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바로알기 현장탐방(6) - 이상화 기념관, 이장가 문화관 관람
벽면 입구 이일우 님의 좌우명 '우헌서루(友弦書樓)' 로 민족계몽을 꿈꾸었던 사회사업가로 크게 성공 하였다.
이상화 시인의 가계(家系)
이상화 시인의 조부 이동진 선생은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배움도 없이 성장하였다.
단돈 200량을 가지고 경산에서 대구서문시장까지 걸어 다니면서 장사를 한 결과 7년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수천량으로 불어나 그 돈을 밑천으로 하여 방직과 농사를 지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돈으로 농지를 구입하여 가족 및 일가친척, 종족들을 위하여 나누어 주므로 의식주(衣食住) 걱정을 없게 하므로 이러한 선행(善行)의 나눔을 '이장(李庄)' 이라고 하였는데, 그래서 이상화의 가문을 '이장가(李庄家)' 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 인터넷 참조)
가계도 안쪽 벽면으로 이상화 님의 내력(來歷)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상화 님은 1901년에 출생하였지만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므로 큰 아버지가 되시는 이일우 선생님의 보살핌으로 살았으며 그 또한 42세가 되는 1943년에 사망하므로 매우 단명의 삶을 살았던 시인이 되었다.
(상화 시인의 부모와 형제)
상화의 부친은 우남(又南) 이시우(李時雨), 모친은 김해 김신자(金愼子, 법명 華秀)였으며, 상화 위로는 독립운동가인 이상정(李相定), 아래로는 사회학자이며 체육인인 이상백(李相佰)), 수렵가 로서 『한국 야생동물기』를 쓴 문필가 이상오(李相幹)가 있어 사람들은 이들을 일러 용봉인학(龍鳳麟鶴) 사형제라 불렀다.
모친 김신자는 알려진 여걸이었고, 조부 이동진(李東珍)과 백부 이일우(李一雨)는 당대 부호로서 재력을 바탕으로 팔운정(八雲町, 현 수창초등학교 부근)에 우현(友 弦)서루를 세워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중교(二重橋) 폭파 미수 사건의 김지섭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이 우현학숙은 일제에 의해 1915년경 강제 폐쇄됨에 따라 강의원(講義院)으로 바뀌었고, 다시 이곳은 교남(嶠南)학교(1921년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
이상화는 이 학숙에서 한문 교육을 받았다. 이때의 유년기 체험은 훗날 그의 인격 형성에 결 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향리에 대한 남다른 집착과 '혼자 있을 때도 나를 속이지 말라'는 성실성은 실로 모친의 훈도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龍 청남 이상정(晴南 李相定,1897~1947)
맏형 청남 이상정은 8·15광복 때까지 중국에 서 독립군을 이끌었던 장군으로 항일운동을 펼 쳤다. 1923년 중국 만주로 망명한 뒤 중국군 고 위 장교와 임시정부의 의원을 역임하는 등, 한 평생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펼쳐 나간 혁명가였다. 상정은 시·서·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표박기(瓢泊記)」란 제목의 유고를 남긴 시인이 자 전각에도 뛰어난 예술가였다.
麟 상백 이상백(思白 이상백, 1903-1966)
대구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사회 철학과에서 사회학, 철학, 역사학을 두루 익혔으 며, 유학 시절 적극적인 체육활동을 펼쳐 일본 체육계를 대표하는 인사가 되었다. 광복 이후 사학자·사회학자·체육인, 서울대학교 교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한국사회학회장을 역임했고, 한국 사회학의 개척자로 활약, 조선왕 조사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
鶴 모남 이상오(慕南李相阡, 1905~1969)
한국을 대표하는 수렵인으로 수렵기와 야생동 물기의 저술가로서도 명성이 높다.
각 신문 에 <수렵야화> 등을 연재하여 호평을 받았으며, 최근 청년시절의 시작노트가 발견되 었는데, 그 안에 있는 시 「마음」, 「시인」, 「취 가」 등은 1924년 재일 대구인들이 만든 '달성구 락부' 회보에 게재되었다.
(출처 : 문학앨범 이상화, 이상화기념사업회, 2008년 발행)
24효도 병풍은 이상정 장군의 따님 이선희 씨가 시집갈 때 작은 아버지 이상화 시인이 직접 주해를 달아 선물한 것임. ‘24효도’는 효자이야기 34편을 중국 원나라 때 곽거경이란 분이 수집하여 ‘24효’라는 책을 편집한 것이라고 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