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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297
2월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연중 제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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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내면을 먼저>
저희 살레시오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캠프에 참가해보면 뭔가 특별한 것을 느낍니다. 저희 캠프장 시설을 보면 사실 별것도 없습니다. 캠프 프로그램 역시 다른 곳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공되는 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캠프를 끝내고 돌아가는 많은 아이들이 그곳에서 받았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짧게나마 그곳에서 쌓은 추억을 두고두고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우리 젊은 수사님들 아이들을 위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수사님들 거의 목숨바쳐가며 아이들 위해 연구합니다. 온갖 정성을 다해 준비합니다. 지니고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아이들을 위해 헌신합니다. 결국 순수한 열정과 열렬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이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기에 앞서 단단히 정신교육을 시키십니다. 정신교육의 요지는 ‘내공’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내면을 먼저 갈고 닦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형적인 것들, 부차적인 것들에 신경 쓰지 말고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부분, 실질적인 준비를 잘 하라는 것입니다. 열정, 사랑, 마음, 정성이 중요하니 그런 것들부터 먼저 챙기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외적인 것도 중요하지요. 자기 관리도 필요합니다. 옷이 날개라고 품위 있고 맵시 있게 입는 교육도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면이나 본질적인 면은 뒷전이고 오로지 외형적인 것에만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머리는 텅 비어 있고 정신자세는 엉망인데 유명 메이커 신발에 외투에 가방에... 그게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각종 첨단 기기와 값진 음향 및 영상 설비로 완벽한 시스템을 갖췄다 할지라도 마음이 없다면, 사랑이 없다면, 열정이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결국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의 내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운 상태에서 복음 선포 여행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형제들과 하나 된 마음, 공동체 영성으로 무장한 채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 선포를 향한 전적인 투신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순도 높은 은총을 선물로 주십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전적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전적인 자기 해방과 초탈한 마음을 덤으로 주십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죽을 각오로 뛰어드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맡기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대자유와 완벽한 평화란 선물을 무상으로 건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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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을 전하려면 적어도 대죄는 짓지 마라>
어느 날 악마가 한 청년에게 나타났습니다.
“흐흐, 이제 너는 나와 함께 죽음의 세계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 네 재산을 모두 내게 바치든지, 네 누이를 팔든지 아니면 큰 술잔으로 술 열 잔을 마시든지 이 셋 중의 하나를 행하면 너를 살려주겠다.”
이 말은 들은 청년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을 했습니다.
“어떻게 내 손으로 내 다정한 누이를 팔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인간의 도리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짓이다. 애써 모은 나의 귀한 재물 또한 어찌 네게 줄 수 있겠느냐? 차라리 술 열 잔을 마시겠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술 열 잔을 단숨에 들이마시고 휘청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또 술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이후에도 계속 술을 즐겨마셨습니다. 늘 술에 취해 살던 그는 결국 가장 사랑스런 누이를 팔아넘겼고, 급기야는 재산도 모두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악마의 뜻대로 그는 죽음의 세계로 끌려갔습니다.
악한 것들 중에 어떤 것만 안 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내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끊으려면 다 끊어야 합니다. 적어도 대죄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대죄는 내 안에서 성령의 귀한 은총을 잃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파라오에게 보내실 때 힘을 넣어 주셨던 ‘지팡이’와 같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다른 것은 몰라도 지팡이는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이 지팡이는 ‘성령’입니다.
성령이라는 무기를 주시며 파견하시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마치 빛처럼 어둠을 침략해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둠이 가만히 있을까요? 악착같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인 성령의 힘으로 그들을 쳐 이겨야 합니다.
다만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그 무기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 잃느냐면 재물에 집착할 때 잃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혹은 인간적인 애정에 얽매일 때도 잃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아의 욕구이고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성령을 잃게 만드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갈 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막대기도 있었지만 ‘매끄러운 돌 다섯’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사무 17,40 참조) 막대기는 분명 지팡이, 즉 성령님을 상징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이 꺼지는 경우는 육의 욕망에 넘어갈 때입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따라서 지팡이만 있어서는 안 되고 육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통제력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조약돌 ‘다섯’은 ‘오감’, 즉 육체의 욕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좋은 무기를 주셔도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데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조약돌이 매끄러웠다는 말을 굳이 쓴 이유는 다윗이 그때는 오감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쳐야 할 가장 귀한 선물은 영혼입니다. 많은 영혼을 주님께 바치려면 내 안에 주어진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 육체의 욕망을 절제하여 적어도 대죄에는 빠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먼저 길러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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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7-13 : 열두 제자의 파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채비에 대해 말씀하신다. 최상의 준비는 소박한 음식과 인간의 허약한 몸을 가리고 덮어줄 옷 한 벌처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도들은 길을 떠나며 주님의 말씀대로 전대도 지니지 않았고 여벌 옷도 없이 떠났다(8-9절). 두 벌을 껴입는다는 것은 이중적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이다.
