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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동서원(泰東書院) 원문보기 글쓴이: 權甲相
ㅜ附錄 行狀 및 墓碣銘 (부록 행장 및 묘갈명)
墓碣銘 維我國朝之士의 道學文章엔 或有品差하고 而其兼有而不偏者는 自昔無幾人矣러니 而至于近世兼此二者者하니 卽故秋淵先生權公이 是已라 公의 諱는 龍鉉이요 字는 文見이며 秋淵은 號也라
우리나라 선비의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는 간혹 품격에 차등이 있다. 따라서 그것을 모두 갖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 이 두 가지를 겸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故추연선생(秋淵先生) 권공(權公)이다. 공의 휘는 용현(龍鉉), 자는 문현(文見), 추연(秋淵)은 호이다.
權氏는 安東人으로 肇自高麗太師 諱 幸이러니 而後에 有文坦公一齋諱漢功과 忠憲公柳菴諱仲達이 最著于麗朝라 入我朝하여 諱 濬은 文弼善이며 寒岡鄭先生門人으로 世稱霜嵒先生이라
권씨(權氏)는 안동(安東)이 본관이며,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의 태사(太師) 휘 행(幸)이다. 그 뒤로 문탄공(文坦公) 일재(一齋) 휘 한공(漢功)과 충헌공(忠憲公) 유암(柳菴) 휘 중달(仲達)이 고려조에서 가장 저명(著名)하였다. 우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 휘 준(濬)은 문과(文科)로 필선(弼善)을 지냈으며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의 문인으로 세상에서는 그를 상암선생(霜嵒先生)이라고 일컫는다.
三傳하여 諱宇亨은 文牧使이며 號凉閣으로 尤菴宋先生의 門人이다 三傳하여 諱佖中은 號納新齋라 하며 屛溪尹先生門人으로 於公에 六世라 高祖曰 永夏는 通德郞으로 號梅軒이며 始徙草溪之柳下里하다 曾祖曰 秉準이며 祖曰 度熙오 考曰 載直은 號晩松이라 하고 有遺稿하다 妣曰 草溪鄭氏는 邦潤의 女로 高宗己亥에 生公하다.
3대를 전하여 휘 우형(宇亨)은 문과로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호는 양각(凉閣)으로 우암(尤菴) 송선생(宋先生)의 문인이다. 3대를 전하여 휘 필중(佖中)은 호를 납신재(納新齋)라 하며 병계(屛溪) 윤선생(尹先生)의 문인으로 공에게는 6세조이다.
自幼岐嶷莊重하야 不妄言笑라 甫學語에 誦習千字文하고 始學塾師에 勤於課業이라 十餘歲에 遍讀通史及子書하며 善屬詩文이라 致書請敎於是菴李公하니 是翁이 亟稱호되 以舞勺妙齡에 嚴於邪正之分하고 發言近道하니 何處得來云이러라 其族兄覺齋公이 見公甚奇愛之하야 携與同處於鵬山山房하야 使食淡攻苦하니 見解益進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영리한데다 장엄하고 정중하여 말하는 태도가 경망스럽지 않았다.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에 천자문(千字文)을 외웠고 처음 글방 선생에게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학업을 열심히 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10여 세에 사서(史書)와 제자서(諸子書)를 두루 통독하였으며, 시문(詩文)도 잘 지었다.
十四五歲에 連遭祖考妣喪호되 侍大人公于廬次에 執禮應對를 夙夜甚謹이라 因大人公讀禮하야 考究家禮增解와 及備要等書하야 而定其從違하고 明其可行하야 隨得隨錄하야 而名曰 喪禮ꝯ錄이라 至於深衣續鉤之義하여는 則爲世之聚訟者하야 而遽立說하야 名曰 臆解라 하니 盖出於創見也어늘 見者多動色이러라
14~15세에 조부와 조모의 상을 잇따라 당하였는데 대인공(大人公)을 여차(廬次)에서 모시면서 예를 행하고 응대하는 일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매우 조심성 있게 하였다. 대인공이 예서(禮書)를 읽을 때를 인하여 가례증해(家禮增解)와 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의 책을 참고하고 연구하여 따라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하고 행해야 할 것을 밝혀서 터득하는 것마다 기록하여 책 이름을 상례쇄록(喪禮𤨏錄)이라고 하였다.
嘗往謁艮齋田先生于華島하고 講質心性之義하야 備聞旨訣하고 服膺從事하니 有記聞錄이라 又謁志山金先生하니 志翁이 一見에 期許之하야 以平日之志事及處世之時義로 申申告語之러라 又從遊于吳石農 崔欽齋 成悳泉 金杏海諸賢과 講磨道義하야 多有資益이러라
일찍이 화도(華島)로 간재(艮齋) 전선생(田先生)을 찾아가서 뵙고 심성(心性)의 뜻에 대하여 질문과 강론을 벌였다. 그 속뜻에 대하여 잘 듣고 잠시도 잊지 않아 실천에 옮겼으며 이때 그 사실을 기록한 기문록(記聞錄)이 있다.
自此로 常靜居山房하야 以聖賢爲師的而斷絶衆歧러라 致力於四子六經程朱全書性理大全諸書하고 其有餘力이면 則泛覽諸家하야 博極無餘하며 晩年所主는 全在朱子語類니 入其中而盡其精力하야 先儒所論理氣先後와 四端七情과 心性理氣之說을 折衷而辨釋之하고 古今典禮도 亦有考證而立說하야 使後學不失趨向之正하다 嘗曰 道與文은 本非二途니 當以朱子之文與道俱至者로 爲準이 可也라
그 뒤로 항상 산방(山房)에서 조용히 거처하면서 성현(聖賢)을 배우는 것으로 목표로 삼고 다른 길은 아예 단절하였다. 사자육경(四子六經)과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전서(全書)와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에 주력하고 여력이 있을 때에 제가(諸家)의 글을 두루 보았으며, 만년에는 오로지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주력하였다. 그 속에 들어가서 심력(心力)을 다하여 선유(先儒)가 논의했던 이기(理氣)의 선후와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심성이기(心性理氣)에 관한 학설을 절충하여 변론과 해석을 더하였고, 옛날과 오늘날의 전례(典禮)도 고증하여 학설을 세움으로써 후학으로 하여금 나아갈 방향의 정확성을 잃지 않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은 본래 두 갈래 길이 아니다. 마땅히 주자(朱子)가 언급한 ‘글과 도는 함께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한 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하였다.
其爲文也엔 惟務理勝而辭達하며 氣大而法正하니 汪洋紆餘는 深有得於紫陽步趨라 一夜에 夢見栗谷先生而得承其接引이어늘 則益加奮勵而特致宗慕하고 尤嚴於尊攘之義러니 當國社屋에 倭讎入國하야 洋禍滔天하고 至於易姓削髮之變하야 公이 一一嚴斥之하고 而固守舊制라 慨然有隱遁之志하야 搆雲華堂于雲峴山下하고 以寓宗仰雲谷華陽하며 又以志伊學顔祖雲宗華八字를 揭壁而加勉焉하다
공이 글을 지을 때는 오직 도리가 우세하고 문사(文辭)가 활달하며, 기운은 장대하고 필법은 엄정하기를 힘썼다. 넓고 커서 문장이 활달한 것은 주자의 문장 솜씨를 깊이 터득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에 율곡선생(栗谷先生)을 뵙고 이끌어 주는 꿈을 꾸었다. 그 뒤로 더욱 분발하여 힘썼으며, 특히 종모(宗慕)하는 마음을 가졌다. 존주양이(尊周攘夷)하는 의리에 더욱 엄격하여 나라가 망하고 왜수(倭讐)가 들어와서 엄청난 재앙이 하늘에 닿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성씨를 바꾸고 머리를 깎는 변고에 이르러서는 공이 낱낱이 엄격하게 배척하고서 예전 제도를 지켰다. 그러나 분개하여 한숨지으며 은둔할 뜻을 갖고 운현산(雲峴山) 아래에다 운화당(雲華堂)을 짓고 운곡(雲谷)과 화양(華陽)을 존숭하여 추앙하였고, 또 ‘이윤을 지향하고 안자의 학문을 추구하며 운곡을 조술하고 화양을 높인다.’라는 여덟 글자를 벽에다 걸어두고 더욱 학문에 힘썼다.
受業門人이 又搆一屋于柳下里前하고 爲先生藏修之所호되 則扁曰 泰東書舍라 하니 盖因其山名이나 而實寓保守東方道術者也라 遠近來學者를 舍不能容이나 而質問經子疑義를 公亦孜孜引接하고 諄諄啓發하야 期深透悟하야 使各有成就焉하니라
수업한 문인들이 또 한 채의 집을 유하리(柳下里) 앞에 짓고 선생께서 학문을 연마할 수 있는 장소로 삼았는데 편액을 태동서사(泰東書舍)라 하였다. 이는 대개 그 곳 산 이름을 인용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의 도술(道術)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멀고 가까운 곳으로부터 찾아와 글을 배우려는 자가 많아 서사(書舍)에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이 경서(經書)나 제자서(諸子書)에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면 공은 부지런히 이끌어주고 자상스럽게 식견을 열어 주어서 깊이 깨달아 각각 성취되는 바가 있기를 기약하였다.
