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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개혁주의 전도론
복음전도의 기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훨씬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멀게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한데서 찾을 수 있으며(갈3:8),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양의 가죽옷을 입히신데 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창3:21). 성경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졌고, 성경을 모든 것의 원천으로 삼는 개혁주의가 이런 복음전도의 역사성과 중요성을 간과할 리가 없습니다.
1. 개혁주의는 전도에 약한가?
1) 교회 안팎의 변증에 힘쓴 개혁주의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개혁주의는 이단이자 비성경적인 신학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데 관심이 지대했기에, 자연히 신학이 교회 내를 향하는 내향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처한 상황이 그들의 신학과 변증이 ‘사명’보다는 교회의 ‘본질’에 더 치중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관은 선교적 교회관보다는 전투적 교회관이 되었고, 그렇게 내전에 에너지를 쏟다 보니 자연히 교회 밖을 향한 변증(전도)에는 소극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분석에 대해선 이견이 없어 보이며 개혁교회를 향한 이런 평가는 어느 정도 유효합니다. 이는 오늘날도 종교개혁시대 못지 않게 종교다원주의, 자유주의, 신비주의 등으로부터 다양한 신학적 도전을 받고 있으며 그 도전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기 위한 내적 변증에 연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개혁교회가 결코 전도사명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증거들은 곳곳에 드러납니다. 칼빈은 교회내의 변증 곧 로마교회와의 신학적 싸움만 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변증인 전도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다음의 글은 칼빈이 신학자를 넘어 한 사람의 전도자였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칼빈은 비록 신학적 논쟁에서는 유능한 투사였지마는 학자들과 소란스런 논쟁을 하는 것 이상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 대학의 강당이 신학적인 논쟁으로 시끄러울 동안, 칼빈은 집집을 방문하며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칼빈은 목사가 되기 전부터 제네바에서 복음 전도를 했고, 소천하기 며칠 전까지 제네바 시가지에서 노방전도를 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프라이 C. 조지는 그의 저술 ‘신학자 또는 전도자로써의 칼빈’에서 칼빈은 신학자인 동시에 전도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카데믹하고 형이상학적인 신학자로 불려졌던 조나단 에드워즈 역시 1750-1775년까지 직접 스톡브리지에서 인디안 선교를 했습니다. 개인 전도자로 익히 알려진 존 번연, 리차드 백스터 같은 청교도들은 복음 전도가 교회 밖의 잃은 영혼들을 찾는 일일뿐더러, 교회 안(영국국교회)을 향한 가장 효율적인 변증임을 알았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낳은 존 웨슬리가 전도자의 대명사처럼 되고 있지만, 사실 영국에서 존 웨슬리보다 더 전도에 돌풍을 일으켰던 사람은 조지 휫필드였습니다. 그는 존 웨슬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심지어 그는 존 웨슬리를 전도에 끌어들이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혁주의가 전도에 약하다고 평하는 것은 오해요 편견입니다.