또한 배를 채울 양식이 부족할까 염려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마태 6,34 참조) 하느님의 섭리는 사도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통하여 완전해지려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다.
그리고 손님에 대한 풍습은 손님에게 친절히 접대하는 것은 거룩한 의무 중의 하나였다. 낯선 여행자에 대한 손님 접대는 그들의 의무였던 것이다.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손님을 거절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절하는 행위는 바로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그로 인해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턴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고”(루카 10,16),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마르9,37) 이것이 지금 사목을 하고 있는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잘해 주라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우리 이웃들에게 하여야 할 바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사랑을 드릴 수 있으며, 그분께 진정한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며, 그리하여 참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의 복된 삶으로, 생활로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도 그렇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우리 이기주의의 바람막이가 아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 노력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만 의탁하며 이 순간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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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단순한 분이신지를 보여 줍니다. 사실 제자들을 파견하려면 적어도 그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마르 8,19-21 참조)
어디 그뿐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한다는 소리에 그러시면 안 된다고 반박하여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습니다.(마르 8,33 참조) 또 그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에 대하여 논쟁을 하는가 하면(마르 9,34 참조), 야고보와 요한은 출세할 생각으로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마르 10,37 참조)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파견하십니다.
단순하기로는 제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떠나라는 소리에 그냥 떠납니다. 더구나 지팡이 외에는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챙기지 말라시니 그냥 그렇게 합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겪게 될 불편함도, 위험도 많을 터인데 그들은 그냥 떠납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점은 하느님께서 제가 가지고 있는 깜냥보다 더 큰 것을 바라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못 합니다.’, ‘안 됩니다.’ 하고 대답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제게 단순한 응답을 가르쳐 줍니다. 그 어떤 일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실천인 것 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단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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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7-13)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신 이야기가 있는데, 두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가셨을 때,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마르 6,1)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신 일을 직접 생생하게 목격했을 텐데, 그때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분이 그런 일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 기가 꺾였을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대한 각오와 결심을 더욱 새롭게 했을까?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의 기가 꺾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떻든 나자렛에서 겪은 일은,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서 떠나는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예방주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가 아니라 고위층 사람이었다면, 또는 부유한 상류층 사람이었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바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도들이 세속에서 높이 떠받드는 어떤 학위나 지위나 권력이나 재물이나 정치적인 배경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면, 박해를 안 받았을 것이고, 시련과 고난을 덜 겪었을 것이고, 선교활동을 편안하고 쉽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빈손’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세속에 속한 것들을 욕심내지도 말고 갖지도 말라는 명령이고, 오직 믿음의 힘으로만, 또 ‘하느님 안에서만’ 선교활동을 하라는 훈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은, 세속의 그런 것들은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마르 4,19)
“그래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은 다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선교활동은,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과 방법이 중요한 활동입니다. (“복음을 ‘얼마나’ 전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전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돈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전하는 활동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에 ‘권력의 힘’이나 ‘정치적인 배경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선교활동이 아니라 그냥 세속의 정치활동입니다. 세속의 학위나 지위 같은 것의 힘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메시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활동이 아니라, 개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활동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꼭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따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을 보면, 정말로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이 지난 이천 년 동안의 교회 역사가 주는 교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그런 것들을 얻기를 바라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선교활동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얻으려고 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랑의 봉사활동’입니다.
<‘빈손’으로 떠난 사도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물질적으로는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라는 말은, 사도들이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 주었고, 또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랑으로 인도해 주었음을 뜻합니다.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고, 나누어 주는 사람 자신도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면, 사도들이 ‘빈손’으로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것으로만 보이겠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믿음과 열정으로 가득 차서 떠났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가득 차서 돌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떠날 때에도, 또 돌아올 때에도 영적으로 풍요로운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선교활동을 세속 회사들의 영업활동처럼 한다면, 신자 수를 늘려서 교세를 확장하고,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대형 교회가 되고, 재산을 축적하고 증식해서 점점 더 부유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러면 그 종교는 사이비 종교입니다. 선교활동의 목표는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것, 그것만이 선교활동의 목표입니다. (교회를 운영하는 일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의 교회는 ‘돈의 힘’이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운영합니다. 혹시라도 이 말에 대해서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이고, 믿음이 없다면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곧 ‘삶’입니다.)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생활이 아닙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신앙인들이 얻는 것은 하나도 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재산을 낭비하는 것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참 생명, 사랑, 평화, 기쁨을 누리고 있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세속의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고,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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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모든 분들이 그러하겠지만 저에게도 가장 좋아하는 성가가 있습니다. 그 성가는 위령성월 혹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연도를 바칠 때 자주 부르는, 29번 <주 예수 따르기로>입니다. 제가 이 성가를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사제로써 살아가고 있는 저의 삶 혹은 지향해야 할 삶이 1절부터 3절까지 모두 세세히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의 가사를 되짚어 보면, 제가 막 사제가 되었을 때의 마음이 생각납니다.
