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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즉문즉설 (5/18 손태도 교수님 강의)| 공부방
1. 간혹 왜곡된 사설과 사설을 이해 못하는 소리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예전 정병욱 선생이 70년대 뿌리 깊은 나무(브리태니카)에서 만들어 낸 판소리 다섯 마당에 이미 주석을 다 달아 놓았습니다. 조선시대 노래를 우리가 어떻게 다 알아 듣겠습니까? 춘향가의 경우는 서울대 중문과 허성도 교수가 추가 해석을 하여 잘 되어 있습니다. 주석은 그 정도이고 나머지책들은 베끼는 수준이며 요즘 학자들은 잘 못하고 있습니다. 명확하지 않은 내용은 미상(未詳)이라 명기하기도 하는데 이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학자들은 1800년대 소설책을 찾아 분석해서 확인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신재효 판소리 다섯바탕을 강한효 선생이 주석을 달아 놓는 등 이런 분들이 큰 일을 해놓았으니 읽어 보면 됩니다.
광대들이 판소리를 다 만들지 않고 주변에 아전들이 중간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전주에는 백비장이라는 아전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비가비'라고 하는 양반출신 소리꾼이 있습니다. 양반출신인 권삼득 아버지의 호가 이우당인데 두가지 근심이라는 뜻인데 하나는 조상의 산소를 잘못 써서 후손으로서 마음에 걸린다는 점이고, 둘째는 아들 삼득이가 공부는 안하고 노래만 하여 걱정이라는 것으로 그분의 문집(이우당집)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1940년에 나온 정노식의 조선 창극사에 보면 광대는 그대로 적어놓고 비가비는 비갑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즉 갑이 아니다 동갑이 아니다. 동갑은 광대들이고 동갑이 아닌 사람은 비갑이라 한다. 이런 사람들이 하니 문식이 있는 것지요. 광대들이 가지를 치고 신재효 같은 사람들이 또 지도를 했을 것이고 이제 전통사회는 끝나 버렸으니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못 알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창극 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창작 판소리는 판소리사적으로 보면 판소리 초기 형태인 재담소리로 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12마당이었고 오늘날 전해지는 것은 전승 5바탕입니다. 배비장 타령, 장끼 타령, 강릉매화 타령, 옹고집 타령, 변강쇠 타령, 가짜 신선 타령, 무숙이타령 등 7개 실전 판소리가 전승이 되지 않은 판소리죠. 이를 잘 살펴보면 공통적인 점이 우스운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에게서 특별히 본 받을 점이 없고 풍자와 해학의 대상이며 일종의 재담 소리로서 오늘날의 창작 판소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흥주씨가 제일 처음시작할 때 저와 얘기를 하였는데 일단 해 보시라고 했습니다. 강력한 판소리가 있고 고급 성악 예술이기 때문에 판소리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술사적으로 보면 판소리의 시대는 이미 지난 것입니다. 이면에 맞게 불러야 한다고 하는데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모두가 조선시대 이야기로 이면에 맞게 하려면, 그 음악도 조선시대 음악이어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판소리 5바탕도) 입지가 좁아 지는 것입니다. 판소리 이전에 재담소리가 있고 재담소리 이전에 화극이 있는데 화극이란 오늘날 일인 개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금은 궐안에 살어 궐밖에 사정을 모르니 연말에 여러 행사를 할 때 대표적인 행사로 광대들이 대괄밖의 일들을 연극으로 꾸며 아주 자세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럼 임금이 세상 밖의 일들이 저런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며 이를 화극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말과 흉내내기로 고려 시대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에 융성했습니다.
