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과 선물 / 한정숙
사진 속 세 사람의 얼굴은 환하기 그지없다. 파르란 머리와 잿빛 모시 승복을 단정히 입은 스님 양쪽으로 나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돌리고, 친구 경자는 앞을 보고 활짝 웃고 있다. 해를 마주 보아야 사진이 밝게 나오는지라 배경은 암자가 아니고 방향이 맞춤한 멀리 있는 산이다. 저녁에 마당을 밝히는 등이 다정히 서있다. 세 사람의 표정처럼 하늘도 밝다. 1986년에 여름에 불일암에서 법정스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들여다 볼 때마다 기분 좋은 웃음이 그칠 줄을 모른다.
1986년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기다렸다. 엄격하고 욕심 많은 아버지와 4년 동안 떨어져 마음 편히 생활했던 기간이 끝나고 함께 지내는 날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간간이 발령 예정일을 물으시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알 수 없다고 대답한 후 조용히 자리를 뜨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당시 교사 발령이 많이 미루어졌었는데 바로 위의 선배들은 1년 반에서 2년을 대기하기도 하였다.
유일한 낙은 내가 사는 읍내 유명가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석 달 동안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일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수협에서 근무하는 친구랑 그동안 읽었던 책과 점찍어 두었던 책을 바꿔오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는데 겨루듯 읽은 책은 둘 다 100여권에 달했다.
다행히 그 해 9월 1일자 발령 예고를 받았다. 마음도 가볍고 친구도 휴가를 받았는지라 책 속에서 만나 스승이 된 법정스님이 사시는 곳, 불일암을 찾아 나섰다. 진도에서 직행 버스를 타고 광주에 도착한 후 송광사로 갔을 터인데 불편한 교통 때문에 고생한 기억은 없다. 단지 송광사에서 흰색 블라우스와 검정치마를 단정히 입은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라는 포교사를 만나 법정스님 계신 곳을 안내 받은 일만 선명하다.
하얀 피부에 얼굴이 복스러웠던 그 분은 까만 단화를 신고 우리를 차분차분 안내하셨다, 올라가는 길에 어른 가운데 손가락만큼 크고 통통한 민달팽이가 곳곳에 있어 깜짝 놀랐다.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선생님은 사람 발길이 드물어 살기 좋은 곳이라 미물들이 많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여름날 오전이었으니 축축한 산길이 놀이터로 마땅했던 모양이다.
민달팽이 때문에 잔뜩 웅크렸던 마음은 깊 섶에 늘어선 샛노란 꽃을 보자 편안해졌다. 낯선 꽃이라 궁금했는데 이름만 알고 있었던 달맞이꽃이었다. 산길에 쨍하니 해가 들어오면 꽃이 시들 것이라고 하였다. 선명한 꽃 색깔과 해를 싫어하는 습성이 특별하여 기억에 남았다. 이듬해 달맞이꽃을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고 1학년 학생에게 동화구연을 가르쳐 군 대회에서 1등을 하였다. 신규교사가 큰 대회에서 수상을 하자 선배교사들은 깜짝 놀라며 부러움과 질투를 섞어 칭찬해주셨다. 작년 봄 우연히 연락이 된 마흔이 넘은 ‘배우리’는 그 때의 이야기를 하자 쑥스러워하며 영상통화로 엄마의 1학년 때 담임 선생님 이시라며 초등학생 딸에게 나를 소개했다. 세월의 빠름을 따로 이야기하여 무엇 하랴.
법정스님은 성격이 칼칼하고 중답게 사는 일을 엄격히 하시는 분이시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계시니 볼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아마 진도에서 새벽부터 서둘러 당신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달리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스님이 내려주신 맑은 차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겠으나 기억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두고두고 나의 생활에 가르침이 되었던 선물이 있었다. 헤어지면서 주셨던 볼펜과 엽서였는데 바로 전에 오신 방문객이 주고 간 선물이라고 하셨다. 누군가에게 받은 선물을 다음 손님에게 주는 것은 세 사람의 마음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닐까? 또 받되 받지 않았으며 갖되 갖지 않은 이른 바 ‘무소유’의 다른 실천이 아닐까도 짐작해본다. 우리는 가져간 선물이 없었으므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볼펜과 엽서를 잘 썼으므로 그 또한 선물에 대한 예를 다한 것이라 여긴다.
올해 9월 초 그 길을 다시 올랐다. 함께 가는 일행도 달랐다. 가는 곳 마다 친절한 안내문이 있고 37년 전과는 달리 올라가는 시간도 짧았다. 주인이 없는 불일암엔 스님이 즐겨 앉으셨던 나무 의자가 방명록을 들고 있었다. 하얀 벽 위에 걸린 나무판에 적힌 묵언(默言)이라는 글자에서 스님의 기상이 보였다. 마음이 단정해졌다. 아래쪽에선 법정스님의 맏상좌 덕조스님이 기거하실 하사당 낙성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위가 시끌벅적했다. 사진을 찍었다. 그 때는 셋 이었고 이번엔 혼자다. 사진 속 나는 무심하다. 대신 불일암을 배경으로 두어 스님의 기운을 가져왔다. 그리고 친구에게 보냈다. 두 사람의 기운을 담아 친구에게 갔으니 세 사람이 찍은 사진이 된 것이다.
첫댓글 무려 법정 스님과 사진을 찍으셨군요.
부럽습니다.
살아 계실 때보다 돌아가신 삶이 더 빛나는 분 중의 한 분이죠.
그러니까요. 얼마나 보석 같은 기억인지요.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법정스님 잘 생겼어요. 눈빛이 너무 멋있어요. 그 때는 젊어서 더 멋있었나요?
맞아요. 훈남이십니다. 그분은 모습과 생활과 사고가 일치하는 분이세요. TV로 밖에 볼 수 없었던 스님의 다비식도 생각납니다.
" 스님, 불들어 갑니다." 울먹이며 소리치던 상좌 법현스님의 목소리도 쟁쟁하네요. 왜 이 찬란한 아침에 울컥하는지요.
감사합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초판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을
뵌적은 있지만 직접 이야기해 보지는 못 했어요.
큰 용기로 큰 행운을 얻었네요.
와~ 보물을 가지셨네요. 기회되면 한 번 보고 싶습니다.
훌륭하신 분과 찍은 사진이라 더 의미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