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공원
하나의 공원으로 가고 있었어요
벤치는 생각처럼 앉아있고 나무는 기다림처럼 서 있는 곳이에요 먼 곳들이 모여 있는 가까운 곳이죠 낙서장의 유서처럼 찢어버려도 그만인 날, 악몽이 깃들지 않는 서정적인 취향 그대로 식상해진 나를 지나쳐버려도 좋은 날이에요 초록 사이로 뒷모습들이 걸어 다녀요
입구에서부터 피클볼 소리가 팡팡 날아다녔어요 주고받는 운명이 저리도 가볍다니 서로 받지 않겠다고 사치를 부리네요 쳐다볼수록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번갈아 거절당하는 피클볼이 되었어요 주로 허공에 떠 있었죠 퍽 하고 떨어진 공이 철조망을 따라 굴러가요 운명처럼 따라가요
통통 걸어가던 피클볼이 꿈틀, 경계를 깨워요 체크무늬 셔츠가 배를 깔고 누워 있어요 겨우 생겨난 구석의 그늘을 하루 쓰고 버리는 일회용 지옥처럼 부둥켜안고 있어요 홈리스적인 침묵이 시체스러워요 부피를 버린 나뭇잎처럼 전혀 입체적이지 않아요 바람 불면 날아가겠죠 발끝에 피어있는 꽃은 더욱 보들레르적이구요 보이는 실체보다 그의 알리바이가 궁금해진 건 순전히 하나의 공원에 온 탓이에요
나갈 때까지 하나의 공원이길 바랬어요 오직 두 사람 사이의 피클볼이길 바랬어요 그저 무료해진 공원을 슬쩍 달래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기어이 팡팡 천국과 체크무늬 지옥을 건설해버린 두 개의 공원을 결코 나오고 싶지 않았어요
안개와 아버지
세상의 반은 백내장을 앓았어요.
수술대에 오르지 못한 어둠이 버티고 있을 때
물려받은 다초점 렌즈 너머 아버지는 부작용이 넘치는 중
범인 수색에 뚫린 구멍처럼 텅 빈 시선으로
한 쪽 눈을 가려도 집으로 가는 길이 두 개로 보였을까요
수정체 같은 엄마는 반질반질한 눈물을 깜빡이며
다래끼처럼 생겨난 아침에 한 쪽 손으로 용서를 가리고 있었어요
먼 바다가 키운 은갈치 구이로 밥상은 눈부시고
남자와 여자 사이엔 죄로 이어진 다리가 있어
먼저 건너오는 쪽이 죄인이 되는 거라고
안개 자욱한 동굴이 키우는 아이들은
잘못 만난 하나님처럼 그저 숭배하고 복종하는 바람에
세상의 반은 당신의 여자들
흉몽을 덮고 자는 밤마다 태어나는 아비뇽의 여자들은
뭘 먹을지 그려보는 분식집 테이블처럼 일상적이었어요
붉은 떡볶이 국물에 하얗게 삶긴 계란은 속살처럼 전위적이어서
입을 닦고 돈을 내는데 화대를 지불하듯 왜 낯이 뜨거웠을까요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당신은
장애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모순의 실험실 같았어요
당신의 함정에 빠진 아이들은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크고 멋진 배를 떠올렸죠
향수에선 늘 매춘의 냄새가 났어요
벽에 닿으면 맺히는 세상은 습관처럼 주인을 실험 중
나는 물방울이 되어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눈 속에 떠있었나요
한쪽 눈을 가린 채 아버지, 당신은 무엇과의 거리를 재고 계셨나요
언제나 가해자 편에 서서 피해자를 다독이며
한 번쯤 속여 본 것들이 손을 잡으면 세상이 되는 거라고
반신이 움직이지 않는 방에서도 부활하신 나의 아버지
살아갈수록 살아있다는 기분이 조금씩 달라져요
살아있다는 건 함정에 빠졌다는 것
살아있다는 건 함정에서 빠져나왔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어느 쪽이어도 상관이 없어졌다는 것
