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밤 (황동규, 1938~)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 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 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 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 1975년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 (민음사)
*청소년기와는 다르게 우리는 성인이 되어 직장을 잡은 30대가 되어서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고민에 빠진 적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목표가 최선의 선택이 아닌지, 자신의 가치관이 올바르고 타당한 것인지, 자신의 삶이 과연 후회하지 않는 정당한 길인지 등등을 말이죠. 그래서 산이나 바다로 여행을 떠나거나 홀로 달빛에 젖어 밤길을 헤매기도 하였을 거라 생각됩니다.
특히 70년대 유신과 80년대 신군부 독재 시절의 비합리적인 행태와 사회적 모순과 마주 선 사람에게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대해 수많은 갈등과 번민에 시달렸을 법합니다. 이 詩에서 보는 것처럼 겨울밤 얼은 들판을 걷기도 하면서.
이 詩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긴 하지만, 밝고 깨끗한 이미지를 지닌 달빛을 자신의 내면으로 비유하여, 삶에서 겪는 고독이나 헐벗음은 우리 내면의 순수성을 통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세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시인은 절망적인 시대적 상황과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겪으며 보름달이 환하게 비치는 겨울밤, 얼어붙은 시골 들판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 들판에 맑게 비치는 달빛을 통해 시인은, 밝고 깨끗한 내적 순수성이야말로 오랫동안 자신이 간직해 오고 앞으로 걸어 가야 할 삶의 자세라고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내면이야 말로 몇몇 친구들에게 기꺼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고, 외롭지 않은 길이며 헐벗은 자아 위에 비치는 순순한 삶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보름달이 밝게 뜨는 요사이 겨울밤 풍경은, 남아 있는 흰 눈과 어우러져 적막한 데다 이 詩에서처럼 맑고 순수한 느낌을 주고 있군요.
첫댓글 즐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