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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떤 기상학자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요. 올여름이 여러분들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여름 중에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수도 있다는 끔찍한 말을 하더라고요. 물론 그건 예상이긴 한데요. 이 정도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가 처참한 환경 가운데 처해 있음을 아는데 중요한 건 우리는 그래도 어떻게든지 냉방이 돼 있으니 조금이라도 좀 덥고 힘들면 냉방에 들어가서 좀 시키기도 하고 좀 우리는 이렇게 이런 공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보다 더 지금 온도가 40도 50도까지 올라가는 나라들도 있더라고요. 이건 말이 안 되는 기온인데요. 그 기온에서는 잘못 노출이 되면 30분 안에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기온이라고도 하더라고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가 점점 우리가 살지 못하는 그런 환경으로 바뀌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정말 우리가 지금 늦었다 늦었다 끝났다 끝났다 이런 말까지 나오는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그러한 일들을 바라보면서 나부터라도 뭔가를 한 개씩이라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누가가 이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처음 이제 누가 복음에 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정리를 했다고 말씀을 드렸죠. 예수님의 생애를 5가지의 동사로 표현을 했습니다. 첫 번째가 행하셨다. 먼저 행하셨다. 두 번째 가르치셨다. 세 번째 택하셨다. 그리고 네 번째 성령으로 명하셨다.
그리고 오늘 이제 다룰 부분이 승천하셨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 승천이라고 하는 이 말 속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다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 내용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이 구절 한 구절을 통해서 자기가 지금 누가 복음부터 지금까지 기록한 말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정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일들을 행하셔서 근데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을 누가복음 총 24장 가운데 24장에 그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단 한 장이며 어쩌면 불량으로 따지면 누가 복음의 2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불량입니다.
그런데 이 누가 복음을 기록한 목적 자체가 마지막 이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 누가가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는 누가 복음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발견하게 돼요. 그래서 누가복음 1장에서 23장의 말씀은 이 마지막 24장을 전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고 마지막 24장을 전하는 그래서 마지막 24장이 없다면 누가 복음에 팥이 들어가지 않은 팥방 그런 정말 뭔가 비어 있는 그런 말씀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지금 우리의 신앙은요.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그렇죠 이거는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누가 복음의 마무리를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로 마무리한 이 누가가 다시금 사도행전을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한 번 더 강조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사도행전 우리가 성령행전이라고도 하는데요. 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은 이 믿음에 대한 이 부활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이 말씀을 통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요.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에 이 부활을 증거하는 그리고 예수님이 그 부활하신 모습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이고 다시 오실 그날에 우리 모두는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걸 믿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에 이유가 있는 거예요.
부활하셨다는 것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신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구체적인 예를 누가복음 24장에 기록해 놨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에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 다락방에 숨어 있던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보고 증거하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결국에 예수님의 그 손에 못자국 난 그 자리에 손을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이야기를 들은 그 제자의 이야기까지 그리고 그들과 함께 부활하신 이후에 식사도 하시고 그들과 40일 거주하면서 생활했던 그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명확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샤쿠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분이 굉장히 유명한 세계적인 소설가였는데요. 이 사람이 쓴 작품 중에 예수의 생애 그리고 그리스도와 탄생이라는 그러한 책이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뭔지는 분명히 아시죠? 예수 그리스도가 플레임이 아닙니다. 이거는 이제 너무 기본적인 내용이라서 우리가 다루지 않아야 될 부분인데요.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메시아라고 하는 그러니까 직함입니다. 노효철 목사라고 하는 그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어쩌면 우리가 주님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우리가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고 하는 고백이 그 짧은 그 이름에 우리가 담겨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 작품의 이름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예수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 그리스도의 생애라고 말하는 게 더 맞아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 엔도 슈샤쿠가 이 탄생과 생애라고 하는 말을 바꾼 이유가 있답니다. 이 사람이 원래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는데 그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늘 궁금증이 있었던 거예요. 크게 두 가지의 궁금증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복음서의 증언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기적 이렇게 아주 막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나 보면 예수님이 그 동시대 또는 그전에 있었던 여러 선지자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있던 선지자나 랍비들과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내용들을 들어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이더라는 겁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죽음의 현장을 보면 너무 무기력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그 현장의 모습 엔도 슈샤쿠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치 개가 끌려가 햇볕이 내려찌는 골고다 언덕에서 비참하게 죽으시는 예수님 어쩌면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살았던 예수님 그리고 그랬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인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한번 이것도 여러분들이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은 무조건 믿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믿어버리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어요.
