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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12일, 성령강림 후 제16주]
[*. 성경, 찬송가를 준비합니다.]
*.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2021년 9월 12일, 성령강림 후 제16주입니다. 함께 인사 나누고 예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
예수님 안녕하세요, 사랑합니다. ~
성령님 안녕하세요, 평안합니다. ~
*. 다 함께 조용한 기도를 함으로 성령강림 후 제16주 주일예배를 시작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시고, 오늘 거룩한 주일 맞이하여 예배 가운데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온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님 기뻐 받으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배 가운데 임재하셔서 영광 받아 주시고, 예배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허물이 사함을 얻게 하시고,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과 능력과 위로와 소망을 얻게 하옵소서. 예배의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였습니다. 아멘.
*. 찬송가 26장(구세주를 아는 이들)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성시교독은 시편19:1~14절입니다. 한 절씩 교독합니다. (성경)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 함께 기도합니다. [세실 커, Cecil Kerr]
(영상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신 분을 위한 기도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은 평화의 길이십니다.
손상된 우리의 삶과 우리 땅에
주의 치료하는 사랑을 가지고 들어와 주소서.
참된 회개로 주님 앞에 고개 숙이고
진정한 용서로 서로 받아들이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의 성령의 불로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녹여주시고
우리를 갈라놓는 교만과 편견을 소멸해 주소서
오 주님, 주의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주옵소서.
그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연합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오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야고보서 3:1~12절입니다. (성경)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 특별 찬양: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 말씀 선포: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1. 들어가는 말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16주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언어(말) 생활’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은 ‘말 조심하라’고, 그리고 ‘한 입 갖고 두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다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과연 ‘슬기로운 언어 생활,’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까요?
2. 언어(말) 생활
플라톤은 다섯 가지의 국가 정체 [최선자 정체, 명예지상(지배)정체, 과두정체, 민주정체, 그리고 참주정체]를 사람에게 적용시키면서 사람을 세 부류, 즉,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와 ‘이기기를 좋아하는 부류’ 그리고 ‘이(利)를 구하는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利)를 구하는 부류의 사람은 ‘재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고 ‘절제’라는 가치를 잘 새겨야 합니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은 ‘힘 혹은 권력’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고 ‘용기’라는 가치를 잘 새겨야 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부류의 사람은 ‘깨달음’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고 ‘지혜’라는 가치를 잘 새겨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3대 덕목인 ‘지혜, 용기, 절제’라는 가치가 여기서 나옵니다. 사실 사람은 모두 이 세 가지의 지평에서 삶을 꾸려갑니다. 물론 무엇을 더 중시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테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세 지평의 삶, 그 중심에는 ‘언어(말)’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로 보면, 땅(地)에 이(利)를 구할 때 사용하는 언어 생활이 있고, 사람(人)에 대하여 이기기를 구할 때 사용하는 언어 생활이 있고, 하늘(天)에 대하여 지혜나 깨달음을 얻고자 할 때 사용하는 언어 생활이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 언어 생활은 눈에 보이는 사람 혹은 사물에 대한 언어 생활이고, 세 번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대한 언어 생활이 됩니다.
3. 눈에 보이는 언어(말) 생활
눈에 보이는 언어 생활 즉, 땅의 이(利)를 구하거나 사람에 대하여 힘과 권력을 구하는 경우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말 실수 하지 않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그야말로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세 가지를 주의하시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진실한 말인가?’, ‘필요한 말인가?’, 그리고 ‘친절한 말인가?’입니다. ‘진실한 말, 필요한 말 그리고 친절한 말’만 하며 산다면 말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여겨집니다. 삼위의 지평으로 보면 진실한 말은 성부 하나님께서, 필요한 말은 성자 하나님께서, 그리고 친절한 말은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의 본성(本性)이 됩니다.
삼위가 일체이듯이, 위의 세 가지 지평의 말은 어느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실한 말이라도 ‘필요한 말, 친절한 말’이 아니라면 말해서는 안되고, 필요한 말이라도 ‘진실한 말, 친절한 말’이 아니라면 말해서는 안되고, 친절한 말이라도 ‘진실한 말,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언어(말)의 타당성은 위 세가지에 꼭 맞아야 합니다.
