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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단한 로마사
정치사적으로 고대는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끝이 나며, 근대는 1453년 동로마(비잔틴)제국이 멸망하고 시작된다. 그러니까 476년부터 1453년까지 약 1,000년의 시대를 중세라고 말한다. 로마에 대한 역사적 지식은 중세기독교시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유럽의 역사는 로마제국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럽은 로마를 중심으로 편성되었었다. 로마는 BC 8세기 경 조그만 도시국가로 출발했지만,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시기에는 서로는 스페인, 동으로는 인도국경, 남으로는 아프리카 북부까지 이어지는 거대 제국으로 성장하며, 1세기 중반에는 영국까지도 로마의 속국이 된다. 독일의 중서부에 쾰른(Koeln)이라는 큰 도시가 있는데, 그 말뜻은 식민지라는 뜻으로, 로마에 의해 건설된 이래 2,000년이나 되는 도시역사를 가지고 있다.
395년 경 로마
BC 510년부터 로마는 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공화정의 시기가 되었다. 공화정(Republic)은 어원적으로 res(사물, 부)와 publica(공동의)의 합성어로 ‘공동의 것’, ‘공동의 재산’(commonwealth)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국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럿에 의해 운영되고 관리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오늘날 공화정은 국가가 국민의 것이라는 민주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되었지만, 당시의 공화정은 원로원 중심의 귀족들이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과두정치를 의미했다. 로마는 자신의 나라가 공화정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로마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사, BC. 100 – BC. 44)가 전쟁으로 국가의 영웅이 되어 황제와 같은 권한을 행사했을 때 그의 심복인 브루투스가 그를 암살하게 되는데, 암살의 동기는 공화정을 지키고 싶었다는데 있었다. 그때 카이사르가 쓰러지며 했다는 유명한 말 “브루투스, 너마저도”는 인생의 덧없음과 인간에 대한 신뢰에 한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말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위대한 영웅이 황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끊을 수 없었다. 예수그리스도가 활동하던 시기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칭호를 듣는다. 이때부터 로마는 공화정을 폐하고 제정 시대로, 황제시대로 돌입한다(BC. 27 – AD. 476).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 즉 ‘존엄한 자’라는 이름의 황제가 되는데, 그 후 200년은 여러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의 시기가 도래한다.
하지만 거대한 로마를 영구히 지탱하기는 쉽지 않았으며, 그것도 한명의 황제가 통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395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이후 로마는 동과 서로 나뉜다. 처음에는 단순히 분할통치를 목적으로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독립된 국가로 성장해간다. 300년경에는 로마의 국경에 점차 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특히 아시아 쪽에서 중국 한나라에 쫓긴 흉노(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게르만인 들을 압박하고, 이들은 다시 로마 안으로 쫓겨 들어와 국경에서 전쟁을 일삼게 되었다. 말하자면 4세기에 게르만의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팍스 로마나는 깨지고 이제부터 지난한 고난의 시기가 시작되는데,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결국 서로마는 망하고 만다.
로마는 어떻게 그 방대한 국토와 이민족들을 큰 잡음 없이 통치할 수 있었는가? 로마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로마가 정복지의 문화와 종교 등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데서 찾는다. 로마 스스로 다신교를 인정하고 있었고, 그들의 정복지에서 숭배되는 신들을 용인하였다. 기독교 역시 그들에게는 원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기독교가 로마에 문제가 되는 것은 기독교가 일신교였다는 사실이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여타의 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종교였으며, 이는 모든 이민족들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네로의 박해 등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진다. 그런 박해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4세기 로마에서 국교가 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2. 중세의 기독교
392년 기독교는 유럽 유일의 대국인 로마에서 국교로 승인되었다. 로마에서의 기독교 박해는 이제 더 이상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서로마는 그 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민족들의 침략에 무너지고 만다. 로마황제의 강력한 힘으로 지탱되던 유럽의 정치공동체는 무너지고, 각 지역은 자신들만의 정치공동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 지역마다 제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프랑크왕국은 그 중 하나다.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전신이 되는 프랑크왕국은 더 이상 로마의 간섭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한다.
로마제국이 멸망했다고 해서 로마의 국교였던 기독교가 쇠퇴한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는 그 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유럽이 각 나라들로 쪼개지기는 했지만, 그런 쪼개진 나라를 기독교는 하나로 통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없어진다고 종교가 쉽게 업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나라는 인간의 외면을 지배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각 나라 제후들은 로마교황과의 관계에서 경쟁관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로마교황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로마교황은 안정적 지배를 위해 세속 군주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한 인물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카알대제(샤를마뉴, 800년경)이다. 그는 오늘날의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독일 대부분을 이방인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기 나라를 ‘신성로마제국’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로마제국의 부활을 알리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통치가 교회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였다.