인조 12년 1634년에 궁궐에서 공연이 없어지게 됩니다. 연말 나래라고 산대도 만들고 불꽃놀이도 하고 해서 비용이 많이 들어 이전부터 그만두자고 얘기되었지만 년말에 대비, 왕대비도 즐기기 때문에 지속되어 왔으나 결국 인조 때 없어 지게 되었습니다. 화극은 궁궐에서 할 때만 해도 대표적 공연물이었으나 예술적으로 보면 수준이 높지 않았습니다. 광대들이 노래를 잘하니 여기에 노래를 집어 넣어 재담 소리가 된 것이고 이것이 발전 되어 판소리가 된 것입니다. 판소리는 1700년대에 생긴 것으로 가장 오래 된 판소리 문헌은 1754년에 나온 것입니다. 1634년까지는 화극이라는 공연이 광대들의 대표적인 공연물이었고 1700년까지는 재담소리가 인기가 있었고 1700년 이후부터는 판소리가 인기있는 대표 공연물이 된 것입니다. 근대에 오면서 1902년 협률사(궁내부 관할 기관, 추후 판소리 창극 공연단체의 보통 명사가 됨)에서 관리하는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원각사가 생기게 되는데 김창환 같은 판소리 광대들이 극장에 들어가보고 난후 창극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이때부터 창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날은 근대 극장을 중심으로 공연이 진행되니 창극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렇게 창극으로 가기 시작해서 1930년대가 되면 봉덕사의 종소리, 일목 장군이니, 어촌 야화니 하는 창작 창극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작 창극을 해야 무엇이 되었죠. 그런데 1936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 기본적으로 일제시대인데 1902년 창극을 시작했지만 국운이 기울어 지면서 무슨 예술이 발전하겠습니까.
그러다 해방이 되었고 창극들을 다시 시작하였으나 1948년 여성 국극이 시작되었습니다. 48년 10월 '옥중화 (춘향전)'는 실패했으나, 49년 2월 '해님 달님'으로 크게 성공하여 여성 국극의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1954년경에는 창극단이 싹 사라지게 됩니다. 여성국극을 해야 돈이 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창극을 하면 극장을 안빌려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여성국극이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왜냐하면 여성국극이 갑자기 성장하면서 너도 나도 뛰어 들면서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시작한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행, 인규영, 신숙 등인데 이들은 판소리 명창이기도 하지요. 박귀희 선생은 일제시대때 일목 장군으로도 나오고 흥부로도 나오고 선화공주에서 서동요도 맡는 등 남자 역할을 했습니다. 48년에 옥중화, 49년에 해님 달님이 공연되었습니다. 판소리광대들은 소리만 하는데 여자들은 춤도 배워 남자들보다 재주들이 좋아 창극이 된 것입니다. 1954년까지는 한국의 오페라, 민족오페라 라고 신문 광고를 하여 이때까지만 해도 창극을 잘 해왔습니다. 54년 경에 여성 국극이 2~3개 정도뿐이였는데 이후 50년대 후반에는 여성국극이 15~20개 정도가 생기면서 제대로 소리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소리보다는 인물이 중요시 되면서 여성국극이 60년대부터 없어 지게 됩니다. 결정적인 이유로 TV가 나오고 영화 붐이 일어 나고 국가에서 영화 지원 정책을 펴면서 70년에 와서는 여성국극이 싹 사라지게 됩니다.
57년이 되면 창극단은 다 망하게 되고 동초 김연수는 창극단을 해산하고 62년에 국립창극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공연예술은 시대 정신과 연결이 되어야 하며 연결이 안되면 공연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60년대 시대정신이 민주화다 해도 1962년 군사정부인 3공화국이 국립창극단을 만들어 주었는데 거기서 어떻게 민주화를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목 장군이니 어촌 야화니 하는 창작 창극을 하고 그 당시 사회적인 소재로 공연을 했지만 일제 시대때 죽어 버렸고 또 여성 국극 때문에 죽어 버렸습니다. 62년에 국립창극단이 생겼지만 국가에서 세운 단체가 어떻게 민주화 정신을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구태의연한 주제로 공연하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 진 것입니다. 창극단이 국립창극단외에 전주 도립 창극단, 남원 민속 창극단, 광주 시립국극단, 춘천에도 생겼다고 하여 지금은 5개나 되는데 군사정부 시절에 우리 창극은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판소리와 같은 예술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은 광대라는 신분 집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천민이라 토지가 없었고 관청에 가서 피리나 대금을 불고 그리고 줄타기나 쌍줄타기나 솟대타기를 목숨 걸고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경기이북에는 제일촌 광대촌이라는 특수마을이 있었습니다. 관하에 가서 악공연주를 하고 줄타기를 하고 노래도 하였습니다. 경기 이남에는 세습 무당 집안의 아들들 즉 당골네들이 이러한 일들을 했죠. 이들이 악공을 하고 광대역할도 겸했습니다.