존 웨슬리의 이단 관용정신으로 대변되는 알미니안의 무(無)신학성이 교회 밖의 변증(전도)에만 올인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개혁주의는 교회 안팎의 변증에 힘을 기울임으로 집중력이 덜 해 보엿을 뿐이지 전도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그레샴 메이첸이 “전도는 항상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한 변증법적 투쟁과 더불어 수행돼야 한다”고 말한 것에서 개혁주의가 교회 안팎의 균형 있는 변증에 힘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화와 전도
또 혹자는 퓨리탄(결백주의자)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유추하여 성결에 대한 청교도들의 집착이 그들을 자아성찰적인 사람들로 만들어 교회 밖의 전도에 무관심하게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아성찰에 에너지를 쏟다보니 전도의 여력이 없게 됐고, 자기성찰이 갖다 준 ‘나 같이 부족한 자가?’라는 자괴감이 전도의 용기를 막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펼칩니다.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이나 적어도 청교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청교도들의 성결에의 집착은 그들을 내향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외향적인 전도의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청교도들이 성결 추구가 분리주의적인 세상 철학, 종교로부터가 아닌 종말론적인 영성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이 종말론적인 영성의 뿌리는 청교도의 언약사상입니다). 앞서 지적됐듯이 영국에 내려질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청교도들로 하여금 신대륙을 향하게 했고 나아가 성결의식과 전도를 고무시켰습니다. “교회의 삶은 종말론적 희망을 지향한다”라는 칼빈의 종말론적 교회관에도 교회가 전도 지향적이어야 할 당위성이 함의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종말과 성결’(롬13;11-14, 눅21:34-36, 딛2:12-13), ‘종말과 전도’를 연계 시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딤후4:1-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마3:2, 4:17)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전도는 종말 의식, 성결의식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종말의식이 전도와 성결에의 갈망을 낳고 전도가 성결과 종말의식을 고취시킵니다. 전도할 때 사람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박해가 전도자에게 종말론적인 나그네 의식을 증대시키고 자기 부인의 성결의식을 배양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도, 성결, 종말의식은 연동되어 서로 밀고 끌어주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므로 성결에의 집착이 전도 열의를 약화시켰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청교도주의가 ‘하나님, 경건, 교회개혁, 복음 전도를 위한 운동’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성결)과 전도가 함께 엮여진 것은 둘의 연관성 때문입니다. 최근에 발간된 ‘전도와 성화’(clc)라는 책에서도 제목이 시사 하듯이 저자는 전도를 경건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했습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4:16)는 말씀은 전도가 타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전도자 자신의 구원과 성화를 도모시켜주는 방편임을 말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의 카이퍼 교수가 전도를 자기 영혼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 것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 주권적 전도 태도
개혁주의 복음 전도를 하나님이 구원택정한 사람을 부르시는 방편으로(살후2:14) 이해합니다. 곧 하나님이 택자를 구원의 부르심으로 부르실 때 복음을 통해 부르신다는 것으로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어 필수 요소가 됩니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하나님이 구원의 주관자이기에 전도 없이도 하나님이 하시면 구원할 수 있다는 칼빈주의 아류인 ‘과도한 칼빈주의’(하이퍼 칼빈주의)의 주장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으로 택자를 구원하시지만 반드시 복음의 부르심을 통해서 하신다(고전2:12)고 믿습니다. 동시에 하나님 주권적인 전도 태도를 가진 개혁주의자들은 자신의 전도가 하나님이 택자를 구원에 부르시는 도구이길 자처하며 자기 힘으로 사람을 구원하겠다는 분수 넘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핑계로 전도의 의무를 저버리지도 않으며 동시에 구원을 자기 권한에 두려는 오만한 태도도 갖지 않습니다. 따라서 개혁주의 전도관은 조엘 비키가 그의 저서 ‘청교도 전도’에서 말했듯이 기도중심의 성령의존적인 전도태도를 견지합니다. 즉 자신의 전도를 받는 자가 구원 택정된 자라면 성령의 역사로 반드시 믿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전도하며 동시에 성령께서 그의 전도를 효력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전도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택자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밀 섭리‘(은밀 의지)를 믿기에 당장 나타나는 전도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성령에 설득당하지 않은 채 나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을 알기에 외면적 복음 수용자들을 다 전도의 열매로 간주하지 않으며 동시에 당장 믿음으로 방응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해서도 아직 구원의 때가 이르지 못했을 수 있음을 알고 인내로 기다립니다. 이렇듯 당장 나타나는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하나님 주권적인 전도 태도는 무심한 듯 무성의한 듯 보이나 진리의 권고를 따른 것이기에 내적 열기는 누구 못 지 않게 뜨겁습니다.
2. 전도의 왜곡
1) 행실로 대치되는 전도
앞서 청교도 정신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왜곡된 자기 성찰에서 나온 ‘나 같이 불완전한 자가?’라는 자괴감은 교인들로 하여금 전도에 과감하게 투신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감 결여가 행실로 전도하려는 소위 간접전도의 유혹을 받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완전함을 전도자의 자격으로 삼는 곳은 없습니다. 이는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완전해진 후에 전도하려고 한다면 전도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칼빈을 위시하여 개혁자들은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여전히 악에 쌓여 있음을 일치하게 동의합니다. 성도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는 말이나 칼빈의 성도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연약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다음의 지적도 같은 시각입니다.
