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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성해응(成海應)생년1760년(영조 36)몰년1839년(헌종 5)자용여(龍汝)호연경재(硏經齋), 난실(蘭室)본관창녕(昌寧)특기사항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
硏經齋全集卷之五十九 / 蘭室史科二 / 晉陽殉難諸臣傳
鄭名世字伯時。晉州人。高麗文良公乙輔之後。幼警悟。萬曆乙亥中進士。己卯登明經及第。丙戌除海美縣監。壬辰倭冦大至。湖西士大夫上書軆察使。請名世爲義兵別將。轉戰于牙山平澤之間。其弟名遠以淸安縣監。戰死槐山。名世哭曰汝骨我收。我骨誰收。人知其必死。時倡義使金千鎰在咸安。名世馳赴之。癸巳六月入晉州。隨賊所薄。晝夜力拒。會黃進中丸
死。城中推名世領進衆。城陷與千鎰,慶會北面四拜死之。事聞予祭㫌閭。贈都承旨。享長興忠烈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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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소산인집(左蘇山人集) 서유본(徐有本)생년1762년(영조 38)몰년1822년(순조 22)자혼원(混原)호좌소산인(左蘇山人)본관대구(大邱)특기사항유금(柳琴), 성대중(成大中), 박제가(朴齊家), 김영(金泳) 등과 교유
左蘓山人文集卷第八 達城徐有本混原 / 文 / 晉州殉難諸臣傳
鄭名世字伯時。少中進士試。專精學問。屛妻子。結茅于獨谷里。人稱獨谷先生。未幾擧明經乙科。出爲海美縣監。有惠政。吏民借留一年。亂初以義兵將。轉闘湖中。弟名遠以淸安縣監。戰歿于槐山。名世馳哭之。旣葬立標以識曰。汝骨我收。我骨誰收。軆察使啓于朝。授助防將。已與金千鎰等同赴晉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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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60권 / 잡저(雜著) 7 / 정단(正壇) 32인 -장릉배식록(莊陵配食錄) 신해년(1791)
의정부 우의정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
자는 자유(子㽕)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찬성 이오(以吾)의 아들이다. 태종 병신년(1416, 태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계유정난 때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유배지에서도 조상의 신주를 모시더니, 어느 날은 종자(從者)를 보고, “정갈한 밥을 한 상 차려라. 내가 제사를 지내련다.” 하여 제사를 지내고서는 신주를 불살랐는데, 그러고 나자 사자(使者)가 도착하여 죽었다. 아들 원(遠)은 거짓으로 미쳐서 스스로 호를 광노(狂奴)라 하고 이어 광로(光露)로 이름을 바꾸어 도망쳐 버렸다. 영종 병인년(1746, 영조22)에 복관되고 무인년(1758, 영조34)에 충장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임고서원(臨皐書院)과 장흥(長興)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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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22권, 정조 10년 9월 27일 정유 6/8 기사 / 1786년 청 건륭(乾隆) 51년
전라도 유학 김익현 등이 충장공 정분을 충렬사에 배향할 것을 청하다
전라도 유학 김익현(金翼賢) 등이 글을 올려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을 충렬사(忠烈祠)에다 배향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에서 복계하여 아뢰기를,
"정본의 곧은 충성과 큰 기개는 단종 때 세 정승 중의 하나입니다. 두 정승과 여섯 신하에게 모두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정본만 영령을 모시는 한 칸의 집도 없으니, 실로 결여된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청한 것은 창설이 아니라, 그의 손자 사당에 배향하는 것에 불과하니, 관례를 초월하여 시행을 허락하는 것도 넉넉히 선비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올려 호소함으로써 상규(常規)를 어기었으니, 그냥 두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살아서는 지조를 똑같이 지켰고 죽어서는 똑같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두 정승과 여섯 신하는 모두 제사를 지낼 곳이 있으나, 오직 충장공(忠莊公) 한 사람만 지금까지 빠졌으니 어찌 결여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충장공 정본을 충렬사에 배향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전라도 진사 이진희(李鎭熙) 등이 글을 올려 증 병조 참의 양대박(梁大樸)의 관작을 가증(加增)할 것을 청하였다. 예조에서 복계하여 아뢰기를,
"양대박의 절의는 매우 뛰어났으므로 성상께서 특별히 정문(旌門)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런데 선비들이 또 그의 아들로 인해 증직되었다는 이유로 정문을 세우고 비석을 세울 때에 관작을 올려 주라고 청하였습니다. 선비들이 호소한 것은 격례(格例)에 어긋나니, 그냥 두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증직이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면 비록 1품에 이르더라도 괜찮지만 자신으로 인한 것이면 비록 한 품계에 그쳐도 괜찮다. 고 충신 증 참의 양대박에게 병조 참판을 더 증직하라."
하였다.
