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삶은 다시 타오른다
김서정
딸 방에 들어서다 깜짝 놀랐다. 타는 막대기라 불리는 인센스 스틱의 잔해가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다. 회색빛 재와 함께 남은 스틱을 모조리 찾아 방을 나섰다.
한때 향초가 유행했다. 크기와 모양, 빛깔이 모두 제각각인 향초가 우리 집에도 여러 개 있었다. 모두 지인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그들 중 어느 하나도 불을 피워 향기를 발산하는 본래의 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단발머리 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어두운 표정으로 봐서 좋은 일이 아님은 확실했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옆 동네 사는 친구가 온몸에 화상을 입어 사경을 헤맨다고 했다. 그날 교실은 태풍에 습격당한 갈대숲처럼 온종일 술렁거렸다.
그녀는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고 같은 중학교에 진학한 오래된 친구였다. 공부도 곧잘 하는 예쁜 아이였다. 지난밤에도 촛불을 켜고 공부하다 잠깐 조는 사이 촛대가 넘어져 불이 났고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소문을 들은 부모들은 밤마다 자식의 안위를 살피느라 분주했다. 밤이 깊어지면 마을은 온통 암흑세상으로 변했다.
친구의 책상은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쾌유를 빌며 아침마다 주인 잃은 책상 위에 꽃을 갖다 놓았다. 고작 들꽃 몇 송이가 전부였지만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것이 전부라는 듯 간절했고 또한 절실했다.
병원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고서야 퇴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두 살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그녀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친구가 퇴원했다는 소식은 저승에서 날아온 편지처럼 반가웠다. 우리의 작은 소망을 저버리지 않은 신에게 감사했다.
친구 몇이 병문안을 갔다. 퇴원했지만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등신불처럼 잔뜩 몸을 웅크린 친구가 벽에 기댄 채 앙버티고 있었다. 소독약 냄새가 좁은 방 안에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쓰러움에 더는 있을 수가 없었다. 먼지 나는 골목길이 어느 쪽으로 굽어 도는지 눈앞은 그저 흐릿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앞선 친구의 발뒤꿈치를 보며 허적허적 따라 걸었다.
친구는 더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하며 위태로운 생명을 이어간다고 했다. 그 후로 두어 번 더 병문안을 갔었던가. 친구의 그 끔찍한 일도 서서히 잊혀갔다. 지옥 같은 입시 공부에 내몰려 친구를 찾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면 구차한 변명일까. 우리만 보면 작달비처럼 쏟아내던 친구 어머니의 눈물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친구네 마을에 있던 작은 연못은 그 어머니의 눈물로 더 넓어졌을지도 모른다.
친구의 근황은 고향에 갈 때마다 들었다. 병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흉터 제거 수술과 재활치료를 받아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강산이 한 번쯤 변한 어느 날, 고향 가는 길에 우연히 친구를 보았다. 그녀는 중학생 시절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화상의 후유증으로 성장판이 닫혀버린 모양이었다. 모진 고통의 흔적이 남아있는 듯 노출된 몸 여기저기는 흉터투성이였다. 하지만 결코 흉하게만 보이지 않았다. 저승 문을 지키는 무서운 야차와 싸워 기어코 얻어낸 훈장처럼 보였다. 친구의 그런 모습조차도 어여삐 봐주는 인연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는 이야기도 언젠가 바람결에 전해 들었다. 생명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은 친구에게 주는 신의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삶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인센스 스틱으로 인해 가슴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던 기억 하나가 깨어났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녀가 문득 그립다. 잘 지내고 있을까.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세월의 강에 마모되어 흉하던 화상자국도 이젠 희미해졌으리라. 그녀도 어디선가 나처럼 나이 먹어가고 있었으면 좋겠다.
(《수필문예》 제21집, 2022.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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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2006년 《수필과비평》등단.
대구수필문예대학 강사.
대구문인협회, 수필문예회, 대구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
수필집: 《초승달》
대구수필문예대학 4기 수료
susunhwa8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