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서원 고독방
번역 : 김기현
René Girard. JOB: the Victim of his People. Stanford Univ Press, 1985.
1부 요약 : 욥의 재판(The Case of JOB)
1장. 욥, 백성들의 희생자
우리는 욥기에 관해 얼마나 알까? 그리 많지 않다. 그 영웅은 끝도 없이 불평을 털어놓는다. 그는 자녀와 가축을 잃어버렸다. 그는 헌데를 긁어야 했다. 그가 불평하는 불운들은 “서문”에서 적절하게 열거되어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허용 하에 사탄이 가져온 것들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욥은 사탄이나 혹은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관해 일언반구도 없다. 그것들을 언급할 만큼 그는 그것들에 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걸까?
아마도 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언급하고, 그가 말한 것 이상으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이 불행하게 된 이유를 깊이 캐묻지만, “서문”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도, 사탄도, 그렇다고 물리적/육체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인간적인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것은 수 세기를 거치면서도 주석가들이 그 이유에 관한 미묘한 차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주석과 그다지 친숙하지 않다.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무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대나 현대가, 무신론자, 개신교, 가톨릭, 유대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욥이 불평하는 대상에 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그 문제가 “서문”에서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들 그가 긁어댔던 헌데, 잃어버린 소 등에 관해서 종교적 접근을 고수한다.
몇몇 주석가들은 독자들에게 이 프롤로그에 관해 이따금 경고를 던지곤 했다. 이 작은 서사는 다이얼로그와 같은 차원이 아니며, 그만큼 진지하게 다루면 안 된다. 불행하게도 그들 자신도 그 조언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프롤로그와 분명하게 모순이 되는 다이얼로그의 내용에 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제안하는 새로운 요소는 욥기에서 어두컴컴한 구석에 묻어둘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고, 조금도 애매모호하지 않은 수많은 본문과 copious 본문들 속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욥은 확실히 자신의 고통의 이유를 말로 표현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배척 당했고, 핍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도, 모든 사람들은 그로부터 돌아섰고,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공동체의 희생이었다.
욥기 19장 13-19절(예루살렘 성경 역본)
심지어는 욥의 아내도 욥이 숨 쉬는 것이 냄새가 난다며 불평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를 tragic goat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는 수다한 원초적인 신화들에서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질적인 양/염소라는 암시는 오해가 아니다. 내가 희생양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유명한 레위기에서 희생제의의 동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그 표현을 사용한다. 정치적, professional or 가족사. 물론 이것은 욥기에서 발견할 수 없는 근대적 용례이다. 그러나 그 현상은 보다 원초적 형태로 현재에도 남아 있다. 희생양은 보편적(universal)으로 집단적 적의(hatred)를 극단화(polarizes)한 것이 무고한 자(party)이다. 그것을 욥의 불평에서 볼 수 있다.
욥기 16장 7-10절
이 텍스트는 폭로하는 본문이다. 내가 그 모든 본문을 다 인용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내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두드러진 것만을 선택했다. 그런 본문들은 욥의 사회에서 영구적인 희생양 역할을 하는 하위집단을 알려준다.
욥기 32장 1-12절
역사가들은 이러한 희생양 그룹들이 인종적 혹은 종교적 마이너리티, 또는 인도의 최하층 카스트처럼 동일한 종류의 regime에 굴복하는 하위 프롤레타리아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은 별로 흥미롭지 않다. 그들은 욥과 비교될 때만 그곳에 존재한다. 희생양들 중의 희생양으로 그들은 규정되고, 박해를 탐닉하는 자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절대적으로 만인의 희생자이고, 희생양 중의 희생양이고, 피해자 중의 피해자이다.
욥이 잃어버린 소떼와 불평하는 보다 합리적/선한 근거에 관해 고집스럽게 침묵을 지킬수록 그는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한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욥이 신체적 질병 때문에 불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체적/특이한 불평은 그의 탄원의 근본 이유(cause)와 곧잘 연결된다. 그는 셀 수 없는 야만성의 희생자이다. 그에게 심리적 압박은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다.
