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복효근은 콩나물에 대해서도 예의를 지킵니다. ‘너와 나 감당 못한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을 공유한 존재에 대한 예의로 콩나물 뿌리도, 콩나물 대가리도 자르지 못하는 마음 약한 시인입니다. 알량한 휴머니즘에 넝마 같은 낭만이라고 스스로 자조하면서도, 그래도 예의는 차리겠다는 것, 이것이 시인의 마음입니다. 근본을 가진 자, 위를 향해 발돋움을 한 자, 고통의 시간을 함께 한 자들은 모두가 존중해야 할 생명이라는 믿음, 이것이 시를 쓰게 하는 근원, 아니,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원이겠지요. 더구나 ‘어둠 속에 가두고 물먹’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시생활에 찌들이고 삶에 고단한 자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는 콩나물이니, 시인의 말마따나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것이 인간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 예의라는 것이, 살신성인한 콩나물의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를 벗겨주는 것일 뿐일지라도 말이지요.
‘염우염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염우(廉隅)는 품행이 바르고 절개가 굳음을 뜻하는 말이고, 염치(廉恥)는 체면을 차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합니다. 알다시피 예의(禮儀)란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예로써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을 말하지요. 존경이나 예의는 아니더라도, 염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사람들이여, 최소한의 염치는 좀 차리고 살자 싶습니다. 사람이 식물에게, 동물에게,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최현주 시인의 <공존에 대한 예의, 아니면 최소한의 염치>에서 인용
첫댓글
참~~~
마음에 와 닿는
따뜻한 글이네요
쌤
감사합니다.
복효근 시인의 시에서
순수순박한 인간미를 읽게 됩니다.
공존에 대한 예의
최소한의 염치.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
염우염치를 상실한
요즘 세태...
특히
정치권의 구린내나는 욕망을 보면서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