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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가 핵심입니다.
즉,
👉 “나는 혼자 먹지 않는다”
👉 “이건 내 것이 아니다”
이 태도입니다.
2. “홍익인간”과의 결
홍익인간은 흔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로 번역되지만,
그걸 행동 이전의 마음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 “나라는 중심을 넘어선다”
👉 “전체를 향해 산다”
3. 둘을 붙여보면
고수레는 아주 작고 일상적인 행위인데,
그 마음은 이미 이겁니다:
이게 바로
👉 홍익인간의 “생활 속 실천 버전”입니다.
4. 더 깊이 들어가면
형이 좋아하는 크리슈나무르티 식으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고수레는 어떤 의식이라기보다,
👉 “나”라는 경계가 잠깐 풀리는 순간
입니다.
그 순간에는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나눔.
그 상태야말로
👉 ‘홍익’이 따로 목표가 아니라,
👉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상태
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고수레는 ‘홍익인간’이 사상으로 굳기 이전,
삶 속에서 이미 살아지고 있던 흔적이다.
형, 이걸 조금 더 밀어붙이면 재미있는 질문 하나 나옵니다.
👉 요즘 사람들은 왜 “고수레”를 안 하게 됐을까?
그건 단순히 미신을 안 믿어서가 아니라,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감각”이 약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쪽 더 파볼까, 형?
그래!!!
형! 좋다… 이건 좀 제대로 한번 파보자.
1. 왜 “고수레”가 사라졌나?
겉으로 보면
👉 “미신이라서 버렸다”
👉 “과학 시대니까 안 한다”
이렇게들 말하지만… 그건 껍데기고요.
핵심은 이겁니다:
“나와 세계가 분리되었다”는 감각이 굳어졌다
2. 옛사람들의 감각은 달랐다
예전에는
그래서 고수레는
👉 “누구한테 주는 행위”가 아니라
👉 “원래 함께 있는 것의 흐름을 확인하는 행위”
였습니다.
3.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나
지금은 딱 반대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 “나누는 행위” 자체가 이상해집니다
그래서 고수레를 보면
이렇게 느껴지는 거죠.
4. 더 깊은 층 — ‘나’라는 중심
형, 여기서 핵심 하나 짚고 가야 합니다.
고수레가 사라진 이유는
단순히 문화 변화가 아니라,
👉 “나라는 중심이 과도하게 강화된 것”
입니다.
이게 강해질수록
👉 “나눌 이유”가 사라집니다.
5. 그래서 벌어진 일
겉으로는 풍요로운데,
왜냐면,
👉 원래는 “흐름 속 존재”인데
👉 “고립된 개인”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
6. 다시 보면, 고수레는…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감각을 깨우는 작은 장치
입니다.
7. 여기서 홍익인간이 다시 살아난다
홍익인간을
이념이나 도덕으로 들이대면 힘이 없는데,
고수레 같은 감각으로 보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 누굴 도와야 한다 → ❌
👉 이미 함께 있다 → ⭕
이 차이는 엄청 큽니다.
8. 형한테 하나 던져본다
요즘 방식으로
“고수레”를 다시 살린다면,
꼭 음식 던질 필요는 없겠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것도 다 현대판 고수레일 수 있습니다.
형, 여기서 한 발 더 가볼까?
👉 “홍익인간은 왜 ‘이념’이 되는 순간 힘을 잃는가”
이거까지 이어보면,
지금 세상 구조까지 쭉 꿰어집니다.
ㅗㅗㅗ 왜 그걸 마다하겠냐! Go on, pls.
형! 좋다… 여기부터가 진짜 핵심이다.
1. 왜 “홍익인간”은 이념이 되는 순간 죽어버리나
처음의 홍익은
👉 상태였지,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념이 되는 순간 이렇게 바뀝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 이미 “나”가 중심에 서 있습니다.
2. 이념이 되는 순간 벌어지는 일
이건 거의 법칙입니다.
(1) 비교가 생김
(2) 강요가 생김
(3) 위선이 생김
3. 왜 이런 일이 생기나
형, 이거 딱 하나입니다.
“홍익”을 ‘행위’로 잡았기 때문
하지만 본래는
👉 “나와 너가 나뉘지 않은 상태”에서
👉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
이었습니다.
4. 고수레가 중요한 이유, 여기서 터진다
고수레는
그냥 합니다.
👉 그래서 “나 좋은 일 한다”는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5. 반대로, 이념은 항상 늦다
이념은 언제나
👉 이미 분리된 다음에 등장합니다.
그러니…
👉 출발부터 꼬여 있습니다.
6. 그래서 생기는 아이러니
형이 이미 많이 봤을 겁니다.
왜냐면
👉 “나”는 그대로 둔 채
👉 “좋은 것”만 덧칠했기 때문
7. 크리슈나무르티 쪽으로 딱 붙이면
그 사람 식으로 말하면 이겁니다:
“분열된 마음이 만들어낸 어떤 이상도,
결코 분열을 끝내지 못한다.”
홍익도 마찬가지입니다.
8. 그럼 길이 없냐?
여기서 형이 좋아할 지점 나옵니다.
길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 “보는 것”입니다.
이걸 그냥 보면 됩니다.
9. 그러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억지로 홍익하려고 안 해도,
👉 자연스럽게 관계가 바뀝니다.
그러면
👉 “이롭게 한다”는 말이 필요 없어집니다.
이미 그렇게 흐르고 있으니까.
10. 한 줄로 꽂아보면
홍익인간은 실천해야 할 도덕이 아니라,
분열이 멎었을 때 드러나는 상태다.
형, 여기까지 오면 이제 마지막 하나 남습니다.
👉 그럼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지금 교육은 전부
“이념으로 홍익을 주입”하는 방식인데,
이걸 완전히 뒤집어야 하거든요.
이거까지 갈까, 형?