카알대제 사후 국가는 동서로 나뉘는데, 서쪽은 프랑스가, 동쪽은 게르만이 지배하게 된다. 동프랑크, 즉 독일은 오토황제가 즉위한 변경의 헝가리를 물리치면서 교회와 국토를 안전하게 보호한다(962). 교황은 이를 인정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칭호를 동프랑크, 즉 독일에 선사한다. 이 시기를 독일 제1제국시대(962-1806)라고 한다(제2제국: 1871-1918, 제3제국: 1933-945).
3.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즈음의 유럽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자. 프랑크왕국이 분열되어 서프랑크에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민족국가를 형성하고 있었고, 영국도 자기만의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통일왕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수많은 영주들이 지배하는 소규모 국가들이 느슨한 형태의 제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이름으로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질에 있어서 황제가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지역 제후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한편으로는 로마의 교황을 의식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의 영주들을 의식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 금인헌장(1356): 교황의 승인 없이도 독일황제를 승인할 수 있다는 규정
이 규정에 근거하여 독일의 황제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독일 각 지역의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합스부르크왕가가 세습적으로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형식적이나마 제후들의 승인을 얻어야 했으며, 또 중요한 결정사항은 제후와 도시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제국의회에서 수행되었다. 물론 모든 제후나 영주들이 황제를 선출하는데 참여한 것은 아니다. 일곱 명의 제후가 황제를 선출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래서 이들을 ‘선제후’라고 하여 좀 더 많은 명망과 권한을 가졌다.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선제후는 대주교였으며, 이들이 로마교회를 대리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속군주로는 보헤마아(체코), 팔츠, 작센 그리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영주들이었다. 이 일곱 선제후를 ‘제국의 7기둥’이라 불렀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서 황제를 선출하고, 거기서 대관식을 가졌다.
㉡ 제국의 도시들
제국 내에는 점차 현대적 도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도시들은 황제의 직접적 통치를 받았지만, 상당한 수준의 자치가 이뤄지고 있었다. 도시는 상업과 무역이 중심을 이룬다. 이 말은 중세사회를 지탱하던 봉건제도로는 유지될 수 없는 새로운 요소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의 봉건제는 영주가 사는 성을 중심으로 광활한 농업지대로 이뤄져 있었다. 주민의 대다수는 농업을 주로 하는 농노였으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도시기능을 하는 성안에 거주했다(10%이하).
하지만 상업의 발달은 독자적인 도시의 발달을 가져왔다. 도시에는 아랍, 아시아 등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품을 수입하거나 수출해서 부를 챙긴 사람들이 자리 잡았다. 이들은 인근의 영주들이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체적인 법체계와 세금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또 도시들 간에 협정을 맺어 영주들을 견제하고 자신의 힘들을 강화했다, 예컨대 한자동맹(브레멘, 뤼벡, 함부르크, 전성기 때 100여개, 1300년 경 성립)과 슈바벤 동맹(울름, 아우구스부르크 등, 전성기 때 32개 도시, 1331)은 대표적인데, 이들은 점차로 황제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치도시로 발전해 가고자 했다.
제국의 도시를 지배하던 시의회는 교회의 문제가 사회적으로 확산될 때를 제외하고는 종교적인 문제에 가능하면 관여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세속정치와 종교가 분리될 수 있는 지반이 조성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세와는 다른 인간상을 만들어 냈다. 중세는 교회와 국가공동체에 철저히 귀속되는 인간상을 설파했다고 한다면, 도시의 시민들은 점차 모든 공동체 보다 앞서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습득해 나간다. (부르주아의 탄생, 근대 개인의 탄생을 알림)
4. 16세기 초 교회의 부패와 신학
㉠ 교회:
독일제국의 개혁의 목소리는 교회개혁의 목소리로도 나타났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부패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16세기 문턱에 교황이 된 알렉산더6세(1492-1503), 율리우스2세(1503-1513), 레오10세(1513-1521) 등은 그 부패의 끝을 보여준다. 예컨대 알렉산더6세는 교황에 선출되기 위해 막대한 양의 돈을 뿌려 추기경들의 표를 샀으며, 교황이 된 후 그 돈을 회수하기 위해 자기 부하들도 독살하고, 성직을 매매하며, 사형수를 돈을 받고 풀어주고, 근친상간을 눈감아주었으며, 발렌시아의 추기경인 ‘피터 멘도자’에게는 돈을 받고 ‘미소년’을 입양할 수 있게 허락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부패는 교황이나 고위 성직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위성직자들도 그런 부패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사제의 혼외관계는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 ‘사제의 자녀’라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았으며, 신학수업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들이 돈으로 성직을 받았으며, 이들은 죽은 자의 영혼구원을 위해 기부를 종용하고 또 그를 위해 침묵미사를 드려 부를 축척하였다.
특히 16세기 초에는 교회의 목회 직임의 의식이 더 약화되고 교황청의 세금수납은 더 노골화 되었다.
