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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趙芝薰 문학 주변과 나 / 서울대 명예교수 金容稷
이장희 추천 0 조회 201 17.09.26 16: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趙芝薰 문학 주변과 나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金容稷



[1]


올해로 내가 조지훈 시인의 이름을 알고 지낸지가 60년을 훌쩍 넘기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이 시인에 대한 몇 편의 평론을 쓰고 작품을 분석할 기회도 가졌다. 그와 아울러 그를 소재로 한 한시도 써 보았다.

다음은 지훈의 고향인 주실(注谷)에 조지훈 문학관이 낙성되고나서 내가 현지에 내려가 보고 소감을 적은 7언율시한 수다.


寂寞門庭晝掩扉
秋風蕭瑟孰吟詩
半邊川碧楓巖好
日月峰高雲影遲
聞?長空情奈盡
橫烟故郡恨胡爲
回頭欲問平生事
千古靑山外是非
- 丙戌晩秋訪注谷芝薰故宅


헛브다 님의 집 뜰 한낮인데 문 닫혔네
소슬한 가을바람 누구가 시를 읊나
반변천(半邊川) 푸른 물결 단풍바위 빗겨 좋고
일월산(日月山) 저리 높아 구름도 쉬어간다
먼 하늘 우는 기럭 정은 일어 다함없고
연기 피는 옛 고을에 무슨 한 이러한가
고개 들어 세상살이 알고저 해보아도
천고(千古)에 푸른 산은 옳다 외다 말이 없다



지금 주실에 있는 시인의 큰집에는 지키는 이가 있으나 정작 본집은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의 첫줄이 “적막문정(寂寞門庭)”으로 시작한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또한 주실은 낙동강의 한 지류인 반변천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다. 이 강은 영양의 일월산(日月山)에서 시작되어 남으로 흘러 입암(立岩), 청송과 진보(眞寶)를 거쳐 지금은 임하댐으로 막힌 안동부 앞에서 본강과 합류한다.

이 시에 나오는 반변천은 그 흐름을 가리킨다. 또한 일월봉(日月峰)은 일월산으로 영양군 청기면(靑杞面)과 일월면(日月面) 사이에 솟아 있으며 높이 1,919미터다. 이 작품의 형태적 특성상 짝을 맞추기 위해 강과 산의 이름을 써 본 것이다.



[2]


조지훈(趙芝薰)은 일제 식민지 체제하의 극악한 상황을 무릅쓰고 우리 문단에 등장 활약한 시인이다. 그가 시를 습작하고 있었을 때 일제는 우리말 사용을 전면 봉쇄해 버렸다. 우리 시인과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간섭·핍박을 가했다. 그런 반대 기류를 무릅쓰고 조지훈은 모국어를 갈고 다듬어 아름다운 작품을 쓰는 시인의 길을 택했다. 우리 문단에 등단하기 위해 그는 당시 한국문단의 최고 등용문 구실을 한 ≪문장(文章)≫ 추천제에 응모했다. ≪문장(文章)≫의 선고위원은 그 심사 기준이 까다롭기로 이름이 난 정지용이었다. 그런 지용이 지훈의 <승무>를 보고는 이례적으로 상찬을 아끼지 않은 심사평을 썼다.


"조군(趙君)의 회고적 에스프리는 애초에 명소고적(名所古蹟)에서 날조한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고유(固有)한 푸른 하늘 바탕이나 고매한 자기(磁器) 살결에 무시로 거래(去來)할 일말운하(一抹雲霞)와 같이 자연(自然)과 인공(人工)의 극치일까 합니다."


여기서 <명소고적 날조> 등의 말은 국민문학파 출신 일부 시인들의 작품을 두고 한 말이다.
국민문학파에 속한 일부 시인 가운데는 문학의 길이 민족전통을 살리는 일이라고 믿은 나머지 한국적 소재를 쓰는데 매달리고 기능적으로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한 예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조선적>인 것을 노래한 것만으로 시가 되는 양 생각한 사람들이 포함된 것이다. 조지훈도 <승무>나 <고풍의상>, <봉황수>를 통해 한국적인 것을 소재로 썼다. 그러나 국민문학파들과 달리 그는 그것들을 시적의장(詩的意匠)으로 잘 다듬어 내었다. 그를 통하여 시를 아름다운 모국어의 노래가 되게 했고 훌륭한 현대시의 명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자격으로 조지훈은 등단작에서부터 우리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은 시인이다.