“주 예수 따르기로 나 약속했으니, 내 친구 되신 주여 늘 함께 하소서. 주 함께 계시오면 나 든든하옵고 주 나를 이끄시면 바른길 가리다.”
2절은 현재 사제로써 살아가고 있는 저의 일상과 그로 인한 간절한 청원이 떠오르게 합니다.
“이 세상 온갖 유혹 내 맘을 흔들고 내 모든 원수들이 늘 괴롭히오니 주 나를 돌아보사 내 방패 되시고 내 옆에 계시옴을 깨닫게 하소서.”
3절은 제가 언젠가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갈 날을 미리 상기시킵니다.
“저 영광 빛나는 곳 주 내게 보이니, 그 아름다운 곳을 늘 사모합니다. 주 예수 섬기기로 나 약속했으니 끝까지 따라가게 용기를 주소서”.
이 가사를 음미하다 보면 왠지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다가올 제 장례미사의 마지막 퇴장 때에는 신자분들이 꼭 이 성가를 불러주시길 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약속, 그러나 일상 안에 언제나 다가오는 유혹, 그리고 결국 이를 견뎌낸 자의 찬양. 이는 비단 사제인 저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윗은 결국 죽음을 앞두고 왕위를 계승하게 된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워 이스라엘 민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순종했으며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의 의향을 물으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인물입니다. 그러나 결코 완전무결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했지만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그의 자식들은 끊임없이 왕권을 두고 다투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많은 은총을 베풀었던 이유는 그가 예언자 나단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쳤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천하를 호령하던 그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된 솔로몬을 불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으므로 남길 수 있는 유언도 많았을 것입니다. 업적에 대한 역사와 통치의 지혜를 유언으로 남길 법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마지막에 남기는 말은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라는 단순한 한마디 일 뿐입니다. 그가 이러한 유언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자신이 이뤄 온 모든 것이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이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돌멩이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느님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여러 가지 부족함을 용서해주시고 극복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 정향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오늘 복음 말씀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파견하면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여러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철부지 같은 제자들을 파견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저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모든 부족함과 나약함을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봅시다. 여러 가지 유혹들과 한계들이 우리의 주변에 산적하고 수많은 걱정과 문제들이 삶에 동반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기도 하고 애를 써도 고쳐지지 않는 미움과도 같은 습관들이 자꾸만 우리의 삶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러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늘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소 부족한 인간이지만 하느님이 계시기에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 가끔 죄를 짓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하느님의 자비가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루하루 천천히 주님께 나아간다면 언젠가 우리는 주님 앞에 서서 기쁜 마음으로 앞서 말씀드린 성가의 가사를 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영광 빛나는 곳 주 내게 보이니 그 아름다운 곳을 늘 사모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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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가난한 파견자>
길을 떠나는 사람은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가진 것에 애착을 느끼거나 간 곳에 애착을 느껴 갈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으면 주님의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합니다.
착한 품성을 가지고 성인이라고 칭송을 받고 사목하던 신부가 본당에서 가진 것, 누리는 것에 애착을 느끼고 살다가 인사 발령이 나니 자기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주교에게 항의하고, 신자들을 동원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문을 봉쇄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고 불순종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제는 진정한 선교사가 못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집과 가족을 다 버리고 자기 자신마저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어디나 매여 있으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리가 있고 가진 것이 있으며 능력을 갖고 삽니다. 그러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자리를 탐하거나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가지려 하거나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하려 하면 언제나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떠날 때 발밑의 먼지까지 떨고 떠나라는 말씀은 있던 자리에 매여 있지 말고 가난한 마음으로 떠나며 떠날 때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첫 사제품을 받을 때처럼 살면 일생 행복할 것이지만 이것저것 쓸모없는 것들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으면 주님의 사도로 순수성을 잃고 권력의 노예, 재물의 노예, 명예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며 주님이 주신 능력을 발휘하려면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주님의 것이며 무엇을 이룬 것 같아도 한 일에 애착을 버리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선교적 사명을 지니고 사는 이들이 더 겸손하고, 온유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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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트로 성바오로수녀회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님]
<빼앗길 수 없는 가치, 무소유>
“수녀님, 옷이 몇 벌이에요?”, “수녀님, 한 달 용돈이 얼마예요?”