부패한 인간의 심령이 비밀스러운 역사로 인해 회개를 통해 새로운 마음을 회복하고 성화의 과정을 거친다 해도 완벽한 생활은 불가능하다. 죄가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연약한 존재로서 죄가 마음에 남아있다.
이를 전도와 결부지운다면 전도자는 약점과 허물을 노출 시킬 수 있는 연약한 인간이며 그러한 전도자의 약점 때문에 결코 복음 전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자가 가진 복음을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고 한 것은(고후4:7) 하나님께서는 질그릇같이 연약한 자들을 복음 전도자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능력이 심히 큼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질그릇 같이 약점 있는 전도자를 통해 택자를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능력은 전도자의 약점까지도 뛰어넘을 수 잇을 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접 전도인 “행실전도”는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이는 성도의 착한 행실이 구원 없는 믿음을 생기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착한 행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마5:16) 결코 그것이 사람에게 구원 얻는 믿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착한 행실이라는 ‘일반계시’가 복음이라는 ‘특별계시’를 대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
다시 말하면 이 말의 요지는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이 불신자들에게 구원 얻는 믿음을 생기게 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일반 계시적 차원에서 불신자로 하여금 기독교에 마음을 열어 믿음을 가질 준비를 시켜준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청교도들의 ‘준비신학’ 개념과 유사합니다.
반면에 로마 천주교는 우리와는 달린 행실전도를 장려하는데 이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동등시하는 그들의 신학에서 연유합니다. 즉 모든 종교적 가르침과 인간선행(일반계시)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의 영향 때문입니다. 얼마 전 교황청에서 실제로 로마 천주교인들에게 타종교인의 개종을 강요하거나 직접적은 포교를 하지 말라는 교시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이런 교리적 지침을 가진 로마천주교인들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직접 전도보다는 불신자들의 환호를 받는 선행, 구제, 의료, 교육, 자선사업 같은 간접전도에 올인 하게 될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로마천주교의 신학적 배경을 모르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선행, 봉사, 같은 간접전도만을 하는 로마천주교인들이 거부감을 주는 직접 전도를 하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훌륭하고 센스 있다고 칭송하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2) 세계관신학
일부 개혁교회들이 전도에 적극적이지 못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신칼빈주의의 ‘세계관 신학’을 섣부르게 구현하려다가 지상명령에 대한 초점을 분산시킨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 르판시스 쉐퍼에 주도된 소위 ‘세계관 신학’(혹은 문화주권신학)이 추구하는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로 왕이 되게 하자는 이상은 칼빈주의에 뿌리를 둔 진리 운동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구현하는데 용의주도함 없이 과학, 정치,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문화 콘덴츠에 무턱대고 대시하다가 세속화와 탈진으로 교회의 지상 목표인 전도에 대한 초점을 흐리게 했습니다.
때론 ‘문화주권실현’이라는 그들의 지상 ‘명제’에 너무 천착하다가 전도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배제시켜 버림으로 기독교신학을 일종의 문화신학으로 전락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비판을 가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 대해 눈을 감자는 뜻이 아닙니다. 문화주권 성취는 교회의 사명이고 개혁주의자, 청교도의 중요관심사였습니다. 다만 교회의 제한된 역량 속에서 다양한 문화콘덴츠들에 관여하다가 탈진과 세속화의 우려와 함께 지상명령을 놓칠까 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교회가 문화 사명을 행할 때는 언제나 ‘땅을 정복하라’(창1:29)가 문화주권 명령이라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비가시적인 하나님나라 건설의 요청입니다. 이미 다윗 왕국의 실ㄹ패를 통해 드러나듯이 하나님은 이 세상에 그의 주권을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무너진 다윗 왕국을 재건한다는 것은(단11:3, 행15:16) 세상에 정치 문화적 왕권을 세우는 시오니즘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문화주권실현’과 ‘시오니즘‘을 동일시 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우려했던 나라는 이신칭의 받은 사람들로 세워진 의의 마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힘써 구축할 나라는 이 나라이며 문화주권 실현은 항상 거기에 복속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문화주권 사역에 연루되면서도 세속화에 붙들려 지상명령을 놓치지 않으려면 명실할 것이 있는데 곧 세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게 해주는 퇴각기도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도는 성도가 세상에 연루되면서도 세상에 매몰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파티션 역할을 해줍니다. 이 점에서 역시 예수님이 귀감이 됩니다. 그는 전도하며 병자를 고치던 중에도 기도의 필요를 느낄 때는 과감히 사역을 물리치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습니다(눅5:16).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영적 탈진과 세속화에 붙들릴 위험이 있다 싶으면 과감히 퇴각하여 기도에 몰입하셨습니다.