당신으로 가려진 세상은 더 크고 더 넓어서
넘어져도 일어날 데가 많았대요 떨어져도 기어오를 데가 많았대요
죽은 것과 다름없는 당신의 장지에서 가장 멀리 도망쳤을 때
냉장고 위에서 아버지만 기다리던 바나나 한 손
지금은 정말 보기만 해도 토할 것 같아요 라며
복숭아맛과 자두맛과 사과맛을 합친 오묘했던 노란 손을 다시 잡아요
손이 많은 아버지
안개만 먹고 자란 아이들은 기일을 기억하느라 생일을 잊었어요
노을이 뒷짐을 지면 하루를 여의던 그때 조금씩 눈치챘어요
안개와 아버지가 한 몸이었다는 걸
Re: 꿈
밤새 화장실을 찾아다닌다 재래식 문을 두드리며 배설을 꿈꾼다 어떤 식으로든 미완성이다 나는 오프라인에 있고 꿈은 온라인에 있다 협곡처럼 스며드는 푸른 기척, 미료한 얼굴을 데리고 다닌다
바람에 우는 비즈커튼 사이로 고스트처럼 빠져나오는 외진 생각, 쫓고 쫓기는 사냥꾼의 해묵은 논쟁처럼 어둠은 약자를 솎아낸다 악행과 변명을 떼어놓지 못해 꿈을 반짝이던 여자와 사이즈가 스몰에서 미디엄으로 바뀐 뒤 꿈을 접었다는 여자가 연이어 등장했다 오늘을 만진 건 어쩌면 꿈이었을까
말줄임표로 끝나버리는 꿈의 문체에 끼어든 후 에스키모처럼 영혼을 잃었다 꿈과 꿈을 잇기 위해 또 다른 꿈을 잇대어야 했다 어제의 손을 자꾸만 놓치는 건 꿈이 이어지지 않기 때문, 새벽녘 끝물에 달아오르는 꿈의 체위를 바꿔야 한다 흉몽과 길몽의 기준을 벗어버린
별과 밤사이에는 정교한 어둠에 걸린 깊이가 산다 거울 속에서 본 얼굴은 퇴행을 꿈꾼다 리비도의 베개 속에서 태어나는 눈이 없는 아이는 문신 같은 상처가 있다 간밤의 위장술에 시간이 녹아내리는 기억의 고집*, 히스테리한 앨범에 굴절된 사진들이 꽂힌다
꿈 없이 해몽되고 있는 하루를 살았다 돌아눕다 잡혀오는 곳, 오늘보다 조금 더 부풀어 올랐던 어제의 꿈이 떠내려간다 물 위에 뜨는 기름처럼 떠오르는 꿈을 남모르게 걷어내는 일, 바닥을 보기 위함이다
어둠의 눈은 안다 가슴에서 눈동자까지의 거리인 걸, 눈뜨면 다시 가슴으로 돌아가 머뭇거리는 사연인 걸, 마카롱처럼 달콤한 꿈으로 짜인 이불을 턱밑까지 당겨 꽁꽁 언 꿈을 해동시킨다 녹아내린 꿈이 흐르기 시작하면 해마의 손을 놓친 기억들이 주춤주춤 휩쓸린다
꿈을 신봉하게 되었다 철로가 끊어진 날 길에서 떨어진 후, 굳은 하반신으로 꽃신을 신은 엄마가 천국으로 간 후, 눌러도 튀어 오르지 않는 건반 하나 꿈의 악보에 붙들려 있었다 누가 나를 들여다보는가 꿈 밖으로 뛰쳐나와서도 길을 잃었는데 비행기를 놓쳤는데 시험지를 잃어버렸는데 낳은 아이를 또 낳았는데
욕창 같은 꿈에서 깨어나면 엄마의 꼬리뼈가 떨어져나간 자리가 보였다 환골탈태 중인 그녀를 꼭 붙들고 싶었다 소변 줄을 달고 사는 그녀에게 개구리반찬 놀이처럼 묻고 싶었다 죽었니 살았니
이상한 냄새가 두려워 도망치다 보면 빠져드는 생시의 늪
나를 낳은 것은 꿈이었다
*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1931)
우유베개
1
나를 눕힌 것은 뜬구름 잡는 잠이 아닙니다
초유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머리맡의 기억입니다
다산으로 말라붙은 가슴마저 햇살 아래 말려야 했다는
개연성 없는 감상입니다
더 이상 젖지 않아 살균되지 못한 아기를
행주 옆에 방치했을 늙은 여자는 노산이 취미였습니다
머리를 괴는 곳마다 눈물이 고였다는 말도 거짓말이 틀림없습니다
달콤한 연유를 뺏어먹은 언니는 농구선수처럼 키가 자라고
벌컥벌컥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른 이유가 어렴풋해질 때쯤
시들어가던 엄마의 욕창이 베갯잇에 피어올랐습니다.