궁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들은 자주 묻는다.
“옷은 두 벌, 용돈은 ○만 원.” 하고 대답하면 설마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이” 하고는 말문을 닫아버린다. 그럴 만도 하다.
사실 아이들이 수도자의 삶의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더욱이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하고, 돈버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는 세상이니 왜 안 그렇겠나.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법정 스님이 「무소유」에서 언급한 삶의 방식과도 통하는 수도 생활의 가치는 누구에게도 침해받을 수 없는 가치다.
‘아무 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의 기도에 곡을 붙인 노래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만을 품으라는 의미이며, 그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당신이 홀로 하느님과 함께 가시니 우리도 그리 가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저것 갖춰져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로서는 무소유의 길을 살아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의 수도 생활은 쌓았다 무너뜨리는 여정의 반복이다. 마더 데레사의 어머니가 수녀원에 들어가는 딸에게 “예수님의 손에 네 손을 맡기고 단둘이 걸어라!” 하는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 말씀은 나한테도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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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과 채비>
마르코 6,7-13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길과 채비>
채비가 있어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길이 있어
채비하는 거지
채비하러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나러
채비하는 거지
채비가 되지 않아
길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나기 싫어
채비하지 않는 거지
채비가 모자라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채비에만 신경 쓰다
길을 잃는 거지
채비하다가
길을 놓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걸으면서
채비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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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믿음을 귀하게….>
고운님들의 믿음을, 고운님들의 기도를 귀하게 지키십시오. 자식들이 오더라도, 그리고 무슨 일들이 있더라도 고운님들의 믿음을 아무것도 아니게, 값어치 없게 여기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제가 시골 본당에 있을 때, 어느 주일날에 서울에서 쉬고 있는 자녀들이 어머님 댁에 왔다가 어머니에게 함께 놀러 가자고 합니다. 그때 자매님이 자녀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놀러 가는 것도 좋고, 일하는 것도 좋지만, 주일 날에는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는 것이 먼저다. 성당에 같이 가든지, 기다리든지 알아서 해라!”
그때 자식들은 어머니를 존경하고. 어머니가 가진 믿음을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엄마, 함께 성당 가요. 그리고 엄마의 기도가 필요해요.”
주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은혜를 받으라고 고운님들을 부르셨습니다. 혹시 우리 고운님들이 부모님에게나 또한 자녀들에게나 아니면 아는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전화라도 좋겠습니다.
“당신을 보니 마치 예수님을 성모님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다.” “뭐든지 된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 열둘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이르셨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 그리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
다시 말하자면, ‘부족하든지 넉넉하든지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져도 가지지 않은 것처럼, 없어도 있는 것처럼 살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지만, 대신에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권한”이라는 즉, “어떤 더러운 영도 제자들을 막을 수 없는 권능(엑수시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운님들은 주님을 붙들고, 또한 주님께서 주신 그것도 꼭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자신을 “천국을 향한 나그네, 순례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순례하면서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짐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두레박 사제가 묵상했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천국을 향한 인생 순례 길에서 고운님들은 무슨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운님들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게 될 때, 그것은 바로 고운님들을 위해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주 예수님께 빚을 갚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충만한 오늘, 고운님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기쁘게 당당하게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항상 하느님의 사랑에 빚을 갚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베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다.”라는 말씀을 담고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면서,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뭐든지 된다.’라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입고 살아서 천국을 향한 복된 순례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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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99)
♧♧ 시편 73편 5절…
"인간의 괴로움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고통을 당하지 않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고통을 당하는 의인’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고통’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말’은 ‘인생의 병고, 짐’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정직하고 의롭게 살려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겪는 인생의 고통을 겪으며 살지만, 악인들은 도리어 모든 일에 평안하다는 말입니다.(시편 12절, 14절. 참조) 아삽은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이 자신이 알고 있는 하느님의 정의로운 본성과 어긋남을 들어 하느님께 호소한 것입니다.(시편 89편 15절. 예레미야서 12장 1절. 하바쿡서 1장 13절. 참조)
♧♧ 시편 73편 6절…
"그래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며 폭행이 옷처럼 그들을 덮었네."
*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며...