3. 전전무능 교리와 전도
1) 전적 무능과 전도
개혁교회가 전도에 힘쓰는 것은 인간의 전적무능 교리와도 연계돼 있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3;11),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 한다”는 말씀에 근거해 인간의 전적무능을 믿는 개혁교회는 죄인 스스로는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착안할 때 인간 스스로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여지가 남아있다고 보는 알미니안보다 개혁주의가 더 전도에 열렬해야 할 당위성을 봅니다.
성도가 전도를 안 하면 해를 받고(고전9:16), 그에게서 피 값을 찾는다(겔3:18)는 말씀도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는 전적 무능한 죄인을 향한 성도의 전도책임에 대한 추궁입니다. 만일 알미니안의 주장대로 인간 스스로에게 하나님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면, 불신의 책임이 그들에게도 일정 부분 있기에 성도에게 그렇게 엄중한 책임을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전적무능 교리는 전도의 내용과 방법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을 부정하는 자연신학이나 계몽주의신학은 당연히 율법적 의무 곧 선한 삶이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됩니다. 반면에 인간의 전적무능 교리에 기반 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요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로 믿는 개혁교회는 오직 십자가 대속과 믿음만을 전파합니다.
2) 전적무능과 성령 의존적 전도
인간의 전적무능 교리에 근거하여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개혁주의자는 성령 의존적 전도방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이 성령 의존적 전도방식은 말 그대로 성령을 전도의 주관자로 삼고 전도자 자신은 하나의 도구이길 자임합니다. 즉 전도에서 자신의 역할을 입에 복음을 올리는 것으로 한정지우며 성령께서 자신의 입에 올려진 복음을 효력 있게 하여 죄인을 구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나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마3:3)라고 말한 것의 의미를 터득한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을 “성령의 검”(엡6:17)이라 했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을 검으로 사용하는 분이 성령이시라는 말입니다. 전도자가 말씀을 증거 하면 성령께서 그 증거 된 말씀을 구원의 무기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강림하시기까지 전도에 나서지 말라고 하신 것도 전도의 주관자 성령이 그들의 말을 증거 해주지 않으면 효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 감림 때 제자들의 입에 방언(a tongue)에 임한 것은 성령이 전도자의 입에 권세를 입혀 전도의 말을 효력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유명한 개혁주의 복음전도자 폴 워셔는 그의 ‘복음’이라는 저서에서 초이성적인 복음은 오직 성령의 개입으로만 효력이 발휘된다고 지적합니다.
유대인에게 십자가에서 죽은 나사렛 사람을 메시야라고 선포하는 복음은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헬라인에게 유대의 메시야가 육신을 입고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복음은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었다. 바울은 성령께서 개입하시어 청중의 생각과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시면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할 때마다 멸시와 조롱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전도가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1:17, 2:4) 했다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전도란 복음의 저자이며 전도의 주권자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입을 성령께 빌려드리는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물론 성령이 전도의 주관자라고 해서 인간의 노력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다방면의 노력들, 예컨대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방도와 효과적인 복음 전달 방법들을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그런 노력들만을 만능으로 여기지 말고 성령을 전적 의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4. 전도의 당위성에 대한 근거들 생략
5. 전도의 내용
전도의 목적은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한 것이고 그 방법은 복음을 들려주는 것이며 복음의 내용은 구속의 말씀입니다(벧전1:25). 주지하듯이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요1:3), 통치하시고(히1:3), 마귀를 멸하시고(계12;11), 병자를 치유하셨듯이(마8:16)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도 말씀으로 하십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 곧 복음이 죽은 영혼을 살리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이를 실물로 보여준 것이 무덤에 장사된 나사로의 부활 사건입니다(요11:43-44). 죽어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사로의 시체에 “나사로야 나오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졌을 때 시체가 살아났습니다. 에스겔 해골 떼가 선지자의 말을 듣고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룬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겔37:7-17). 아들의 음성은 죽은 시체를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럼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아들의 말, 복음은 어떤 내용입니까?