[*. 언어(말)의 의사소통 타당성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소개한 사람은 합리성을 믿는 근대주의의 마지막 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Jurgen Habermas)입니다. 그는 <의사소통이론>이라는 방대한 책을 썼습니다. 서로간에 언어(말)를 갖고 소통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썼을 것입니다. 그는 이상적인 대화의 상황을 설정하고 네 가지의 대화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말하는 자의 발언이 이해 가능한가? (the comprehensible of the utterance) 둘째는 그 발언을 구성하는 명제들의 내용이 참인가? (its propositional truth) 셋째는 말하는 행위 속에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규범적 언어 행위의 정당성 혹은 적합성이 있는가? (the normative rightnes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speaker and hearer taken up through the speech act)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는 자의 주관적 표현이 진실한가? (the truthfulness or authenticity of the speakers intention expressed in the utterance) 라는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는 상황만이 ‘그 말이 옳다’는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이상적 담화 상황 (ideal speech situatio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밥상이 차려져 있네. 밥 먹자’’하고 ‘친절하게’ 말하면 (배고픈) 듣는 사람에게 말의 ‘타당성’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밥상이 차려져 있네’는 진실한 말이고, ‘밥 먹자’는 말은 (배고픈 듣는 자에게) 필요한 말이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은 말하는 자의 (마음을 담은) 표현입니다. 진실한 말, 필요한 말, 친절한 말이 됩니다. ‘밥상이 차려져 있네’라고 말했는데 밥상이 없다면 진실한 말이 아닌 것이고, 혹은 ‘밥 먹자’라는 다음 말이 따르지 않으면 (배고픈 듣는 자에게) 필요 없는 말이 되고, 혹은 두 말 모두 했더라도 눈에 불을 켜고 죽일 듯 인상 쓰며 말했다면 그 말의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을 할 때는 이 세가지를 꼭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말, 필요한 말, 친절한 말’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 21세기 대한민국에 살면서 입 밖에 내서는 안되는 말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성-차별적인 언어가 그것입니다. "여자가~" 혹은 "남자가~" 라고 하는 ‘성(性)을 기준으로 차별해서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혹은 남자이기 때문에 "이러 저러 하다~"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성(性)을 가지고 차별을 하는 것이 됩니다. 때로 차별이 아닌 의미에서 쓴다고 해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차별적인 언어로 들릴 수 있기에, 쓴다면 매우 조심스럽게 써야 할 언어인 것입니다. 그냥 입밖에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별히 여성의 용모와 관련한 언어 선택은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성 추행’으로 들려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 나라는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인종 차별적인 언어입니다. (하긴 외국인 노동자가 이제 우리 나라에도 많이 들어와 있으니 남의 나라 문제만은 아닌 것으로 됐습니다 만은) "흑인이~"라고 하는 말은 미국에서는 차별적인 언어가 됩니다. (한국인은 가끔 ‘연탄’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당연 쓰지 말아야 할 차별하는 언어가 됩니다.) 영어로 니그로(Negro)는 물론이고 요새는 블랙(Black)이라는 말도 쓰지 않습니다. 흑인을 지칭할 때면 아프리카-계-미국인(Afro-American)이라는 말을 씁니다. 백인에 대해서는 유럽-계-미국인 (Euro-American)이라는 말을 쓰고 아시아인은 아시아-계-미국인(Asian-American), 한국인은 한국-계-미국인 (Korean-American)이라는 말을 씁니다. 피부의 색깔로 그들을 부르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피부색을 가지고 희롱하는 것이 됩니다. 인종차별적인 언어는 입밖에 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우리 나라의 특수한 상황에서 또한 조심해서 써야 할 언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좌파~ 혹은 빨갱이~"이라는 말입니다. [*. 못된 정치인들이 그들의 당파 이익에 따라 만들어 낸 프레임입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언어 때문에 고난을 겪었는지 6, 70년대 혹은 80년대를 살아오신 분들은 아마 잘 알 것입니다. 민족의 비극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희생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아주 조심해서 써야 할 것입니다. 아예 입밖에 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와 비슷한 차별적 언어로 지역에 따른 언어도 조심해야 합니다. ‘전라도가~ 혹은 경상도가~’하는 말도 조심해야 할 언어, 가급적 쓰지 말아야 할 언어가 됩니다.
성, 인종, 이념, 지역에 따른 차별 외에도, 배움, 외모, 가족 혹은 가정형편 등등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언어(말) 생활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혹은 남의) “삶의 수레바퀴”를 불 사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4.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말) 생활
사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하여는 조금만 마음을 쓴다면 언어 생활로 인해 우리 삶이 추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언어 생활에 있습니다. 즉 하늘에 대한, 진리, 지혜, 지식, 깨달음에 대한 언어(말) 생활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언어(말) 생활은 그 언어의 방대함도 방대함이려니와 그 내용을 언어에 담는 것도 매우 어려운 까닭입니다.