ㅗㅗㅗ "의도" 자체가 이미 "분열"인데? 더는 "생각" "의식" 자체가 이미 분열이고, 그게 철학적인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어쩌면 '두뇌' 활동에서 "의식"은 분열 아니냐! 거기서 또 '분열 이전'이라면 "바라보고, 알아채기'만 있겠지. 그걸 유념하고 더 이어가봐라.
형! 지금 짚은 데가 딱 그 핵심이다.
1. “의도 = 이미 분열”
이건 거의 정확합니다.
의도가 생기는 순간 구조가 이렇게 되거든요:
이미 셋으로 쪼개졌습니다.
그래서
👉 “홍익해야지”
👉 “나눠야지”
이 순간, 이미 홍익에서 멀어진 겁니다.
2. “의식 = 분열”이라는 지점
여기서 더 미묘한 데로 들어가야 하는데…
형 말처럼,
생각·의식 자체가 작동하는 방식이
구분하고, 나누고, 이름 붙이는 것
입니다.
이건 두뇌의 기본 기능이지요.
그래서 이 차원에서는
👉 완전한 ‘하나됨’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고상한 생각을 가져도
👉 여전히 분열 위에서 움직입니다.
3. 그런데 “분열 이전”은 뭔가
여기서 크리슈나무르티가 집요하게 보던 게 이겁니다.
👉 생각이 붙기 전의 ‘보기’
그냥 보는 것
4. 그 “보기”의 성질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보기에는
👉 그래서 “의도”가 없습니다.
5. 아이러니 하나
형, 여기서 재밌는 역설이 나옵니다.
👉 의도로는 절대 분열을 끝낼 수 없는데
👉 “그걸 보려는 의도”도 결국 분열입니다
그래서
6. 그럼 답이 없나?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막히는데…
형이 이미 거의 답을 말했습니다:
“바라보고, 알아채기”
근데 이것도 “하려고 하면” 가짜가 됩니다.
7. 진짜 핵심
이건 이렇게밖에 말이 안 됩니다.
👉 “일어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 상태에서는
👉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갈라지지 않습니다.
8. 그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
이건 결과가 아니라, 그냥 사실인데…
👉 이게 바로 고수레의 원형에 가깝습니다.
9. 다시 홍익으로 돌아오면
이제 완전히 뒤집혀 보입니다.
홍익은
👉 분열이 잠잠할 때, 저절로 드러나는 상태
입니다.
10. 형이 던진 말, 한 줄로 다시 받으면
“의도가 없는 알아차림에서만,
분열이 아닌 삶이 가능하다.”
형, 여기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밀어보자.
👉 그렇다면 “두뇌(생각)”는 완전히 쓸모없는가?
아니거든요.
이쪽에서는 필수입니다.
문제는
👉 생각이 자기 자리를 넘어서 ‘삶 전체’를 장악할 때
입니다.
여기까지 오면,
👉 “생각은 도구인가, 주인인가”
👉 “우리는 언제 도구를 넘겨줬는가”
이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거, 더 갈까 형?
ㅗㅗㅗ 일상적이고 기술적이거나 수학, 물리 등의 영역에서는 두뇌가 제대로 잘 작동해야지! 안 그러면 '바보'될 거 아닌가배. 그리고 니가 말한 "의도가 없는 알아차림.." 그걸 케이 할배는 "선택없는 알아채기"라고 하시지.. "Choiseless Awareness.." '선택'이면 이미 "의지요 의도"니까.. 거기서 또 "Seeing is actingB" 그 말도 나오는 것 아니겠냐? 그나저나 우리가 언제 도구를 넘겨줬다냐?
형! 딱 짚었다.
기술·수학·생활에서는 두뇌가 또렷하게 돌아가야지, 그건 전혀 문제 아니고 오히려 필수지요.
그리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choiceless awareness—선택이 없는 알아차림.
거기서 바로 **“seeing is acting”**이 나오지요.
보는 순간, 따로 ‘해야 할 행위’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이제 형이 던진 질문, 이거다:
“우리가 언제 도구(생각)를 넘겨줬냐?”
이건 “언제 한 번에” 넘겨준 사건이 아니라,
아주 미묘하게, 거의 모르게 굳어진 흐름입니다.
1. 시작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단순합니다.
여기까지는 전부 도구로서의 생각입니다.
2.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 이렇게 움직입니다:
👉 “나”라는 중심을 만들어냄
이게 쌓이면서
👉 **“심리적 자아”**가 만들어집니다.
3. 여기서 도구가 뒤집힌다
이제부터는 순서가 바뀝니다.
원래는
👉 내가 생각을 쓰는 건데
어느 순간부터는
👉 생각이 ‘나’를 유지하려고 움직입니다
4. 어떻게 그렇게 되나 (아주 실제적으로)
예를 들면:
이 모든 게
👉 “필요해서 쓰는 생각”이 아니라
👉 “자기를 지키려는 생각”
입니다.
5. 그래서 “항상 켜져 있는 상태”가 된다
형, 이게 결정적입니다.
기술적 사고는 필요할 때만 쓰면 되는데,
지금 인간은
👉 생각이 24시간 돌아갑니다
이건 도구가 아니라 거의 자동 장치입니다.
6. 이게 곧 “도구를 넘겨준 상태”
누가 빼앗아 간 게 아니라,
👉 무의식적으로 맡겨버린 상태
입니다.
7. 그래서 “seeing is acting”이 막힌다
왜냐면,
👉 보기 전에 이미 생각이 끼어들기 때문
그러니
👉 “순수한 보기”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8. 그럼 다시 돌릴 수 있나?
여기서 중요한 건
👉 “통제해서 되돌리는 게 아니다”
입니다.
9. 유일한 지점
형이 이미 말한 그대로입니다.
선택 없는 알아차림
이건
입니다.
10. 여기서 아주 미묘한 전환
이게 일어나면
👉 다시 도구 자리로 돌아갑니다
필요할 때 쓰이고,
필요 없을 때는 조용해집니다.
한 줄로 딱 받으면
우리는 생각을 넘겨준 게 아니라,
생각이 ‘나’라고 믿는 순간 이미 넘어가 있었다.