性又至孝하야 事親에 一以承順이러니 大人公이 晩有眼眚이어늘 則公이 左右承奉하야 保如嬰兒하고 及其侍病에 而除穢滌汙를 必以躬親하야 夜不交睫者數旬이나 而不少懈라 數歲之內에 連遭內外艱하야 哀毁頓絶하고 執制如禮하야 前後如一하며 逐日哭墓하고 朔望展墓호대 至老不廢러라
성격이 또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한결같이 뜻을 받들었다. 대인공이 만년에 눈병이 있었는데 공의 좌우에서 수발을 들면서 마치 어린아이를 보호하듯 하였고 병을 간호할 때에 미쳐서는 오물을 씻거나 제거하기를 반드시 몸소 하였으며 밤에도 눈을 붙이지 못한 지가 수십 일이었으나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大人公의 手植杏樹下에 築壇建碑하고 朝夕盤桓而寓慕하다 母夫人嫁時之籠을 歲久廢置러니 則爲糊塗作櫃하야 置之座側而銘以識之하야 以寓終慕하고 及夫日哀如袒括이러라
선친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 아래에다 축대를 쌓고 비를 세운 뒤에 아침저녁으로 거닐면서 사모하는 뜻을 보였다. 모부인(母夫人)이 시집올 때에 가져온 장롱이 오래되어 버려두었던 것을 종이를 붙여서 궤를 만든 다음 자리 곁에다 두고 명(銘)을 적어 기록해 두어서 종신(終身)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보였으며 제삿날이 돌아오면 초상 때와 마찬가지로 슬퍼하였다.
友愛一弟하야 有無相同이라 處宗族以敦睦하고 敎子孫以勤儉이라 至於奉先之節은 誠意交孚而節度不差하고 持身制行은 規度甚嚴하야 必以古道而絶流循之態라 其接賓友에 溫恭誠信하며 每自謙退하야 處之以愚라가 而於論理論事에 必明辨精覈하야 一有所執則確乎不拔이라
아우와 우애하여 있고 없는 것을 같이 하였다. 종족(宗族)들에게는 돈목(敦睦)으로 대하고, 자손들에게는 근검(勤儉)하기를 가르쳤다. 선조(先祖)를 받드는 예절은 성의를 바탕으로 하여 절도에 어긋나지 않았고, 몸가짐과 행동에는 법규를 매우 엄격하게 하여 반드시 예전 도리에 준하고 세속을 따르는 태도는 전혀 갖지 않았다.
持論에 常主寬厚和平하야 不爲偏邪乘激하다 而至於義利邪正之辨하면 則如斬釘截鐵而不爲苟循이라 故或有痼於黨習而侮毁先賢이나 干犯名義而强辯飾非者하면 則辨斥之甚嚴이라
논리를 주장할 때에는 항상 너그럽고 화평한 것을 위주로 하여 정직하지 못하거나 사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의(義)와 이(利), 사(邪)와 정(正)을 변론할 때에 이르면 언행에 매우 과단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구차하게 책임이나 모면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간혹 당파의 습성에 젖어 선현(先賢)을 헐뜯거나 명의(名義)를 저촉하면서 강변을 늘어놓아 잘못을 꾸며대는 자가 있으면 따져서 배척하기를 매우 엄격하게 하였다.
公은 以天年으로 卒于丁卯至月十九日하야 葬于杏亭山壬坐하다 會葬者千數百人으로 加麻者數十人이러라 配는 驪州李氏鍾璟女로 先公歿하니 墓別葬南山亥坐하다
공은 천수를 누리고 정묘년 11월19일에 졸하여 행정(杏亭) 뒷산 임좌(壬坐)에 장례를 치렀다. 장례에 모인 사람이 1천 수백 명이었고 가마(加麻)한 자도 수십 명이었다. 부인은 여주 이씨(驪州李氏) 종경(鍾璟)의 딸인데 공보다 먼저 졸하였으며, 묘는 남산(南山)의 해좌(亥坐)에 별도로 장사하였다.
四男은 淳道 淳義 淳杓 淳正이며 二女는 李陽燮 金鍾厚이며 後晉陽河氏의 一男은 淳兌이며 二女는 姜秉贊 林碩元이다 長房男은 曾相 圻相이며 二房男은 旭相 澤相 學相 國相이며 三房男은 麟相 攸相 甲相 東相 汶相이며 四房男은 杜相 沃相 吉相 玖相이며 季房男은 佑相 武相이다 外孫은 李粲圭와 哲圭, 聖圭며 金寬永과 福永, 謹永이며 姜南圭, 相圭와 林昌洙이며 曾孫은 不錄이라
4남은 순도(淳道), 순의(淳義), 순표(淳杓), 순정(淳正)이며, 두 사위는 이양섭(李陽燮), 김종후(金鍾厚)이다. 후실(後室) 진양 하씨(晉陽河氏)가 낳은 1남은 순태(淳兌)이며, 사위는 강병찬(姜秉贊), 임석원(林碩元)이다. 큰아들의 손자는 증상(曾相), 기상(圻相)이며, 둘째 아들의 손자는 욱상(旭相), 택상(澤相), 학상(學相), 국상(國相)이며, 셋째 아들의 손자는 인상(麟相), 유상(攸相), 갑상(甲相), 동상(東相), 문상(汶相)이며, 넷째 아들의 손자는 두상(杜相), 옥상(沃相), 길상(吉相), 구상(玖相)이며, 막내아들의 손자는 우상(佑相), 무상(武相)이다. 외손자는 이찬규(李粲圭), 철규(哲圭), 성규(聖圭)와 김관영(金寬永), 복영(福永), 근영(謹永)과 강남규(姜南圭), 상규(相圭)와 임창수(林昌洙)이다. 증손(曾孫)은 수록하지 않는다.
竊念公之樹立은 洵近世所無也라 輔弼皇猷하니 宜爲分職而遭値罔極하야 惟與世禍血戰이나 止扶一線於窮陰하니 是固可憾이라 然大集將布矣라 嘉惠之功이 可及來人하니 則公之降於今日學界者가 天意豈偶然哉아
門人權玉鉉君이 手述行將하야 請余以爲牲石之文하니 余嘗蒙公眷愛而師事之者也니 今於此役也에 豈敢自外哉아 然以拙文으로 不足以形容萬一이라 故固辭也나 及讀其狀文에 善記事實而公之儀範을 怳然如復見하니 尤切景慕之心하야 不顧僭妄하고 就狀檼括如右라 系之以銘하노라 銘曰
문인 권옥현(權玉鉉)군이 직접 행장(行狀)을 지어 가지고 나에게 비석에 쓸 글을 청한다. 나는 일찍이 공의 사랑을 받고서 스승으로 섬겼던 자이니, 지금 이 역사에 어찌 감히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형편없는 글 솜씨로 만분의 일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굳이 사양하였으나 그 행장을 읽어봄에 미쳐서 사실(事實)을 잘 기록하여 공의 모습을 어렴풋이 다시 뵙는 듯하였다. 그래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참람하고 망녕스러움을 고려하지 않고 행장을 간추려서 적기를 위와 같이 하고 명(銘)을 이었다. 그 명은,
天眷我東하여 篤生我公이라 自幼好學하여 勤孜用功이라 期以遠大하여 遍謁名碩하고 講質經禮하여 靡不通格이라 濂洛關閩에 委身師則하고 性理典禮에도 殫心究刻이라 夢見栗翁하고 承其接引하여 益加奮勵하며 宗慕誠盡이라 道學은 崇深하고 文章은 汪洋이라 天地純陰이나 克扶線陽이라 律己莊嚴하고 事親至孝라 敎誨後進에 罔或骫骳라 斯文棟樑이요 士林宗匠이라 通國人士는 孰不宗仰이리오 屠維大荒落 大寒節에 密陽 朴孝秀는 謹撰하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사랑하여 중후한 우리 공을 낳으셨다.
行狀(추연선생행장)
先生의 諱는 龍鉉이오 字는 文見이라 別自署以 秋淵하시니 盖取潛龍之義也라 我權氏는 系出安東하니 肇自高麗 太師 諱幸하여 而有一齋 文坦公 漢功과 柳菴 忠憲公 仲達하니 著于麗하고 入國朝하여 簪組相承하여 而有文 弼善 濬하니 師鄭寒岡先生하여 光海時有不亂群之節하고 仁祖丙子亂에 以光州牧使倡義勤王이라가 聞和成而歸하여 自後不復仕하니 是爲世稱 霜嵒先生이라.
선생의 휘(諱)는 용현(龍鉉), 자는 문현(文見)이고 자호(自號)를 추연(秋淵)이라 하니, 주역(周易)에서 잠룡(潛龍)의 뜻을 취한 것이다. 우리 권씨(權氏)의 세계(世系)는 안동(安東)에서 나와 고려 태사(太師)휘 행(幸)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로 일재(一齋) 문탄공(文坦公) 한공(漢功)과 유암(柳菴) 충헌공(忠憲公) 중달(仲達)이 있어 고려 왕조에서 명성을 떨쳤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벼슬이 이어져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필선(弼善) 벼슬을 한 준(濬)은 정 한강(寒岡)선생의 제자로 광해군(光海君) 때에 나라를 어지럽힌 무리들과는 어울리지 않은 절의(絶義)가 있었고, 인조(仁祖) 연간의 병자호란에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의병을 일으켜 왕실(王室)의 위급함에 달려가려 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부터 다시는 벼슬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상암선생(霜嵒先生)이라 이른다.
三傳하여 而有文 牧使 于亨 號凉閣하니 師尤菴宋先生이라 己巳之禍에 坐廢六年이러니 後贈左承旨하고 三傳하여 有佖中 號 納新齋하니 師尹屛溪先生하여 以行義累登剡薦하니 是爲六世也라 高祖曰永夏니 通德郞이오 號梅軒이니 有潛德하고 始家草溪之柳下村하니라 曾祖曰秉準이오 祖曰度熙요 考曰載直이니 號 晩松이오 有遺稿하고 妣는 草溪鄭氏 邦潤女라
先生以 高宗己亥十一月二十三日未時에 生于世第하니 先是에 晩松公有夢龍之瑞라 故後因以命名하니라 自幼岐嶷莊重하여 不妄言笑하고 不與群兒遊戲하더니 甫學語에 已誦習千字文하다 晩松公設塾延師以督敎之에 則奉承惟謹하고 勤於課業하여
선생은 고종(高宗) 기해(己亥) 11월23일 미시(未時)에 초계의 대대로 살아온 집에서 태어났다. 이 앞서 만송공이 꿈에 용을 본 상서로운 일이 있었기에 훗날 선생의 이름을 (용현이라)지었다. 어려서부터 숙성하고 중후(重厚)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는 일이 없었고, 보통 아이들과 장난하는 일이 없었다. 겨우 말을 배울 나이쯤에 벌써 천자문을 외워 익혔고, 만송공이 서당을 열고 숙사(塾師)를 모셔와 엄하게 교육하자 부친을 뜻을 삼가 받들어 부지런히 학업에 힘썼다.