또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질문이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렇게 이야기를 읽어보면 너무 비겁쟁이들이잖아요. 겁쟁이들이고 심지어 거짓말쟁이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자마자 배반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친 정말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증거하고 다 순교를 나가느냐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 상식적으로 볼 때 상대가 살아있는 상황에서도 이 사람을 배반할 정도의 그런 마음 상태의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죽고 난 다음이라면 더 이 사람을 배반하고 아예 버릴 수 있는 그런 대상들이 보통 사람들인데 제자들은 그렇지 않은 모습에서 궁금증이 나타났어요.
근데 이 질문을 이렇게 가지고 있다가 이 엔도슈샤프가 그 답을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구나라고 이제 찾았다는 거예요.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 사람은 참 고민을 많이 했죠.
근데 여러분 신앙에는요. 질문들을 만드는 게 너무 중요합니다. 그냥 덮어놓고 믿는 게 좋은 믿음이 아니에요. 궁금한 거는 한번 궁금증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 쳐보는 거예요. 누구한테 물어도 보고 나도 찾아도 보고 그러면서 그 궁금증이 발견되었을 때 그게 내게 되는 거거든요.
엔더스자쿠가 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그 답을 딱 찾고 나니까 이 부활이 아니고는 도무지 이 지금 내가 궁금해하던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구나 무기력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지? 아니 그렇게 무기력하고 정말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어떻게 그런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들이 될 수 있지?
바로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이 엔도 슈샤쿠가 그 작품의 이름을 예수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마지막에 보여준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일 수 있다고 하는 그러한 정의를 이 책의 제목에 담아놓은 거예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 그들의 인생은 확 평탄했나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들의 삶은요. 결코 부가 따라다니거나 영광이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곳마다 사자밥이 되거나 또 참수형을 당하거나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개의치 않았어요.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이 다시 사셨다고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왜 가능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까 이제는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확실한 신앙인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겁쟁이들이 이젠 담대하게 그 누군가 앞에서도 죽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시작점에서 누가가 이 부분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말씀을 자세히 보면요. 예수님의 부활을 누가가 강조한다고 제가 금방 설명을 드렸잖아요. 그런데 정작 본문에는요. 부활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이렇게 자세히 보시면요. 부활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지 않아요. 오늘 본문에서는 고난받으신 후에 신이 살아계심을 나타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누가복음 24장이라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죠. 누가복음 24장에서도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단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도 보면 부활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아요.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라고 하는 단어가 부활이라는 말인데 이 단어를 누가 복음에서도 또 다른 복음서에서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경에 보면 마태복음 27장 53절에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말이 번역으로 등장을 하는데 여기에서 부활이라고 우리가 번역한 이 말은 에게르시스라고 하는 말을 썼는데 이거는 자리에서 일어난다라고 하는 단어로 원래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과는 다른 의미의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아나스타시스라고 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활이라는 진정한 단어가 몇 번 쓰이지 않는데요.
이를테면 부활이 없다고 여기는 사두개인들 사두개인을 소개할 때 그 앞에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라고 말을 할 때 그때 부활이라는 말이 쓰이고요. 그리고 요한복음 11장 25절에 예수님이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할 때 그때 부활이라는 말을 씁니다.