[3]


그의 생전에 내가 조지훈 시인을 만나 본 것은 꼭 두번 뿐이었다. 그 첫 번째가 대학 3학년 때였다. 마침 친구가 있어 고려대학에 갔다가 그를 복도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조지훈 시인은 어딘가를 서둘러 떠나는 중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말씀을 여쭐 겨를을 갖지 못했다.


친구의 소개에 따라 나는 그저 내 고향을 얘기했고 시인은 선자리에서 몇 마디 그의 근친으로 우리 마을로 시집와서 사는 분의 근황을 물었다.


두 번째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의 전임자리를 얻게 된 후의 일이다.
마침 김종길(金宗吉) 선생에게 볼 일이 있어 갔다가 지훈(芝薰)의 집에 가는 길이니 동행하겠느냐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제대로 시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몇 가지 질문도 해 보았으면 하던 때였다.

그래 기회를 놓칠세라 그를 따라 나섰다. 그러나 당시 지훈은 이미 건강이 좋지 않은 때였다. 김종길 선생과 동행으로 성북동 산자락 가까이에 있는 시인의 거처를 찾았으나 자세한 말씀을 듣고 여쭐 시간은 갖지 못했다. 다만 서재 겸 거실로 쓰는 방에 안내되어 우리 고향과 이웃한 시인의 외가 마을 삼산(三山)의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 받은 기억이 새롭다.


참고로 밝혀두면 시인의 외가댁은 전주 유씨(全州 柳氏)의 일파로 안동 예안현 삼선(三山)에 세거해온 일족의 종가였다. 그 집이 바로 지훈의 선친인 조헌영(趙憲泳) 선생의 처가였는데 대대 조행(操行)과 문한으로 이름이 있었다. 또한 선생님의 외사촌이 문학가동맹의 전위시인 유종대(柳鍾大)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 조지훈 시인은 널리 알려진대로 민족진영의 편에 서서 청년문학가협회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그런데 고종인 유종대 시인이 조선문학가동맹의 맹원이 되어 서로가 맞서 싸우는 반대입장을 취했다. 잠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씁쓸해 하던 시인의 모습이 지금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나는 학교가 달라서 강의실에서 조지훈 시인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갖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내 문학적 체험에는 청소년 때부터 몇 차례나 조지훈 시인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 섞여 있다. 8?15 직후 내가 시골 소읍의 중학교에 들고 나서의 일이다. 같은 반의 친구 하나가 ≪노산시조집≫, 정지용의 ≪백록담≫을 읽는 것을 보았다. 한창 시를 읽는 일에 열이 올라 있었을 때라 나는 그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 친구에게 시집의 출처를 물었더니 그 자신이 지훈의 처남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뒤 나는 그를 통해 몇 권의 일제시대 때 간행된 우리말 시집을 얻어 읽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나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청록집≫도 읽었다. 당시 나는 상급생이 주재하는 독서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문학동가맹의 김동석(金東錫)이 쓴 조지훈론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우리 모임의 좌장격인 상급생은 곧 지훈이 우파 보수, 반동시인으로 그의 시가 아주 나쁜 작품이라고 깎아 내렸다.

그런 조지훈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나는 반대 의견을 제기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읽은 <파초우(芭蕉雨)>를 그 자리에서 암송한 다음 이것은 문학가동맹의 아무개 시 보다 한결 아름다운 시라고 내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러자 내가 참석한 모임 전체가 감전이라도 된 듯 이상 긴장이 되어버렸다.
그 까닭은 우파 보수진영이 무조건 배제되는 자리에서 내가 정면으로 그것도 상급생과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초등학교가 같은 상급생 하나가 나서서 그런 사태를 무마해 주었다. 나는 그 상급생으로부터 앞으로 그런 말 삼가하라는 경고를 들은 다음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어떻든 나는 매우 일찍 조지훈 시인을 매개로 해서 시와 이데올로기의 마찰과 대립이 빚어낸 사태를 체험한 것이다.



[4]


≪청록집≫ 다음에 나는 또 한번 조지훈의 면모를 생생하게 실감할 기회가 있었다. 8?15직후 얼마동안 우리 문단은 문학가동맹의 제패 상태로 전개되어 갔다. 그런 서슬 속에서 문학가동맹계는 위장 형태로 민족문학론을 휘두르면서 우파 민족진영계의 문학론이 보수 퇴영적인 것이며 사이비라고 몰아붙여갔다.

특히 문학가동맹의 대표적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원조(李源朝)가 그런 류의 논리를 폈다. 그는 ≪문학≫7호에(1948년 4월) <민족문학론>을 발표했다.