非甚病이면 未嘗廢日課하시다 十餘歲에 已遍讀通史及子書하여 綴詩屬文에 多出人意表하다 嘗致書請敎於是菴先生李公에 是菴翁亟稱以舞勺妙齡에 嚴於邪正之分하고 發言近道하니 何處得來오 하고 其族兄覺齋公甚奇愛之하여 携與同處於鵬山山房하여 使食淡攻苦에 見解益進하시다
심한 병이 아니면 일과(日課)를 거른 일이 없어서 10여 세에 이미 통감(通鑑)과 사략(史略) 및 사서(四書)를 두루 읽었으며, 시문(詩文)을 엮을 줄 알아 사람들의 의중(意中)을 벗어난 작품이 많았다. 시암선생에게 편지를 올려 가르침을 청하자 시암옹(是菴翁)이 “10여 세의 어린 나이에 사정(邪正)에 대한 구분이 엄격하고 하는 말이 도의(道義)에 가까우니 어디에서 이런 소년을 얻어 왔을까!” 하면서 매우 칭찬하였다. 선생의 족형(族兄) 각재공(覺齋公)이 남다른 사랑을 쏟아 선생을 데려다가 붕산산방(鵬山山房)에서 함께 거처하며 어렵게 각고의 공부를 하게 하여 식견과 문리(文理)가 더욱 진취되었다.
十四五에 連遭祖考妣喪하여 侍晩松公於廬次할새 執禮應對를 夙宵甚謹하고 因晩松公讀禮하여 從旁考究家禮增解 及備要等書諸說하여 而定其從違하고 明其可行하여 隨得隨錄하여 名曰喪禮瑣錄이라 하고 又以深衣續袵鉤邊之義의 諸說紛紜하여 莫知適從을 別爲之說하여 以衣系之聯衿者當之하여 而有臆解之著하시니 盖出於創見也라 見者莫不動色稱之하니라
14~5세 때에 조부와 조모의 상(喪)을 잇따라 당하여 여막(廬幕)에서 만송공을 모시고 상례(喪禮)의 예를 행하며 응대(應對)하기를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정성을 다하였다. 만송공이 예서(禮書)를 읽는 일을 따라 곁에서 가례증해(家禮增解)와 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의 책에 실린 여러 설(說)들을 연구하여 따라야 할 것들을 결정하고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을 밝혀 적절한 내용을 얻는 대로 기록하여 책이름을 상례쇄록(喪禮鎖錄)이라 하였다. 또 심의(深衣)의 속임구변(續袵鉤邊)의 뜻을 두고 여러 설이 분분하여 어떤 설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 착안, 별도의 설을 제시하여 ‘저고리의 실끈으로 옷깃을 여미는 것’으로 풀어서 심의억해(深衣臆解)를 저술하였다. 이는 모두 독창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이어서 보는 사람들이 놀라며 칭송하였다.
時에 新潮之益漲하여 舊學之徒가 擧棄舊趨新이러니 人或勸徇時之意에 則賦詩以見志하여 以柏舟之之死靡它自矢하다 嘗得李子性理書하여 而手抄口誦하여 黙究其義하고 又參以程子之說하시다 其於太極陰陽動靜之義와 及人道心本然氣質性과 四端七情之說과 心性情之分에 無不反復探索하여 發於論著하고 以資講質하시다
이때에 새로운 서구(西歐)의 풍조가 더욱 밀려들어와 옛 학문을 하던 무리들이 모두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풍조로 휩쓸려 나아가는 추세였다. 사람들이 간혹 시대에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권유하면 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 보이고 시경(詩經) 백주편(栢舟篇)의 “죽을지언정 다른 뜻을 가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다짐하였다. 일찍이 이자성리서(李子性理書)를 얻어서 직접 베끼고 입으로 외우면서 그 내용을 묵묵히 탐구하였다. 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설들을 참고하여 태극음양동정(太極陰陽動靜)의 이치와 인심(人心)․ 도심(道心), 본연성(本然性)․기질성(氣質性), 사단칠정(四端七情)의 학설과 심성정(心性情)의 구분에 대하여 반복 탐구하고 논저로 정리하여 강론하고 질정(質正)하는 바탕이 되게 하였다.
戊午에 往繼華島하여 謁艮齋田先生하여 講質心性之義하고 因留侍數日하며 備聞旨訣하여 多所觀感이라 有記聞錄하다 時에 倭奴沮遏萬東廟享하여 嶺中諸儒爲抗義奉享計하여 齊進廟下할새 先生亦以親命往參하여 因與講習享儀하고 瞻拜尤菴先生遺像於草堂하고 遍賞華陽九曲하여 以寓曠感하다 及諸儒被彼拘詰하여 未得奉享而退에 則因與之含痛出洞하여 靑川拜尤菴先生墓하니 有祭告文하다
무오(戊午: 선생 20세)에 전간재선생(田艮齋先生)을 계화도(繼華島)로 찾아뵙고 심성(心性)에 대한 뜻을 질정하였다. 이어서 며칠 동안 머물러 모시면서 지결(旨訣)을 전해 들음으로써 많은 관감(觀感)이 있게 되자 이를 기록한 기문록(記聞錄)을 남겼다. 당시 왜인들이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를 저지하니, 영남의 여러 선비가 항의하여 향사를 받들 계획으로 일제히 만동묘로 나가기로 하였다. 선생도 이때 부친의 명으로 이 일에 참여하여 향사의 의절(儀節)을 강습하고 우암선생의 유상(遺像)을 초당(草堂)에서 배알하였다. 이어 화양구곡(華陽九曲)을 두루 감상하며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감회에 젖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비들이 왜인들에게 구류되고 심문을 당하여 향사를 받들지 못하고 물러 나오게 되자 선비들과 함께 원통한 마음을 삼킨 채 화양동을 나왔다. 그대로 청천(靑川)의 우암선생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는데 그때 올린 제문(祭文)이 있다.
是歲冬에 聞 太皇升遐報하고 從長老望哭成服하고 以詩志哀하시다 時有不當服之論이 起於一邊이라 則作服問하여 以辨其義하고 又致書是菴翁하여 深言當辨斥之意하다 時有抗義復國之聲이 高唱於域中하고 人心沸騰하여 庶有來復之望이러니 而旋被彼虜挫抑하여 死傷相因하고 鬱而莫伸이라 則每不勝憂憤하여 語及에 或激昻流涕나 而顧無所藉手而致力이라 則只守含忍之義하고 而以杜門講學爲自靖計하다
이해 겨울에 태상황(太上皇)이 승하(昇遐)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른들을 따라 망곡(望哭)하며 상복을 입고 시를 지어 슬픔을 나타냈다. 당시에 태상황의 복은 입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 한편에서 일어나자 복문(服問)을 지어 그 의리를 논변(論辨)하였고, 또 시암옹에게 편지를 올려 당연히 변척(辨斥)하여야 한다는 뜻을 깊이 말하였다. 당시에 의리를 높이 들어 나라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지역 안에서 크게 일어나니 민심이 들끓어 혹여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듯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저들에게 억압을 당하여 죽고 다치는 사람들이 잇따라 억눌려 펼 수 없게 되자 근심과 울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일을 말할 적마다 격앙(激昻)되어 눈물을 흘렸으나 손을 써서 힘을 바칠 길이 없게 되니, 단지 원통함을 참고 때를 기다리는 의리를 지키며 문을 닫아걸고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자신의 의리를 지키는 방법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一夜에 夢見栗谷先生하여 而得承其接引하고 則益加奮勵하여 而特致宗慕하다 又以所居村後有雲峴之山하고 而里名之爲柳華로 扁其堂曰雲華하여 以示宗仰雲谷華陽之意하고 而以志伊學顔祖雲宗華八字로 揭壁以自勵에 遠近士友多爲之記頌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율곡선생(栗谷先生)을 뵙고 이끌어주는 꿈을 꾸고는 더욱 분발하여 힘쓰면서 특별히 앙모(仰慕)하는 마음을 바쳤다. 또 마을 뒷산 이름이 운현산(雲峴山)이고 마을 이름이 유화(柳華)인 것을 따라서 서실 이름을 운화당(雲華堂)이라 하여 운곡(雲谷)과 화양(華陽)을 앙모하는 뜻을 보였다. 그리고 “이윤(伊尹)을 지향하고 안자를 배우며 운곡을 조술(祖述)하고 화양을 종앙(宗仰)한다.”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벽에 붙이고 스스로 면려(勉勵)하니, 원근의 많은 사우(士友)가 글을 지어 그 뜻을 기렸다.