욥의 이야기가 이런 어려움을 잘 보여줍니다. 지난 번, 욥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면서, 땅과 사람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욥은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두 가지의 환난 속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잘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욥기 전체 42장 중에서 2장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하늘에 대한 이야기(진리, 지혜, 지식, 깨달음)는 방대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동방의 의인’이라던 욥조차도 넘어지게 합니다. 2장 11절부터 42장 끝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내용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비록 언어에 담기가 어렵다고 해도, 진리, 지혜, 지식, 깨달음 등 ‘하늘’에 대한 이해는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아미쿠스 플라토 세드 마기스 아미카 베리타스(Amicus Plato, sed magis amica veritas)’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 돈키호테1,2>의 2권의 내용 중에서, 총독으로 부임한 산초 판사에게 보내는 돈키호테의 편지에서 돈키호테가 인용한 경구입니다. (새겨 두면 참 좋은 말인 듯 하여 소개합니다.) ‘아미쿠스 플라토 세드 마기스 아미카 베리타스’ ‘플라톤이 친구라 해도, 더 좋은 친구는 진리이다’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비슷한 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도 나옵니다. “벗과 진리가 다 같이 소중하지만 우리의 벗들보다 진리를 더욱 귀히 여기는 것이 경건한 태도” (니코마코스 윤리학, 1096a) 라고 말입니다.
벗도 좋고, 가족도 좋고, 명예도 좋고, 재물도 좋고, 세상에 좋은 것이 참 많지만,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진리 (베리타스, veritas)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입니다. [ref.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바국 6:3)]
그러나 이 진리, 지식, 지혜, 깨달음이니 하는 ‘하늘’에 관한 것을 언어(말)에 담는 것은 ‘큰 것을 작은 것에 담으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평에 있어서 언어는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가장 신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또한 언어가 됩니다. ‘가장 신뢰할 수 없는 그러나 가장 신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하늘의 것’에 대한 언어 생활입니다. 언어(말) 속에 진리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또 담아야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계종에서 가장 큰 스님으로 추앙 받는, 돌아가신 성철 스님은 속세에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기자와의 첫 인터뷰에서 “내 말에 속지 말라”라고 일갈(一喝)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속지 말라는 것인가요, 속으라는 것인가요? 잘 생각해 보면 “내 말에 속지 말라”는 말을 한 이는 성철 스님 자신입니다. ‘내 말’이 ‘내 말에 속지 말라’이므로, 그 말을 내 말에 대입해 보면, ‘내 말 곧 “내 말에 속지 말라”라고 한 말에 속지 말라”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속으라는 말인가요, 속지 말라는 말인가요?
이는 마치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같습니다. 거짓말쟁이가 ‘내가 거짓말을 했다’라고 말하면 그 말은 거짓말인가요, 참인가요? 디도서 1장 12절에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그레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그레데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역시 그레데 사람이므로 항상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그가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말은 거짓이 되므로 그레데 사람은 언제나 참말만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선지자는 그레데 사람이므로 참말만 한다면 거짓말쟁이가 되고 거짓말이라고 하면 참말을 하게 됩니다. 거짓말쟁이의 역설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항상 거짓말하는 사람이 ”나는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라는 말이 (그는 거짓말쟁이이니) 참말이 되어서도 안되고, (거짓말이 되면 참말이 되어버리니) 아니 되어서도 안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거꾸로 항상 참된 말만 하는 사람도 “나는 거짓말을 했다”고 이야기 하는 것도 안됩니다. 거짓말은 (참이 아니므로) 참이 되어도 안 되고 (참된 말만 하는 사람이기에) 참이 아니 되어도 안 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 말이 참되면 참되지 않은 것이 되고, 참되지 않으면 참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논리는 ‘항상’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항상 거짓말을 한다” 혹은 “나는 항상 참되다”고 말하는 것과 그리고 거꾸로 “당신은 항상 거짓이다” 혹은 “당신은 항상 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람에게는 역설이고 오류가 되는 것입니다.
‘항상’ 참되지 않은 (악한) 모습을 한 형상이 ‘사탄’이라고 하고, ‘항상’ 옳은 (선한) 모습을 한 형상을 ‘천사’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탄’이나 ‘천사’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항상’ 이라는 말을 붙여서 ‘참되다’ ‘거짓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체로 사람은 역설에 빠지고 맙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의 ‘말’은 일종의 한 주장이고, 하나의 해석이 됩니다. 주장이고 해석이라는 말은 그 ‘말’이 그 사람이 처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시간과 장소와 목적)에 따라 얼마나 타당성을 가지는가 하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메시지도 그러한 주장과 해석에 따라서 2천년 넘게 ‘논의’되면서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땅에 온 현인들은 언어(말) 속에 진리를 담을 수 없기에 소위 ‘진리’라고 선포된 많은 가르침들을 대부분 이런 식의 언어로 보여줍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언어(말)에 진리를 담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가의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언어나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깨달음을 이야기 하고, 노자는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이라 하여 “도를 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이름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을 해 버리면 말이 그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ref. “마가복음 8:34b,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 자기를 부인하면 어떻게 되나요?