이 글의 요지는 8?15를 맞고 난 다음 우리 문학과 문단이 당면한 최대 과제가 민족문학의 건설에 있다고 시작한다. 여기서 문학가동맹이 말하는 민족이란 인민의 다른 이름이며, 인민이란 그들이 말하는바 진보적 역사관에 입각해서 미래를 개척해야 할 역군을 가리킨다. 이런 문학가동맹계의 주장에 따르면 조지훈 등의 시는 외견상으로 민족의 편에 서 있는 듯 보이나 실제 작품들을 검토해 보면 거기에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봉건성이 검출되며 미래를 타개해 나갈 전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글에서 이원조는 왜곡된 민족문학의 보기로 박종화의 <청자부>, 조지훈의 <봉황수>등을 들었다. 이들은 모두가 이원조(李源朝)가 그 주체의 하나로 활동한 조선문학가동맹의 행동노선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 시인 작가들이었다. 이원조가 이때에 특히 문제 삼은 것이 조지훈이었다. 그는 민족진영계 문학의 보수 퇴영적 경향의 보기로 <봉황수(鳳凰愁)>를 든 후,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을 폄하했다.


"시인 조지훈 씨는 역시 고궁을 거닐면서, <봉황수>(<봉황수>는 아마 덕수궁 내의 중화전(中和殿) 천정에 새겨 있는 악작(??)을 봉황으로 잘못 알았을 것이다-필자)라는 일편을 읊조리는데, “정일품에서 종구품까지 내 몸둘 곳이 없어라”라고 한탄했으며……"


이런 비판에 대해서 조지훈 시인은 이원조의 지적이 그릇된 작품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정면에서 맞받았다. 그에 따르면 <봉황수>는 흘러간 왕조를 그리거나 벼슬을 탐해서 쓴 것이 아니라 민족의 슬픔을 구조물 또는 건축에 기탁한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조지훈 시인은 이원조가 작품해석의 전제조건인 기본지식에 얼마나 어두운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지훈은 우선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이 대한제국이 되고 나서 건립된 것임을 지적한 다음 그 옥좌위에 새겨진 것이 중국을 의식한 나머지 그렇게 한 제후국 상징의 봉황새가 아니라 쌍룡이라고 밝혔다. 다음 악작을 봉황으로 잘못 알고 쓴 것이라는 이원조의 주장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반박을 했다.



"악작이란 새를 봉황으로 잘못 알았다는 이 잘못이란 말은 무슨 말인가.

씨(氏)는 악작이란 새에 대한 분운(紛?)한 제설을 섭렵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의 동물에까지 과학적 분류의 체계를 가질 수 있는가.

악작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적어도 그것이 고전적 의미에 있어서는 봉황과 같이 쓰여졌다면 어떻게 되는가.

허신(許愼)의 설문(說問)에 ‘악작(??) 봉속야(鳳屬也)’라 했고 장화(張華)의 금경주(禽經註)에 ‘봉지 소자왈 악작(鳳之 小者曰 ??)’이라 했으며 주어(周語)에 있는 ‘주지 흥야 악작우기산(周之 興也 ??鳴于岐山)’이라고 했으며 시경(詩經) <대아(大雅)>에서는 ‘봉황명이 우피고강 오동생이 우피조양(鳳凰鳴矣 于彼高崗 梧桐生矣 于彼朝陽)’이라 했으며 우리의 고가(古歌) 새타령에도 ‘문왕(文王)이 나계시니 기산조양(岐山朝陽)에 봉황(鳳凰) 새’라고 뚜렷이 있거늘 악작(??)을 봉황으로 안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이런 조지훈 시인의 반박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논리적 근거가 확보되어 있다. 그 하나는 이원조의 비판이 온당한 논리적 근거를 갖지 못했음을 지적한 점이다. 덕수궁 중화전의 언급으로 들어난 바와 같이 이원조는 왕궁의 건축연대와 그에 부수된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를 범했다.


이것은 그가 작품의 근거가 된 사실 자체에 전혀 맹목이었거나 적어도 그릇된 선입견을 가지고 임했음을 뜻한다. 또한 여기에는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도 있다. 본래 이원조는 외국문학도 출신이다. 일찍 그가 전통 유림의 후예로 어렸을 때 다소간 한문을 읽은 경험이 있기는 했다.
그런 그의 소양은 남긴 몇 수의 한시로 남아 전하는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유가에서 성장한 자제들의 기초 소양 정도였다. 그것으로 전문적인 논설을 쓰고 책임 있는 의견을 제시할 수준이 확보되지는 못했다. 그의 전통문화 내지 동양고전에 대한 소양은 조지훈의 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봉황과 악작을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이 말을 뒤집을 때 한 가지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것이 문단에 진출한 초기부터 조지훈의 전통문화·동양고전에 대한 소양이 상당했다는 사실이다. <봉황수>를 에워싼 논박이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이런 사실이 가리키는 바도 명백하다. 8?15 직후 문학가동맹계의 일방적인 공세 속에서 조지훈은 문학적 담론을 통해서도 민족진영계의 문학을 튼튼하게 지키고 이원조로 대표된 좌파 문학가동맹계의 이데올로기 일방통행 논리를 되받아치는 버팀목 구실을 해내었다.