○全羅道幼學金翼賢等上言, 請以忠莊公 鄭苯, 配享於忠烈祠。 禮曹覆啓言: "鄭苯之貞忠、大節, 卽端廟三相中一人。 二相、六臣、皆享俎豆, 而苯獨無一間妥靈之所者, 實爲欠典。 且其所請, 不在於創設, 不過躋享於其孫之祠, 則拔例許施, 亦足慰士林, 而上言呼籲, 旣違常規。 請姑置之。" 敎曰: "生則同其操, 死則同其傳。 二相、六臣, 皆有俎豆之所, 惟忠莊一人之尙此獨漏, 豈不是欠事? 今以忠莊公 鄭苯, 配食忠烈祠。" 仍令遣禮官致祭。 全羅道進士李鎭熙等上言, 請加贈贈兵曹參議梁大樸職。 禮曹覆啓言: "梁大樸節義, 不啻卓異, 自上特施旌閭之典。 多士又以贈職之由於其子, 迨此旌閭立石之時, 以進秩加贈爲請, 而多士呼籲, 有違格例。 請置之。" 敎曰: "貤贈不由於己, 則雖至一品可也, 由於己, 則雖止一命可也。 故忠臣贈參議梁大樸, 加贈兵曹參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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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 사전전고(祀典典故) / 서원(書院) / 전라도(全羅道)
장흥(長興) 예양서원(汭陽書院) 만력 임자년에 세웠다. : 이색(李穡)ㆍ남효온(南孝溫)ㆍ김광원(金光遠) 호는 월봉(月峯), 진사이다. ㆍ신잠(申潛)ㆍ유호인(劉好仁) 호는 천방(天放), 진사에 급제하여 참봉을 지냈고 율곡의 문인이다.
연곡서원(淵谷書院) 무술년에 세웠으며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 민정중(閔鼎重)ㆍ민유중(閔維重)
월천사우(月川祠宇) 임오년에 세웠다. : 문익점(文益漸)ㆍ문위세(文緯世) 호는 풍암(楓巖), 목사이다.
양강사우(楊江祠宇) 경진년에 세웠다. : 김경추(金景秋) 호는 죽정(竹汀) 또는 송정(松亭)이다.
충렬사우(忠烈祠宇) 신미년에 세웠다. : 한온(韓薀) 벼슬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병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ㆍ정명세(鄭名世) 호는 독곡(獨谷), 현감을 지냈고 승지에 증직되었다.
포충사(褒忠祠) 숙종 을유년에 세웠다. : 선세강(宣世綱) 호는 매곡(梅谷), 영장(營將)을 지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죽천사우(竹川祠宇) 을사년에 세웠다. : 위덕의(魏德毅) 호는 청계(聽溪), 병조 좌랑을 지냈고, 참의에 증직되었다.
감호영당(鑑湖影堂) 숙종 정사년에 세웠다. : 전녹생(田祿生) 호는 야계(壄隱), 벼슬은 고려조의 사인(舍人)이다. ㆍ전유추(田有秋) 호는 송담(松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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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 전라도(全羅道)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대동지지(大東地志)》
【누정】 규양루(葵陽樓) 부 안에 있다.
【사원】 연곡서원(淵谷書院) 숙종 무인년에 건립하고 영종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민정중(閔鼎重) 양주(楊州) 편에 보인다. 민유중(閔維重) 자(字)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정중(鼎重)의 동생이며, 벼슬은 영돈녕부사 여양부원군(領敦寧府事驪陽府院君)이다.
○ 강성서원(江城書院) 숙종 계미년에 건립하고 정종 을사년에 사액하다. 문익점(文益漸) 단성(丹城) 편에 보인다.
○ 충렬사(忠烈祠) 숙종 계해년에 건립하고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정분(鄭苯) 자(字)는 자외(子
)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며, 본관은 진주(晉州)다. 단종 계유년에 사사(賜死)하였다. 벼슬은 우의정이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정광로(鄭光露) 분의 아들이다. 한온(韓蘊) 자는 군수(君粹)이며 청주(淸州)사람이다. 명종(明宗) 을묘년에 본 부사(本府使)로서 싸우다 죽으니, 병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정명세(鄭名世) 자는 백시(伯時) 호는 독곡(獨谷)이다. 선조 계사년에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진주에서 싸우다 죽으니,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오 (역)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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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 선조 26년 계사 > 7월 10일 > 최종정보
선조 26년 계사(1593) 7월 10일(임술)
26-07-10[09]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을 보고하다
창의사(倡義使) 판결사(判決事) 김천일(金千鎰)이 치계하였다.