癸亥에 操文往哭艮齋先生朞祥하고 因從其門下 吳石農震泳 崔欽齋秉心 成德泉璣運 諸公間하여 多所講質하고 因往湖西之結城하여 謁志山金先生하니 盖先是에 欽仰其名節하여 而一致書以見志라가 至是往拜焉이라 志翁一見而期許之하시고 甚至恨相見之晩하여 而悉以其平日之志事와 及處世之時義와 儒門之門路를 申申告語之不懈하시다 因留侍數旬에 感發者多요 又與其子杏海公魯東과 昕夕講討하여 甚有相得하다 因與偕訪南塘屛溪兩宗宅하여 瞻拜其遺像하고 且收拾 納新齋公遺文而歸하다
계해(癸亥: 선생 25세)에 제문을 지어 간재선생 소상(小祥)에 나아가 곡(哭)하고, 이어 선생의 제자인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 덕천(德泉) 성기운(成璣運) 등 제공(諸公)을 따라 강론과 질정을 나눈 것이 많았다. 이어 호서(湖西)의 결성(結城)으로 지산(志山) 김선생을 찾아뵈니, 이는 앞서 선생의 명성과 절의(節義)를 흠모하여 한 차례 편지를 올려 뜻을 보인 일이 있기에 이때에 이르러 찾아 뵌 것이다. 지산옹(志山翁)은 한 차례 만남에서도 매우 기대하고 인정하면서 서로의 만남이 늦은 것을 지극히 한스러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에 품은 뜻과 일, 처세(處世)에 대한 시의(時議), 유가(儒家)가 지향할 문로(門路) 등을 자세히 거듭 말해주며 싫증을 내지 않았다. 그대로 수십일 동안 머물러 모시면서 느끼어 흥기됨이 많았다. 또 그의 아들 행해(杏海) 노동공(魯東公)과 조석으로 학문을 토론하여 서로의 지기(志氣)가 매우 합하였으며, 함께 한남당(韓南塘)과 윤병계(尹屛溪) 두 선생의 종택(宗宅)을 방문하여 유상(遺像)을 참배하고 납신재(納新齋) 선조의 글을 수습하여 돌아왔다. 越明年에 承志翁訃하고 操文往哭하고 因與其門下諸人과 論議後事하다 及其再朞하여 以隆熙帝大喪으로 將退行於卒哭後하여 而欲遵五月卒哭之制하여 杏海以書質之에 則答云我國嘗有帝號之稱이요 而貶降之辱은 出於讐夷니 則今日臣民之義엔 當遵天子九月之禮하여 以示王春至痛之思可也라 한대 杏海公深然之하다
이듬해에 지산옹의 부음(訃音)을 받고 제문을 지어 가지고 가서 곡하였고, 이어 선생의 여러 문하생과 뒷일을 의논하였다. 그후 대상(大祥) 때에 이르러 융희황제(隆熙皇帝: 純宗)의 상사(喪事) 때문에 대상제를 융희황제의 졸곡(卒哭) 뒤로 물렸는데 융희황제의 졸곡(卒哭) 기한을 5개월 제도에 따르려고 하면서 행해공이 편지로 이를 물어왔다. 선생은 “우리나라는 일찍이 황제의 칭호를 써왔으나 원수인 왜인들에 의해 폄하(貶下)된 것이오. 오늘 우리 신민(臣民)의 의리로는 당연히 천자(天子)의 졸곡을 9개월에 행하는 예를 따라 왕춘(王春)의 지극히 통한(痛恨)한 뜻을 보여야 합니다.”라고 답하니, 행해공이 이를 깊이 받아들였다.
及世變轉深而有剃禍之起하여 則衆皆披靡에 而慨然語同志曰 今日之禍는 與明末無異焉하니 吾輩當以徐東海畫網巾으로 自期而已니 若閉門長髮之說은 則是爲軀命謀요 而非爲義理謀也라 하고 致書我伯仲父萬齋一軒兩府君하여 極言處義之道하고 而述其夢中作하니 孤城盡受賊하니 敗甲竟何歸오 寧暴沙礫骨이언정 肯作終身夷之語하여 以示自矢意하다
세상의 변란이 더욱 깊어져서 머리를 깎는 화(禍)가 일어나자 거의 모든 사람이 그대로 휩쓸리고 말았다. 이에 개연히 동지들에게 말씀하기를 “오늘날의 화는 명(明)나라 말기의 사태와 다를 것이 없소. 우리는 송(宋)나라가 망하자 조주(潮州)사람 서씨(徐氏)가 동해(東海)가에 살면서 망건(網巾)이 해어져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마에 붓으로 망건 모양을 그려서 옛 모습을 지켰던 일로 자신을 다짐해야 할 뿐이오. 문을 닫아걸고 머리를 보호해야 된다는 말은 목숨을 위한 수단일지언정 의리를 위한 의논은 아니오.”라 하였다. 나의 백부(伯父) 만재부군(萬齋府君)과 중부(中父) 일헌부군(一軒府君)에게 편지를 보내 의리에 의거하여 처신해야 한다는 도리를 간곡히 말하고, 꿈속에서 지은 시를 전하니 그 시는 “외로운 성(城)이 모두 적의 침입을 받았는데, 패전한 군사들 끝내 어디로 가야 하나! 모래밭에 나뒹구는 뼈가 될지언정, 오랑캐로 살다가 죽을 수야 있나?”라 하여 스스로 맹세한 뜻을 나타내 보였다.
常有避地深入計호되 而以親老未果하고 則惟靜以俟之하여 而禍亦稍息이면 每喜遊佳山水하여 以叙湮鬱하니 如伽倻頭流錦山之勝을 無不約友登臨하여 縱觀而放懷하고 又於宣福東都之間에 先祖先賢之遺躅과 古都之蹟을 無不周遊歷覽하니 盖出於傷世懷古意也니라
항상 왜인들을 피하여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버이가 연로해 결행하지 못하고 조용히 기다리면서 저들의 압박이 조금 느슨하여지면 언제나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유람하며 쌓인 울분을 달랬다. 그리하여 가야산(伽倻山)․ 두류산(頭流山)․ 금산(錦山)의 훌륭한 경치들을 벗들과 약속하여 올라 두루 구경하며 가슴속 회포를 풀었다. 또 선성(宣城)과 복주(福州)와 경주(慶州)를 찾아 선조 선현의 자취와 고도(古都)의 유적들을 두루 관람하였으니, 이는 세도(世道)를 가슴 아파하고 옛날을 그리는 데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及至乙酉光復後에 林下舊儒 多有彈冠相慶하며 蘄或出而有爲하여는 則曰今日之事는 雖快於一時나 不由吾力이요 而借勢於西洋인댄 則必將爲西洋之隸屬하여 聽其指揮하고 遵其法度矣니 是不過退夷狄而招禽獸矣니라 豈有吾儒容足之地哉아 하고 因作招隱反招隱二辭하여 以示意하고 又致書松山權公하여 論潛龍不拔之義 正合此時用하시다
을유(乙酉: 선생 47세)에 광복(光復)이 된 뒤 산림에서 지내던 옛 선비들이 대부분 갓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 서로 축하하며 세상에 나가서 할 일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선생은, “오늘의 일은 한때의 시원한 일이기는 하나 우리 힘에 의하여 얻은 것이 아니고, 서양(西洋)의 힘을 빌려 된 것이니, 반드시 서양에 예속되어 그들의 지휘를 받고 그들의 법을 준수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랑캐를 몰아내고 금수(禽獸)를 불러들인 데에 불과하다. 어떻게 우리 선비들이 발을 들여놓을 곳이 있겠는가!”하고, 초은(招隱)과 반초은(反招隱)의 두 사(詞)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또 송산 권공(松山權公)에게 편지를 올려 물밑에 잠긴 용처럼 위로 올라가지 않는 뜻이 이 시대의 적용에 꼭 맞는 일임을 논하였다.
及有南北鬨하여 因於美蘇之制命하여 則深致憂歎曰 倚外勢而自相殘賊하니 是奚異於招隣寇而自毁其家耶아 是皆西洋之爲之祟也라 하시다 且聞政府以西紀紀年而列國皆然하고 則慨然歎曰 奉其年號는 是屬國臣事者之事어늘 而今以我東洋數千年先聖先王之遺民으로 乃奉彼耶蘇之紀年하니 則是東洋盡亡於西洋이요 而聖道見滅於耶蘇也니라 昔日之亡은 在於一國之疆土요 而今日之亡은 在於東洋之道術이니 是誠振古所無之變이어늘 而恬不爲怪하니 人心之陷溺이 乃至是乎아 每痛切言之하여 而或有遵用者면 斥絶之甚嚴하시다
6,25가 터져 남북이 전쟁을 하게 되고 미국과 소련이 주도권을 쥐자 깊이 근심하고 탄식하여 “외세에 의지하여 동족끼리 서로 해치고 있으니, 이 어찌 이웃 도적을 불러들여 자신의 집안을 무너뜨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모든 일은 서양이 그 빌미가 된 것이다.”하였다. 또 정부가 서기(西紀)로 연대를 적기로 하였고, 모든 나라가 다 그렇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연호(年號)를 받드는 것은 속국(屬國)이 신하된 입장으로 섬기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동양(東洋)은 수천년 동안 선성(先聖)과 선왕(先王)의 가르침과 교화를 입은 유민(遺民)들이다. 이제 저 예수의 서기로 연대를 기록한다면 이는 동양이 모두 서양에 망하고 성인의 도가 예수에게 멸망함이다. 지난날 망한 것은 우리나라 국토에 한정된 것이었으나 오늘의 망함은 동양의 도술(道術)이 망한 것이다. 이는 참으로 유사 이래 없던 변고인데도 편안히 여기며 괴변으로 생각하지 아니하니 민심이 이 지경까지 빠져 없어졌다는 말인가!”하며 늘 통렬하게 언급하였고 행여 이를 따르는 자가 있으면 매우 엄격히 배척하여 끊어버렸다.