‘목걸이...’는 상징적으로 ‘영화’와 ‘권능’을 나타냅니다.(창세기 41장 42절. 참조) 이 구절은... 악인들이 자기에게 재난이 미치지 않으므로 도리어 교만해져 자기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 폭행이 옷처럼 그들을 덮었네.
‘옷’이 늘 입고 있는 것으로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듯, 악인들의 폭력성은 일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어짐을 말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물론 그 폭행의 대상은 사회적으로 약한 이와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인들이었을 것입니다.(시편 11편 2절, 55편 10절, 58편 3절, 72편 14절. 이사야서 1장 15절, 3장 15절, 59장 3-8절. 호세아서 4장 1-2절. 아모스서 3장 10절. 참조)
♧♧ 시편 73편 7절…
"그들의 눈은 비계로 불거져 나오고 그들의 마음에서는 온갖 환상이 흘러나오네."
* 그들의 눈은 비계로 불거져 나오고...
이것은 악인들이 그 소유의 넉넉함으로 인하여 지극히 교만하게 된 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욥기 15장 27절. 시편 17편 10절. 참조) 실제로는 살이 찌면 눈이 들어가 보이기 마련인데, 여기서 악인들의 눈이 나와 보이는 것도 아마도 저들이 폭행과 핍박의 대상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 그들의 마음에서는 온갖 환상이 흘러나오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들의 마음에 품은 것이 넘쳐 나온다(한계를 넘어섰다).’라는 뜻입니다. 또 어떤 이는 ‘그들의 끝없는 교만의 착각이 밖으로 넘쳐 나와 강처럼 흐른다.’라는 말로도 풀이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해석은 ‘악인들의 소득은 자기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았다.’라는 의미로 악인들의 평안함을 강조하는 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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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는 차를 타고 안전띠를 매지 않는 사람이 참 많았지만, 요즘에는 뒷좌석까지 안전띠를 맵니다. 안전띠를 하지 않는 것이 훨씬 편안합니다. 몸이 안전띠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순간의 편안함을 위해 안전띠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안전띠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시속 48km의 속도에서 사고가 났을 때의 충격이 7층 높이에서 떨어질 때 받는 충격과 같다고 하지요. 그만큼 큰 위험에 있으므로, 스스로 보호하고 또 다른 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안전띠는 반드시 매어야 합니다.
조금의 편안함을 위해 생명을 담보로 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큰 손해가 분명합니다. 차에 탄 사람이 안전띠를 반드시 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이라는 안전띠를 반드시 매어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이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만 같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데도 주님을 생각하면 사랑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놀고 싶은데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라는 것은 큰 구속처럼 보입니다. 나의 노력을 얻은 재화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내놓아야 한다는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떠올려 보면 당연히 주님이라는 안전띠를 매어야 할 것입니다. 즉, 주님과 함께해야 하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라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전띠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한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려졌습니다. 도저히 그 명령을 따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명령을 철저히 따랐고, 부자 청년은 슬퍼하면서 주님을 떠납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지금은 부자 청년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지만, 결국 하느님 나라 안에서는 더욱더 큰 슬픔 속에 빠지게 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주님이라는 안전띠는 완전한 사람을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억지로 당신이라는 안전띠를 매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접 안전띠를 매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의 굳건한 의지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세상의 것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모범을 떠올리면서 주님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뜻을 잘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고 있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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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거운 도토리>
지금은 꾸준히 운동해서인지 불편함 없이 살고 있지만, 한때 제 삶을 힘들게 했던 신체 부위가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허리’입니다. 이 허리가 얼마나 부실한지 매년 병원에 입원하고, 어떤 때는 가벼운 것을 집어 들다가 또 어떤 때는 엉덩이로 차 문을 닫다가 삐끗해서 꼼짝 못 하게 되는 어이없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입니다.
