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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선포: 마태복음 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선택이 아니라 순종이어야 한다」
【말씀 나눔】
누군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가집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생일파티를 여는 것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잘사는 집 애들이나 생일 파티를 하는데 파티에 초대된 아이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저마다 자신을 초대한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민합니다. 이렇게 초대 받은 것 자체만으로 그 친구와의 친분 관계를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면 이런 유치한 감정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모습으로 자리 잡습니다. 바로 기득권, 권력이라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일반 서민을 대통령 취임식에 불렀다면 그 자리는 매우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대통령 취임식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초대를 받으면 더 좋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같은 시국에 검찰에서 나를 불렀다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겠죠?
누가 초대 했는가?에 따라서 부름을 받은 사람의 반응이 달라 질 수 있습니다. 초대에 응할지 말지는 초대받은 자리의 성격과 초대한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초대에 응할지 말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경우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어서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아들인가? 질문하시고 포도원 농부 비유를 통해서 주인에게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며,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악한 농부들의 최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길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열매 맺는 백성들은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은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어서 바로 그 열매 맺는 백성을 택하여 부르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임금이 아들을 위해 마련한 혼인잔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왕이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고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예상이외입니다.
5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떠나갔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한 나라의 왕이 백성들을 왕자의 혼인잔치에 초청하였는데 그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한 사람은 밭으로 한 사람은 사업하러 가고 어떤 사람은 그 종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일은 임금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임금이 노하여서 군대를 보내어서 종을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도 초토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임금에게 대항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임금을 대적하여 멸망당한 것입니다.
바로 앞 문단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21:41(새번역)으로 보면,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그에게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포도원을 소출을 바칠 다를 농부들에게 맡기는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의 임금도 잔치에 참여할 다른 사람들을 찾습니다.
임금은 다시 종들을 내 보내서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잔치에 초청하라고 합니다.
그가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혼인잔치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예물을 준비하여 가져올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준비해 놓은 예복을 입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마도 길을 가다가 왕의 잔치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나 같이 자격이 없는 사람도 왕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고, 또는 초청장이 잘못 전달 된 것은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어 종들이 내민 초청장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초청장을 들고 잔치자리를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성문 문지기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초청장만 보고 입장시켜 줍니다. 허름한 옷차림 때문에 걱정하였는데 시종들이 나와서 예복도 준비해 놓았다고 갈아입으라고 안내해 줍니다. 마치 왕의 친족이 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왕의 잔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왕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이것 자체를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왕이 준비한 예복을 끝까지 입지 않고 잔치 자리에 들어온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왕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은 행위는 왕이 준비한 성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으로 왕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행한 것은 아마도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이 왕의 잔치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였거나 왕이 준비한 옷으로 갈아 있는 것조차도 귀찮은 매우 게으른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지 이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앞세우고 왕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은 손과 발을 결박당한 채로 바깥 어두운 데로 던져졌습니다.
여러분!
최종적으로 왕의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왕의 초청에 응하되, 왕의 방법대로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왕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무엇이었습니까?
첫 번째, 분주함입니다.
그들은 자기 일들이 바빠서 왕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평행본문인 누가복음 14:15-24에 보면, 초청을 거부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8-2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고 말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밭을 샀기 때문에,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여야 되기 때문에, 장가들어야 해서...라고 저마다 이유를 대며 왕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 저마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면서 왕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왕의 일을 최우선순위에 두지 않았습니다.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은 왕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 보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왕의 부름보다 자신들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왕을 존경하지 않으며 왕이 자신들에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과 같습니다.
바쁘게 분주하게 살아가는 것이 초청을 거부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왕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
두 번째, 희생을 거부하는 마음입니다.
왕의 초청에 응하기 위해 자신의 일 중에 무언가 포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왕의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은 왕의 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것을 용납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왕을 위해 조금도 희생할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왕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왕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
세 번째, 자신들이 스스로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는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왕의 초대를 거부한다는 것은 임금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다스릴 통치권이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에게 왕이 이래라 저래라 명령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왕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의 최우선 순위의 일이 무엇인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학교에 초등학생들이 등록하여 성장하여 중학교에 진학하면 학원시간과 겹친다고 안 나옵니다. 고등학교 진학하면 대학 입시 공부 하느라고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교 진학하면 바쁘다고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취업을 하면 먹고 사는 일이 급급해서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 교회학교에 나온 학생들이 100명이라면 청년이 되도록 남아서 교회에 다니는 성도는 10명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자녀들에게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학생들에게 왜 공부하느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답하는 학생들 중의 상당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공부한다고 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뭐할 것인가? 물어보면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랍니다. 그렇다면 좋은 직장에 취업하면 뭐할 것인가? 물어보면 좋은 집사고 좋은 차사고 부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뭐 때문에 신앙을 포기한 것입니까?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자기 일이 바빠서 신앙을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점검해 보아야 할 또 다른 점은 분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교회에 출석할 것을 권면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무리 말해도 자녀들이 교회에 오기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임금이 초청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3절에 보면 그들의 반응을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오기를 싫어하거늘’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교회 나오라 했을 때 반응과 어떻게 다릅니까? 같습니다.