어떤 이들은 욥의 아내는 실제로 위협적이지 않았으며, 그를 살해하려는 의사가 없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친구들이 그를 보호해 주었다. 이것은 완벽한 거짓이다. 욥은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 장장 죽는 것을 바랐고, 그의 의사들은 욥의 병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전혀 애를 쓰지 않았다. 욥은 자신이 폭력적으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피 흘리는 것을 연상하였다.
욥기 16장 18절(새번역과는 다르다)
“오, 대지여, 내 피를 숨기지 마오.
나의 부르짖음을 쉴 곳이 없어요.”
나는 예루살렘 성경이 번역한 이 시의 두 행의 각주에 만족한다. “피, 만약 대지가 숨기지 않는다면, 복수를 요청하는 부르짖음이 하늘까지 올라갈 것이다. [. . .] 욥, 치명적인 상처(mortally wounded)를 입은 그는 최후의 신원 요청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바로 대지 위에, 자신의 피에, 하나님과 함께, 즉 기도의 소리를.....”
두 행의 번역과 각주는 다른 위대한 번역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각주의 언어는 무언가 모호하다. 욥은 누구에 의해 죽을 만큼 상처를 입었는가? 그건 분명히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도 복수를 부르는 희생자의 피가 향하는 곳은 확실히 하나님에 반하는(against) 것은 아니었다. 그는 복수를 위해 하나님께 울부짖는다. 그것은 마치 성서에서 최초의 위대한 희생자인 아벨의 피처럼 말이다. 야훼는 가인에게 말한다. “”(창 4:10)
복수를 외치는 그 피는 누구를 대적하는 것인가? 욥의 외침을 짓누르려고 애쓰는 자는 누구인가? 그의 말이 하나님에게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욥의 말을 지우려고 하는 자는 누구인가? 참으로 희한하게도 이런 기초적인 의문이 질문된 적이 전혀 없다.
욥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공동체에서의 역할을 회상한다. 그러나, 이것은 미스테리한 것인데, 그는 텍스트 바깥, 곧 텍스트 안에서 그에게 의문을 던지는 자들보다는 그를 좀 더 이해하는 텍스트 바깥의 주석자/해설가를 만드는데 실패했다. 그 누구도 그가 말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희생양의 폭로는 그의 친구들에게와 마찬가지로 후손들에게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욥이 말하는 바에 끈기 있게 집중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가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동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인간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신을 지켜내기란 너무나 두렵다. 특별히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 결과는 동일하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 보다 아주 조금 더 위선일 뿐이다. 욥에게 귀를 기울이려는 모든 사람은 그러나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말이 너무 많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친구들처럼 우리의 무관심을 감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일 뿐이다.
욥기 8장 2절
욥의 주장(claims)은 희생자가 항상 어디에서나 두드러지는 성경과 같은 텍스트 안에서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성찰을 좀 더 밀고 나간다면, 욥의 언설과 숱한 원수들에 둘러싸여 희생당하는 평범한 이들의 시각을 발견할 수 있는, 우리가 참회 시편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놀랄만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레이먼드 슈바거의 책(<희생양은 필요한가?>, 손성은 옮김. 가톨릭출판사, 20??.)은 비극적 시편에 관한 탁월한 reference를 제공한다. 이 텍스트들은 극히 응축된 형태이고, 욥의 불평과 같은 상황에서 린치를 당하는 한 무고한 희생자가의 말들을 묘사한다. 레이먼드 슈바거는 실수하지 않았다. 근대적 의미에서 희생양은 그가 견뎌내야만 하는 잔혹함으로 설명된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시편에서는 오로지 희생자만 말한다면, 욥의 다이얼로그에서는 다른 목소리들이 들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욥을 희생양으로 가장 잘 묘사한 저 텍스트는 시편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사실 상호 교환할 수 있을 만큼 상당히 흡사하다. 각각은 surrogate한 희생자에게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 많은 성서 텍스트를 모든 사람이 기이하게도 무시했던 바를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희생양인 피해자에 관한 지능적인 추방은 고대로부터 물리적 폭력의 연속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프롤로그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잘못을 일소하는 탁월한 방법은 욥이 실제로 겪었던 바를 알아내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시편을 다시 읽는 길이기도 하다.
시편 31편 11-13절.
첫댓글 성경 구절은 각자 찾아 보셔요
아.. 정말 아쉽네요 목사님. 다녀와서 기회되면 참여 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번역문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