“신이 이달 14일에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였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중국군 지대(支待)하는 일로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와 함께 변란에 대처하는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15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충청 병사 황진(黃進), 조방장 정명세(鄭名世), 경기 조방장 홍계남(洪季男),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복수 의장(復讐義將) 고종후(高從厚)들이 잇따라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권율(權慄)이 전라 병사와 각항(各項)의 장령(將領) 등에게 전령(傳令)하여 모두 나아오게 하므로 제장(諸將)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하여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신이 최경회ㆍ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收合)하였으나 3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성안은 넓은데 이처럼 주린 군사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으니 지극히 우려됩니다. 대개 진주는 바로 전라도의 보장(保障)인데 순찰사 이하가 방어를 철수하여 산음(山陰)으로 옮겨 갔으니 더욱 우려됩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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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 광해군 즉위년 무신 > 11월 21일 > 최종정보
광해군 즉위년 무신(1608) 11월 21일(갑진)
00-11-21[08] 유학 정첨이 상소하여 그의 아버지 정명세의 충의와 절개에 대해 아뢰다
장흥(長興)에 사는 유학(幼學) 정첨(鄭䪜)이 상소하기를,
“이미 죽은 신의 아비 정명세(鄭名世)가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있을 때 임진 왜란을 만나 출몰하여 적군을 토벌했는데, 크고 작은 십여 차례의 전투에서 수급을 많이 벤 공로가 있었고 나라를 위해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아비의 이름이 절개를 세운 인사들의 뒤에 끼어 있는데도 아직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자식된 자의 원통만이 아니고 사실 공론이 한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명세의 충의를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은 의당 쾌히 시행해야 할 것이다. 예조에 말하여 속히 논의한 다음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재열 (역)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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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 정조 10년 병오 > 4월 2일 > 최종정보
정조 10년 병오(1786) 4월 2일(을해)
10-04-02[12] 상언(上言) 21건을 각 해사(該司)에 판하(判下)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라도의 유학 윤덕우(尹德雨)가 상언하여, 고(故) 상신(相臣) 충장공(忠莊公) 정분(鄭苯)을 장흥부(長興府)의 충렬사(忠烈祠)에 합향(合享)하여 선조와 손자의 충렬이 영원토록 함께 빛나게 하는 일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충렬사는 곧 정분의 5대손 정명세(鄭名世)와 정명원(鄭名遠)이 임진년 국난에 절사(節死)한 일로 증직(贈職), 정려(旌閭)하고 이어 그들을 위하여 사우(祠宇)를 세운 것이니, 정분의 죽음과는 사체가 다를 뿐 아니라 손자로서 그 선조에 덧붙인다면 혹 허락할 수 있겠지만, 선조로서 손자에 덧붙인다면 주벽(主壁)이 되어야 하므로 사우를 건립한 본뜻에 자못 어긋납니다. 그만두게 하소서.”
하여, 하교하기를,
“회계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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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정조 > 정조 12년 무신 > 9월 8일 > 최종정보
정조 12년 무신(1788) 9월 8일(병인)
12-09-08[09] 각 해사(該司)에 상언(上言) 133도(度)를 판하(判下)하였다.
또 아뢰기를,
“연기(燕岐)의 유학 정홍달(鄭弘達)의 상언에, ‘선조 고 상신(相臣) 정분(鄭苯)은 자식이 없어서 종형(從兄)의 아들 정지산(鄭之産)을 후사로 세워서 이로부터 대대로 조상의 유업(遺業)을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진주 사람 정중권(鄭重權) 등이 9대조 정준(鄭遵)을 정분의 소생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의 집에서 송사를 일으키자 영영(嶺營)의 도신이 정준의 친아비에 정인덕(鄭仁德)이란 이름을 조사해 내어 정중권을 경흥(慶興)에 형배(刑配)하였습니다. 그런데 장흥(長興) 사람 정규환(鄭奎煥)이 자기(磁器)로 된 지문(誌文)을 위조(僞造)해 먼 조상의 무덤에 묻어놓은 뒤에 관아에 파낼 것을 청하였는데, 9대조 정광로(鄭光露)를 바로 정분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가탁(假托)해서 지어낸 것이 전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완영(完營)에 송사를 일으키니, 정규환이 경사(京師)로 숨어들어 진신(搢紳)들을 두루 찾아뵙고서 거짓 지문을 과시(誇示)하여 갑자기 연석에서 아뢰기에 이르렀고, 재작년에는 정규환의 족속(族屬) 정규응(鄭奎應)이 상언하여 정분을 그의 조부 정명세(鄭名世)의 사사(私祠)에 배향하기를 청하여 사제(賜祭)한 일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부디 조사하여 사실을 캐내 윤리와 기강이 어긋나지 않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피차의 곡직(曲直)을 막론하고 윤리와 기강을 손상시키고 풍속과 교화에 관계됨이 크니, 양도(兩道)로 하여금 명확하게 조사해서 하나로 결론지어 결처(決處)하게 하라고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又啓言燕歧幼學鄭弘達上言以爲其先祖故相臣苯無子以從兄之子之產立爲後自是以來世守宗緖有晉州人鄭重權等稱其九世祖遵爲苯所生故渠家起訟嶺營 道臣査得鄭遵親父仁德之名刑配重權於慶興矣長興人鄭奎煥者僞造磁器誌文埋其遠祖之墳請官掘出以其九世祖鄭光露卽是苯之子大抵假托粧撰都不成說故起訟完營則奎煥潛入京師遍謁搢紳誇示僞誌遽至筵白再昨年奎煥之族奎應上言請以苯配享於渠祖鄭名世之私祠至有賜祭之擧矣伏乞行査得實使倫紀不忒云矣母論彼此曲直其爲傷倫紀關風化則大矣令兩道明査指一決處之意請分付該曹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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