 갈 때는 사연은 남겨두고 홀가분하게 떠나야 하는 거야. 남은 사람에게 이것저것 묻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서 왔어.”
“ 궁금한 거라고?”
“ 여의전 약사 영감을 해첸 놈이 누군지 그것만 알려주면 조용히 보내줄게.”
“ 이승걸?”
“ 응.”
연우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니까 이승걸의 복수를 하러 왔단 말이냐?”
“ 복수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그냥 그분이 억울하게 죽은 것 같아서 그래.”
“ 미친놈!”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유장계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손가락 사이에 있던 기다란 침이 은빛 광채를 번쩍이며 연우강을 향해 쏘아져갔다. 유명계가 손을 휘두름과 동시에 다른 의원들 또한 손을 썼다.
“ 궁금증만 풀어주면 되는데.”
연우강은 다가오는 침들로 시선을 주었다.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육안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날아오던 침들이 일제히 속도가 느려지더니 한치 남짓 남겨둔 상태에서 그 자리에 멈췄다.
“ 저럴 수가....”
유장계는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호신강기라면 침을 가루로 만들든지 튕겨내야 하고, 허공섭물이라면 육안으로 파악하기도 힘든 침을 잡아낼 수가 없다. 그런데 십여 개의 침들은 한결같이 놈의 몸 앞에 멈춰 있다.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일을 어렵게 만드네.”
연우강은 가슴 앞에 서 있는 침을 잡았다. 그러고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의원 한 명을 향해 가볍게 튕겼다.
슉!
미약한 소성과 함께 침은 의원의 머릿속으로 사라졌다. 백육십여 개의 암기를 무기로 사용하는 그에게 있어 침을 날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컥!”
나직한 비명과 함께 의원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 헉!”
의원들의 입에서 일제히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은이 섞인 침이 날릴 때는 보통 은빛 광채가 남는다. 그런데 방금 날아온 침은 광채조차 남기지 않았다.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그들은 눈빛을 교환하며 암암리에 전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런 그들을 보며 연우강은 다른 침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약사 영감을 해친 놈이 누군지 아직도 대답할 마음이 없어?”
연우강의 시선이 유장계 오른편에 있는 약사에게로 향했다.
“ 없다, 놈!”
시선을 받은 약사는 연우강 앞으로 몸을 날리며 양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슉!
하지만 그보다 연우강의 손가락이 더 빨라싿.
의원이 들어올렸던 손을 아래로 휘두르기도 전에 그의 미간에서 피가 방울방울 흘러나왔다.
“ 차앗!”
“ 타앗!”
이미 절명한 의원이 쓰러지기도 전에 다른 의원들이 연우강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좋지 않은 선택이야.”
연우강의 눈에서 차가운 광채가 쏘아져 나왔다.
이어 그의 가슴 앞에 있던 침들이 몸을 날려 오는 의원들을 향해 일제히 쏘아져 나갔다. 몸을 날려가던 의원들의 동작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서는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유장계는 넋을 잃었다. 이곳에 있던 열 명은 비록 의원이라고 하지만 침을 던지는 기술만큼은 어떤 무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그런 의원 열 명이 본인들의 무기인 침에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 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연우강은 유장계를 빤히 쳐다보았다.
“ 마, 말하면 살려줄 거냐?”
“ 네가 살아나가면 복수를 한다며 부하들을 줄창 보낼 테고, 그럼 난 몇 번이 될지도 모르는 살인을 해야 해. 너만 죽이면 나는 물론이고 네 부하들까지 편해지는데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잖아. 그리고 내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하거든.”
철컥! 철컥!
연우강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쓰고 있던 사망마립이 여덟 개로 분리됐다.
“ 넌?”
유장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설마 철립 속의 인물이 야장의 똥지게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 놀랄 필요 없어.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비밀쯤은 지니고 사는 거야. 그런데 아직도 말할 기분이 아냐?”