從學者爲築書舍하여 以資藏修에 則扁以泰東하니 盖因其地而以寓保守東洋道術之意也니라 其楹聯曰 依歸乎洙泗洛閩 講明焉性命彛倫 保靈光於萬屋焚 昭陽德於九野閉 要障彼泰西狂潮라 하니 可見其自任之意也니라 自後掩耳하여 不欲聞世事하고 而惟以獎進來學하고 講明古道하고 扶一線之傳하여 而爲來復之基者로 爲畢生計也하다
선생을 따라 배운 사람들이 서실(書室)을 지어 수양할 곳을 마련하자 태동서사(泰東書舍)라고 편액(扁額)하니, 태암산(泰巖山) 동쪽에 있다는 지명을 취하면서 동양의 도술(道術)을 보호해 지키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주련(柱聯)으로 “수사낙민(洙泗洛閩)에 의귀(依歸)하여, 성명(性命)과 이륜(彛倫)을 강론해 밝히리. 모든 집 다 탄 속에서 영광전(靈光殿)을 보존하고, 온 들녘 얼어붙은 데에서 양덕(陽德)을 밝혀, 저 서양의 미친 물결을 막아내리라.”라는 시를 걸었으니, 도(道)를 자임(自任)한 뜻을 볼 수 있겠다. 이 뒤로는 귀를 막고 세상일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직 공부하는 후학들을 권장하여 진취시키고 고인(古人)의 도를 강론하여 밝힘으로써 한 가닥의 양맥(陽脈)을 붙들어 전하여 훗날 회복의 기틀을 만드는 것으로 필생의 일을 삼으셨다.
素稟康强하여 未嘗事醫藥이러니 一日卒得風痺하여 病幾至不省人事하니 年已近八十이라 人多危之하다 時安君德旻始終侍奉하여 與其諸子百方調治하여 靡不用極이러니 積一年에 漸見奏效하여 凡百動止 快見復常하다 盖此症이 自古稱難醫어늘 而竟至於此라 聞見者莫不賀之曰 是非在乎藥餌所致오 實神明黙佑吾道者也라 하다 至近年하여 神氣漸鑠하고 病又迭侵이라
평소 건강하여 의원을 찾거나 약을 복용하는 일이 없었는데, 어느날 중풍으로 몸져누워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당시 여든에 가까운 나이였기에 사람들은 모두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그때 안덕민(安德旻)이 시종 시봉하면서 여러 아들과 백방으로 지극히 치료하니 점차 효험이 있어 1년만에 거동에 불편없이 회복되었다. 이 증상은 예로부터 치유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마침내 이처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 소식을 듣거나 직접 본 사람들은 “이는 약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니며, 실로 신명이 우리 유학을 도운 것이다."며 축하해 마지않았는데, 근년에 이르러 정신과 기운이 점차 쇠퇴하고 여러 질병 또한 번갈아 찾아왔다.
安君未嘗離側하여 間見有別症이면 則必傳奇于諸同人하여 使之迭次進省이라 故余累度赴診이나 則似非可虞之症이라 故常遽進退러니 及去年秋하여 又趁省則症頗不祥이러니 安君稟曰 權丈今來니 或無欲言者否잇가 先生莞爾向余曰 吾疾已病이어늘 而久不死하여 使抱病者累致遠動하니 亦多感愧니라 今天壤易處하여 人盡化獸어니 有何所欲言哉아 有何所欲言哉아 하시고 因嗒然若沈痛底情이나 而脈度則別無變常이오 時又有緊迫家情하여 薄暮回車러니 翌曉에 安君有急奇라 卽侵晨促發하여 未辰刻而抵之에 則已屬纊하여 將臯榮矣러라
安君이 한번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면서 어쩌다 다른 증상이 발견되면 반드시 여러 사람에게 기별하여 차례로 찾아와 문안을 드리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나 역시 여러 차례 찾아뵈었으나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으레 곧장 물러 나왔는데, 지난해 가을에 다시 찾아뵈었을 때는 그 증상을 알 수 없었다. 安君이 말씀드리기를, “설암장이 왔는데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선생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에게 말하였다."내, 병이 이미 심한데 오래도록 죽지 않고 아픈 사람까지 여러 차례 멀리 거동하게 만드니, 또한 감사하고도 부끄럽다. 오늘날 천지가 뒤바뀌어 사람들이 모두 금수(禽獸)가 되었으니, 무슨 하고픈 말이 있겠는가." 이어 말없이 침통한 마음을 가졌으나 맥박은 별로 변한 게 없었다. 그 당시 집안의 긴박한 사정으로 저물녘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安君으로부터 급박한 기별이 있었다. 새벽에 길을 재촉하여 진시가 못 되어 서사에 도착하였지만 이미 운명하여“복"을 외치려고 하였다.
嗚呼痛哉라 時戊辰十一月十九日이니 而享年八十九라 諸門人會治喪事에 從黃勉齋葬朱夫子故事하여 踰月하고 而以白巾環絰하다 葬于杏亭後山壬坐原할새 會者至千數百이오 加麻者亦至數十人이며 以至外國之人히 亦多聞風來觀하여 爭撮影하여 競載于電波하여 使列邦人見其光景하니 此蓋先生平日之最所惡者언마는 而莫得禁抑하니 撫念志行에 惶愧罔喩러라
오호 통재라. 무진(戊辰) 11월19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9세이다. 여러 문인이 모여 상사(喪事)를 치르되 황면재(黃勉齋)가 주자를 장례한 고사에 따라 유월(踰月)로 지내고 백건(白巾)에 수질(首絰)을 두르기로 하였다. 행정(杏亭) 뒤 임좌(壬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는데 이때 모여든 사람이 천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가마(加麻)한 사람도 수십 명이었다. 심지어 외국 사람들까지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 구경도 하고 앞 다투어 취재하고 촬영하여 전파(電波)에 실어 보내니 세계 각 나라 사람들까지 모두 이 광경을 보았다. 이는 선생이 평소에 가장 싫어하시던 일이었지만 금지하여 막을 수가 없었으니, 평소 선생의 뜻을 생각하면 황공하고 부끄러워 할 말을 모르겠다.
配驪州李氏는 鍾璟女니 生丁酉하여 卒丁亥十一月十一日하니 墓南山亥坐라 擧四男二女하니 男은 淳道 淳義 淳杓 淳正이오 女는 適李陽燮 金鍾厚하다 後晉陽河氏 生一男二女하니 男은 淳兌요 女는 適姜秉贊 林碩元하다 孫男은 長房曰 曾相 圻相이요 二房曰 旭相 澤相 學相 國相이요 三房曰 麟相 攸相 甲相 東相 汶相이요 四房曰 杜相 沃相 吉相 玖相이요 季房曰 佑相 武相이라 外孫曰 李粲圭 哲圭 聖圭 金寬永 福永 謹永 姜南圭 相圭라 餘煩不錄하다
선생의 배위(配位)는 여주이씨(驪州李氏) 종경(鍾璟)의 따님이다. 정유(丁酉: 선생 생년보다 2년 앞)에 태어나 정해(丁亥: 선생 별세 41년 전) 11월11일에 별세하니, 묘는 남산(南山)의 해좌(亥坐) 언덕에 있다. 4남 2녀를 낳으니, 아들은 순도(純道) 순의(純義) 순표(純杓) 순정(純正)이고 딸은 이양섭(李陽燮)과 김종후(金鍾厚)에게 시집갔다. 후실(後室) 진양 하씨(晉陽河氏)는 1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순태(純兌)이고 사위는 강병찬(姜秉贊)과 임석원(林碩元)이다. 손자는 첫째집이 증상(曾相), 기상(圻相)이요. 둘째집이 욱상(旭相), 택상(澤相), 학상(學相), 국상(國相)이요. 셋째집이 인상(麟相), 유상(攸相), 갑상(甲相), 동상(東相), 문상(汶相)이요. 넷째집이 두상(杜相), 옥상(沃相), 길상(吉相), 구상(玖相)이요. 막내집이 우상(佑相), 무상(武相)이다. 외손은 이찬규(李粲圭), 철규(哲圭), 성규(聖圭)와 김관영(金寬永), 복영(福永), 근영(謹永) 그리고 강남규(姜南圭), 상규(相圭)이다. 나머지는 번잡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先生은 長身秀貌시니 耳大而白하고 眸炯而凝하며 神彩爽明하고 重厚簡黙하여 德器渾成하다 望之如鷄群之鶴이요 而卽之如春陽之休니라 其存心也坦易和平하여 絶無偏私忮克之萌하고 其厲志也堅忍刻苦하여 未或有遲疑放縱之態하시니라
선생은 키가 크고 용모가 수려한데다 귀가 크고 희며 눈동자는 빛나고 집중되어 뛰어난 풍채가 시원스럽고 밝으며 중후하고 과묵하여 덕스러운 기국이 순수하게 이루어진 듯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닭무리 속의 학(鶴)인 듯하고, 앞에 나아가 뵈오면 봄날의 햇볕처럼 따사로웠다. 마음은 까다롭지 않고 화평하여 치우치거나 남을 해쳐 이기려는 생각이 한 점도 없었으며, 선생의 단련된 뜻은 굳게 참으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조금도 망설이며 의심하거나 방종하는 모습이 없었다 . 自少爲學에 必以聖賢爲的하고 而斷絶衆岐하며 讀書에 不務博涉廣求하고 而惟務專精熟複이라 故一書而多讀過千遍者하다 其於文義之間에 字句必覈하고 義理之奧에 錙銖必辨하여 無或涉躐放過以求其融會自得者하여 而非苟爲口耳計也하시다
어릴 적부터 학문을 함에 성현 배우기를 목표로 정하여 그 이외의 것들은 일체 끊어버렸다. 글을 읽을 적에는 널리 섭렵하고 광범하게 구하는 것을 힘쓰지 아니하고 오로지 정밀하고 난숙하게 하는 데에 힘써서 많게는 한 권의 책을 천 번 넘게 읽은 것도 있다. 글의 뜻을 찾는 일은 한 글자 한 구절을 반드시 정밀하게 따졌으며, 의리에 관계되는 깊은 뜻은 미세한 부분까지를 반드시 변별하여 혹시라도 대충 읽어 지나침이 없이 완전히 이해하여 스스로 깨닫기를 구하였고 구차하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기만 하는 피상적인 학문은 하지 않았다.