처음 허리가 아파 입원하게 되었을 때, 그때는 정말로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쎄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다가 쓰러진 것입니다. 도토리는 아주 가볍습니다. 그러나 이 도토리를 줍다가도 병원에 입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허리 상태가 좋았다면 아주 무거운 것을 들더라도 아플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토리 하나에도 꼼짝 못 할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육신만이 아닙니다. 내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좌절이나 절망으로 쓰러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튼튼한 내 마음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것에 집중할수록 주님한테서 멀어져서 약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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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한 모임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2세의 어르신께서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는 위원회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1990년부터 작성한 ‘연도명부’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3458명의 고인을 위해서 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명부에는 고인의 이름, 세례명, 나이, 장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고인의 유족들은 고인을 위한 기도를 들으며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떠나면 연도를 받고 싶어서 개종하신 분도 있었다고 합니다. 3458명의 고인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리라 믿습니다. 어르신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가시면 연도명부를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본당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는 위원회에 선물로 드린다고 하셨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숨은 봉사자들이 계시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 싶습니다. 90이 넘으신 어르신께서 고백성사를 원하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미국에 오신 지 오래되셨지만 영어가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어르신이 사시는 아파트 옆에는 미국 성당이 있어서 그곳으로 미사를 가지만 3년 동안 성사를 못 보셨다고 합니다. 저에게 연락이 되었고, 저는 어르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저는 어르신이 가지고 계신 오래된 가톨릭 기도서를 보았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당시에 새롭게 개정된 기도서였습니다. 기도서를 열어보니 1968년에 발간되었습니다. 52년 된 기도서입니다. 어르신께서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올 때 기도서를 가지고 오셨다고 합니다. 기도서는 진리가 담긴 보물이라고 하십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순간 부끄러웠습니다.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낡았다는 이유로 보물을 너무 쉽게 버렸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세상은 아름답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진리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아름다운 겁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입원을 하신 교우 분을 위해서 봉성체를 하였습니다. 병실에서 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복도에서 휠체어를 타고 오는 자매님을 보았습니다. 자매님은 저를 보면서 간절한 모습으로 부탁을 하였습니다. ‘오늘 암 수술을 받기로 했는데, 신부님께서 기도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병원 복도에서 자매님을 위해서 기도를 해 드렸습니다. 자매님의 간절함을 기억합니다. 함께 기도를 하면서 자매님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매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술이 잘되셨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은 기억입니다. 사제가 된 보람을 느끼던 기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 위한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살면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욥 성인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의지하며 걸어간다면 병이 나았던 여인처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던 소녀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일어나야할까요? 재물, 명예,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욕망, 욕심, 시기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으로부터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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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꼰대’가 되지 맙시다-
오늘은 일본의 순교 성인들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지금부터 423년전 1597년 2월 5일, 성 바오로 미키 예수회 사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 때, 25명 동료들과 함께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나이 33세에 순교한 바오로 미키의 처형장에서의 설교 마지막 부분이 감동적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복종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서 나는 나의 박해자들을 용서합니다.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청하며, 나의 피가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비처럼 나의 동포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전사’로서 살다가 장엄한 순교의 전사戰死를 한 바오로 미키입니다. 잘 살았기에 거룩한 떠남의 순교의 죽음입니다.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결같이 기쁘게 분투奮鬪하시는 모습도 그대로 주님의 사랑의 전사로서의 모습입니다.
떠날 때 잘 떠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날마다 깨어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마지막 죽음의 떠남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읽은 ‘꼰대’에 관한 글이 인상깊게 남아있습니다.
-“떠나지 않고 남으면 ‘꼰대’가 된다. 세대 간의 소통은 어느 지점에 가서 불통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불통의 지점에서 이전 세대는 자리를 비우고 떠나야 한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어람靑於藍(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이나 은퇴가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부모의 시대가 끝나야 자식의 시대가 온다. 선배가 떠나야 후배가 일을 맡을 수 있다.”-
그러니 날마다 새롭게 떠나야 합니다. 밖으로는 정주定住의 산山, 안으로는 하느님 바다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떠나는 맑게 흐르는 강江으로 살아야 합니다. 떠나기를 멈추어 웅덩이에 고인 물이 되는 순간, 본의 아니게 꼰대가 됩니다. 사전에서 찾아 본 꼰대의 뜻 풀이입니다.
‘꼰대 또는 꼰데는 본래 아버지나 교사 등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쓰던 은어였으나, 근래에는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 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형된 속어이다.’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다윗의 마지막 떠남의 임종장면이 감동적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맞이하는 마지막 죽음의 떠남입니다.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이야 말로 참으로 복된 떠남입니다. 솔로몬에게 주는 마지막 유언의 임종어도 감동적입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유언후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성에 묻히니 해피엔딩의 복된 죽음입니다. 과연 이런 삶의 지침이 될만한 유언을 남기고 떠나는 어른들은 몇이나 될까요? 아마 이보다 결정적 도움을 주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떠나기전 남은 공동체 형제들 모두에게 유언과 더불어 강복을 주고 또 공동체의 강복을 받고 떠나는 거룩한 죽음이라면 얼마나 바람직하겠지요. 평상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할 때 이런 죽음이겠습니다.