고려 중기부터 이러한 신습 세습제도가 생겼는데 이들은 토지를 가질 수 없고 오직 악기, 줄타기, 소리로 먹고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피리대금을 하고 모든 음악의 중심은 악기 연주였습니다. 이런 전문 연주자가 소리도 하는 것으로 최고의 음악인이 판소리를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하지 못하고 소리 소질만 있으면 죽어라고 소리를 하고 안되면 피리 대금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판을 벌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경우를 보면) 환갑잔치가 크고 더 큰 것은 과거 급제자의 축하 잔치였습니다. 문과 33명, 무과 29명, 생원 100명, 진사 100명 총 260명 정도의 급제자 들이 나옵니다. 조선시대는 매우 소박한 사회로 술먹고 놀았다 하면 상소가 올라가는 시대였는데 단 두가지 예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모와 관계 되는 것이고, 둘째는 과제 급제자 행사였습니다. 즉 과거급제를 하면 궁궐에서 은영연(恩榮宴)이라고 해서 의정부가 주관해서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당시 관련 그림을 보면 광대들이 땅 재주도 부리면서 동원이 되기도 합니다. 또 급제자가 고향 지방으로 내려가면 유가(遊街)를 하는데 유가라는 것은 광대가 어랑 어랑 소리를 부르고 급제자는 말을 타고 길에서 3~5일 동안 하는 것으로 오늘 날 카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방관아의 수령이 영친연(榮親宴)이라고 해서 또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그러니까 과거 급제의 경우 궁궐에서는은영연, 지방관아에서는 영친연 등 잔치를 베푸니 집안에서도 광대를 불러 한바탕 잔치를 베푸는 것이 관례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광대들이 그들의 잡기를 보이게 된 것이죠. 급제자가 260명이면 광대가 몇명 필요하겠는가. 한 사람이 길에서 행진을 하면 앞에 3인 6각을 하게 되는데 한명당 5명을 배정하면 1000명이 넘는 것이죠. 과거가 있으면 광대들도 서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과의 경우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29명이지만 이후 필요에 따라 수천명, 수만명까지 뽑게 되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유가를 하게 되는데 이 때가 광대들의 대목이 되는 시기죠. 그러한 과거가 얼마나 자주 열리나 하면 문과, 무과, 대과, 진과, 신년시는 3년마다 260명씩, 별시는 9개월마다 한번씩 열린다고 합니다.
서울의 경우 10시가 되면 통금이고 4시 바루를 치고 통금 해제가 됩니다. 그래서 판소리를 하게 되면 밤을 새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에는 일요일이 없으니까 퇴청하고 난 뒤에 관아 업무가 끝내고 잠시 참석하게 되고 놀다보면 금새 10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궁궐의 은영연이나 지방관아의 영친연은 1~2시간 놀게 되지만 급제자 집의 잔치는 보문 잔치 또는 문희연이라고 하는 데 이는 몇날 몇일을 하게 되며 광대들도 그렇게 공연을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화극을 공연하다가 나중에 판소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하층 모두가 보게 되는데 여기서 광대들은 이름을 얻게 되고 판소리 좋아 하는 양반들은 이를 보고 앞으로 언제 이런 경지를 얼마나 맛 보겠는가 하고 꼭 보려고 하였답니다. 이건창과 같은 사람들은 판소리를 듣고 시를 쓰고 신휴과 같은 고관은 판소리 고수관과 같은 명창들을 데리고 몇달간 판소리를 듣고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후 임금 앞에서도 들려 주게 되고 임금은 소리를 듣고 소리꾼에게 교지를 만들어 벼슬을 주기도 하였답니다.