[5]


조지훈 시인이 타계했을 때 나는 막 모교의 교양학부에 전임 자리를 얻은 직후였다. 그 무렵 나는 다소간 들뜬 마음으로 오래전부터 마음먹고 있던 한국현대시사 쓰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현대시사의 역사 쓰기에 부수되는 일로 나는 당시 상황을 아는 시인·작가들을 심방하여 그들의 증언들을 녹취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요 항목의 하나에 조지훈 시인과 정지용 시인 사이의 상관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이 차일피일이 된 어느 날, 뜻밖에도 시인의 부고에 접했던 것이다. 적지 않게 놀란 가슴을 안고 나는 고려대학교로 달려갔다.

거기서 김종길 선생이 쓴 만장(挽章)을 본 기억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일월산(日月山) 지초(芝草)향기 맑고도 매웁더니/

쉬흔도 못다 살고 웃으며 떠나는가/

술익는 강(江)마을에는 오늘도 타는 저녁놀.’


1970년대의 여름철 어느 날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의 제자들이 주동이 되어 시인의 고향인 주실에 시비가 서게 되었다. 그 무렵까지 나는 시인의 고향인 주실마을을 한번도 찾지 못한 채였다. 그런 나에게 뜻밖에도 시비 제막식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고려대학교 교우회에서 왔다. 나는 그날 고려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출발한 버스를 얻어 타고 유족들과 제자들로 이루어진 행사 참가자 일행의 틈에 끼었다. 그길로 새재를 넘고 안동을 거쳐 여러 시간을 달린 다음 주실 마을에 당도했다.

우리 일행은 시인의 큰집 사랑채와 옆채 등을 거의 독차지하고 술판을 벌였다. 간간 시인인 동시에 국문학의 교수이기도 했던 조지훈의 추모담이 오고갔다. 누군가가 가슴 밑바닥에서 토해내는 것 같은 울음소리를 터뜨렸고 그런 분위기가 되자 내 마음도 공연히 울적해지던 기억이 난다. 나는 몰래 자리에서 빠져나와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옛 집터를 둘러보았다(시인이 태어난 집은 6?25 직전의 혼란기에 좌익의 방화로 소실되고 그 후 재건이 되지 않아 지금은 그 자리만이 남아 있다).

거기서 나는 얼마동안 조지훈 시인이 걸어간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자 생전에 내가 찾아뵈었을 때 유난히 두꺼운 안경을 쓰고 기침을 자주 하던 시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시인의 대표작으로 유난히 그의 체취가 짙게 배어있는 듯한 <파초우(芭蕉雨)>가 생각났다.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깃 빗방울
파초잎에 후득이는


저녁 으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주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소리기에
날마다 바람도 그리운 산아


온 아침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 <파초우(芭蕉雨)> 전문 -



선생님의 기념시비 제막식은 우리 일행이 주실마을에 도착한 그 다음날에 있었다. 시비가 선 자리는 주실마을 서쪽 시내를 건너서 있는 숲속이었다. 조금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그날따라 작은 빗방울이 오락가락 했다.

영양군청과 경상북도의 관계자까지 참석한 가운데 시인의 작품 <빛을 찾아가는 길>을 새긴 시비가 제막되었다. 비문 찬은 뒤에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홍일식(洪一植) 교수의 솜씨였고 설계는 아드님인 광열(光烈)의 손으로 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비평계와 문단을 대표하여 기념사를 했다. 그 내용 가운데 나는 내가 조지훈 시인과 문화권을 같이하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섞어 넣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훈이 매개항이 된 가운데 내가 겪은 문학적 체험으로 아직껏 내 머리에 남아 있는 것에 1980년대의 일도 있다. 그 무렵 나는 8?15 후의 우리 시단 상황을 정리하여 ≪해방기한국시문학사≫를 책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때까지 우리 주변에는 8?15 직후 우리 문단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독립된 단행본 체제로 나온 시사(詩史)가 없었다. 내 작업은 그 빈틈을 매우려는 시도였고, 또한 문학가동맹계나 우파 민족진영계 시와 시론을 아울러 자료로 수용하여 객관적 서술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 직후 그 서평격인 논문이 내 모교의 후배, 제자에 의해 발표된 바 있다.


