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장 1~8절)
오늘도 거룩하고 복된 주일을 맞이하여 주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려 나오신 우리 사랑하는 샘물교회 권속들에게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포도나무 비유로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본문 총 여덟 구절중에 ‘열매’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 ‘열매’가 나오는 1~2절을 보면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아멘. 이 짧은 두 구절에는 ‘열매’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비유에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내 아버지(하나님)를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농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참 포도나무의 가지들을 손보시면서 열매를 잘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돌보십니다. 농부로써 당연히 할 일입니다. 하지만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발견하면 그 가지는 가차 없이 제거해 버립니다. 열매도 맺지 못하는 나무는 즉시 베어 버려야 다른 좋은 가지에게 양분이 제대로 공급이 됩니다. 쓸모 없는 가지를 잘라내 버리는 것 역시 농부가 해야할 일입니다. 이비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열매 맺는 가지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로 구분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 양과 염소, 반석과 모래위에 지은 집 등의 비유에서 무엇을 행하였는지(순종과 충성), 그래서 무슨 결과(열매)를 얻게 될 것인지를 매우 많이 강조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이 외에서 수 많은 비유(열매 없는 무화과, 어리석은 부자, 불의한 청지기, 열 므나 비유 등)을 들어서 열매 맺는 삶에 대하여 셀 수 없이 많은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성경에서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의 주인 이신 예수님이라는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이라고 표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으로 성령 안에서 거룩한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 비유는 바로 이런 연합의 관계, 붙어 있는 가지와 같은 관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참포도 나무 비유에서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소망이 더욱 열매 맺어지도록 우리 몸과 마음과 말과 생각과 행동을 깨끗하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농부의 정성이 우리를 이토록 아름답게 가꾸어 간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십자가 은혜와 부활영생의 소망에 합당한 열매가 맺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십자가 은혜가 은혜로 열매 맺지 못하고, 부활영생의 소망이 소망으로 열매 맺지 못한다면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그것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으실 겁니다. 망설이지 아니하시고 과감하게 가지를 쳐 내서 다른 좋은 가지에게 더 많은 양분이 공급되도록 관리 하실 겁니다. 참포도 나무를 돌보는 농부와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항상 마주 대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수 많은 가지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항상 함께 있을 만한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가지로써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은혜입니다. 참 포도나무 밭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거룩’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그 밭에 나아가서 자동으로 나뭇가지가 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우리가 참포도 나무의 가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보배로운 피 흘리심의 은총으로 인하여 거룩함이 덧 입혀졌기 때문임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장소에 머물며 항상 함께 있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면서도, 참 포도나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지가 되었음에도 ‘열매’라는 수확을 하나도 거두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내가 농부의 밭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장소에 있을 만큼 내 자신이 거룩함이 생성(십자가 구원의 확신, 성령으로 거듭남)되지 못했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내 몸과 마음이 연결된 것이 참 포도나무가 아닌 돌무화과 나무 였던 겁니다. 다른 장소, 다른 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농부의 밭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열매 맺지 못하는 상태는 성령 받지 않음, 성령 소멸(성령의 일하심을 거부),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답이 나왔죠.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와 열매 맺는 가지의 차이점은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 성령과 동행하는지 안하는지 여부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과 동행하지 않으면 열매 맺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하여서 성령이 없으면 예수를 주라 시인 할 수 없기에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믿음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것이 되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진실로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기에 농부의 밭에 있는 참 포도나무에 가지로 살기는커녕 밭조차 보지 못하는 완전 다른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① 거룩한 곳, 농부의 밭에 초대 받아 항상 거기에 머물기를 원하십니까? - 성령을 갈망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사모 하십시오. ② 참 포도나무에 붙어 말씀의 양분으로 성장해 나가시기를 원하십니까? -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여 확고한 진리의 증언자가 되십시오.③ 참 포도나무에 붙어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가기를 원하십니까? - 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화개하며 감사와 순종으로 살아가십시오. 1~2절은 바로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세 가지로 압축하니 말씀이 뜻하는 바가 선명해 졌죠. 우리 모두가 항상 진실한 마음을 담아 농부와 함께 있기를 사모하고, 농부의 돌보심을 받아 항상 성장하기를 갈망하고, 항상 열매 맺기를 소망하며, 항상 성령님과 아름다운 동행을 이루어가는 존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1~2절에서는 열매 맺는 가지로 계속 깨끗하게 하시는 과정의 이야기를 하셨다면 3절에서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해 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은혜를 받아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의인(justification)이 되었다는 것은 과정의 단계이고 성화(sanctification)의 단계,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계속 나아간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간다는 뜻이며, 이렇게 계속 전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4절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열매 맺지 못하리라)” 아멘. 이 말씀에 근거하면, 예수님과 성도가 하나가 되어 서로 상호작용이 일어날 때에만 열매 맺어가는 변화와 성장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분리되어서는 결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주인이시며,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시며, 믿음을 가진 자들과 항상 함께 하시며, 믿음의 성장을 도와 주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의인도, 성화도, 영화도, 그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는 메마르고 땅에 떨어진 가지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오랜 신앙 생활을 했는데도 어떤 변화나 성장이 눈곱만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전 보다 더 나쁘게 되었다면 그 원인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할 수 없을만큼 더럽고 불결한 죄와 더불어 연합(짝이 되어)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성령의 열매 없음을 걱정하면서,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어가는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더욱 전심으로 기도하며,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하려는 열심에 집중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항상 함께 계시도록 갈망하며, 거룩으로, 믿음으로, 사랑으로, 열매 맺는 제자의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