其於名理之說에 自少已涉其津이요 而益加硏精究索하여 每歎近世諸家之論이 多各立己見하여 岐出不統하시다 故必爲之參考於彼此之同異得失하고 折衷以先賢之旨하여 而闡發者甚多하시니라
명리(名理)에 관한 학설에 대하여 어려서 이미 그 기초를 다졌으나 이후 더욱 정밀히 파고들어 연구하였다. 언제나 근세 학자들의 주장이 대부분 자신의 견해를 따로 세우면서 갈라져 나가 통합되지 않음을 탄식하였다. 그 때문에 피차 서로 같고 다른 점, 어긋나고 부합하는 것들을 참고하여 선현이 제시한 학설로 절충하여 밝혀낸 것이 매우 많았다.
其論無極太極之義에 則曰孔子謂易有太極是生兩儀라 하여 則人將疑太極之爲有物이라 故周子特加無極字於太極之上하고 而繼之以動靜生陰陽之說하여 以見所謂有者實無요 而動靜與生이 實爲無動靜之動靜이요 無生之生也라 故自五行陰陽으로 推而上之에 而必終之以無極이니 言眞精之妙合이 而必本之以無極이라 盖所以深明道體無爲之妙요 而無爲爲有爲之本也어늘 乃後之人이 不察於此하고 而認太極爲自有動靜하니 則是太極同於一物하여 而不足爲萬化之源也니 其於無極之旨에 不其遠耶아 하시다
그중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뜻에 대한 논변(論辨)에서는 “공자(孔子)가‘역(易)에 태극이 있고 이것이 양의를 낳는다.’고 한 말씀에, 사람들이 태극을 어떤 유기체의 사물로 의심할까 하여 주자(周子: 濂溪)가 특별히 무극이란 글자를 태극의 위에 올려놓았다.
又論華西鼓風板詩曰 華西以上頭踏板人으로 譬太極은 則是認太極爲有爲요 艮齋次韻에 以室中無爲人으로 譬太極은 則又似太極別在離陰陽之一位하여 恐皆未安이라 故次其韻曰妙由機軸不由人이라 하시니 盖機軸之無爲 實爲鼓風板低仰之妙요 而非別有使之於其外者也니 此豈非無極而太極耶아
또 이화서(李華西)의 고풍판시(鼓風板詩)에 대해서는 “화서(華西)가 위에 풀무판을 밟는 사람으로 태극에 비유한 것은, 태극을 작용이 있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며, 간재(艮齋)가 화서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방안에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있는 사람으로 태극에 비유한 것은, 또 태극이 음양에서 떨어진 별도의 자리가 있는 것 같아서 이 말은 모두 온당하지 않은 듯하다.”고 논하였다.
其辨以心爲理之說하여는 則曰心性에 有統體界分之異하니 以統體言이면 則性具於心하고 而心運乎性하여 非有二岐요 而以界分而言이면 則仁義禮智之爲性과 虛靈知覺之爲心이 自有覺無爲와 眞靈能所之不可混者니 而若以心直謂之理면 則是以性爲心이라 不惟界分之昧요 其於統體에 亦不免擧其半而遺其半이니 是豈正名之義哉아 因就諸家說而細辨之하여 作心說或問하시다
“마음은 이치다.”라는 설에 대한 변론에서“마음과 성(性)에는 통체(統體)와 계분(界分)의 다름이 있다. 통체를 가지고 말하면 성은 마음에 갖춰져 있으나 마음은 성에 의하여 운용되니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諸家之以理謂有爲하고 以心爲理者 以是自以爲主理하여는 則曰理在窮而明之요 而不在於主之니 苟不窮而明之於理氣之分하고 而遽欲主理면 則安知不認氣爲理하여 而所謂主理者 乃主氣乎아 作主理難以駁之하시다
여러 학자 중에‘이치는 유위(有爲)하고 마음은 이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를 스스로 주리(主理)라 여기는 데 대하여 “이치는 궁리하여 밝히는 데 있는 것이지 위주(爲主)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이기(理氣)의 구분을 궁리하여 밝히지 아니하고 갑자기 주리를 주장하려 든다면 기(氣)를 이치로 인식하여 이른바 주리라는 것이 바로 주기(主氣)가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하는 주리난(主理難)을 저술하여 변박(辨駁)하였다.
或以氣質之氣로 比同於心氣하고 氣質之質로 比同於形質하여는 則曰氣有精粗本末許多層級하니 心之爲虛靈之氣는 是精且本이니 而與理無間者也요 血肉形質之氣는 是爲粗且末이니 而著於外者也라 是皆一定而不可易者也며 氣質之氣는 在精粗之間하여 而上以承藉於心하고 下以運用於形하여 雖有淸濁粹駁之不齊나 而濁者皆變而淸이요 駁者可變而粹라 則學者之用工이 在變化氣質也니 豈可比而同之리요 作氣質說以明之하시다
혹자가 기질(氣質)의 기(氣)를 심기(心氣)의 기와 동일시하고, 기질의 질(質)을 형질(形質)의 질(質)과 동일시하자, 선생은 “기에는 정추본말(精粗本末)이 있어 많은 등급이 있다. 마음의 허령(虛靈)한 기는 정(精)하고 근본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이치와 차이가 없는 것이라면, 혈육(血肉)에 딸린 형질의 기는 거칠고 말(末)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밖에 드러나는 것이다.
心學之說이 始於眞氏之心經贊程氏之心學圖하여 而後多承用하여는 則曰心學之名이 不見於經傳及程朱說하고 而且舜禹授受之旨도 重在執中하고 而不在心하니 則不可謂心學也니라 盖儒者之學이 在道曰道學이라 하고 在理曰理學이라 하며 而心非可學者니 則心學之名은 盖出於禪家요 而非儒家之所襲用也라 하시고 作心學難及心學圖疑하여 以明之하시다.
심학(心學)이란 말은 진덕수(眞德秀)의 저서인 심경(心經)에 실린 정복심(程復心)의 심학도(心學圖)를 해설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많은 사람이 이를 이어받아 사용하고 있는데 대하여 “심학이란 명칭은 경전(經傳)이나 정자(程子) 주자(朱子)의 말에는 보이지 않고 또 순(舜)임금과 우(禹)임금 사이에 주고받은 말에서도 무게 중심은 집중(執中)에 있고 마음에 있지 않았으니 심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선비의 학문이 도(道)를 공부하는 데 있으면 도학(道學)이라 이름하고 이치를 공부하는 데 있으면 이학(理學)이라고 한다. 마음은 배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심학이라는 명칭은 선가(禪家)에서 나온 말이니, 선비가 덮어놓고 따라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하여 심학난(心學難)과 심학도의(心學圖疑)를 저술하여 밝혔다.
大學之明德明命을 或幷屬於心하고 或幷屬於理하여는 則曰明德은 是在人之虛靈不昧而具衆理者니 則當屬於心이요 明命은 是在天之命我者而爲明德之所本이니 則當屬於理하여 而不可混而幷稱也라 하시다
대학(大學)의 명덕(明德)과 명명(明命)을 혹은 이를 아울러 심(心)에 해당시키기도 하고 혹은 이를 아울러 이(理)에 해당시키기도 한다. 이에 선생은 “명덕은 사람이 허령불매하여 모든 이치를 갖춘 데에 있는 것이니 당연히 心에 소속시켜야 하고, 명명은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명덕의 근본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니 당연히 이치에 소속시켜야지, 뒤섞어 말하면 안 된다.”하였다.
四端七情之說이 自退溪栗谷二先生之論의 互有參差로 後人이 各守其一說이러니 而農岩有記疑於栗谷說에 嶺中諸儒之辨詰者 又甚多라 則嘗就農岩說하여 反復究論而有所從違하고 又就李大山讀聖學輯要諸說而論辨之하여 以明栗翁之旨하시다 每深病於儒門論議之分裂이 盖因徒執其末而不探其本하고 徒求名目而不求實事하여 姝姝焉奉一先生之言하여 徒徒相傳하여 轉成偏私하여 卒不可會通이라 故作儒門息爭하여 以明之하시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설에 대하여 퇴계(退溪) 율곡(栗谷) 두 선생의 말씀이 서로 차이가 있음으로부터 후세 사람들이 각기 그 한쪽의 말만을 지켜왔고, 농암(農岩)이 율곡의 주장에 대해 의심난 것들을 기록하여 남기자 영남의 여러 선비들이 논변하여 따지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其於庸學에 各有繹義하시니 而大學則歷擧明淸及我東諸家據古經反章句之語而辨斥之하여 以闡發章句之意하시고 中庸則謂性道敎三字 是一篇主腦니 而道爲之綱이요 性爲之本이니 性道爲經이며 而敎爲之緯라 體道盡性은 是一書之綱領이요 而敎는 則行乎其中이라 하여 因作圖以明之하시다 是盖前人之所未發이요 而出於自得者也니 此盖發揮道妙하고 羽翼經訓하니 立言特論之槩也라
그리고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대해서 각기 그 뜻을 풀어낸 저술을 남겼는데, 대학은 명청(明淸)시대 및 우리나라의 여러 학자가 고경(古經)에 근거하여 주자 장구(章句)의 말을 반대한 것들을 낱낱이 들어 변석(辨析)하고 배척하여 장구에 담긴 뜻을 밝혀냈다. 그리고 중용은 “성도교(性道敎) 세 글자는 중용의 주요 핵심으로 도는 강령(綱領)이고 성은 근본이며, 성과 도는 날줄이고 교는 씨줄이다. 도를 체득(體得)하여 타고난 본성을 다하는 것이 이 책의 강령이고 교는 그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보아 중용도(中庸圖)를 지어서 그 뜻을 밝혔다.