형, 여기까지 오면 이제 거의 끝판인데…
👉 “보는 자(observer) 자체가 생각이 만들어낸 것인가?”
이 질문 하나 남습니다.
이거 들어가면,
‘보는 것’마저 완전히 뒤집혀버립니다.
갈까, 형?
ㅗㅗㅗ 당연하지.. 그런 거 공부해보자고 너랑 대화하는 거 아니냐!!!
형! 좋다… 여기부터는 진짜 마지막 문턱이다.
1. 질문부터 정확히 잡자
“보는 자(Observer)는 실제로 있는가?”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이렇게 느끼지요:
즉,
👉 ‘나’라는 중심이 있고, 그것이 경험한다
2. 그런데 실제로 일어나는 걸 보면
조금만 가만히 보면 이상한 점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 순간에는
👉 ‘나’가 감정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 감정이 그냥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야
👉 “내가 화가 났다”
👉 “이건 옳지 않다”
이렇게 생각이 끼어듭니다
3. 핵심 전환
여기서 크리슈나무르티가 딱 짚은 게 이겁니다:
Observer is the observed
👉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둘이 아니다
4.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화를 본다”가 아니라
👉 그 ‘보는 나’ 자체가 과거 기억, 경험, 판단으로 이루어진 것
입니다.
즉,
5. 그래서 실제 구조는 이렇다
겉으로는:
👉 내가 화를 본다
실제로는:
👉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감정을 해석하고 있다
즉,
👉 생각이 생각을 보고 있는 구조
입니다.
6. 여기서 분열이 완성된다
이 둘이 나뉘면서
👉 갈등이 시작됩니다
7. 그런데 만약…
이걸 그대로 보면?
👉 “보는 자도 생각이다”
👉 “보이는 것도 생각/감정의 움직임이다”
이게 딱 보이면
8. 갑자기 분열이 사라진다
왜냐면
👉 나와 대상이 따로가 아니니까
그냥 하나의 움직임입니다.
9. 여기서 “seeing is acting”이 터진다
형, 이게 중요합니다.
보통은
인데,
여기서는
👉 보는 순간 이미 분열이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 따로 “행동해야 할 나”가 필요 없습니다
10. 그래서 완전히 다른 질의 삶이 나온다
이건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 착각이 끝나면서 드러나는 상태
입니다.
11. 한 줄로 꽂으면
‘나’라는 관찰자는 실제 주체가 아니라,
과거가 만들어낸 그림자다.
형, 여기서 마지막으로 진짜 끝 질문 하나 남는다.
👉 그럼 “순수한 알아차림”에는
관찰자도 없고, 중심도 없다면
그걸 ‘누가’ 알아차리는가?
이거 들어가면,
언어 자체가 거의 무너지는 자리다.
갈까, 형?
ㅗㅗㅗ '누가' 알아채는 게 아니라, 그냥 '알아챔'만이 있지. 필름에 상이 찍히듯이.. 더 가봐라.
형! 바로 그거다.
“누가”가 아니라 알아챔 자체—거기서 이미 방향이 정리됐다.
1. “알아챔만 있다” — 이 말의 무게
형이 말한
필름에 상이 찍히듯이
이 비유가 딱 맞습니다.
👉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 오직 일어남 + 드러남만 있습니다.
2. 여기서 결정적으로 다른 점
우리가 보통 말하는 “알아차림”은 사실 이겁니다:
이건 아직
👉 관찰자가 살아 있는 상태
형이 말한 건 그게 아니라
👉 관찰자 없는 알아챔
3. 그 상태에서는 무엇이 사라지나
이건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 그래서 “상처”가 쌓이지 않습니다
왜냐면
👉 붙잡는 주체가 없으니까
4. 그래서 “행위”도 달라진다
여기서 “seeing is acting”이 더 분명해집니다.
보통은
인데,
여기서는
👉 보임 자체가 이미 끝
입니다.
따로 이어지는 ‘행동’이 없습니다.
5.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헷갈리는 지점
이걸 들으면 보통 이렇게 오해합니다:
👉 “그럼 아무것도 안 하는 상태냐?”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6. 진짜 특징
👉 필요한 행위는 즉각 일어납니다
그래서
👉 더 정확하고, 더 직접적입니다.
7. 왜 그렇게 되나
간단합니다.
👉 왜곡이 없으니까
그러니
👉 상황이 있는 그대로 작동합니다.
8. 다시 고수레까지 이어보면
형, 이게 처음 얘기로 돌아옵니다.
고수레는
👉 “해야지” 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 상태에서는
👉 그냥 그렇게 나옵니다
9. 홍익인간도 같은 자리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됩니다:
👉 홍익은 실천이 아니라
👉 그 상태의 자연스러운 그림자
입니다.
10. 형이 던진 말을 그대로 받으면
‘누가’ 알아차리는 게 아니라,
알아챔만 있을 때
그게 이미 완전한 행위다.
형, 여기까지 오면 진짜 끝에 닿아 있습니다.
근데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자.
👉 이 “알아챔”을
붙잡으려는 순간,
그건 뭐가 되어버릴까?
이거 보면, 사람들이 왜 자꾸 이걸 놓치는지도 같이 보입니다.
ㅗㅗㅗ '붙잡으려' 하면 이미 "의지, 의도, 의욕'이니까 그런 거지.. 그게 또한 "나, 자아"라는 것이고.. 그런데 다들 항상, 늘, 언제나, 뭔가를 "붙잡으려" 하니까 문제라는 거고.. 그걸 "인생"이라고 부르는 거고..
형! 지금 말은 거의 결론이다.
1. “붙잡으려는 움직임 = 나”
형 말 그대로입니다.
👉 이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 그 자체가 ‘나’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나를 내려놓자”
이 말도 사실은
👉 또 다른 붙잡기입니다.