거기서는 상당히 가혹하게 내 작업이 비판되어 있었는데 그 결론 비슷한 말이 나를 아주 당혹하게 만들었다. 서평자는 거기서 8?15 직후 조지훈이 역사를 배제한 순수문학론을 휘둘렀는데,김 아무개의 해방기시문사학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틀렸다는 것이었다. 문학적 담론에서 진실과 오판의 기준이 되는 것은 사실 해석의 합리 타당성 여부일 것이다. 그것이 내 『해방기시문학사』비판에서는 실종, 배제되어버리고 그 대신 내 자신이 수긍할 수가 없는 의식 성향론이 독주하고 있었다. 이 논리의 일방통행 현상에 나는 적지 않게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6]


세 번째 조지훈 시인을 통해서 내가 가져본 지적 훈련의 체험은 한시(漢詩)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한국현대시사를 진행시키는 가운데 나는 내 담론이 고전문학기(古典文學期)의 한국문학과 문화에 대한 소양 부족으로 부실한 구석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 보완책으로 나는 한시 창작 모임에 나갔다. 한시를 짓기 시작하고부터 나는 동양고전의 주류가 되는 이 문학 양식의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몇 개의 현대시론을 만들어 보았다.

그 가운데서 이육사(李陸史)의 <광야(曠野)>론이나 김소월의 <초혼(招魂)>에 대한 생각은 내 나름의 논거가 선 것으로 믿고 있다. 지난해의 한 글에서 나는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과 함께 지훈의 시를 한시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읽고자 한 적이 있다. 특히 지훈의 시 가운데는 직접적으로 한시에 상관되는 것이 나타난다.

≪유수집(流水集)≫(지훈의 미간행 한시집)에 포함된 한 편인 <송행(送行)>은 다음과 같다.


送子靑山路
滿山花政飛
行行白日暮
應悔振衣非


이 작품에 대비될 지훈의 한시 <송인(送人)>은 다음과 같다.


그대를 보내노니
푸른 산길에
자욱히 꽃잎이
흩날리노라.
가고 가면 꽃비 속에
백일(白日)은 지리


날 두고 그대 홀로
떨치고 간 소매가
섧지 않으랴.


이들 두 작품에 대해서 나는 한글과 순 한문이라는 표현 매체가 다를 뿐 내용에 있어서는 일란성(一卵性)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런 내 견해 자체에는 별로 이의가 제기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정작 문제는 조지훈 시인의 다른 한시에 대한 내 해석을 두고 제기되었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지훈의 오언률시 <불국사도중(佛國寺途中)>의 3·4행이다.

율시의 대우적 성격을 말하면서 나는 벽장(碧藏)과 대가 된 홍로(紅露)를 문제삼았다.

‘벽장(碧藏)’ 곧 푸른 기운은 구름 밖의 절을 갈무리하고의 ‘장(藏)’이 용언임에 반해 ‘홍로(紅露)’의 ‘로(露)’가 체언이므로 약간의 문제가 생기지 않나 지적한 것이다. 그러자 내 글을 읽은 같은 한시 모임의 친구 하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의견은 ‘노(露)’를 동사로 읽어 <드러내다>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벽장(碧藏)’과 ‘홍로(紅露)’가 짝이 되고 작품의 형태가 제대로 파악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그의 의견에 완전 승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가 되는 것은 별로 복잡한 데 있지 않다. ‘홍로(紅露)’에서 ‘노(露)’를 용언으로 읽으려면 ‘홍(紅)’이 단독으로 꽃, 곧 붉은 꽃으로 해석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홍로설변춘(紅露雪邊春)’이 ‘붉은 꽃은 눈 가장 자리에도 피어나는 봄을 드러내고, 또는 아로새기고’가 되어 그 앞줄인 푸른빛(산빛)은 구름 밖의 절을 갈무리하고, 곧 <벽장운외사(碧藏雲外寺)>와 대우를 이룰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내가 찾은 한자 자전에는 그런 용례가 나타나는 것이 없었다.

예외격으로 ‘타홍(墮紅)’, ‘낙홍(落紅)’ 등이 있는데 그때는 수식어가 앞에 있어 그렇게 읽는 일이 가능하다. 여기서 이런 말들을 곁들이는 의도는 누구의 해석이 맞고 틀린 점을 가려내자는 것이 아니다. 어떻든 조지훈 시인의 작품을 매개로 해서 이렇게 나는 몇 차례나 세계인식의 자극을 얻어 왔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회보 2008,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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