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래는 영화 "인사이더 아웃"에 대한 좋은 리뷰글로서 그 출처를 밝히고 간추려서 전재합니다.
2. 이 영화 및 리뷰의 관점과 대구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의하시는 김기태 선생님의 관점이 매우 상통하고 우리의 직관에 호소하는 그 무엇이 있으므로 아울러 김기태 선생님의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be1.co.kr) 방문도 추천합니다.
[출처] 인사이드 아웃 리뷰 : 슬픔이 뭐야, 먹는 거야? (스포有) (심리학 트레이닝 센터,『모든 마음 연구소』) |작성자 알케믹
세계 자체가 변화하며 흐르는 힘은 실로 항거할 수 없이 막강한 힘입니다..
그러면 그에 연동되어 한몸처럼 함께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이 흐르는 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항거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도도한 외부 세계의 흐름에 힘입어 주인공으로 등장하려는 슬픔에게 맞선 것은
세계가 운행하는 거대한 힘에 저항한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 결과 라일리의 자아는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 안에서는 일어나고 있지 않는 걸까요?
긍정과 열심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문화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라일리와 같은
내적인 파국 상태에 처해 있는 이웃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그게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지요..
긍정적이고 행복하고 싶어서 싫은 감정들을 억압한 결과,
우리들 내면의 본부에 놓인 계기판은 라일리의 것처럼
회색빛으로 삭막하게 굳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 야.. 시..시발 이거 왜 이래? 왜 안 움직여?! ....대체 누구 책임이야??
우리의 가슴에는 감정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 하나가 있어서,
싫은 감정의 출입을 막고자 이 문을 닫아버리면
좋은 감정까지도.. 그리고 그 밖의 다채롭고 독특한 여러 감정들까지도
함께 차단되어 버리게 됩니다.
라일리의 환경 변화에 따라 일어난 정당한 슬픔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려 했던 기쁨이의 철저한 실패를 떠올려보세요.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기쁨이는..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숙고해보게 됩니다.
과연 늘 기쁜 것만이 행복하고 건강한 것인가?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무슨 힘이 있겠어?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기운내기 힘든 판에.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외면해 왔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진 힘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던 우리 외부의 현실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라일리의 현실이 180도 달라졌던 것처럼 말이지요.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외면돼 왔던 감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감정과 연동되어 있는 세계 자체의 막강한 힘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 개인의 힘이 아닌, 세계의 힘에 의해 나의 상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변화의 추동력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라 결정내리고, 그 아이디어의 전구를 자신 내면의 계기판에 굳게 꽂아 넣습니다. 그 목표가 달성되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해하지 않으리라 다짐이라도 하듯이 말이지요..
혹은 어떤 이들은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나면, 아니면 직장을 옮기고 나면, 근사한 집이나 차를 소유하고 나면 행복한 핵심기억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전구를 계기판에 꽂아 넣습니다.
물론 무언가 좋은 것을 갖기로 결심하거나, 멋진 아이덴티디를 갖기로 결심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고,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요소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심의 동기가 <슬픔을 느끼기 싫어서 or 우울함을 치우기 위해서 or 불안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어서> 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집니다..
* 카페지기 부연 : 즉 부정에서 긍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긍정에서 긍정으로 가는 것이지요..
명백히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배제하기 위한 결정이 라일리를 파국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기 위해 그렇게 결정을 내린다면 라일리와 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억압해 온 감정, 바로 그 감정만이 우리의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뻘 생각, 잘못된 판단, 편협하고 제한적인 신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있습니다.
억압되었던 마음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중과 접촉의 회복은, 뻘 생각을 곧바로 그치게 합니다. 왜냐하면 뻘 생각은 애초에 그 마음을 계속 억누르며 살아가기 위해 동원된 '유사 논리적 사고(pseudo-logical-thinking)'였기 때문입니다. 유사 논리적 사고란 쉽게 말하면, 겉보기론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을 말합니다. (ex : 라일리가 엄마 지갑에서 카드를 훔칠 때 버럭이 왈.. "흥! 이딴 데로 이사를 와서 우리를 엿먹였으니 이 정도 보상은 당연히 받아야지!")
억압됐던 감정이 존중받기 시작하면, 뻘 생각은 존재의 근거 자체를 상실하기 때문에 너무나 간단히 휘발성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내가 지금 놓인 상황에 꼭 맞는 적절하고 유효한 사고로의 지혜로운 전환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라일리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반면에 자기 자신의 감정을 대면하고, 존중 속에 그것을 경험하기만 한다면 나의 상황에 꼭 맞는 판단을 내리고 선택을 내려주는 놀라운 지혜는, 다름 아닌 우리 안에서 제한 없이 샘솟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감정은 치유의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상당수의 전문가들조차도, 더이상 우울해 하지 않는 것, 더이상 화를 내지 않는 것, 더이상 불안해 하지 않는 것을 치유라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도 경험하지 않게 만드는 것을 치유라 정의내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는 심각한 오해입니다. 이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치유에 대한 정의부터 새롭게 다시 내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치유에 대한 잘못된 정의 : 더이상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
* 치유에 대한 올바른 정의 : 하나의 감정에만 치우쳐 고정되지 않고, 여러 감정이 두루 자리바꿈하며 흐를 수 있게 되는 것. 그러므로 치유란 상황에 적합한 마음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자유로이 경험될 수 있도록 마음을 허락하는 것.
강아지가 멍멍 짖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기린이 목이 긴 데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처럼, 토끼의 꼬리가 짧은 것이 결함이 아닌 것처럼, 우리 안의 소위 말하는 부정적인 감정들 역시 본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존귀한, 대체불가능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본디 하자가 없는 것들을 고칠 수 있을 리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새겨야 합니다. 아픈 것이란 흐르지 못하는 것이고, 치유란 흐르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마음이 자유로이 흐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를 조건없이 받아들이는 친절한 태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위에 첨부한 TEDx 강의 영상 내용을 참고해보세요 :)
그러므로 감정이란 설사 그것이 부정적인 감정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치유의 대상이 아닌, 누려져야 할 향유의 대상인 것입니다.
만일 오직 여자들만이 가득한 별이 있다면, 그 별에는 여성이 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여성와 대비되는 성으로서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자를 여자라 불러야 할 이유가 전혀 없겠지요. 자연 그 별에 사는 여자들은 자신들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별엔 여자들로 가득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그냥 사람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여자 사람'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자만 존재하는 별이라 해도 마찬가지겠지요.)
만일 행복만이 가득한 세상이 있다면... 만일 평화만이 가득한 세상이 있다면... 만일 끝없는 풍요로만 가득 차 어떠한 결핍도 없는 세상이 있다면... 제가 무슨 말을 할 지 다들 짐작이 되시죠? 그런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바로 그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되는 것들은 서로의 존재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 카페지기 부연 : 진정 하나님이라면, 진정 보편적이고 편재하는 진리라면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과 기쁨만을 추구하는 것은 이루어져도 반쪽이지요..있을 건 다 있는 것이 온전함이 아닐까요...그래서 부처도 반쪽이고 중생도 반쪽일 것입니다..삶과 죽음이 그냥 아무 노력 없이 온전하게 있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