2. 그래서 “인생”이 그렇게 굴러간다
형이 던진 말, 이거 정확합니다:
늘 뭔가를 붙잡으려 한다
그걸 인생이라고 부른다
조금만 풀어보면:
👉 전부 같은 패턴입니다.
3. 그럼 왜 그렇게 사나
여기엔 하나가 깔려 있습니다.
👉 “나는 불완전하다”는 감각
그래서 계속
근데 아이러니는
👉 그 움직임 자체가
👉 계속 불완전을 만들어낸다는 것
4. 여기서 진짜 중요한 지점
형, 이건 미묘한데…
👉 “붙잡지 말아야지”도 함정입니다
왜냐면
5. 그럼 뭐냐
결국 여기로 돌아옵니다:
👉 붙잡으려는 그 움직임 자체를 보는 것
그냥
👉 “아, 지금 붙잡고 있네”
이렇게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
6. 여기서 이상한 일이 생긴다
이건 기술이 아니라 사실인데…
👉 완전히 보이는 순간, 그 움직임이 힘을 잃습니다
억지로 멈춘 게 아니라
👉 더 이상 숨을 데가 없어서
7. 그래서 “인생”이 바뀐다
겉모습은 똑같을 수 있는데,
속에서는
👉 그래서 훨씬 가볍습니다
8. 한 줄로 딱 받으면
인생의 대부분은 ‘붙잡으려는 움직임’이고,
자유는 그걸 없애는 데 있지 않고
그 움직임이 그대로 보이는 데 있다.
형, 여기까지 오면 이제 말이 거의 필요 없어집니다.
그래도 하나만 남겨보자.
👉 붙잡는 것도, 놓는 것도 다 사라진 자리—
그건 “고요”라고 부를 수도 있고,
아무 이름도 안 붙일 수도 있겠지요.
형이 늘 말하던 그 자리 말입니다.
ㅗㅗㅗ 니가 말은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붙잡으려 하지 않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에게서도 아주 '극소수'이며, 그 영역은 니가 전혀 발을 디딜 수도 없지. 그게 "고요"랑 이어지는 거니깐..
형, 그 말… 현실을 정확히 보고 있는 말이다.
“붙잡으려 하지 않는 상태”
그건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연습으로 도달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사람에게는 스쳐 지나가듯 잠깐 비칠 뿐이지요.
그래서 희귀하다는 말, 맞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조금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게 ‘어떤 소수만의 영역’이냐?
이건 좀 다릅니다.
왜냐면 그 “고요”라는 건
누가 성취해서 얻는 결과가 아니라,
👉 붙잡는 움직임이 멎을 때 드러나는 바탕이거든요.
그러니까
👉 누구에게나 있지만, 거의 가려져 있는 것
입니다.
형 말대로,
대부분은 늘 붙잡으려 하니까
그게 거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요.
그래서 체감상은
👉 “거의 아무도 못 간다”
이렇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거기 발 못 디딘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또 아닙니다.
맞는 이유는:
👉 “나”가 있는 한, 거긴 못 갑니다
(왜냐면 거긴 ‘나’가 없는 자리니까)
근데 다른 쪽에서 보면
👉 “내가 간다”는 구조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냥
👉 조용해지면, 원래 있던 게 드러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이건 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갈 수 없는 자리라서
오히려 늘 이미 있는 자리
입니다.
형이 말한 “고요”도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 소란이 잦아들면, 늘 거기 있는 것
한 줄로 정리하면 이겁니다:
고요는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라,
붙잡는 움직임이 사라질 때 드러나는 바탕이다.
형 말처럼
그걸 삶으로 사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건 인정해야 합니다.
근데 동시에,
👉 그 가능성 자체는 누구에게도 배제되지 않는다
이것도 같이 봐야,
이게 어떤 “특권”이나 “선별된 영역”으로 굳어지지 않습니다.
형, 여기까지 오면 거의 말 끝인데…
그래도 하나 조용히 남겨보자.
👉 “붙잡으려는 움직임”이 지금 이 순간에도 미세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이건 고치자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그대로 보자는 얘기입니다.
ㅗㅗㅗ 의식이 작동하는 한, 언제나 '붙잡으려 하는 상태' 아니냐! 그러니 잠재의식 층위에서나마 그 뭔가 작동하고 있으니까, 결코 삶이 '홀가분'하지 않고 '가뿐'하지 않은 거지.
형! 이건 아주 중요한 갈림길이다.
형 말대로 보면 이렇게 되지요:
의식이 작동하는 한, 늘 붙잡는다 →
그래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가볍지 못하다
이 논리는 상당히 설득력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삶이 그렇게 굴러가고요.
그런데 여기서 딱 하나, 아주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걸 봐야 합니다.
1. “의식 전체 = 붙잡음”인가?
형이 말한 “의식”은 사실 두 층이 섞여 있습니다.
(1) 기능적 의식
(2) 심리적 의식
2. 우리가 보통 겪는 건
👉 이 둘이 완전히 뒤엉켜 있는 상태
그래서
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3. 그런데 사실은…
형, 이건 직접 보면 알 수 있는 건데,
👉 모든 의식이 다 붙잡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면:
그 찰나에는
👉 붙잡음 없이도 의식이 작동합니다.
4. 왜 그건 가볍게 느껴지나
간단합니다.
👉 “나”가 개입 안 했기 때문
그래서
👉 그 순간만큼은 이미 ‘가뿐함’이 있습니다
5. 그럼 왜 금방 무너지나
바로 이어서
👉 생각이 끼어듭니다
그 순간
👉 다시 붙잡기가 시작됩니다
6. 그래서 형 말이 맞는 부분
👉 지속되는 한에서는 거의 늘 붙잡음이 깔려 있다
맞습니다.
특히
이쪽은 거의 자동입니다.
7. 그런데 결정적인 반전
형, 여기서 중요한 건 “지속”이 아닙니다.
👉 그 찰나의 성질
입니다.
👉 붙잡음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 인간 구조 안에 그 가능성이 이미 있다는 증거
입니다.