“심사숙고해서 고안해낸 요금제도, 즉 세금, 기부금 그리고 면죄부로 교회금고를 채우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로마교황청은 새로 확정된 감독 혹은 수도원장에게서 소위 초년도 성직 상납금을 징수했다. 이것은 새로 받은 성직록 중에서 첫 일년 수입의 절반을 교황청에 내어 놓는 것이다. 비어 있는 자리에 대한 성직록은 교황이 관여하여 1년 치 중 6개월간의 수입을 로마가 차지했다. 감독들은 교황이 그들에게 수여한 권위를 상징하는 대주교용 후두비용, 어깨띠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최고위성직의 위임은 교황에게 허용된 소위 ‘목자적 유보’(reservatio pectorals: 진실을 말할 의무를 피하기 위해 속으로는 신에게 진실을 말하고 겉으로는 모르겠다고 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경우 한 후보에게 약속된 성직은 교황의 은밀한 지시 하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한 다른 후보에게 주어지게 된다. 로마에는 은전과 성직록을 관장하는 교황청의 한 부서(Datarhaus)가 있었다. 이곳은 교황의 사면, 은총의 서신, 특별법 그리고 특혜를 승인하고 판매하도록 설치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참회부와 면죄부도 교황의 금고를 채웠다.”
교회의 뜻 있는 인사들은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교회의 개혁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위클리프(1320-1384)는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면서 신앙과 구원에 대한 최고의 권위가 성경에 있다고 함으로써 교황 권으로부터 영국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독립시키고자 했다. 그는 1378년 가난한 신부들을 민중 속으로 보내 복음 설교를 하게 했으며,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사업도 하였다. 그리고 성찬에 대중을 참여시키는 설교를 하기도 함으로써 로마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1381년 그의 영향을 받은 소작농들이 백년전쟁이후 늘어난 높은 세금에 반란을 일으켜(와트 타일러난) 왕과 귀족들을 위태롭게 하면서 그의 공개적 삶도 위축되었다. 그가 죽은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그를 이단자로 정죄하여 그의 유해와 서적을 불태워 템스 강에 흩뿌렸다고 한다.
얀 후스(1369-1415)는 오늘날 체코에 속하는 보헤미아에서 태어나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학자 겸 성직자였다. 그는 초기기독교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체코어 철자법을 개량하여 찬송가를 보급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건으로 독일인 학생들과 교수들이 반발하여 프라하대학을 떠나게 되고, 그 후신으로 라이프치히 대학을 세우게 된다.) 그는 위클리프를 이어받아 교회의 재산권을 몰수해야 한다고 했으며, 면죄부 판매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그리고 성찬예식에서 평신도들도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고 하여 전통적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가톨릭교회는 이를 도전으로 받아들여 프라하총장에서 해임하였는데, 그는 시골로 들어가 그곳에서 농민계몽활동에 전념하였다. 콘스탄츠공의회에서는 그를 호출하여 이단으로 정죄하고 불길에 던져버렸다. 이 사건으로 체코인들은 격렬히 반발하여 시의회 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는 제1차 창문투척사건이 발생했으며, 체코인들의 자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의 개혁은 개인차원에사만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도 제기되었다. 예컨대 교회의 2대 군력기관으로서 교황권을 견제해왔던 공의회가 교황권에 대항하여 교회개혁을 소리 높였다. 특히 콘스탄츠(1414-1418)와 바젤(1431-1449)에서 개최된 공의회가 중요하다. 콘스탄츠공의회에서는 위클리프를 단죄하고 요한 후스를 화형에 처하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끝내기 위해 교황보다 공의회의 권위가 더 크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그리고 바젤공의회에서는 온건한 후스주의를 용인하였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설교, 평신도에게의 배잔 허용, 교회의 세속적 부의 철폐 등을 요구하였고,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가 더 우선적 권위를 갖는다고 천명하였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교황 역시 공의회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반격했다. 교황 피우스 2세는 1492년 공의회주의와 콘스탄츠공의회를 “저주받아 마땅하며 과거에 없던 악행”이라고 선언하며, 그 이전에 교황 니콜라우스 5세(1447-1455)는 오스트리아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와 빈 협약을 체결하여 바젤공의회를 약화시킨다.
하지만 교황의 이런 반격이 거대한 물결을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돈을 모으기 위한 교황과 교회의 집요한 요구는 이 시기 반발의 주요인이었다. 면죄부는 그 중심에 있었다. 13세기 이후 다양한 면죄부가 발행되었는데, 그 기본적 의미는 죄인이 참회를 할 경우 사제를 통해 자유롭게 되지만, 본인은 그에 합당한 참회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면죄부를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이러한 참회행위는 살아생전에 다 완결할 수 없었고, 죽어서 연옥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보수를 지불하고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아 놓은 잉여의 보화창고에서 특별히 조제된 참회행위를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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