장사익 선생님이 잘하시던 못하시던 그것은 우리노래이기 때문이지요. 지난 4월 27일날 국회에서 제가 여성국극에 대해서 발표가 있었습니다. 국립국악원 원장, 최종민 선생님 등 7~8명이 나오셨는데 제가 원고 A4 26장을 준비했으나 국회에서 생방송이라고 10분전에 갑자기 원래 20분짜리 발표를 10분만에 끝내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1930년대에 우리 노래를 잃어 버렸다. 신민요와 일본에서 나온 트로트 요나누끼 단게 (라시도미파 )가 경쟁이 붙었는데 신민요가 져 버렸다. 그 이후로 우리는 우리 노래를 잃어 버린 것이다. 필리핀이 미국 식민지를 거치면서 자기 말을 잃어 버리고 영어를 공영어로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제 38년간 우리말을 못쓰게 하고 이름을 못쓰게 하였는데 다행히 우리는 많이 버텼고 또 해방이 되고 우리말을 되찾았다. 그러나 1930년대 우리 노래를 잃어 버렸고 아직도 못 찾았다. 김영미씨가 쓴 대중가요사를 보면 우리 대중가요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외국의 노래를 수입해서 노래하고 있다는 얘기다. 프랑스 샹송이나 이태리의 칸소네라든지 일본도 전통사회에서 자기네 민요 계통에서 조금 발전시켜 대중 가요를 해 왔다. 이제 모든 노래를 프랑스사람이 샹송만 하고 이태리 사람이 칸소네만 하고 이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자기 노래를 향유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말을 되찾았지만 우리 노래를 아직도 못찾았다는 말입니다.
한복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우리 음악극이 창극과 여성 국극인데 창극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고, 여성국극은 54년까지 민속 오페라라고 해서 성공한 음악극이라 할 수 있는데, 김진진(34년생), 김경수, 조금행, 조현석, 김연숙씨 등 이런 분들이 돌아 가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니 와 닿는 것이고 대중 가수들의 노래가 깊이 와 닿지 않는 것은 결국 그것이 우리의 노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외국에서 한국가수들이 유행인 것은 노래작곡을 외국에서 했던 것들이 있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노래라는 것은 말의 연장임. 지역마다 사투리가 있듯이 음악에서는 '톨'이라고 합니다. 서도(황해도나 평안도)에서는 수심가 톨, 서울 경기는 경톨이라고 하고 전라도에서는 육자배기톨, 경상도 함경도에서는 메나리톨이라고 합니다. 같은 나라에서도 사투리가 다르기 때문에 음악 선율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육자배기다하면 '라'를 중간음으로 해서 '시도'에서 꺽고 밑에 '미'를 떨고 하지 않습니까. 아라~리가(시도에서 꺽고)아~(미에서 떨고) 났네. 판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정 통곡 애원성 을 다아안장곡을 섞어(꺽고)어~(미에서 떨고) 운다. '아라리가아 났네' 와 같습니다. 서울사람이 아라리가 났네 하면 뭔가 갑갑합니다. 즉, 같은 나라 사람이라도 사투리, 말이 다르니까, 노래는 말의 연장이니까, 선율이 다르니까 1930년대 신민요와 일본의 트로트와 대결하여 우리가 져버린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대중가요가 좋고 해도 우리 노래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채워 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우선 판소리에 대한 인식을 좀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 예술사에서 새로운 예술세계를 연 판소리'라는 논문을 썼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판소리는 대단한 예술이다. 왜냐하면 예술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소리와 같은 고급 성악곡이 왜 우리나라에만 있는가. 이유는 세가지 조건이 우리나라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광대집단입니다. 경기 이북에는 재인촌 광대촌에 사는 사람들 경기이남에 세습무당집안의 남자들 화령이라고 합니다. (신라 화랑에서부터 내려왔을 지 모름) 고려 중기부터 신분이 세습되는데 세습된다는 의미는 악공을 하면서 광대를 하는 것입니다. 광대집단을 따로 둔 것이 아니고 고려말에 무당의 아들들이 악공으로 호적이 올라가고 악공집단으로 광대 신분집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집단은 사회적으로 계급내혼이기 때문에 시대가 흐르면서 자기들끼리 하기 때문에 숫자가 많아 지게 됩니다.
