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각사(妙覺寺)의 기우제(祈雨祭)
‘코로나 19’ 확진자가 수도권을 비롯하여 전국 각처에서 다시 늘고 있다는 보도를 듣고, 국민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긴장하며 생활을 하고 있다. 당국에서 그동안 신속한 정보를 전해주고 당부하는 주의사항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행보(行步)를 하는 것이 이제는 생활화 된 듯하다.
더운 날씨에 마스크를 착용하니 매우 답답하지만, 귀중한 자기 생명을 위탁 관리할 수 없기에 저마다 불평 없이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언제 이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박멸(撲滅)될지 가늠할 수 없어서, 주말(週末)이나 공휴일은 올 데이(all-day) 하우스키퍼(housekeeper)가 되어 제한된 실내 활동을 하다 보니, 솔기증이 나서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청정한 숲을 찾아 심호흡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마침 영천이 고향인 동서(同壻)가 묘각사(妙覺寺)에 가보자는 제의(提議)를 해 왔다. 참으로 반가웠다. 처남 내외(內外)와 같이 오래간만에 심산(深山) 원족(遠足)을 떠나게 되었다.
영천 지역은 코로나 19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안심시켜주었고, 그 심산유곡에 소재한 묘각사에 코로나19가 불공(佛供)을 드리기 위해 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어서 마음 편히 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1차 집결지인 임고서원(臨皐書院) 주차장에 약속과 같이 11시 30분에 미팅(meeting)을 해서, 도중에 조용한 하천(河川)유원지(遊園地)에 들려 잠시 소요(逍遙)하다가, 산중(山中) 매운탕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이 인적이 적은 산골에 위치하지만 자양 댐에서 잡아온 잡어(雜魚)라서 양식(養殖)하는 민물고기와는 맛이 다르고, 특히 검은 콩과 찹쌀을 넣어 지은 밥이 마치 생일날 특별히 정성드린 밥처럼 부드러웠고, 씹히는 콩 맛 또한 숟가락을 더욱 분주하게 하였다. 온갖 생활고를 극복하고 돈을 모아 시작한 식당이 손님의 인정을 받아 대지 4천여 평을 마련하여 식당만이 아니고 각종 과목을 심어서 매년 소득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일손이 비록 부족한 형편이지만 촌가(寸暇)를 내어 여러 화초(花草)를 심어서 아름다운 조경(造景)을 한 것을 보니, 주인부부의 친자연적인 순후한 심정(心情)에 모두들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배불리 감식을 한 후 2시 경에 묘각사를 찾았다.
동서(同壻) 차에 동승하여 임고면을 지나 자양면의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니 묘각사까지는 3.5km라는 이정표(里程標)가 눈에 띠었다. 인가(人家)가 보이지 않는 산중길이 넓게 포장은 되어 있지 않았으나, 그래도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이 퍽 다행스러웠고, 도로를 개설한 영천시장이 고마웠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란 말과 같이 산중으로 들어 갈수록 골자기는 좁아지고 길은 점점 가파르게 구비 쳤으며, 주변에는 수목(樹木)이 울창하였다. 차장(車牕)을 열고 자연이 주는 시원한 바람에 청량감을 느껴보니 어느덧 탈속(脫俗)한 기분이 들었다.
위험한 굽이굽이를 저속으로 운행하다보니 묘각사 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해발 600m가 넘는 7부 능선고지에 위치한 묘각사는 지금부터 1,300여 년 전에 선덕여왕(632-647) 당시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사찰(寺刹)이었는데, 조선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란(壬辰亂)으로 사찰전체가 소실(燒失)되었다고 한다.
1644년에 지장전 창건, 1657년에 요사체 중창, 1889년에 법당 지장전을 중수하였고, 2009년에 극락전을 신축하여 깨끗한 도장(道場)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군들이 멀고 험악한 이 고산(高山)에 소재한 묘각사에 와서 불을 질러 전소(全燒)시켰다는 것은 참으로 못된 짓이고, 안타까운 사적(事跡)이다.