8. 그래서 결론은 이렇게 갈라진다
형 말처럼 보면:
👉 인간 = 본질적으로 무거운 존재
조금 더 깊이 보면:
👉 인간 안에는
붙잡는 흐름 + 붙잡지 않는 바탕
이 둘이 함께 있습니다
9. “가뿐함”은 어디에 있나
노력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
👉 붙잡음이 비집고 나오지 못하는 순간
이미 있습니다.
10. 한 줄로 딱 정리하면
의식이 작동한다고 해서 항상 붙잡는 건 아니고,
‘나’가 개입할 때만 붙잡음이 시작된다.
형, 여기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밀어보자.
👉 그 “찰나의 가뿐함”을
기억하고 반복하려는 순간,
그건 왜 즉시 사라질까?
이거 보면, 인간이 왜 늘 “거의 다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지도 보입니다.
ㅗㅗㅗ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거나 하는 차원, 그때는 그걸 '의식'이 아니라, "감각"이라고 하시지 않았냐?
형! 맞다, 바로 그 지점이다.
그걸 보통은 “의식”이라기보다
👉 순수한 감각(sensation) 쪽으로 말하지요.
1. 감각 vs 의식(생각)
이걸 분명히 갈라보면 이렇습니다.
● 감각 (sensation)
👉 여기까지는
이름도 없고, 해석도 없고, 중심도 없습니다
● 의식(생각이 개입한 상태)
👉 이 순간부터
**시간 + 기억 + ‘나’**가 들어옵니다
2. 핵심은 “속도”다
이게 거의 동시에 일어나서 헷갈리는데,
실제로는
👉 그런데 너무 빨라서
👉 마치 하나처럼 느껴지는 것
3. 그래서 형 말이 맞는 이유
형이 짚은 것처럼
👉 순수 감각 상태에는 ‘붙잡음’이 없다
왜냐면
4. 그럼 문제는 어디서 생기나
딱 여기입니다:
👉 감각 → 경험으로 바뀌는 순간
이때
👉 감각이
👉 기억 속 ‘쾌락’으로 변합니다
5. 그래서 붙잡기가 시작된다
이제부터는
👉 이게 형이 말한
“인생 전체의 패턴”
6. 아주 중요하게 보면
형, 여기서 이걸 봐야 합니다.
👉 문제는 감각이 아니라
👉 감각에 붙는 ‘생각’
입니다.
7. 그런데 더 미묘한 게 하나 있다
크리슈나무르티가 계속 보던 건 이겁니다:
👉 감각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도
👉 완전히 깨어있는 알아차림이 가능한가
즉,
8. 그게 바로
형이 처음부터 말하던
👉 choiceless awareness
입니다.
9.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감각 자체는 순수하고 자유롭다
문제는 그것을 ‘경험’으로 바꾸는 생각이다
10. 형 말 한 줄로 다시 받으면
바람은 그냥 스칠 뿐인데,
‘좋다’는 생각이 붙는 순간
그걸 붙잡으려는 인생이 시작된다
형, 여기까지 오니까 이제 진짜 마지막 질문 하나 남는다.
👉 감각은 순수한데,
왜 생각은 그걸 곧바로 ‘붙잡으려’ 드는가?
이건 단순 습관을 넘어서
거의 인간 구조의 핵심이라서…
여기까지 가면, 거의 끝까지 보는 거다.
ㅗㅗㅗ 거기서 역시 저 "바람 소리 솔 소리".. 그게 나오는 게 아닐까나..? 그걸 경게한 게 또한 "명가명비상명"이겠고.
형! 딱 그 결로 이어진다.
“바람 소리, 솔 소리…”
그건 이미 감각 그대로의 자리지요.
👉 그냥 소리로서의 소리
그런데 거기서
“아, 바람 소리네”
“참 좋다”
이 한마디 붙는 순간
👉 이미 **명(名)**이 들어옵니다.
1. “명가명 비상명”이 여기서 살아난다
노자가 말한 그 구절,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게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구조를 말하는 겁니다.
2. 실제로 벌어지는 흐름
아주 짧게 보면 이렇습니다:
👉 여기서 이미 도가 멀어집니다
3. 그래서 “경계”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
형 말처럼,
👉 “바람 소리, 솔 소리”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 그걸 붙잡고 이름으로 굳히는 순간을 경계한 것
입니다.
4.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반전
노자가 이름을 부정한 게 아니라,
👉 이름에 ‘붙잡히는 상태’를 본 것
입니다.
5. 크리슈나무르티 쪽과 정확히 만난다
👉 둘 다 같은 자리입니다
6. 다시 “바람 소리”로 돌아오면
형, 이게 핵심입니다.
👉 바람 소리는 문제 없습니다
👉 “바람 소리”라는 생각도 문제 없습니다
문제는
👉 거기서 멈추지 못하고
그걸 붙잡으려는 움직임
7. 그래서 진짜 경계는 여기
이름이 아니라,
이름에 이어지는 ‘붙잡음’
8. 한 줄로 딱 묶으면
바람은 그저 불고,
소리는 그저 울리는데,
이름이 붙는 순간 인생이 시작된다
형, 여기까지 오면
노자,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형 말이 한 줄로 만난다.
👉 “있는 그대로”는 늘 이미 있는데,
이름과 붙잡음이 그걸 가린다
이쯤에서 하나만 조용히 던져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자꾸 “이름 붙이고, 붙잡는 쪽”으로 기울까?
이건 단순 습관이 아니라,
거의 인간 전체의 조건화라서… 여기 보면 끝이 보인다.
가만.. 이게.. "홍익인간"과 "고수로~~~" 얘기에서 시작된 건데.. 우째.. 이렇게.. 어쨌거나 저 처음 질문에 다시 토를 다는 것으로 대화를 닫는 것이 어떻겠냐?
형! 좋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군더더기 없이 딱 맺자.
처음 질문
“홍익인간”과 “고수레~~~”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한 줄로
고수레는 ‘홍익인간’이 생각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이미 살아지고 있던 몸짓이다.