오늘 본문과 자녀들의 반응이 같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이 부분은 단순히 심리적인 면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VIP들에게 목장참여를 권면하면 대부분의 반응은 ‘오기를 싫어하거늘’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것을 분별하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끝까지 권면하고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을 위해 내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눅 14:27에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희생해야 합니까?
우리들은 믿음을 위해서 무엇을 포기하라는 것인가요?
지인들 중에 주말이면 가족들이랑 캠핑장으로 놀러 가는 가족이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어디론가 떠납니다. 토요일 밤 늦도록 놀고 주일이면 아침까지 늘어지게 잡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성도들은 금요일이면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목장 예배를 드리러 갑니다. 토요일은 봉사 가기도하고 예배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주일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무엇을 포기했나요? 주말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주말을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내 고집을 포기한 것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왕의 잔치 자리에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너무나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초대에 응한 사람 중에서 잔치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 쫓겨났습니까?
바로 자기 고집을 앞세워 왕이 준비한 예복을 착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왕은 참석자들에게 전통 관습대로 받아야 할 예물을 받지 않고, 오히려 예복을 준비하여 주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도 않고 잔치 자리에 앉았습니다. 왕이 준비한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방법으로 잔치에 참여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합니까?
제가 군 생활하던 시절에 미군과 함께 작전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작전에서 매우 인상적인 경험을 하였습니다. 미군부대 지휘관이 병사들의 이동로를 지도를 보면서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기동로에 지도에서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 장애물은 바로 논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 논을 피해서 조금 돌더라도 농로길을 이용하여 목표로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군들은 그 논을 그대로 통과합니다. 아직 모내기를 하지 못한 질척이는 땅을 밟고 갑니다. 때로는 그 논에 엎드려 포복으로 이동하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융통성이 없고 한편으로는 바보처럼 보였지만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변경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 옳은 대로 행동합니다.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 임금이 준비한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은 이유를 10: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나답과 아비후는 자기 향로를 가져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법으로 분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고집대로 행동한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을 때 모세가 아론과 아론의 두 아들에게 한 말입니다.
7절을 새번역으로 보면
당신들은 회막 어귀 바깥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어기면, 당신들도 죽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주님께서 기름부어 거룩하게 구별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시킨 대로 하였다.
모세는 아론과 아론의 두 아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주님께서 기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하신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별된 사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각별히 주의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것은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이 말씀은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직후에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과 연관이 되어 있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인들에게 술을 경계하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5:18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을 본 사람들은 새 술에 취했다 말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술 취한 것과 성령의 충만함을 종종 비교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술에 대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술을 마시고 조금 지나면 술이 술을 마시고 더 지나면 술이 사람을 마신다... 왜 이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술에 취하면 그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그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이 술 취한 사람과 비교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그 사람을 통제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가 통제합니까? 바로 성령님이 통제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나답과 아비후는 술에 취하여 성령님 즉 하나님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술에 취하여 분향함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그렇게 분향하여도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임직자를 피택 할 때 고려사항으로 금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에 술 마시지 말라는 말이 어디에 있느냐며 반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다고 술을 먹지 말라는 것은 과도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저는 이것에 대한 답변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생각은 누구의 생각일까요?
성령님이 주신 생각일까요 사람의 생각일까요?
여러분!
사람의 생각을 따르면 그 길이 처음에는 옳은 길처럼 보일 지라도 마지막은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 외에는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다른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부정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왕의 잔치 자리에는 자격이이 없는 사람들이 초대되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자격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에 보면,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들을 택하셨습니다.
시편 71편에서는 모태에서부터 택하셨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은혜로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요15:16a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은혜로 택하사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15:16b에 보면,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안에서 열매가 항상 있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열매일까요?
베드로전서 2:9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행전 1:8에서는 이 일을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명령입니다. 우리들이 하고, 말고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즉 부르심은 우리가 자원하여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따라서 내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에서 알 수 있는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명은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이 일은 우리 각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사명은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나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다 지켜 행하게 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것은 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에 주어진 사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상기해보면,
① 하나님의 일보다 내 일이 우선 인 것,
② 하나님을 위해 조금도 희생하지 않는 것, 주신 십자가를 거부 함.
③ 내 고집대로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애물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외에도 한 가지 장애물이 더 있습니다.
길가다가 임금의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이 초대장이 진짜인가?
의심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사명도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나같이 믿음이 부족한 사람에게 목자를 맡기실까?
혹시 실수하신 것 아니실까?
다른 사람을 부르셨는데 내가 분별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며, 내 자신이 결정자가 되어서 ‘나는 아니다’ 라고 판결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후회할 지라도 하나님은 후회하시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11:29에 보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실수도 없으시고 후회하심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사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어느 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그래 네가 해라 하고 부르신 것도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1:9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들이 모태에 있을 때, 영원 전부터 택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실수가 없다는 것을 믿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며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14절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에 성도들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동안 살아온 삶을 되돌아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혹시라도 부르심에 반응하여 잔치 자리에는 앉아 있으나 여전히 내 방식 내 소견에 옳은 대로 내 고집대로 행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새해부터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명자의 삶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우둔한 고집과 방법을 내려놓고 오로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가장 적합한 십자가를 주셨음을 믿고 그 십자가를 달개지고 나아가는 성도들이 다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 찬양】
하나님의 부르심,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순례자, 실로암, 부르신 곳에서, 일상. 찬송가: 38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323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524장 갈길을 밝히 보이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