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와 부정과의 명백한 차이
고르기아스, 퓌론, 데카르트, 흄....이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뭘까요? 철학사를 아주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대번에 '회의주의!!'라고 떠올리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이 회의주의에서 회의가 지칭하는 바가 정확히 무언지는 명확히 모르는 관계로 회의라고 하면, '아 그거 무조건 아니라고 하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이지요. 그리고 회의주의의 본질을 떠올린다면, 전적으로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러므로, 오늘은 이 '회의'의 의미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봅시다.
회의주의에서 회의란, 의심을 가지는 것, 즉 특정한 무언가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이 틀릴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염두를 하는 것입니다. 이 회의주의의 첫 시작점은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와 그 제자들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그들은 자연의 것으로써 충분히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본 '자연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의심에서부터 철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고르기아스의 저 유명한 말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다 하여도 인식되지 않는다. 인식된다 하여도 전달되지 않는다.'에 잘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빈약한 인식으로써는 받아들이는 진리의 참 거짓 여부를 판가름 할 수 없지요.
이러한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적 전통은 헬레니즘 때의 퓌론에게 이어집니다. 회의주의 또한 인식 가능한 모든 사태에 대해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판단을 유보할 때에야만 비로소 마음속에 평화가 온다고 보았지요. 퓌론의 뒤를 이은 것은 무려 천년 가까운 세월 뒤에 등장한 데카르트였는데, 데카르트는, 의심가능한 모든 것에 대해 의심해보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그럼에도, 결코 부정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인 생각하는 나'라는 위대한 발견을 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대륙합리론의 반대쪽이라 할 수 있는 영국경험론의 대가인 흄은, 극단적 회의를 통해,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성 그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관념의 다발이라고 보았지요.
이것이 아주 간략하게 훑어본 회의주의의 역사입니다. '뭐 별거 없잖아.'라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간과하고 착각하기 쉬운 사실 하나가 숨겨져 있지요. 바로 진리의 참 거짓 여부를 판가름 할 수 없다는 말은, '진리를 모른다'라는 말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회의주의와 관련되어, 사람들이 가장 잘 저지르기 쉬운 착각이지요. 회의주의란 것은, 다짜고짜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대해 모른다.'라는 입장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다짜고짜 부정하는 것이 회의주의일 수는 없을까요? 그것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회의주의의 목적 자체가 시시껄렁한 농짓이 아닌, '세계를 통찰하는 철학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째서 확신이 불가능한가?에 대해 논리적이고 체계적(고대 철학자들은 덜하겠지만)으로 연구해놓았고, 그 결과에 따라 회의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었지요. 따라서 회의주의는 어디까지나 세계를 보는 또 하나의 철학적 패러다임이자 창인데, 이 창이 있는 이유는 세계를 보다 다채롭게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회의주의적 철학자들이 각각의 철학에서 회의주의를 통해 얻어낸 학문적 성과들이 담긴, 그들의 책(고대철학이라면 원서를 구하긴 어렵겠지만)을 읽어본다면 쉽게 수긍이 가게 되지요. 그들은 회의주의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터득했으며,(물론 다른 이들과는 달리, 소피스트들만큼 내외적으로 좀 욕을 많이 얻어먹긴 했지만) 이를 통해 후대의 수많은 학자(회의주의자이든 아니든지에 관계없이)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요.
둘째, 회의한다는 말 자체가, 부정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데 있습니다. 회의란 말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의심가능한 한도 내에서 모두 의심하는 것, 즉 물음표를 치는 것이고, 부정은 '아니다.'라고 못을 박는 것이지요. 얼핏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다음 문장을 보고 나면 확실히 그 둘은 다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일 해가 동쪽에서 뜨지 않을 수도 있다.' - 회의
'내일 해가 동쪽에서 뜨지 않는다.' - 부정
보면 알겠지만, 회의적 입장에서 보자면, 내일 해가 떠오를 수도, 않을 수도 있는 셈이지만, 부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일 해가 어느 쪽에서 떠오르든, 동쪽에서만큼은 떠오르지 않는다 라고 볼 수 있는 셈이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에서 봅시다. 그렇다면 내일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부정이 가지는 모순이 제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내일 해가 동쪽에서 뜨지 않는다 라고 부정한다면, 적어도, '내일 해가 어느 쪽에서 떠오르든, 동쪽에서만큼은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하는, 부정될 수 없는 참의 명제가 얻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명제를 또 다시 부정할 수 있을까요? 이 명제를 또 다시 부정한다면, '내일 해가 어느 쪽에서 떠오르든, 서, 남, 북 등등의 방향에서만큼은 떠오르지 않는다.'등의 명제를 얻을 수 있는데, 문제는 이 명제들이 서로 모순된다는 점입니다. 즉 부정의 논리에 의하자면, 해는 내일 어느 쪽에서도 떠오를 수 없는 셈이지요.
또 다른 예로, 가령 '이것은 존재이다.'라는 명제와, '이것은 존재가 아니다.'라는 명제가 서로 충돌하게 된다면, 이것은 존재일 수도 존재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모순이 발생하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부정 그 자체가 가지는 가장 큰 단점이며, 결국 부정이나, 절대적 긍정이나 다를 바가 없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은 거나, 이것도 틀리고 저것도 틀린 거나, 결국 현실화될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니까요. 이것이 바로 무조건 적인 긍정이나, 부정이 철학에서 다루어질 수 없는 이유입니다. 철학에서 긍정, 혹은 부정이 이루어지는 건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논리적, 혹은 현상적 타당함 하이며, 이 둘 다가 의심스러울 경우, 회의의 카드를 꺼내게 되는 것이지요. 긍정 혹은 부정의 카드가 아닌, 물음표인 카드인 회의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