약간 궁금하지 궁금함이 여기서 작동돼야 됩니다. 왜 부활은 너무나도 중요한 핵심 메시지인데 왜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여기에도 약간 배경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2천년 전 그 당시에 살아가던 사람들은요. 이 부활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서 어떤 인식이 있었냐 그들은 이 부활을 언급하는 그 이야기 중에 언급하는 때가 언제냐면 부활은 없다고 말하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아까 사두개인 부활에 대하여 부정하는 사두개인이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부활이 없다고 말을 할 때 사용하는 하나와 또 부활이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마치 신화와 같은 이야기라고 하는 이야기를 할 때 부활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이 이미 장사됐는데 그 사람이 살아서 나왔다고 하는 이 말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지금도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솔직히 우리가 예수님을 너무 이제 기독교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사니까 부활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이제 편안하게 우리가 쓰이고 그리고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솔직히 여러분들 죽은 사람이 살아났대요.
여러분들 누가 장사 치르고 왔는데 요즘에는 죽었다가 살아났다가도 다시 죽게 생겼지만 화장을 해버리니까요. 근데 예전같이 장례식을 우리가 치를 때 예전에는 병풍 뒤에다가 3일 동안 5일 동안 시신을 두고 있지 않았습니까?
근데 그때 만약에 장사를 치르다가 벌떡 일어나서 누가 살아났다는 말을 들어도 솔직히 에이 설마 그러면 안 죽었는데 그렇게 우리가 죽었다고 장사 치른 거 아니야 막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정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걸 고백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증거를 갖다 대고 우리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 이게 명확한 사실이라고 말하시니까 우리는 그걸 믿습니다.
근데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도 이 부활에 대한 거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 부활이라는 단어를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이 단어를 통해서 복음을 증거하면 사람들이 니네가 지금 신화 이야기를 하는구나 니네가 지금 뭘 이렇게 꾸며낸 이야기를 하는구나 이 정도 수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이 부활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이제 사흘째 되던 날 그 예수님을 찾아간 여인들의 이야기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누가복음 24장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니까 부활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이 차이가 뭘 나타내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또 같은 장면을 마태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를 배우리라 하라.
요한복음에서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이 죽은 자라는 말도 원어적으로 따져보면 시체 리얼하게 말하면 시체 시체 가운데 살아났다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활이라고 하는 그 자체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인식이 벌써 딱 안 믿어버리고 신화같이 여겨버릴 그런 상황이니까 죽은 시체가 휠체 가운데 있었는데 그분이 일어나셨어 살아나셨대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여러분 의도가 있습니다. 부활이 그냥 상징이나 어떤 추상적인 개념으로 부활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신앙을 지금 성경을 보고 믿으면서 여러분들은 잘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근데요. 여러분들 자녀들도 한번 이렇게 보십시오. 믿음이 지금 명확하게 서 있지 않으면요. 단군 신화나 박혁거세의 이야기나 예수님이 오병이어 사건 일으킨 이야기는 똑같은 걸로 개념을 잡고 있을 수도 있어요. 에이 설마요. 아니요. 그냥 옛날 이야기 정도 수준으로만 여긴다니까요 아니 그게 우리 애들의 이야기만이 될까요? 우리 중에도 혹 그럴 수 있습니다. 그냥 성경의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이야기 아주 오래전 마치 그건 절대 나의 삶 가운데 일어나지 않을 이야기처럼 믿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 누가는 부활이 단지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존하는 사건이고 실제 죽었던 시체가 일어나 살아났다 라고 하는 명확한 사실로 증거하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걸 믿는 사람이 사도행전의 삶을 살아가고 있노라고 우리에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장면을 여러분 자세히 보시면요. 이제 많은 사람들이 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거짓말이라고 이제 막 이야기를 하면서 안 죽었었다 이렇게 막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근데 그때 십자가형을 그걸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예전에 그 당시에 십자가형에 처한 사람들은요. 보통 며칠 동안 매달려 있다가 죽는 게 일상이었어요. 그러니까 그게 최악의 형벌이었거든요. 몸에 온전히 모든 액체를 다 쏟아놓고 나서야 말라죽는 그게 이제 십자가 형이에요. 그러니까 최고의 형이죠.