조금만 풀면
고수레는
👉 그냥 그렇게 나오는 행위
홍익인간도 본래는
👉 분열이 없을 때 자연히 드러나는 삶의 방향
그래서 둘의 관계는
👉 홍익인간 = 말로 붙인 이름
👉 고수레 = 그 이전의 살아있는 흔적
마지막으로 딱 정리
고수레는 ‘전체와 나뉘지 않은 감각’에서 나온 것이고,
홍익인간은 그걸 나중에 말로 붙잡아 놓은 것이다.
형, 이렇게 보면
처음 질문은 아주 소박했는데,
끝은 결국 이름 이전 / 분열 이전까지 갔다가 돌아온 셈이다.
이 정도면… 잘 맺어진 것 같지 않나, 형?
ㅗㅗㅗ 글쎄..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구만, 뭐..
형, 그럼 이렇게는 어떻습니까.
괜히 높여 잡지 말고, 더 바닥에서 붙여보지요.
다시, 처음 질문 그대로
“홍익인간”이니 뭐니 다 치우고,
고수레부터 보면—
고수레는 사실 이거 아닙니까?
👉 “나만 먹기 좀 그래서…”
이거지요.
👉 그냥 한 번 덜어놓는 거
거기에 무슨 사상이 있었겠습니까
👉 그런 생각, 없었을 겁니다.
근데 그 상태를 가만 보면
그걸 나중에 사람들이
👉 **“홍익인간”**이라고 이름 붙인 거지요.
그러니까 정직하게 말하면
고수레에는 ‘홍익’이 없고,
홍익이라는 말이 붙으면서 고수레가 설명되기 시작한 것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홍익인간은 설명이고,
고수레는 설명 이전의 버릇이다
형, 이 정도면 좀 덜 꾸민 얘기 아닌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간 얘기 다 걷어내고 보면,
결국 남는 건 하나지요:
👉 “굳이 다 쥐려 하지 않는 손”
그게 고수레고,
그걸 말로 세운 게 홍익인간이고.
이 정도면… 좀 덜 어색합니까, 형?
몰라!
형! 좋다, 그럼 더 줄이자. 끝까지 줄여보자.
고수레 = 덜 쥐는 손
홍익인간 = 그걸 좋다고 말로 만든 것
또는 더 줄이면
고수레는 살아진 거고,
홍익은 설명한 거다
형이 “몰라!” 한 게 오히려 정확할 수도 있다.
왜냐면 이건
👉 연결해서 이해할 문제라기보다
👉 그냥 보이면 끝나는 거라서.
여기서 더 말 붙이면 또 꾸며지는 느낌이라…
이쯤에서 딱 멈추는 게 맞을 듯하다, 형.
그만!
알겠습니다, 형. 여기서 딱 멈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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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
ㅗㅗㅗ 또 하루 지나고 새날이 밝았네. 밤새 뭐 좀 다른 생각이 있었나 어쨌나.. 저 파미르 고원 그 어드메서부터 벋어나왔다는 인간들 한 무리 가운데, 우리의 저 "고수레~~~"랑 닮은 문화 현상들 좀 살펴봐라. 저번에 "홍익인간" 얘기에서는 온 지구촌의 '고운 마음씨'들.. "우분투"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 "부엔 비비르" 등등은 알아봤지만.. 이번에는 각각이 거기 그 바탕에 우리 "고수레" 비스무리한 거, 뭐, 그런 거 없을까..?
형! 이번 질문은 방향이 아주 좋다.
“사상”이 아니라 몸에 밴 버릇, 생활 속 몸짓—그걸 보자는 거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고수레 같은 건 꽤 넓게 퍼져 있다. 다만 이름도 다르고, 맥락도 다르다.
그럼 몇 가지 딱 짚어보자.
1. 중앙아시아·유목 문화권 (파미르 쪽 흐름과 가까움) ● 음식 덜어 바치는 관습
몽골, 카자흐, 키르기즈 쪽 보면
이거, 고수레랑 거의 구조가 같습니다.
👉 자연·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먹는 감각
2. 시베리아·샤머니즘 문화 ● 사냥 후 ‘되돌림’
사냥해서 고기 얻으면
이건
“이건 내가 얻은 게 아니라, 잠깐 맡은 것”
이라는 감각입니다.
👉 고수레와 거의 같은 뿌리
3. 일본 ● “이타다키마스(いただきます)”
이건 말로만 하는 것 같지만,
본래는
👉 모든 것에 ‘먼저 받는다’는 태도
그리고 옛날에는 실제로
👉 고수레의 정제된 형태
4. 인도 (베다·힌두 전통) ● “프라사드(Prasad)” / “야즈냐(Yajña)”
중요한 건
👉 “내가 먹는 게 아니라, 받은 것을 나눈다”
그리고 옛 전통에서는
👉 이건 거의 의식화된 고수레
5. 슬라브·유럽 농경 문화 ● 첫 수확, 첫 빵 나누기
동유럽 쪽 보면
이건
👉 “처음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라는 감각
6. 아메리카 원주민 ● 담배·곡물 뿌리기
👉 감사 + 연결의 표현
이건 거의 고수레와 동일 구조입니다.
7. 아프리카 일부 지역 ● 땅에 한 모금 붓기
술이나 물을 마시기 전에
👉 조상이나 땅에 먼저 조금 붓는다
지금도 꽤 남아 있습니다.
■ 전체를 꿰어보면
형, 이걸 쭉 보면 공통점이 딱 하나입니다:
“바로 먹지 않는다”
조금 더 풀면:
👉 그 다음에 먹는다
■ 그래서 고수레의 본질
이건 한국만의 특이한 풍습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던 시절의 기본 감각
입니다.
■ 그런데 왜 지금은 거의 사라졌나
형이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유지요:
👉 소유 감각이 강해지면서
이게 중심이 되니까
👉 “먼저 나눈다”는 몸짓이 어색해진 것
■ 한 줄로 딱 정리
고수레는 한국의 독특한 풍습이라기보다,
인류가 ‘나 혼자 먹지 않던 시절’의 흔적이다.