하여 분도 성인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고 충고하십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가장 설레었던 순간은 아침마다 새로운 떠남과 출발의 시간이었습니다. 참으로 설렘의 기쁨으로 떠나는 날마다의 삶이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떠나야 할 때 미련없이 기쁘게 잘 떠날 때, 늘 새롭고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를 아는 지혜요 겸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받아 무소유로 떠나는 제자들의 모습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소유물이라곤 최소한의 지팡이와 신발이지만 무엇보다 주님을 모시고 있으니 전부를 소유한 것이고, 어디를 가나 환대처가 마련되어 있으니 참으로 홀가분한 주님과 함께하는 복음 선포의 여정입니다.
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하느님 나라와 더불어 회개를 선포하며,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줍니다. 예나 이제나 참 다양하고 많은 더러운 영의 마귀들이요 병들입니다. 참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회개할 때 축출되는 마귀들이요 치유되는 병자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아름답고 매력적인 삶이요 영육의 건강입니다. 저절로 꼰대가 되지 않습니다. 누가 85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꼰대라 하겠는지요. 누구보다 살아있는, 깨어있는 영혼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요 날마다 떠남의 여정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떠남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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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능력에만 의지하라>
여행을 하기위해 짐을 챙길 때에 이것, 저것 꼼꼼하게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행의 목적에 따라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꾸려야 합니다. 잘 챙긴다고 해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쓸모없는 것을 잔뜩 싸 들고 돌아다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음부터 ‘짐을 줄여야지’ 하고는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무엇인가 많이 소유를 해야만 안심이 되는가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선교활동을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마르6,8-9)
이 말씀은 한마디로 ‘한 눈 팔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부수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해야지 인간적인 그럴 듯한 수단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잔머리를 굴리지만 하느님의 일은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마태7,31) 고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면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몫입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17) 하고 적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면서 물질의 소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에 의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그럴듯한 힘을 비워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워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보이는 힘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외에도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처음여행을 떠날 때에는 보따리가 큽니다. 그런데 자주 여행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보따리가 작아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뭔가 손해 볼 것 같은 마음,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실천하면 할수록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접고 주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써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서, 물질에게서, 나 자신에게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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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온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신지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마르 6,7)
악에 대한 권한은 본래 하느님의 것입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셔서 그 권한을 행사하시면서 이제 제자들에게도 그 권한을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을 미처 만나러 올 수 없는 각 지방 곳곳의 사람들도 파견된 제자들을 통해 그 권한의 수혜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윗 임금이 왕위계승자인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입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 지켜라. 그러면 네가 ... 성공할 것이다"(1열왕 2,3).
다윗이 아들에게 전하는 것은 국제 정세 읽는 법이나 외교술, 전쟁기술, 통치 노하우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지켜나가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며 그들을 다스리는 왕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새 임금에게 뼛속 깊이 새겨 주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 나라도 당신의 것이옵니다 ... 당신은 만물을 다스리시나이다."(화답송)
그래서 시편 저자는 이처럼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왕권을 반복하여 노래하고 있나 봅니다. 사실 아무리 건강과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으로 보인다 한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쌓고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 만물과 나라와 권세가 주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복음 환호송).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물리적, 공간적 국가라기보다 선하신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가리키지요.
"빵, 여행 보따리, 돈, 옷"(마르 6,8-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는 선교 여행의 준비물 목록입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나열하시는 하나하나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모두가 가리키는 본질은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다 맡기고 훌훌 자유롭게 가라"는 것이겠지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에 앞서 제자들이 하느님 주권을 인정하고 체험하는 것이 순서일 겁니다. 그래야 앞으로 제자들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될 군중에게 하느님 나라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하느님 뜻대로 살아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제자들에 앞서 예수님께서 이를 몸소 삶의 표양으로 보여 주고 계셨지요. 제자들에게는 실전에 임하기 전에 그동안 예수님에게서 보고 배운 가난, 의탁, 비움, 버림, 자유 등을 한번 더 육성으로 확인하는 정도가 되었을 겁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마르 6,12-13)
복음서 초반의 선교 여행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제자들은 아직 미숙하고 준비가 미흡한 상태일 터인데, 이처럼 하느님의 일을 실전에서 진짜로 하고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이 자기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이 아니라 스승이 하신 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투신하고 있기에 가능한 기적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말과 손끝과 행동을 통해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이심이 드러나는 중입니다.