자동차가 어떻게 가는 지를 가르친다고 가정해 봅니다. 앞에 유치원생이 있다면 뭐라고 가르칠까요? ‘’쌩~ 쌩~’ 혹은 ‘부릉부릉’하고 가요”라고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고등학교 <공업>과목 시간이라면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인 지망생에게는 ‘미끄러지듯 가요’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실용주의자에게는 ‘기름을 넣고 가지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공대생이 앞에 있다면 자동차의 회전 축에 대한 원리를 가르치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언어를 가만 생각해 보면 맞듯이 틀리고, 틀리듯이 맞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쓰였던 (언어생활에 있어서) 단어와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쓰는 단어는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요? 당시에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지구는 네모난 것으로 생각을 했구요. 무리수(無理數)나 소수, 영(0)이나 무한(∞)은 생각을 못했던 때입니다. 4연산(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정도 하던 시대에 살던 그들이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루트(√), 원주율(∏), 시그마(∑), 퍼센트(%), n승(ⁿ), 팩토리얼(!), 로그(log), 실수(R), 소수점(0.0xx), 인테그럴(∫) 싸인(sin), 코싸인(cos), 탄젠트(tan) 등등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성 이론, 양자 역학, 불확정성 원리, 퍼지(fusty)이론 같은 것은 물론이고, 자동차, TV, 컴퓨터 전화기, 전기, 휴대폰 등등 그들에게는 먼 나라의 요원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예를 들면, 자동차 가는 것)를 당시의 언어로 가르친다고 하면 뭐라고 가르치실까요? ‘쌩~쌩~ 달린다’ 혹은 ‘‘부릉부릉’하고 간다”는 정도로 가르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당시의 그들의 언어 생활은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유치원생 정도일 테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 성경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을 수는 없는 것 아닐까요? 언어 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적어도 유치원생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거꾸로 이야기 하면 당시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꽤 많은 ‘하늘에 관한 것’을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 속에서는 쉽게 이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여러 기적 사역 같은) 물론 오늘날의 언어로도 이해 안되는 부분들이 있을 터이지만 말입니다.
비록 언어(말) 생활에 있어서는 수십 수백 배의 차이를 보이겠지만,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변치 않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말)를 너머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마음을 읽으면 그 언어의 뜻이 읽히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 마음을 읽는 것을 간단하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표현합니다. 갈라디아서 5:16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이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체험되어 느껴지십니까?
5. 나가는 말
오늘 성경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므로, 말을 조심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말은 땅, 사람, 하늘을 대하는 말이 있는데, 이 중에 땅과 사람을 대하는 말, 곧 보이는 것에 대한 말 조심은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진실한 말, 필요한 말, 그리고 친절한 말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 사회 속에서 쓰지 말아야 할 언어들, 성과 피부 색깔과 이념, 지리적 차이에 따른 차별적 언어들은 입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자존심을 허물어뜨리는 말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하늘을 대하는 말(진리, 지혜, 지식, 깨달음)에 있어서, 언어(말)라고 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으나 신뢰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말) 너머로 전해지는 마음의 숨결을 들어야 하고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시대의 차이를 너머 전해지는 진리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대하는 말(진리, 지혜, 지식, 깨달음)은 ‘체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체험되지 않은 진리나, 지혜, 지식, 깨달음은 다 ‘속임’의 언어(말)임을 알아채야 합니다.
말(언어)에 실수하지 마시고,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곳에, 주를 찬양하며 예배하는 곳에 마음에 언어(말)를 담아, 언어(말)에 마음을 담아, 실수 없이 온전한 삶의 자리 꾸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찬송가 302장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찬송가 50장 3절 부르며 헌금합니다. (찬송가) / *. 헌금 기도합니다. (#. 헌금은 따로 잘 보관했다가 교회에서 예배할 때 함께 봉헌합니다)]
*. 헌금 기도합니다.
예배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예물을 정성껏 모아 주님 앞에 드립니다. 이 땅 위에 주의 나라 세워가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온전하고, 아름답게 쓰이는 예물 되게 하시고, 귀한 열매 맺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물에 담긴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헤아려 살펴 주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응답 받게 하옵소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주의 성령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저희 있는 곳곳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찬송가 298장(속죄하신 구세주를)을 찬송합니다. (찬송가)
*.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