근데 예수님은 너무 빨리 죽었다는 거예요. 비방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몇 시간 안 걸렸잖아요. 근데 성경에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님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있지 않습니까? 창으로 찔러요. 여러분들도 죽은 시신들을 경험한 분들이 계시죠 살아있는 사람과 이 죽은 사람은요. 똑같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그 시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그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잖아요.
근데 로마 그 당시에 엘리트 군인들이 이 사람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인 제대로 안 할까요? 기절했다가 살아났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근데 누가는 지금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이게 그냥 누군가 이게 이러한 것들을 그냥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하면서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쫓아서 사도행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노라고 지금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인들 가운데는 입술의 고백으로만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계신 주님을 쫓고 그 주님을 따라 나의 삶을 내어뜨리고 사도행전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나도 언젠가는 저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사람들처럼 저기 안장되어 있는 수많은 그 유골처럼 나도 그러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시대에 우리가 신앙이 멀어진 이유 중에 큰 이유가 죽음이 너무 우리에게 멀리 있다라고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들 어렸을 때 여러분들 마을에서 장례 치를 때 또 여러분들 가족이나 이런 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다 집에서 장례를 치렀잖아요. 그러니까 그리고 또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그렇죠 그러니까 시신을 접할 기회가 수없이 많이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은요. 누가 돌아가셔도 그분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분들은 딱 가족 몇 명밖에 안 돼요. 지금은 딱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냉장고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잠깐 입관할 때 얼굴 잠깐 보여주고 덮어버려요. 그러니까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격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이게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아요? 왜요? 착각하게 하는 겁니다. 마치 나는 죽음이 너무 먼 사람처럼 착각하고 살아요. 여러분 내가 나도 언젠가는 저 공동묘지에 저 유골들처럼 나는 그렇게 썩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시체가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부활의 사건이 의미가 있어지는 겁니다. 나도 예수님처럼 다시금 부활하여 살 수 있다라고 하는 확신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골로새서 4장 13절에 등장하는 히에라폴리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신성한 도시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터키에 파묵칼레라고 하는 지역을 들어본 적 있으시나요? 여행 좋아하는 분들은 아마 여기 가고 싶은 분들도 계실 거예요. 아주 그냥 석회 하얀 돌 위에 파란 물들이 이렇게 층층이 이렇게 이쁘게 이루어져 있는 그런 지형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옛날 사람들이 그 지형의 석회 절벽 사이로 흐르는 그 막 물이 흐르고 되게 이렇게 너무나도 환상적인 그런 풍경을 보면서 신비로운 자연 환경을 보면서 여기가 신성한 도시다. 이름을 지어놓고 죽으면 내가 이런 곳에 나는 가고 싶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그래서 돈이 있고 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 도시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묻히기를 바랬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이미 그 성은 폐허가 됐고 그 주변은 다 이렇게 사라졌는데 그 당시에 묻어놨던 무덤들은 수없이 많은 무덤들이 여전히 존재한답니다.
근데 벌써 무덤들은 다 뚜껑이 열리고 난리가 난 상태래요. 벌써 사람들이 이렇게 도구를 한 상태인 거죠. 근데 그곳에 있는 비문 중에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
한번 따라 해볼까요?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
무슨 말인지 조금 이해가 되시죠? 여러분 이 이야기는 2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순서대로 이 땅을 떠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할 날이 분명히 가까이 오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모르지만 분명히 지금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까워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근데 우리가 이거를 잊어버리면 내가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시간이 많다고 생각을 하니까 계속 뒤로 미루는 겁니다.