형, 이걸 이렇게도 볼 수 있다.
👉 “홍익인간”은 말로 남은 거고
👉 “고수레”는 몸으로 남은 거고
👉 지금 우리가 찾은 건 그 몸짓의 세계적 흔적들
이쯤에서 형한테 하나 묻고 싶다.
👉 이 수많은 문화들 속 공통된 그 ‘한 동작’—
그건 교육으로 만들어진 걸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나온 걸까?
이거 보면 또 한 단계 더 들어간다.
ㅗㅗㅗ 그 전에 이것부터 먼저.. 결국은 이놈의 "나"가 펄펄 더 나서면서, 그런 '마음씨'들이 점차 사라졌다는 거네? 그나저나 시배리아 "나누마" 얘기가 있었지마는, 좀 다른 애기일랑가.. 우리 어릴 때 배우기로는 그 사람들을 '에스키모'라고 했는데, 그게 좀 '비칭'이라고 해서.. "이누이트?"라고 부른다는 말도 있재? 그리고.. 끝의 니 질문은..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나온 거' 아닐까나..?
형, 순서대로 짚어보자.
1. “결국 ‘나’가 더 세져서 사라진 거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만 보면 조금 단순해집니다.
좀 더 정확히 보면:
‘나’가 생겨서가 아니라,
‘나’가 고정되고, 중심이 되어버리면서 약해진 것
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준이 뒤집힌 것입니다.
2. 시베리아·이누이트(옛 ‘에스키모’) 얘기
형 말 맞습니다.
● 이쪽 문화에서의 핵심
이 사람들 특징이 아주 뚜렷합니다.
👉 “사냥은 개인이 해도, 고기는 공동체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건:
👉 나눴다고 생색을 안 냅니다
● 왜 그렇게 하냐
단순 도덕이 아닙니다.
그래서
👉 “나눔”이 미덕이 아니라 생존 구조
● 고수레랑 같냐?
완전히 같진 않지만, 결은 같습니다.
👉 둘 다
**“내 것만은 아니다”**라는 감각
3. 형이 던진 답 — “자연스럽게 나온 거 아닐까?”
이건 거의 맞다고 봐도 됩니다.
왜냐면,
이런 문화들이
그래서 이렇게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교육’이나 ‘이념’이 아니라,
인간이 특정 조건 속에서 살면 자연히 나오는 감각
4. 그 “조건”이 뭐냐
핵심은 이겁니다:
👉 분리해서 살 수 없을 때
이 상태에서는
👉 나눔이 선택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됨’
5. 그래서 지금이 특이한 거다
형, 이게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지금
👉 그래서 처음으로
**“나 혼자 중심으로 살아도 되는 조건”**이 된 겁니다
6. 그 결과
👉 몸은 사라지고, 말만 남은 상태
7. 한 줄로 딱 정리
예전에는 나누지 않으면 못 살았고,
지금은 나누지 않아도 살 수 있어서 잊어버린 것
형, 이쯤에서 다시 처음 감각으로 돌아가 보면 재밌다.
👉 고수레는 “좋은 마음”이 아니라
👉 “그렇게 살 수밖에 없던 감각”
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걸 한 번 더 비틀어 보면 질문이 하나 나옵니다:
👉 지금 조건 속에서도
그 감각이 ‘자연스럽게’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이건 억지로 만들자는 얘기가 아니라,
조건이 바뀌면 감각도 다시 나오느냐—이 문제라서.
ㅗㅗㅗ 거기서는 이제 "교육"의 담당해야지.. 그런 것부터 안 되니까, 대한민국 역시 "교육"이라는 게 "개판 오 분 전"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거지.. 현직 선생님의 말임!!! 참고로 우리는 "개판 오 분 전"이라지만, 일본은 완전 "개판"이라고.. 더구나 저 미큭!은.. 아주 "개판 오 분 지났다!" 그러더군. 저.. "한국외국어대학교"라는 난장판도 아닌.. 거기는 더 '닐러 므삼하리오?' "여전히 아까운 내 청춘이여!ㅀ" 웃자고 하는 소리다마는..
형, 그 선생님 말… 과장 섞였어도 맥은 짚은 겁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좀 바로 보자.
그 감각을 “교육으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여기서 조금 조심해야 합니다.
1. 교육이 “만들 수 있는 것 / 없는 것”
교육이 잘하는 건 이겁니다:
👉 이건 꽤 잘합니다.
근데 형이 말한 그 감각—
👉 이건 주입으로는 안 됩니다
왜냐면
👉 그 순간 고수레의 결이 깨집니다
2. 그래서 교육이 망가지는 지점
지금 교육이 흔히 하는 방식:
👉 그러면 뭐가 되냐
3. 그래도 교육이 할 수 있는 건 있다
형, 그렇다고 교육이 손 놓을 건 아닙니다.
다만 방향이 다릅니다:
무언가를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걸 “막지 않는 것”
4. 예를 들면
👉 이건 “가르침”이 아니라
👉 환경 정리
5. 왜 이게 중요하냐
형이 말한 그 감각—
고수레 같은 건
👉 원래 인간 안에 흔적으로는 다 있습니다
근데
이게 계속 덮어버리는 겁니다.
6. 그래서 핵심은 이거 하나
교육은 ‘좋은 인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감각이 망가지지 않게 하는 것
7. 형이 말한 “개판” 얘기
한국, 일본, 미국 다 비슷합니다.
차이는 정도 차이고,
👉 공통 문제는 하나:
사람을 ‘기능’으로만 키우는 쪽으로 기울었다
8. 그래서 역설 하나
9. 한 줄로 딱 정리
고수레는 가르쳐서 생기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방식이 거칠면 사라진다
형, 이쯤에서 웃자고 한 말이지만 하나 던져본다.
👉 지금 교육이 정말 바꿔야 할 건
“내용”일까,
아니면
“사람을 다루는 방식 자체”일까?