연우강은 사망마립의 날 하나를 앞으로 천천히 이동시키며 물었다.
“ 밀천의 대외사자다.”
슈아악.
유장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에 떠 있던 사망마립의 날 하나가 허공을 가르더니 유장계의 목을 스치고 지나갓다.
“ 커억!”
유명계의 비명과 함께 잘려나간 머리가 둥실 떠올랐다. 곧이어 유장계의 시신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 옷을 챙겨입고 온 보람이 없네.”
연우강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곳에 상당수의 무인이 있을 거란 생각에 전투 준비를 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자 공연히 허탈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올 걸.”
돌아온 사망마립을 마라천력으로 조립하여 쓰고는 자루 앞으로 걸어갔다.
철컥!
집게손가락을 펴자 사망마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 혹시 밀천을 알아요?”
그는 눈앞의 자루의 배를 가르며 물었다.
“ .....!”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 숨어 있는 거 아니까 얼른 나와요.”
“ 쳇! 완전 귀신이야.”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몽요는 연우강을 보며 눈을 흘겼다. 하지만 그녀는 내심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이렇듯 놀란 이유는 방금 연우강의 무공 때문이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도 특이한 방법으로 천장의 야명주를 박살냈지만 이곳에서 의원들을 없앨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바로 앞에서 침을 멈추게 하는 기술은 엄청나다는 말로 표현이 불가능했다.
놀라운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 형체는 물론이고 기척도 없이 움직이는 존재를 우린 귀신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찢은 자루에서는 의서들만 나왔다.
연우강이 두 번째 자루의 배를 향해 사망낭조를 그었다. 그가 찢어내고 있는 자루들은 처음 들어왔을 때 유장계 옆에 놓여 있던 것들이었다.
“ 우강은 알아차렸잖아요.”
“ 그건 몽요가 사 장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고, 조금 전 밀천이란 말이 나왔을 때 격동해서 그런 겁니다. 문 밖에 있었더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 정말이에요?”
“ 내가 거짓말 하는 것 봤습니까?”
“ 하긴.... 그런데 안 놀라요?”
몽요는 활짝 웃으며 연우강 곁으로 다가갔다.
사실 그녀가 조제실 안으로 들어왔던 것은 연우강이 걱정돼서다. 그가 위험에 처하면 도와주려고 들어왔는데 그 때문에 들킨 듯했다. 만화은신사영이 약해서 들킨 게 아니었다.
“ 놀라야 하는 상황이에요?”
“ 우강은 무공을 익힌 사실을 지금껏 숨기고 있다가 오늘 들통났잖아요. 보통 이런 경우엔 살인멸구를 하지 않나요?”
“ 살인멸구는 반드시 비밀 유지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하는 겁니다. 몽요.”
“ 내가 소문내도 상관없어요?”
“ 소문 낼 겁니까?”
“ 누구 좋으라고 그걸 말해요?”
몽요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 내가 무공을 익혔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 침을 질질 흘릴 사람이 있어요. 아무튼 비밀은 지킬 거니까 걱정마세요.”
“ 그럼 됐잖아요. 어이쿠, 여기 있었네. 그런데 비밀?”
연우강은 자루 안에서 상자를 꺼냈다.
“ 뭐가요?”
“ 밀천 말입니다.”
“ 아!”
몽요는 배시시 웃었다.
“ 그 웃음의 의미는 뭐죠?”
연우강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금박으로 싼 환약 세 개가 들어 있었다.
“ 맨 입으로는 안 된다는 의미에요.”
“ 원하는 걸 말하세요.”
“ 말하면 들어줄 거예요?”
“ 내 목숨을 달라고 할 리는 없을 테고....”
연우강은 몽요를 빤히 쳐다보았다.
몽요는 생글생글 웃으며 연우강의 대답을 기다렸다.
“ 갑자기 안 궁금해지네.”
연우강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금박으로 싼 환약을 코로 가져갔다.