2
아기를 낳고
젖 마르는 약을 먹은 여자는 우유를 마실 자격이 없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아기고양이를 입양하고 빈 젖을 물린 여자는
우유만 먹고 우유부단해진 아이만 나무랍니다
탁아소에 누워있던 아기를 눈으로 밟고 다닌 적도 없습니다
어물어물 넘어간 몸조리마저 처량한 희생이었다고 단언합니다
가끔씩 잔병치레하듯 수유가운을 입고 가슴을 만집니다
불린 가슴으로 꼭 짠 세월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립니다
오십견에 목이 꺾인 날은 우유베개를 베고 해피드림을 꿉니다
비린내에 잠이 깼는데 엄무우우우우
암소 한 마리 출렁이며 걸어 나옵니다
3
엄마의 법에 충실한 로펌에서 18주 산후휴가를 받은 딸은
보란 듯이 하루 종일 젖을 먹입니다
내가 질투를 느끼는 대상이
D컵으로 부풀어 오른 가슴인지
더 이상 엄마가 필요 없는 디지털 산모인지
고슬고슬한 핏덩이를 끌어안고 눈을 맞추는 새파란 엄마인지
내 딸은 맛도 못 본 젖을 오물오물 배터지게 빨고 있는 딸의 딸인지
통통한 아기침대가 알 리가 없습니다
먹고자고싸고우는 앱의 운용체계로 들어가 버린 로봇아기가
쌔액쌕 알파와 오메가를 읊조리다 모유 한 모금 뱉어냅니다
자궁처럼 흔들리는 베시넷엔 젖 도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흐릅니다
와이파이 프레임 속에서 매일 옷을 갈아입는 혼혈아기가 자면서 웃습니다
액정을 쓰다듬으며 나는 비로소 수면에 공감하고 싶습니다
잠 속의 우유를 마십니다
조우
누구일까
반사되는, 집중하기에 너무 해묵은 빛
눈동자로 작아지는 기색을 감출 수 없습니다
너는 내가 보이니?
무심코 떠오르는 생각이 내가 되다니
생각이 짓무른 날 나를 하나씩 버립니다
립스틱과 입을 맞추며 나는 핑크색입니다
손수건을 접으며 나는 닦을 수 없는 눈물입니다
열쇠를 흔들며 나는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저물녘이면 발이 저려옵니다
운명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일 겁니다
닿을 수 없는 숨은 여행이 돌아다닙니다
미개한 맹목이 우거집니다
생각의 무게를 빼면 어둠으로 타는 그림자
망설이는 목숨이 한 점씩 떨어져 나올 법도 합니다
이게 뭐지
돌아보다 넘어지는 장애물, 슬픔의 외피를 가진 유물입니다
높은 선반 위에는 조금씩 남아있는 나를 모아두었습니다
내가 묻고 네가 대답하면 내가 되는 오늘
어제의 끝말이 치매에 걸렸습니다
만삭의 하루는 양수처럼 흘러내리는 울음소리
아이의 말을 따라하고 아이의 머리를 빗기다보면 내가 있을까요
주문한 듯 내가 왔을 땐 이미 착각이 나를 다 써버린 후
낭비되기 좋은 내가 다시 배달되는 아침입니다
물방울이 매달린 만큼 과육이 붉어지는 열매가 되고 싶었습니다
눈물만큼만 무거워지는 존재의 기슭, 물과 닿은 한 줌의 땅에 불과했습니다
버릇처럼 서로 모른척하기 바빴습니다
유행하는 옷을 입고 유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다보면 닮아갈지도 모릅니다
외도는 것들의 종착지가 되지 않고자 합니다
그러다보면 멀어지기 마련이니까요
대체로 너무 인간적이지 않은 인간을 꿈꾸어갑니다
나를 모면하지 못한 위기의 날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을 향하고 있겠지요
간절히 원한 적도 없이 때마침 내게 중독되어 있습니다
밝히는 눈이 되었습니다
숨기는 범인이 되었습니다
상습정체구간에서 정체를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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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선택했을까요
이동 중입니다
어딘가를 향해 옮겨가고 있습니다
이월란 약력
1964 경북 김천 출생
1988 도미
2014 유타주립대학 비교문학과 졸업
2009 계간 『서시』 신인상
2011 제13회 재외동포문학상 시 우수상
2008, 2010, 2012 경희해외동포문학상 시 입상
2012 SLCC Chapbook Contest 당선
2007~2012 Korean Times of Utah 시 연재
2013 경희해외동포문학상 단편소설 입상
2021 제23회 재외동포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수상
2023 제8회 동주해외작가상 수상
2024 제13회 고원문학상 수상
현재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
시집 2007 [모놀로그]
2009 [흔들리는 집]
2011 [The Reason]
2016 [오래된 단서]
2023 [바늘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