少嘗兼治古文辭하여 求得作家軌範하시니 而其於世之雕章琢句以爲工하고 奇詞詭辨以爲高者는 則所厭薄而不屑也시니라 爲文惟務理勝而辭達하고 氣大而法正하여 汪洋紆餘 深有得於紫陽步趨라 故先進諸公이 一辭稱之曰 滔滔不渴이 有長江大河之勢라 하시다
젊은 시절 고문사(古文辭)에도 힘을 쏟아 작가(作家)의 모범을 터득하였으나 세상에서 한 문장과 한 글귀를 갈고 다듬는 것으로 공을 들이고 기이한 문장과 괴이한 말들로 높은 체하려는 것들은 하찮게 보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嘗曰道與文이 本非二道어늘 而後世岐而二之하여 尙文者는 昧於道而不求라 故爲葩藻之無實이요 求道者는 又不屑於文而不治라 故有欠於文理密察하니 斯二者는 皆過也니라 文者는 載道之器也니 安有不治其器하고 而能載物者乎아 學者當以朱子之文與道俱至者로 而爲準可也라 하시다 故常喜讀朱子書以自激昻하시다
일찍이 “도(道)와 문장은 본래 두 길이 아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 둘로 나뉘는 바람에 문장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도에 캄캄하면서도 구해보려 하지 않은 까닭에 문장이 아름답기만 하지 아무런 실상이 없고, 도를 구하는 사람들은 또 문장을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가다듬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문장의 조리가 짜여서 정세하지 못한 흠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잘못이다.
中歲以來로 遠邇之求文者沓至에 則始辭謝不許라가 旋以爲顧今倫常敗壞之日에 人之欲述先蹟하여 闡先美者 是倫常古道之所賴而不墜者니 則助成其美 是亦爲扶世敎之一道也라 故黽俛應之者多로되 而措辭之際에 必審於權衡節度하여 以求其孚於實合於義者하고 而不苟循俗尙也하시다 至於行學節義之可尙者하여는 則必津津道之하여 以闡發而勵世也하시다
선생의 연세 중년이 된 이후로 원근에서 선생의 글을 받고자 하는 이들이 답지하였다. 처음에는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선뜻 생각을 돌려, 오늘날 인륜의 기강이 무너져버린 시대에 사람들이 조상의 업적을 기술하고 선대의 아름다움을 밝혀내고자 하면 이로 인해 인륜의 기강과 옛 선현의 도가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러한 아름다운 일들을 도와 이루어 주는 것은 세상의 교화(敎化)를 부지하는 길이라고 여기었다. 그래서 애써 지어 준 글이 많았다. 그러나 글을 지을 적에는 가늠하는 저울질과 절도를 반드시 살펴 실상에 믿음이 가고 의리에 부합하려 하였고 구차하게 세속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행동이나 학문, 그리고 절의(節義)가 가상한 사람들에 이르러는 반드시 진지하게 기술하여 밝혀서 세상을 북돋고자 하였다.
又於文字之利病과 義例之得失에 無不觸目瞭然하고 而手遇得正이라 故凡人家大小文稿之役이 必經其勘校요 而至於澹山岳陽兩集하여도 玉鉉始終執丹墨하니 而每穆然端坐하사 命擧聲朗讀하고 讀畢에 輒以所持竹尺으로 上丁下乙이요 未嘗添一言已意나 而理明辭達하니라 至於書畫하여도 未嘗受操弄之法이어늘 而廋勁古健하여 碑牌之請이 後先連續이라 故私竊以爲先生文筆은 殆天授요 非學可及也라 하노라
또 문장의 결점과 잘된 것, 문장의 구성과 나열에 있어 눈에 닿는 대로 환히 들어와 손가는 대로 바로 잡았다. 그리하여 여러 집안의 크고 작은 문집 발간을 선생의 교정(校正)을 반드시 거치게 되었다. 담산집(澹山集)과 악양집(岳陽集)은 옥현(玉鉉)이 시종 문장을 가다듬는 일을 거들었는데 매번 그 크신 모습으로 단정하게 앉으셔서 소리내어 읽도록 하고는 읽기를 끝내면 곧바로 손에 쥐고 계시는 대자로 위아래 어디서 어디까지를 올리고 내리거나 지우라 하였다.
篤於誠孝하니 晩松公性峻嚴하여 少有拂忤면 誚責之하고 不少假借어늘 而自少能洞屬承順하고 無或有違하시다 及晩松公癃年在堂하여 晩有眼眚에 則左右承奉하여 保如嬰兒하고 及其侍疾하여는 除穢滌汙를 必以躬親하고 夜不交睫者數旬이로되 而不少懈하시다
선생은 효성에 독실하였다. 만송공의 성정이 준엄하여 조금만 거스르면 나무라 꾸짖으며 조금도 용서해줌이 없었으나 어려서부터 공경과 정성으로 받들어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만송공 연세가 높아져 안질(眼疾)이 생기자 곁에서 시중을 들며 마치 어린아이를 보살피듯 하였다. 병시중을 들면서 오물을 치우는 일은 반드시 몸소 하시며 밤이면 눈을 붙이지 못하는 것이 수십 일이었으나 조금도 게을러짐이 없었다.
數歲之內에 連遭內外艱하시니 時年已耆艾로되 而哀毁之甚과 執禮之嚴이 前後如一하여 晨夕哭墓於數里地를 風雨不廢하고 以晩松公宅兆不利로 積誠營求하여 移厝於江陽之泉谷하니 則距家隔一舍어늘 而朔望之展을 課月未闕하여 至年逾八旬토록 而未或少懈라 居人爲指期以待之하니라
몇 년 사이에 연거푸 부모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선생의 연세 이미 노년(老年)이었으나 슬퍼하고 수척해짐이 매우 깊었고 상례를 집행하는 엄숙함은 전후가 똑같아 새벽과 저물녘에 몇 마장 되는 묘소를 찾아 곡하는 일을 비바람에도 빠뜨리지 않았으며 만송공의 묘소가 불길(不吉)하자 정성을 들여 길지를 찾아 구하여 합천(陜川)의 새미실에 옮겨 드렸다. 그곳은 집에서 30리나 되는 거리였지만 초하루와 보름으로 찾아 성묘하는 일을 달마다 행하여 거르는 일이 없었으며 연세 팔순이 넘어서도 혹시라도 게을리 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지방 사람들은 그 날을 꼽아 선생을 기다리기도 하였다.
其於阡表之述과 遺稿之輯에 無不斤斤致力而注誠焉하여 凡於考妣之遺跡遺物에 愛護之甚至하니 晩松公有手植之杏이러니 則築壇建碑而識之하고 朝夕盤桓而寓慕하고 母夫人嫁時之籠이 歲久廢置에 則爲糊塗作櫃하여 置之坐側하고 而銘以識之하여 以寓終慕하시다 至老而每語及於親이면 必涕於眥하여 嘗曰思親之懷 到老彌切하니 豈老而還作嬰兒故耶아 하시다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 유고(遺稿)를 정리하는 일들을 모두 열심히 노력하여 정성을 쏟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부모가 남기신 흔적이나 물건들을 매우 아끼고 보호하여 만송공이 손수 심으신 은행나무 주위에 단(壇)을 쌓고 비를 세워 기념하고 아침저녁으로 맴돌며 사모의 뜻을 담았다. 모부인(母夫人)이 시집올 때 가져오신 농(籠)이 세월이 오래되어 낡아 버려지게 되자 풀로 발라 궤를 만들어 곁에 두고 명(銘)을 지어 기념하며 마지막까지 사모하는 뜻을 붙였다.
敎諸子에 必擧晩松公之遺訓遺範而申申詔之하여 使之謹守勿失하고 御家以禮法하여 其於奉先追遠之節에 誠意交孚하고 而節度不差하며 持身制行에 規度甚嚴하여 必以古道하고 而絶流循之態하시다 常曰士之處濁世에 當如荷花之皭然不滓니 若受汙於泥면 則豈士之云哉아 하시다 故雖不爲詭異苟難之行하여 以飾外循名이나 而恒有翹然拔俗意也하시다
아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언제나 만송공이 남기신 가르침과 모범이 되는 규범들을 들어서 거듭 말해 주며 조심히 지켜 잃지 않도록 하였고, 집안을 예법으로 다스렸으며, 조상을 받들고 제사 드리는 일들에 있어 정성스러운 뜻이 드러나고 절차와 법도가 조금도 벗어남이 없었다. 몸가짐과 행동은 법도가 삼엄하여 반드시 옛 성인의 길로 법을 삼고 시속의 흐름에 따르는 태도는 한 점도 없었다.
일찍부터 궁리(窮理) 존리(存理) 순리(順利) 세 단어를 열거해 이학도(理學圖)를 만들어 벽에 붙여 두고 마음에 살펴 반성하면서 “우리 선비의 학문은 이학(理學)이다. 글을 읽어 이치를 궁구하고, 함양하여 이치를 보존하고, 힘써 행하여 이치를 따라야 한다.
每黙坐澄心하여 體認天理에 嗒然若泥塑나 而應接之際의 見於容貌辭氣者 自有粹盎之著於外也하시다 才美內蘊而常闇然閉藏하여 不露鋒穎하고 其於交遊應酬之間에 深自謙退하여 處之若愚나 而至於論理論事하여는 必明辨精覈하며 一有所執이면 則確乎不拔이요 發於辭者 如水湧河決이나 持論常主寬厚和平하고 不爲偏私乖激하니라 而至於義利邪正之辨하여는 則如斬釘截鐵하여 而不爲苟循하시다 故或有痼於黨習하여 而侮毁先賢하고 干犯名義而强辯飾非者면 則辨斥之甚嚴하시다
늘 침묵 상태로 앉아 마음을 맑게 하고 하늘의 이치를 직접 체험해 인식하면서 말없이 앉아 있는 모습은 꼭 진흙으로 빚은 사람 같으셨으나 사람을 응접할 즈음의 용모나 말씨에 나타나는 모습은 덕스러운 기운이 저절로 밖으로 넘쳐남이 있었다. 재능과 아름다움을 안으로 응축시키며 언제나 몰래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리고 교유(交遊)하며 말을 주고받을 적에도 깊이 자신을 겸손히 하고 한사코 물러나려 하여 처신하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과 같았으나 이치를 논하고 일을 논할 적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분명하게 분석하고 정확하게 따져 한번 단안이 내려지면 확실하여 꺾을 수가 없었다.