“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몽요의 입에서 볼멘 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건 불량이네.”
하지만 연우강은 딴소리를 했다.
그가 환약의 냄새를 맡아보았던 것은 전에 우연히 먹었던 여의선천신단과 비교를 해보기 위해서다. 그때 여의선천신단에서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는데, 지금 들고 있는 환약에서는 청아한 냄새가 흘러나온다. 여의선천신단을 제조하다가 실패한 약이 분명했다.
“ 정말 안 물어볼 거예요?”
“ 궁금하지 않는 걸 왜 물어봅니까?”
“ 조금 전에는 이승걸 의원을 해친 자를 궁금해 했잖아요. 그리고 누군지 알아야 복수를 하잖아요.”
“ 내가 복수를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 아니에요?”
“ 내가 약사 영감의 복수를 해줄 이유가 없잖아요.”
“ 그럼 저들은 뭐죠?”
몽요는 쓰러져 있는 약사들을 가리켰다.
“ 약사 영감의 평생 업적을 훔쳐간 자들입니다.”
“ 평생 업적이라면... 조금 전 그 약?”
“ 그렇습니다. 몽요.”
“ 참! 그건 무슨 약이죠?”
“ 여의선천신단이라고 불리는 영약입니다.”
“ 이름은 엄청난데...”
“ 이 갑자에 달하는 선천지기를 얻을 수 있는 영약이니까 엄청난 것 맞습니다.”
“ 이, 이갑자라고요?”
몽요는 경악한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상자 속에서 나온 환약 세 개가 그런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영약이 들어 있는 연우강의 가슴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 부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 저, 정말 줄 거예요?”
“ 난 두 개만 있으면 되거든요.”
연우강ㅇ느 품에서 여의선천신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 바, 받아도 돼요?”
몽요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 하나 정도는 얻어 가야 하잖아요. 부담 갖지 말고 받아요.”
“ 우강에게 공짜로 받으려니까 공연히 손이 부끄러워지네요.”
몽요는 어색한 얼굴로 여의선천신단을 받았다.
“ 조금 전에 불량품이라고 했잖아요.”
“ 맞다. 그랬지. 설마 불량이라서 인심을 쓴 건 아니겠죠?”
“ 당연히 불량이니까 주죠. 진짜 같으면 주겠어요? 돈이 얼마짜린데.”
“ 하여간...”
몽요는 연우강을 흘겨보면서도 여의선천신단을 소중히 간직했다. 이 갑자에 달하는 선천진기를 얻는 영약을 만들다가 실패한 약이면 설사 실패한 불량이라고 해도 웬만한 영약보다 낫다는 사실을 몽요는 알고 있었다.
더불어 함부로 줄 수 있는 그런 약도 아니라는 것도.
“ 그리고 내가 저들을 죽인 건 약사 영감님의 평생 업적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 여의선천신단의 제조비법은 약사 영감 소유니까 그분에게 돌려드려야지요.”
연우강은 주변에 널려 있는 자루를 한 곳으로 모으며 말했다.
“ 이러니까 내가 우강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어쩌면 그렇게 멋진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죠?”
“ 역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건 정의가 아니라 기름칠이란 말이 맞네요.”
“ 무슨 말이죠?”
“ 약을 먹이니까 바로 아부가 나오잖아요.”
“ 호호호, 아부는 돈 드는 게 아니잖아요.”
몽요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연우강의 일을 도왔다.
“ 참! 백만 냥이나 주고 구하고 싶은 무공 비급이 뭐죠?”
문득 생각난 듯 연우강은 물었다.
다른 이들은 전부 비급 신청서에 비급의 이름을 적었는데, 몽요만 유일하게 백만 냥이라는 보수와 비급에 대해서는 직접 말하겠다고 적혀 있었던 거였다.
“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라 말하기가 좀 그래요.”
“ 그래도 일단 들어 보자고요.”
“ 혹시......환백이라고 들어봤어요?”