의상대사는 속성(俗姓)이 김씨(金氏)이고, 진평왕(眞平王) 47년(625)에 출생하여 29세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삭발(削髮)을 하고 불문(佛門)에 들었던 스님으로, 당나라에 유학한 학승(學僧)이다. 입당(入唐)하여 지상사(至相寺) 지엄(智嚴)의 문하(門下)에서 화엄사상을 공부하여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하였고, ‘환본교육론’과 ‘내 몸 교육론’을 주창하였다.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환본교육론’과 ‘내 몸은 내 몸을 교육한다.’는 ‘내 몸 교육론’은 미래의 자기가 자기를 교육한다는 것이다. 대사가 소백산 추동에서 90일간 화엄경을 강의할 때 3,000명이 운집했다고 하니, 의상대사는 신라의 문명사(文明史)를 구축한 교육사상가인 동시에 매우 활동적인 교육실천가로 전해오고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했던 사찰의 원모(原謀)는 볼 수 없었으나 기룡산(騎龍山) 고원(高原)에 사찰(寺刹)을 세웠다는 것은 아무래도 깊은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안내판을 살펴보니, 기이(奇異)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 사찰을 창건할 때 산의 이름이 기룡산(騎龍山)이 된 것은 동해의 용왕(龍王)이 의상대사에게 법을 청하고자 말(馬)처럼 달려 내려왔다(騎)는 데서 그 유래가 비롯되었고, 용왕은 의상대사에게 곧 바로 법을 설(說)하여 줄 것을 청하여, 이에 대사가 법성구 일구를 설하자 홀연히 묘한 깨달음을 얻은 용왕은 곧바로 승천(昇天)하여 감로(甘露)의 비를 뿌렸는데, 당시 관내는 가뭄이 극심하여 농작물이 고사(枯死)되고 있을 때라, 이 비로 인해 가뭄이 해소(解消) 되었다고 한다.
조선 말 건륭제(乾隆帝)때 가뭄 때문에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더니 신기하게도 영험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찰에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이 꼭 성취된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록 거리가 멀고 다니기가 불 편하지만 찾아온다고 한다. 특히 모 대통령의 영부인이 이 사찰에 와서 정성껏 기도를 드린 이후 이 사찰이 더욱 명소(名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일청한 일일선(一日淸閑 一日仙)’, 즉, 하루가 맑고 한가로우면 하루의 신선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지저분한 항간(巷間)의 속 답답한 말들을 듣지 않고, 창송(蒼松)이 뿜어주는 솔향기를 마음껏 마셔보니, 어느덧 신선이 된 착각기분이 들었다.
늦가을이 되면 지고 마는 푸른 잎들이 뜨거운 태양열을 견디면서, 지나가는 구름에 시원한 바람을 보내주니, 힘없는 인간은 자연에 또 신세만 질뿐이다.
그래서 한 가지 소원(所願)은 들어준다기에 묘각사 금부처에게 코로나19를 하루 빨리 박멸(撲滅)해 주기를 기원하면서,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니 어느덧 사양(斜陽)은 푸른 초가을 하늘에 운금(雲錦)을 당기며 내일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무심히 떠나는 것 같다.
뒤돌아보니 묘각사는 미소지우며 열심히 바르게 교육하라고 일러주는 같아, 다시 한 번 합장을 하면서 산사를 향해 손 흔들며 시정을 버릴 수 없어, “妙覺寺刹雖美景(묘각사찰수미경) 不如金佛無言情(불여금불무언정) 衆生無智難解說(중생무지난해설) 淸淨心事溢滿腔(청정심사일만강). ‘묘각사가 비록 아름다움 빼어나나 금부처의 무언 설법에 미치지 못하네. 중생이 지혜가 없어 설법해득 어려우나, 맑고 깨끗한 심사는 가슴가득 넘친다네.”하고 일구(一句)를 토해 보니, 어느덧 차는 황수탕(黃水湯)을 지나고 있었다(2020.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