근데 여러분 시간이 한계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끝이 있다고 생각을 하면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 애들이 시험 기간 공부하는 거 보시면 제가 애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가끔 해요. 시험 기간 공부하는 것의 반 정도만 평상시에 공부하면 정말 대단한 학교를 가겠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시험 기간에는 집중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몰라요. 그렇죠 저도 뭐 그런 인생을 살아왔었습니다. 저도 레포트 막 하루에 몇 개씩 몰아가지고 한꺼번에 쓴 적도 있고 평상시에 나타나지 않는 능력이 이제 기한이 정해지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딱 생각하면 갑자기 막 능력이 일어나죠.
공부 막 하는데 막 뭘 말하는 걸까요? 집중하고 거기에 내 우선순위를 둬버리니까 그게 이루어질 수 있는 거예요.
근데 우리의 인생이 너무 우리는 끝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착각하고 살아요. 근데 우리의 인생도 한계가 분명히 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근데 그때도 너무 멀리 생각하고 있는 경우들이 참 많아요.
여러분 우리 주변에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죽음의 현장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내가 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 사람을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요. 내 생을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이 다급하거든요. 내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터인데 그때 내가 뭐라고 말씀드릴까 마치 시험 기간을 앞두고 있는 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처럼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요.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2천년 전 기독교가 어디에서 집중적으로 성장했는지 아십니까? 카타콤이라고 하는 무덤 속이었습니다. 핍박을 당하면서 다들 카타콤으로 들어갔잖아요. 근데 그 카타콤이 우리나라하고 전혀 다른 지역이기 때문에 거기는 막 몇 층까지도 파고 들어가가지고 무덤을 만들었대요. 이해가 좀 되지 않았는데 책 내용을 보니까 이렇게 책들을 읽어보니까 그 토양 자체가 이렇게 파기가 좋은데 파고 공기가 딱 접해지는 순간 얘가 딱딱하게 굳는 재질이라 그러니까 땅을 파고 들어가기가 편하고 조금만 말리면 얘가 딱 굳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시신이 이렇게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되는 순간 몸에서 모든 물들이 다 빠져나가면서 이 물이 나오거든요.
근데 이 응회질이라고 하는 이 토양이 그 수분을 그대로 흡수하면서 냄새도 나지 않게 하는, 그러니까 그 당시에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핍박을 당해서 숨는 곳이 이곳으로 숨어들었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 생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떻게 무덤 속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막 냄새 나고 막 온갖 어떻게 살았지 근데 그렇지 않은 환경이라는 거예요. 물론 너무 캄캄하고 또 솔직히 위생적으로도 좀 좋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그 안에서도 너무나도 많은 질병에 걸리고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 그거예요. 초기에 기독교인들 핍박받았던 사람들이 이 무덤을 자기들의 예배 처소로 삼았다는 겁니다. 그때 예배드릴 때 여러분들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내 옆에 층층이 시신들이 놓여져 있어요.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근데 그 예배를 드리는 그 사람들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에요? 부활 신앙을 확실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이죠. 하나님 우리가 저 사람들처럼 우리도 죽고 저렇게 묻힐 썩어 문드러질 그런 존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우리도 부활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그 안에서 신앙 고백을 하고 그 안에 신앙을 가졌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거기서 끌려나와가지고 원형 극장에서 그들이 죽음을 당하는 그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그들은 담대하게 그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겁니다. 지하 묘소에서 매일매일 자기의 실체를 발견하던 그 사람들은 시신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더욱 붙들고 의지하고 믿을 수밖에 없는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부활에 대한 이 개념을 조금 더 더 깊이 묵상하시고 이게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깊이 되돌아볼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가 지금 나의 인생들을 점검하면서 내가 지금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내가 정말로 주님 안에서 그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나의 삶을 점검하길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시신의 상태에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내신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많은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그 증거 중에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부활의 증인 증거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