지금이야 광대라고 대놓고 말하지만 20년전만해도 그런 소리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명창 내력을 따지고 올라가니 무대집안이고 광대집안이라고 말하면 자리에서 쫓겨나기 까지 하였습니다. 경기이북에는 광대촌 재인촌에 자기들끼리 살고 경기이남에 무당촌 당골 집안이 마을 일반 평민들과 같이 살지 못합니다. 마을앞 개울이나 산밑 이런 곳에서 따로 살게 되고 그래서 대여섯살 된 어린애도 5~60된 어른에게 김서방 이리와 하고 반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애들을 학교에 보내도 무시하니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70년대만하더라도 그런 설움을 겪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사람들에게 광대라도 광대라는 소리를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광대이고 국악인 집안이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게 되었죠. 판소리는 말할 필요도 없고 기악연주자들의 명인들은 다 그런 광대 집안 출신인 것입니다. 이생강 선생이라든가, 서용석 선생, 성우향선생, 성창순 선생, 이일주 선생, 김소희 선생 등 다 그쪽 집안 출신입니다. 1836년에 경기도 광대들이 <경기도 창제도청안>이라는 문서가 있는 데 계원(남자만)은 4만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당시 경기도 인구가 70만명이었는데 조금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수만명이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경기도만 그렇고 전국으로 보면 수십만명이 되었다고 볼수 있죠. 그 광대 집안 사람들이 1894년 갑오경장때 신분해방이 됩니다. 역졸 창우 백정을 면천한다고 갑오 경장때 신분 해방이 되었지만 다시 별도 포고문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1894년 동학난 때로 역졸 창우 백정이 동학군의 주력역할을 했습니다. 전봉준 밑에 3두령 김개주, 손하중, 홍계관이 있고 홍계관의 손자가 전주에서 판소리하는 홍경태씨임. 홍계관, 홍낙관, 홍동관 3형제가 동학군에 들어가서 광대만으로 구성된 1000여명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갑오경장때 신분해방이 되었지만 국가에서 별도로 포고해 그들을 면천 시킨 것이죠. 창우를 기생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문맥에도 안맞고 기생이 없어 진것은 1909년입니다.
옆길로 샜지만 토지를 가질 수 없고 수십만명이나 되는 광대집단이 있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왜 우리나라에만 광대집단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나라가 산대희를 한 것입니다. 산처럼 큰 무대를 만들어 놓고 그 위 아래에서 공연을 한 것이죠.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동해바다에 봉래산, 방장산, 영조산이라는 신선의 산이 있는데 원래 5개 산인데 2개는 물에 떠내려가서 옥황상제가 큰 거북이로 하여금 3개 산을 떠받치게 하여 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나라가 태평하면 삼신을 떠받드는 거북이가 춤을 춘다고 합니다. 신라 시대 진흥왕 때부터 국가적 축제인 팔관회가 시작되었는데 태평하니까 여기서부터 산대희를 한 것입니다. 또 중국사신이 오면 산대희를 하였고 삼신을 떠받드는 거북이를 형상화하여 산처럼 만들게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그 높이가 15미터 되었다고 하고 조선시대에는 25미터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둥하나가 90척이니까 땅에 조금 묻는다고 해도 25미터는 되었습니다. 산대희를 신라시대 진흥왕때 시작해서 고려시대 팔관회 연등회 하고 조선시대에는 불교적 요소가 있어서 안했다고 하나 중국사신이 오게 되면 산대희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후기 1784년까지 했던 것입니다. 산대희를 하면 600명 정도의 광대가 동원이 되었는데 좌우 산대를 만들었습니다. 국가에서는 성을 쌓을 때도 그렇고 산대를 만들 때는 항상 경쟁을 시켰는데 광대 놀음을 할 때도 좌우 산대를 만들고 춘하추동 산을 만들고 수천명의 군인이 동원이 됩니다. 