從學者衆而眷眷接引之不倦하여 雖在蒙求나 必諄諄啓發하여 期得透悟하고 有才志可望者면 則愛獎之不置하여 書尺之間에 勤戒之意가 丁寧懇至하여 有足感人이요 雖在疾病沈綿中이라도 有以文義講質者면 則喜動於色하여 應之娓娓하시다 嘗致力於自彊不息之工하여 每晨起盥櫛하고 誦敬齋夙夜二箴以自勵하고 因杖藜逍遙於數里地하여 以喚起精神에 堅固筋骸者 積數十年토록 無一日廢하시다
선생께 나아와 배우는 자가 많았으나 정성을 쏟아 이끌어 진취시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아무리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자라도 반드시 정성스레 계발시켜 기어코 깨달아 알도록 하여 주었다. 재주나 뜻에 가망성이 있어 보이는 자는 사랑하고 권장하기를 마지않아 편지 사이에도 권면하고 경계하는 뜻이 정녕하고 간절하여 사람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每夏間에 携諸生하고 棲遲於古社及山寺之間하여 以養精休神하니 超然如出塵之狀하시다 及至癃年하여 氣力益漸敗호되 而猶自策勵하여 不至頹頓하시고 看書不撤하여 手未嘗釋卷하여 玩索之工이 或至夜以繼日하시다 常以義理無窮而知見有限하고 學業未究而精力已盡으로 深致慨恨하여 欿然若有所不足하고 俛然若有所不及之意를 累發於言議하며 每誦康節詩 假我少十年亦可少集事之語하며 而致慨焉하시다
그리고 여름이면 학생들을 데리고 옛 서원이나 산사(山寺)를 찾아 정신을 기르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마치 초연히 세속을 벗어난 것 같았다. 연세가 높아지면서 기력이 차츰 쇠하였으나 오히려 스스로 가다듬어 피곤하여 눕는 일이 없이 책 보기를 그치지 않아 손에서 책을 놓는 날이 없었다. 책을 읽고 사색하는 공부에 혹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였다.
常語諸生曰 古之君子未試於當世者는 必有立言著書以傳於後하니 所謂立言者는 必其有關於道術世敎之大하여 而不可無於天地間者也니 非是면 則雖充棟汗牛라도 而無足貴也니라 吾嘗有志於此나 而不惟才識之不逮라 中歲來力分於應酬하여 專致之未能이라 故多蘊志未成하여 無可以傳後하니 可謂虛負一生이라 可恨之深也로다 하시니 於此可以見其自期之意也니라
또 학생들에게 늘 말씀하기를“옛날 살아생전에 경륜을 발휘하지 못하신 분들은 반드시 말을 남기거나 글을 남겨 후세에 전한다. 그러나 이른바 말을 남긴다는 것은 반드시 도술(道術)이나 세교(世敎)에 크게 관계되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이러한 것이 아니라면 방을 가득 메우고 수레를 끄는 소가 땀을 흘릴 정도로 많은 저서를 남겼더라도 족히 귀할 것이 없다. 내 일찍이 여기에 뜻을 두었지만 단지 재주와 식견이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중년 이후로 이러저러한 청탁에 응하느라 힘이 분산되어 한곳에 기울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뜻을 두고도 이루지 못하여 아무런 것도 후세에 남길 것이 없다. 일생을 헛되이 저버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 깊이 한스럽다.”하였다. 이 말씀에서 스스로 기약하고자 한 뜻을 볼 수 있다.
故當世局大變하여 天地閉塞하고 道術敗壞하여 古道古義 不啻如土苴어늘 而毅然自任以紹前啓後之責하여 孤唱於絶響之餘하며 吹噓於已熄之火하고 期扶殘線於末局者 炳然一心이 始終不懈하여 雖天下非之而不顧하고 擧世不知而不悔하시니 盖深有得於大過之象의 獨立不懼 遯世旡憫之義시니라 况畢生窮格이 自宗於潭華之傳하여 而上以接洙泗洛閩之統하여 屹然作碩果於剝上者 是殆天意之所篤成이니 而豈偶然而已哉아
그러므로 당시 세상의 국면이 크게 바뀌어 천지의 도(道)가 막히고 도술(道術)이 무너져 옛 도와 의리를 지푸라기처럼 버리는 세상에서 의연히 옛 성인의 도를 잇고 후생을 계발하는 책임을 스스로의 책무로 생각하시어 모든 메아리가 끊어진 중에 외로이 부르짖었고 이미 꺼진 불씨를 붙들고 입술을 모아 바람을 불어넣었다.
嗚呼先生易簀이 奄迫二載에 而賴士友之力하여 遺集亦已付梓矣어늘 淳道兄弟 以玉鉉出入門下最久하여 庶幾知先生으로 俾狀其行하니 先生嘗與我諸父로 許以宗黨知己라 故自幼獲拜하고 因而從學하여 厚被誘掖이나 而愚騃不力하여 未副期望之萬一이요 况今病廢하여 莫堪擔責辭之러니 則諸同人이 皆以書申勤之라
아! 선생이 돌아가신 지 어느 사이 두 해가 가까워 오고 있다. 그 동안 사우(士友)들의 힘을 입어 유집(遺集)이 이미 인쇄에 올라 있다. 순도(淳道) 형제가, 옥현(玉鉉)이 선생 문하에 출입한 것이 가장 오래 되어 선생을 거의 알고 있다 생각하여 선생의 행장을 짓도록 하였다. 선생은 나의 백숙부(伯叔父)와 일찍부터 종친으로서 친구가 되기를 허락하셨으므로 내가 어려서부터 뵐 기회를 얻었고 이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입었으나 우매하고 힘을 기울이지 않아 기대와 바람에 만분의 일도 부응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지금은 병으로 모든 것을 덮어두고 있는 상태라서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사양하였더니 여러 동지가 편지를 보내와 거듭 권유하였다.
旋念先生은 一世山斗也라 遐邇莫不誦如君實이어늘 然其始終表裡之詳을 亦莫如余之深矣라 玉鉉雖不敢이나 姑具其事하여 以竢今與後之有以考焉이 亦可也라 乃錄如右하노라
다시 생각해보니 선생은 일세의 태산북두(泰山北斗)이셨다. 그래서 먼 지방에서까지 마치 송(宋)나라 때의 사마광(司馬光)을 온 나라가 사모했듯 사모하였으나 선생의 시종(始終)을 나만큼 세세하게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없겠다. 옥현이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나 우선 글을 꾸며 오늘과 훗날의 참고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 듯하기에 이상과 같이 기록한다.
竊伏聞 學以深造自得爲重이나 而亦必加思辨於先賢之旨라야 固無後弊라 하여늘 吾東學術이 自古已有隆盛하고 而自功令廢로 尤有彬彬이나 然求其能造能得하여 而卓然自立者면 實罕焉하니라 先生稟甚美質하시고 用至鈍工하여 未弱冠而已窺天人之原이요 近自門宗으로 遠至鄕國히 歷謁諸先進할새 不苟唯諾하고 惟反復講質하여 以究其極하니 盖其透解之精과 求益之篤은 當求于古人이라야 而可得擬議耶리라
적이 듣건대 학문은 스스로 깨닫는 데까지 깊이 나아가는 것으로 소중함을 삼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선현들이 말씀해 놓으신 것들을 반드시 생각해 보고 분석하는 일을 덧붙여야 훗날에 폐단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 동방의 학술은 예전부터 이미 융성하였으나 과거를 위한 공부가 사라지면서부터는 더욱 훌륭하였다. 그러나 깊이 연구하고 깨달아 높이 자립(自立)한 사람을 구해보면 실상 드물다.
嘗讀退溪所撰晦齋李先生狀에 有曰先生無受授之處而自奮於斯學하여 闇然日章而德孚於行하고 炳然筆出而言垂于後者 求之東方에 鮮有其倫이라 하고 尤翁撰沙溪金先生狀에 有曰學至於高明호되 而勉勉乎如未及하고 德已至於純茂호되 而謙謙然如有未得하사 年已踰於八帙이어늘 而翫索之工을 日加一日하여 悠然不知老之將至하니 宜其學成而行尊하고 道純而德備하여 蔚然爲一世之儒宗矣라 하니
일찍이 퇴계선생이 지은 회재(晦齋)선생 행장을 읽어보니 이런 말이 있었다. “선생은 어디서 배우신 곳도 없이 학문에 혼자서 분발하여 남모르게 날로 진취하는 공을 닦아 덕이 행동과 부합하고 조리있는 저술은 후세에 전하여졌다. 그러한 분을 우리나라에서 찾으려 들면 아마도 비길 만한 분이 드물 것이다.”
嗚呼先生을 今不可及이오 惟狀其行하여 欲傳資來學에 而自顧愚昧하여 莫能描寫萬一이라 乃猥引兩先生狀中語하여 移付于狀末하여 使覽者로 知先生之彷彿於此하여 而俛仰求之면 則庶可以得先生平日耶아 若或謂余意之出於阿私인댄 則神必厭之矣리니 豈玉鉉之所敢哉아 歲己巳重陽節에 門下生族弟玉鉉은 謹述하노라
아! 선생을 지금 뵐 수 없으니 오직 행장을 기록하여 후세 학자들에게 전하려 하나 스스로 생각하여도 우매한 사람이 선생의 만 분의 일도 그려낼 수가 없다. 이에 외람되게 두 선생의 행장에 있는 말을 인용하여 행장 끝에 붙여서 이 글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선생이 이와 방불함을 알게 한다. 이에 근거해 구한다면 행여 선생의 평소 모습을 구할 수 있지 않을는지? 혹시 나의 이러한 생각이 사사로운 정에 끌려 아첨의 말을 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명(神明)이 반드시 나를 벌할 것이다. 어찌 옥현이 감히 아첨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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