비단 오늘 기념하는 일본의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순교자, 증거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살다가 목숨을 바친 분들이지요.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영성체송)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보상은 그분의 잔치상에 참여하는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끝없이 기뻐 춤을 추네."(입당송)
또 그분이 베푸신 향연에서 그분의 행복한 파트너로 함께 호흡하고 발맞춰 춤을 추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런 가슴 뛰는 보상은 먼 미래의 일만은 아닙니다. 죽은 뒤에나 맛볼 담보물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 내 삶의 구체적인 현실과 상태에서 나를 비우고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온전히 내어맡기고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느님 주권 아래 존재하는 것입니다. 잔칫상에서 그분께 기대어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그분과 춤을 추는 사랑의 현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비운 자리에 성큼 들어와 건설되는 영적 실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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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8-9)
<누구에게 하신 명렁인가?>
여벌 옷도 지니지 말고, 음식을 담은 식량 자루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지금 신은 신발에 지팡이만 지니라는 계명(참조 미태 10,9; 마르 6,8)은 모든 이에게 해당합니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계명(마태 19,21 참조)은 모든 이에게 주진 것입니까? 이는 완전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계명입니다 …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모든 계명을 지켰노라 자랑하던 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주님께서는 청하지 않는 자에게는 무거운 과제를 주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을 듣는 이의 의지에 맡겨 두셨습니다
-히에로니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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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영성 안에 드러나는 소명(봉인된 명령, 독특한 가치, 고유의 의미와 목
대부분의 종교에는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 종교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제공되는 보편적 사건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우에 그 사건은 세례이다.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우리는 세례가 우리가 부여 받은 삶의 특별한 목적(봉인된 명령)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 이냐시오가 군인의 거친 삶을 살다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영신수련’은 자신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하거나 이미 하고 있는 일을 향상하기 위한 결심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영신수련’의 수련을 통해 허버트 알폰소는 영신수련의 목표는 개인의 모든 결정과 활동의 기반이 되는 그 사람만의 특별한 존재 방식을 발견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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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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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장면으로,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것립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7). 곧 미리 준비시키고 무장시키어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신 것은 선포에는 증거가 동반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그들이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고쳐주었다.”(6,13)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는데, 이는 진리가 검증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당시의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제자들) 안에 실현되어야 함을 요청합니다. 곧 ‘파견 받은 자들’ 사이에 이미 형성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 곧 증거가 복음 선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파견 받은 자’는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지만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말씀하십니다. 선포자는 곧 증거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곧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증거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에서는) 왜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지팡이’는 여행자에게 있어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단순히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면 살아나게 하는 구원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바로 그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지요? 진정, 이 말씀의 지팡이의 권능에만 의탁하여 살아가고 있는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머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발의 먼지를 털고 그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처신에 따른 결과가 주어지게 될 것이지만, 동시에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그들의 환대에 의존되지 않고 자유로워야 함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을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중요한 것은 강요나 억지가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는 파견 받아 가서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었다.”(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주신 능력으로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 받은 우리는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그리고 그분 권능의 지팡이인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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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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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순도 백프로>
"더러운 영을 쫓는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파견 하는 이가
파견 받은 이에게 권한을 줄 때
그 권한의 종류가 있고 어느 선까지
부여하는지 잘 인식해야
수행도 잘하게 됩니다.
둘씩 파견될때 필수품은 꼭 챙기고
편리한 것들에 대해서는
취하지 않는것이 좋습니다.
처음 해외로 피정 파견을 갈 때
짐 가방이 차고 넘칠 정도였지만
그후 어디를 가게 되든
최소의 물품으로 살아내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지요.
겪어봐야 알고 부딪쳐봐야 깨닫는 우리
"명하신 대로 순도 백프로의 맘 갖고
따르면 안되는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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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 7)
복음의 기쁨은
제자들의
파견으로 다시
뜨거워집니다.
파견의 체험은
성장하는 우리의
믿음에 있습니다.
파견으로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하는지를
깨닫습니다.
파견은 진리를
실천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파견은
둘씩 짝지어
보내는 공동체의
삶입니다.
파견은 가장
직접적인
주님 사랑의
체험입니다.
파견은 봉헌으로
이어집니다.
일상을 향하는
파견의 본질입니다.
파견은 날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파견의 소명에
충실한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파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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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다시 태어나는 시간은 예수님을 통해 파견되는 떠남의 시간입니다. 떠남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떠남을 통해 새롭게 만나게 되는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사랑은 결코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붙잡거나 묶어두지 않습니다. 떠남을 통해 우리가 찾으려 했던 것이 사랑과 자유임을 깨닫게됩니다. 모든 것을 거저받기만하는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는 언제나 회개가 필요합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회개의 여정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회개야말로 삶의 기쁨을 껴안는 가장 큰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를 내려놓고 오늘을 사는 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살아가는 힘을 매순간 하느님으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떠남은 회개를 통해 만나게 되는 참 기쁨입니다. 떠남과 회개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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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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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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