한쪽 300명, 다른 쪽에 300명 총 600명이 되고 중국사신이 참 대단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한다 합니다. 그 산대희 때문에 광대집단이 유지된 것입니다. 600명 정도의 뛰어난 광대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경우 1164년 송나라 효종 2년에 광대집당을 풀어줘 버려 중국은 우리보다 수십배로 크게 하지만 국가에서 하지 않고 민간에서 합니다. 일본의 경우 782년에 해방시키는데 왜냐하면 중국사신이 일본에 간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국사신이 수시로 오고 조선은 농업사회다 보니 광대와 같이 떠돌이 집단을 싫어 합니다. 떠둘이 집단이 있으면 집단자체가 잡혀 가고 그지역 관장도 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민간 연예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조선전기에 사찰에서 나온 사당패들입니다. 그들은 먹고 살 것이 없으니 떠돌아 다니면서 연희를 하는 것이죠. 조선시대 태종이 천여개가 있던 절을 242개만 남기고 없애고 세종 때 36개 본사만 남기고 싹 없앴습니다. 여기서 나온 승려나 여자 노비들이 사당패가 된 것입니다. 이들이 지방이나 시장이나 단속을 피해 십명 내외로 움직였습니다. 이들은 토지를 가질 수 없고 내내 떠돌이 집단이 되는 것이죠. 1920년대 사당패가 없어 지는 데 1909년에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아무나 기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은 기생은 기생의 딸이 기생이 되고 아들은 사령, 급창, 방자 등 하급 관속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사당패여자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고 기생을 하게 되고 사당패들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당을 데리고 연희활동을 하던 것에 위기를 느끼면서 남자아이에게 여자옷을 입혀서 역할을 하던것이 남사당입니다. 흔히 떠돌이 연예집단 하면 남사당패 라고 생각하는데 남사당패가 생긴것은 1900년무렵입니다. 즉 남사당패는 사당패의 연장에서 생긴 것인고 1900년 그무렵에 사당패가 약화되면서 남사당이 생긴 것이죠. 각론하고 조선시대 산대희를 하는데 600명의 광대가 있어야 하는데 민간에서는 동원할 집단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광대 신분 집단을 1894년까지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무렵까지 수십만명이 광대 신분 집단을 가지고 있던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과거제도입니다. 중세시대에 지배층을 뽑는데 시험을쳐서 사람을 뽑는데는 중국, 월남, 우리나라 밖에 없었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어디든 지배층을 시험을 봐서 뽑는데는 없었으며 다 신분 세습이었습니다. 이는 자랑스러운 제도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당나라의 과거제도를 받아 들였습니다. 과거급제를 하면 궁궐에서 은영연을 베풀고 길거리에서 3~5일간 유가를 하고 지방급제자는 고향에 가서 유가를 하고 지방관아에서는 그부모에게도 영친연을 베풀고 이런 제도도 받아 들인 것입니다. 고려사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958년부터 그렇게 해왔던 것이고 의례 과거급제자들의 축하 잔치에는 광대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준높은 공연물이 성립된 것이고 여기에 판소리와 같은 공연을 하면 후하게 보상을하고 상하층이 공감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고급 예술이 된 것입니다.