예수는 내 죄의 대속자(속전)이다(마20:28).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다(마16:16).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속했다(엡1:7).
같은 구속의 말씀들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 그리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이적, 가르침, 전도가 구속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해섭니다. 이 구속의 복음이 들려질 때 성령이 역사하여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오늘 종교다원주의자들과 뉴에이지언(New Ageans)들은 그들의 종교, 자연, 예술적 체험들을 두고 영혼의 각성, 거듭남의 체험 운운하는데 이는 착각일 뿐 그들이 터치 받은 것은 겨우 마음의 심연(深淵)일뿐입니다. 그런 것으로는 죽은 영혼을 각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혼의 텃치를 받지 못한 자들이 그들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상당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배에서도 마음의 심연과 보편적 종교 감성을 터치 받는 것으로 그치고 영혼이 살아나는 거듭남의 체험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나름대로 종교체험도 있고 영적수준도 있다고 자부합니다. 여기에는 복음을 바로 전해주지 못한 교회의 책임이 큽니다. 셀제로 오늘 많은 교회들이 복음으로 사람의 ‘영혼’을 터치하기 보다는 일반의 종교 감성과 마음의 심연을 건드려주는 것으로 그칩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오늘 교회에 와서 “예수는 내 죄의 대속자(속전)이다”(마20:28)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마16;16)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속했다”(엡1:7)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가련한 영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수많은 설교를 들었어도 제대로 된 복음을 듣지 못했다면 영혼이 살아나는 중생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죽은 영혼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들을 때 중생합니다(벧전13:23). 스펄전이 요3:3-15을 설교하면서 “성경이 거듭남(요3:3-13)과 예수님의 높이 들리심(요3:14-15)을 연결 지은 것은 거듭난 영생 얻는 것이 십자가 대속을 믿는 것과 연결됐음을 말하고자 했다고”고 해석한 것은 적절합니다.
6. 예정론과 전도
전도는 모든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택자 만을 위해 제한적으로 죽으셨듯이(Limited Atonement) 전도의 대상 역시 그리스도께서 위해서 죽으신 택자로 제한합니다. 물론 우리가 실제로 전도할 때는 택자가 누군지 알지 못하기에 아무나 가리지 않고 전도합니다만 언제나 마음속에 ‘오늘도 택자들을 만나게 하소서’라는 염원을 담고 전도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구원 택정을 받은 자를 복음으로 부르신다는 것과(살후2:14) 함께,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과(살후3;2)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만이 믿을 수 있다(행13:48)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택정을 받았지만 아직 때가 안 된 자들은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도 알기에 반대자들을 만날 때도 작심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전도합니다. 일견 구원이 인간의 선택과 노력에 달려있다는 보편 속죄론(Universal Atonement)을 믿는 알미니안들이 더 전도에 열심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지 모르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달려 있음을 믿는 개혁주의자들이 오히려 불퇴전의 전도 열정을 갖습니다. 이는 전자가 불확실한 가능성을 향해 무한도전을 펼치는 것이라면 후자는 확실히 준비된 영혼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칼빈주의자 조지 휫필드가 알미니안 존 웨슬리보다 더 탁월한 개인전도자였다는 것은 이미 티모시 죠지의 말을 통해 언급됐습니다.
휫필드의 전기작가 아놀드 델리모어 역시 같은 언명을 합니다.
어제까지 복음을 전도하는 일에서 웨슬리의 위치는 종속적이었다. 휫필드에게는 그를 따르는 엄청난 수의 회중들이 있었고 그는 야외 설교를 최초로 시작해 놓은 후 웨슬리를 그 일로 끌어들였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이경섭, CLC, 2016.08.16. p. 270-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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