“ 파천 육기 중의 하나인 그 환백을 말하는 겁니까?”
“ 네.”
몽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가 환백을 찾아달라고 하였던 것은 우발적인 결정이었다. 우연히 파천육기의 하나인 묵사가 발견됐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묵사를 발견한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연우강이었다. 그 소문을 듣자 환백에 대한 단서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렇다고 큰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다.
“ 동영의 은밀막부가 밀천에 속해 있는 겁니까?”
파천육기의 하나인 환백이 밀천의 무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 칠백 년 전까지는 그랬어요.”
“ 지금은 아니라는 말?”
“ 밀천은 당 황실을 도와 우리 은밀막부의 모국을 치는 데 일조를 했어요. 결국 우리 모국은 패망했고요. 그때부턴 우린 밀천을 원수로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 다시 밀천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가 생겨났다는 말이네. 그는 몽요의 가문을 위협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거느렸을 테고.”
연우강은 자루 안에서 책을 하나 꺼내 삼매진화를 불을 붙여 다시 자루 안쪽으로 던졌다.
“ 그래요. 우강. 지금 은밀막부는 둘로 나뉜 상태에요. 그리고 환백은 우리 은밀막부의 지존신물이었고요.”
“ 환백이 은밀막부의 인물이었다고?”
자루에서 불길이 오르자 그는 마라천력을 이용하여 불타고 있는 책들을 다른 자루로 옮겼다.
“ 네, 환백은 우리 은밀막부를 세운 분이에요.”
“ 환백이 있으면 둘로 쪼개진 은밀막부를 하나로 합칠 수 있다는 말이에요?”
“ 완전하게 하나로 합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우리 가문이 적통 후예라는 명분을 얻게 돼요. 그럼 중도적인 입장을 위하고 있던 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되고요.”
“ 그러니까 천오백 년 전에 사라진 물건을 찾아주는 대가가 백만 냥이라는 말이네요?”
“ 너... 무 싼가요?”
“ 너무 싼 정도가 아니라 그 정도면 거저죠.”
“ 찾아주면 평생 종이 될게요.”
“ 은밀막부의 가주를 무슨 수로 종으로 거느립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요.”
“ 가주 자리는 동생에게 물려줄 거예요.”
“ 아무튼 알아보기는 하겠습니다. 그만 가요.”
연우강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한쪽 구석으로 던져 놓고는 걸음을 옮겼다.
“ 저건 뭐죠?”
그녀는 연우강을 따를 생각도 하지 않고 한편 구석으로 떨어지는 것을 뜨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 작은 미낍니다.”
“ 미끼라고요?”
“ 그런 게 있습니다. 연기가 심해서 숨 막혀 죽겠습니다. 몽요. 빨리 갑시다.”
“ 불은 왜 피운 거죠?”
연우강을 따르던 몽요가 물었다.
“ 안 들려요?”
“ 뭐가 들린다는 ...... 어?”
천리지청술을 펼쳤던 몽요는 깜짝 놀란 얼굴로 연우강을 보았다. 귓전으로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누구죠?”
그녀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 이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도망칠 자들이지 누구겠습니까?”
“ 이쪽으로 도망칠 자들이면 혹시 생사림주?”
“ 글쎄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연우강은 빙그레 웃었다.
“ 그가 이쪽으로 오는 것과 불이 상관이 있나요?”
“ 불을 피운 게 아니라 연기를 피운 겁니다.”
“ 연기를 피웠다는 건 누군가에게 이곳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고, 그 누군가는 생사림을 공격하는 무인들일 테고....”
몽요는 고개를 갸웃했다.
“ 무인들이 들이닥치면 생사림주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갈까봐 그러는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오히려 부하들을 이곳으로 밀어 넣고 자기는 다른 곳으로 갈 것 같은데.”
“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겁니다. 몽요.”
“ 생사림주가 도망치길 바란다고요?”
“ 그래야 재미있잖아요.”
연우강은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