세번째는 서사무가의 존속입니다. 조선시대는 유교사회입니다. 무속은 고대 신앙이고 고려시대까지는 불교시대라 무속이 괜찮지만 조선시대에는 유교시대라서 무속은 없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고대신앙과 중세의 고등종교 시절임. 유럽에는 기독교, 라틴어, 동아시아에는 중세중기 불교, 후기에는 유교, 공동문자는 한문 이었음. 보편종교, 보편문어의 시대라고 합니다. 윤형상이라는 사람이 제주목사로 갔는데 196개의 무속 신당과 5개의 사찰을 불 태워 버렸습니다. 유학자이니까 조선시대 무속은 없어질만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목사가 신당을 다시 다 짓게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무포세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려말부터 탄압하기 위해서 무당에게 무포세를 받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 오면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사림파들은 없애야 한다고 하고 훈구파는 맞는 말이지만 빈민구제, 국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주장으로 격렬한 논쟁 벌어집니다. 결국 없애지 못하고 1895년까지 시행이 되었습니다. 세금내는 무당이 전국에 2000명이 되는 것이죠. 이들은 세금을 안낼 수는 없고 무당을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세습 무당입니다. 한강 이북은 신이 내린 강신무고 한강이남은 세습 무당입니다. 원시 고대 시대에는 신앙심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뒤로 내려 오면서 신앙심이 없어지니 신들을 위한 것 보다 신도들을 위해 얘기하게 됩니다. 문학적으로 보면 무당들이 부르는 노래에는 세종류가 있습니다. 창부타령은 서정적인 노래고 소노래니 맹인 노래니 하는 것은 연극적인 노래고 긴 내용을 서사적으로 노래하는 것은 서사무가라고 합니다. 당금애기(제석신)노래, 죽은사람을 위한 바리공주 노래, 천연두신을 위해서는 손님군 노래, 무당할머니 위해 계명거리 등 신들의 내력을 노래하는 것, 이 신이 어느나라에서 어떻게 태어나 어떻게 했다. 바리 공주는 어느나라의 오개 대한의 딸인데 일곱공주중에서 약수를 구해서 아버지를 구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 권능이 있다. 재수나 풍요를 바랄 때 당금애기 풀이를 하는 등 이런 서사무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을 위해서 했는데 이제는 관객을 보면서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판소리와 똑 같습니다. 부채 들고 웃기기도 하고 말도 하는 것이죠. 연희창 서사무가입니다. 처음에는 신을 위해서 구송창 서사무가를 하다 조선후기가 되면 관객을 보면서 공연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속이 조선시대 없어질 수 있었는데 무포세 때문에 유지가 되면서 무속도 공연예술처럼 발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서사적인 노래다 손님이 강남에서 천연두 신이니까 손님이 그냥 올 수 있느냐 말을 타고 오지 그러면 방자가 분부듣고 나귀청으로 들어가 나귀 솔질 살살 갖은 안장 짓는다 홍양 작약 산호편 옥양금 청왕금릉 청홍사 고운 굴레 상모물려 덥벅달아 이렇게 부르는데 그 손님 풀이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이 또 제비노정기가 되는 것이죠. 제비가 강남에서 오는 것과 똑 같음. 술을 먹으면 술노래도 부르고 술타령도 부르고 성주대목이다 그러면 집짓는 것이 나오고 이런 것들이 이미 무당들이 부르는 조선후기까지 문학적으로 수백년간 발달이 된 것입니다. 판소리 광대들이 경기이남에는 무당집안의 남자들이 하는 일이고 관아에서 악공을 하거나 산대회에 동원되거나 평소에는 굿판에서 하는 것입니다. 무당이나 서사무가 문화를 같이 공유한 것입니다. 조선후기 공연문화가 성숙할 때 재담소리를 이어서 서사무가는 무당서사시고 판소리는 광대서사시입니다. 처음에는 12마당시절만 해도 팔도 광대가 다 한 것입니다. 무숙이 타령은 서울 경기 광대들이 한것이고, 옹고집 타령은 경상도 광대들이 한 것이고 강릉매화타령 등등 팔도 광대들이 12마당까지 다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전라도 광대들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지요. 경기이북 재인촌은 무속과 관계가 없습니다. 경기이북의 굿에는 피리 대금이 없는 것이 원칙이고 재담소리에 그쳤는데 경기 이남의 세습무 집안의 무부들은 서사무가를 공유했으니 춘향이나 심청이야기처럼 서사적인 것이 많은 것입니다. 음악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서사무가의 사설들을 활용을 해서 판소리를 했던것입니다. 이러한 고대신앙이 오늘날까자 이어지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몽골이나 만주에 무당이라고 있지만 우리와는 다름. 이들은 중세를 겪지 않았지만 우리는 불교 유교시대를 겪으면서도 무속신앙이 거의 온존히 남아 있습니다. 1895년에 무포세는 없어 졌습니다.