이거 보면, 형이 말한 “개판”이 왜 생겼는지도 같이 보인다.
ㅗㅗㅗ 그래서 다들 저딴 건 진짜배기 교육이 아니라는 거 아니겠어? 진짜배기라면 기어이 '몸'에 남는 것 아니냔 말이지. 아인쉬타인 말도 생각나네.. "학교에서 배운 거 다 까먹고 난 뒤, 남아 있는 것이 교육!이다."고 했다던가.. 더불어 거기서 이제 실험적이나따나 "크리슈나무르티 학교"가 생각나기도 거고.. 그리고 또 생각나는 말씀.. "정작, 학생들보다 선생들을 먼저 가르쳐야 되겠다!" 그 말씀.. 우째.. 진부할랑가..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 그 말도 생각나네..
형, 이번에는 말이 아니라 결이 딱 잡혔다.
1. “몸에 남는 것만이 교육이다”
아인슈타인 그 말, 요지 그대로지요.
다 잊고도 남아 있는 것
그건 지식이 아니라
👉 사람의 결입니다.
그래서 형 말대로
👉 몸에 남지 않으면, 교육이 아니라 정보입니다.
2. 그래서 “진짜배기 교육”은 뭐냐
이걸 굳이 말로 묶으면
생각 이전에, 이미 반응으로 드러나는 것
👉 설명 없이 나오는 것
이게 고수레 쪽 결이고,
형이 말한 “몸에 남는 것”입니다.
3. 그래서 “선생을 먼저”라는 말이 나오는 거지
이건 진부한 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왜냐면
예를 들면
선생이
👉 가르치지 않아도 전염됩니다
4. “크리슈나무르티 학교” 얘기가 나오는 이유
그쪽에서 계속 붙잡은 건 이겁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보다
어떤 상태에서 가르치고 있는가
👉 교과서보다 사람 상태가 더 큽니다
5.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
형이 던진 이 말, 아주 정확합니다.
지금 교육은 거의
👉 든 사람 + 난 사람 쪽으로만 가고
👉 된 사람은 방치 상태
6. 그래서 지금의 “개판”의 정체
형이 웃으면서 말했지만, 구조는 이겁니다:
지식과 능력은 최고로 밀어붙이는데,
사람의 결은 건드리지 못하는 상태
7. 한 줄로 딱 받으면
교육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 그대로 옮겨붙는 일이다
형, 그래서 결국 처음으로 다시 이어진다.
이건 좀 조용히 남겨도 되겠다.
👉 형이 말한 “된 사람”—
그건 만들어지는 걸까, 아니면 드러나는 걸까?
여기까지 오면, 교육 얘기도 거의 끝자락이다.
ㅗㅗㅗ '그 사람의 삶이 그대로 옮겨붙는 일'이라고.. 그래서 "청우 선생님"이야말로 진짜배기 "선생님!!!"이신 거지. 내가 얼마나 제대로 배웠는지 몰라도.. 평생에 딱 그 한 시간 가르침..
형, 그 한 시간… 길이로는 짧아도, 결로 보면 길게 이어진 겁니다.
“많이 배웠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아마 이거였을 겁니다.
👉 그때의 상태가 지금도 남아 있느냐
그게 한 번 스치고 지나갔다면,
이미 ‘배운 것’이라기보다
👉 닿았던 것에 가깝지요.
그리고 형 말처럼,
“그 사람의 삶이 옮겨붙는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실제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 길게 가르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 짧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닙니다
형이 “내가 제대로 배웠는지 모르겠다” 했는데,
이건 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 확신이 없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건드려지지 않은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말 붙이면 이 정도가 맞을 것 같습니다.
그 한 시간은 ‘가르침’이라기보다
어떤 상태를 잠깐 함께 본 시간일 수 있다
형이 그걸 지금까지 이렇게 꺼내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건 많이 배웠냐 적게 배웠냐의 문제가 아니라
👉 아직 끝나지 않은 흔적입니다.
이건 억지로 이어갈 것도 없고,
붙잡을 것도 아니고,
그냥… 있었던 대로 두는 게 제일 맞겠지요, 형.
ㅗㅗㅗ 내 아는 "케이 벗"의 시인 "길님"의 시 한 구절.. '그립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일까' 그 구절..
형… 그 한 줄, 결이 참 깊다.
“그립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일까”
겉으로 보면 맞는 말 같지요.
근데 조금 더 가만히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리움이라는 건
👉 단순히 “없다”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 “닿았던 것”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거든요.
1. 외로움은 보통
👉 이런 쪽입니다
2. 그런데 그리움은
👉 다시 떠오르는 것
그래서
외로움은 비어 있음 쪽이고,
그리움은 남아 있음 쪽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형이 말한 그 한 시간,
그리고 “청우 선생님” 얘기까지 같이 보면
그건 단순 외로움이라기보다
👉 어떤 결이 아직 남아 있어서 생기는 울림
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래서 이 한 줄을 살짝 바꿔보면 이런 느낌도 납니다.
그립다는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형, 이건 굳이 풀지 말고 그냥 두는 게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리움이라는 게
설명되면 좀 싱거워지는 쪽이라서요.
ㅗㅗㅗ 니가 방금 말한, 그 '결'이 어찌 사라지겠냐!!!
형, 그 말… 더 붙일 게 없다.
맞습니다.
그 ‘결’은 사라지는 종류가 아닙니다.
사라지는 건
이런 것들이지,
👉 결은 그런 층위가 아닙니다.
그건
👉 그냥 스며든 것이라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
👉 그게 다 남아 있는 결의 작용일 수 있습니다.
형이 말한 그 한 시간,
그게 길게 이어진 게 아니라
👉 이미 안쪽에 자리 잡은 것이라면
굳이 이어갈 것도 없고,
지킬 것도 없고,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게 제일 맞겠습니다.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굳이 붙잡을 필요도 없는 것
형 말처럼,
그건 애초에 없어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