그래서 판소리는 다른 나라에 없는 이런 세가지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예술사에서 새로운 예술 장르가 우리나라에서 나왔습니다. 1902년에 협률사 극장을 만들면서 창극이 되었는데 우리 판소리가 살리면서 강화 확대할 수 있는 공연물이 나오고 음악극이 나와야 할 판인데 이것이 나왔다면 판소리는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창극의 시대가 되고 판소리는 없어졌을 것입니다. 판소리 5명창 정정렬,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등 이들이 창극을 시작했습니다. 판소리 음악성을 살리면서도 극장식 공연에 맞게 뭔가를 만들려고 한 것이죠. 일제 시대였지만 1930년대까지는 창작 창극을 해야 된다는 데까지 간 것입니다. 박석기가 만든 화랑창극단, 조선창극단 등 이런 사람들이 창극단을 만들었을 때 다들 창작 창극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어촌야화 등 일제시대에 어떤 시대물을 할 수가 없었고 대개 이를 피하기 위해선 역사물을 하는 것입니다. 어촌 야화는 바닷가의 청춘남녀 사랑 이야기 입니다. 조선일보, 동아 일보에서 밀어 주었던 것인데 판소리는 후원자가 없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서양오페라도 민간오페라가 있지만 국립오페라가 있고 민간오페라도 후원자가 많습니다. 일제시대때 고급 공연물을 이렇게 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발전해오던 창극은 힘들어 지고 해방이후에 다시 한번 해보려다 48년부터 여성 국극으로 몰리고 해서, 57년에는 창극단이 다 없어진 것입니다. 여성국극이 다 말아먹은 것이죠. 이후 62년에 국립 창극단을 만들었는데 군사 정부하에서 시대 정신의 공연물을 어떻게 하겠는가. 오늘도 국립창극단이 청 공연을 하고 있는데 전혀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30년대까지만해도 창작 창극을 했는데 국립 창극단되면서 춘향전 심청전 등 다시 돌아 가는 것이죠. 또 역사물을 계속 하는 것이죠. 시대적인 정신과 연결이 안되면 공연물은 무의미 한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시대정신과 연결이 되어야합니다. 더구나 예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진취적이고 급진적입니까? 시대정신에 맞지도 않고 구태의연한 것만 하면 그 창극은 성공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판소리가 권번을 통해 여성 판소리인들을 만들어내는데 아닌말로 박록주, 김소희, 박초월 선생님들이 술자리에서 부르면 크게 부를수 없고 예쁘게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소리가 늘어지고 곱게 부르게 되는 것이죠. 판소리가 웃기고 광대소리를 내야 하는데 이런 면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902년부터 창극을 근대적 공연물로 하려고 했는데, 일제시대, 해방이후 여성극국, 60년대 군사 정부 시대를 거치면서 창극은 참 불행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공적인 창극을 만들어야 합니다. 판소리는 세계적인 예술사에서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없고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판소리를 잇는 창극은 또 유일한 것이며 다른 비견될 수 없으며 기존에 있는 다른 것들로 대체 될 수 없습니다. 서양 연극 오페라를 하는 사람이 창극을 연출하는 데 안되지 않는가. 그것을 이제 판소리 창극은 판소리 음악을 살리면서도 오늘날의 극장무대를 맞게 해야 하는 것이고 그걸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악적으로 판소리 음악이 있고 창극음악이 있는데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는데도 오페라 극장에 가면 표가 없어서 못 삽니다. 판소리 공연할 때 내용을 몰라서 자막도 만들고 합니다. 오페라는 벨칸토 창법 공명을 이용해서 내는 목인데 판소리에서는 노랑목이라고 안좋은 것으로 치죠. 새로운 공연물을 만들때 어디서 배워 올 것도 아니고 더 근대식 공연문화에 맞게 만들어야 합니다. 판소리에서 취할 것은 판소리의 강렬한 가창 (발성)을 취하고 나머지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 요즘의 내용으로 대본을 쓰고 판소리를 이해한 작곡가가 작곡을 하는 식으로 해야 새로운 창극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근대 상황에와서는 그러한 성공적인 창극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공적인 창극이 만들어 지면 판소리는 없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판소리가 없어지지 않지 않는가. 왜? 창극이 그것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니까. 그것이 우리가 판소리를 하는 이유입니다. 서양의 오페라 가수처럼 성공적인 음악극으로 하면 판소리가 아니라 창극을 보러 가고 해야 하는데 창극이 성공을 못하지 않는가. 서양의 오페라 가수들은 아리아를 부르지 않는가. 지금까지 1902년부터 우리 창극이 아리아 처럼 불려진 노래가 어디 있는가? 하나도 없다. 그러면 그것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판소리 내용이 다 조선시대 내용인데 이면에 맞게 불러야 한다는데 오늘은 궁극적으로 조선시대와는 다릅니다. 세가지 다른 조건 때문에 고급 성악곡을 만들었는데 근대에 와서 창극 형태로 가야 되고 이게 안되서 그렇다. 한계가 있다는 데 학자가 보기에는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판소리는 조선시대 예술이기 때문에 이것을 계속 하라고 하면 안되죠. 결국에는 판소리가 성공적인 창극이 되고 판소리는 문화재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회원들이 알아야 할 소리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 소리의 미래 발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우연하게 마련된 자리에서 즉석 강의를 해주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 손태도 교수님에게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