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芝薰 문학 주변과 나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金容稷 [1]
다음은 지훈의 고향인 주실(注谷)에 조지훈 문학관이 낙성되고나서 내가 현지에 내려가 보고 소감을 적은 7언율시한 수다.
지금 주실에 있는 시인의 큰집에는 지키는 이가 있으나 정작 본집은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의 첫줄이 “적막문정(寂寞門庭)”으로 시작한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또한 주실은 낙동강의 한 지류인 반변천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다. 이 강은 영양의 일월산(日月山)에서 시작되어 남으로 흘러 입암(立岩), 청송과 진보(眞寶)를 거쳐 지금은 임하댐으로 막힌 안동부 앞에서 본강과 합류한다. 이 시에 나오는 반변천은 그 흐름을 가리킨다. 또한 일월봉(日月峰)은 일월산으로 영양군 청기면(靑杞面)과 일월면(日月面) 사이에 솟아 있으며 높이 1,919미터다. 이 작품의 형태적 특성상 짝을 맞추기 위해 강과 산의 이름을 써 본 것이다. [2]
그런 자격으로 조지훈은 등단작에서부터 우리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은 시인이다. [3]
친구의 소개에 따라 나는 그저 내 고향을 얘기했고 시인은 선자리에서 몇 마디 그의 근친으로 우리 마을로 시집와서 사는 분의 근황을 물었다.
그래 기회를 놓칠세라 그를 따라 나섰다. 그러나 당시 지훈은 이미 건강이 좋지 않은 때였다. 김종길 선생과 동행으로 성북동 산자락 가까이에 있는 시인의 거처를 찾았으나 자세한 말씀을 듣고 여쭐 시간은 갖지 못했다. 다만 서재 겸 거실로 쓰는 방에 안내되어 우리 고향과 이웃한 시인의 외가 마을 삼산(三山)의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 받은 기억이 새롭다.
해방 직후 조지훈 시인은 널리 알려진대로 민족진영의 편에 서서 청년문학가협회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그런데 고종인 유종대 시인이 조선문학가동맹의 맹원이 되어 서로가 맞서 싸우는 반대입장을 취했다. 잠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씁쓸해 하던 시인의 모습이 지금도 뚜렷하게 떠오른다.
뿐만 아니라 그 후 나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청록집≫도 읽었다. 당시 나는 상급생이 주재하는 독서 모임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문학동가맹의 김동석(金東錫)이 쓴 조지훈론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우리 모임의 좌장격인 상급생은 곧 지훈이 우파 보수, 반동시인으로 그의 시가 아주 나쁜 작품이라고 깎아 내렸다. 그런 조지훈 비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나는 반대 의견을 제기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내가 읽은 <파초우(芭蕉雨)>를 그 자리에서 암송한 다음 이것은 문학가동맹의 아무개 시 보다 한결 아름다운 시라고 내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러자 내가 참석한 모임 전체가 감전이라도 된 듯 이상 긴장이 되어버렸다. [4]
특히 문학가동맹의 대표적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원조(李源朝)가 그런 류의 논리를 폈다. 그는 ≪문학≫7호에(1948년 4월) <민족문학론>을 발표했다.
"시인 조지훈 씨는 역시 고궁을 거닐면서, <봉황수>(<봉황수>는 아마 덕수궁 내의 중화전(中和殿) 천정에 새겨 있는 악작(??)을 봉황으로 잘못 알았을 것이다-필자)라는 일편을 읊조리는데, “정일품에서 종구품까지 내 몸둘 곳이 없어라”라고 한탄했으며……" 이런 비판에 대해서 조지훈 시인은 이원조의 지적이 그릇된 작품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정면에서 맞받았다. 그에 따르면 <봉황수>는 흘러간 왕조를 그리거나 벼슬을 탐해서 쓴 것이 아니라 민족의 슬픔을 구조물 또는 건축에 기탁한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조지훈 시인은 이원조가 작품해석의 전제조건인 기본지식에 얼마나 어두운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지훈은 우선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이 대한제국이 되고 나서 건립된 것임을 지적한 다음 그 옥좌위에 새겨진 것이 중국을 의식한 나머지 그렇게 한 제후국 상징의 봉황새가 아니라 쌍룡이라고 밝혔다. 다음 악작을 봉황으로 잘못 알고 쓴 것이라는 이원조의 주장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반박을 했다. "악작이란 새를 봉황으로 잘못 알았다는 이 잘못이란 말은 무슨 말인가. 씨(氏)는 악작이란 새에 대한 분운(紛?)한 제설을 섭렵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의 동물에까지 과학적 분류의 체계를 가질 수 있는가. 악작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적어도 그것이 고전적 의미에 있어서는 봉황과 같이 쓰여졌다면 어떻게 되는가. 허신(許愼)의 설문(說問)에 ‘악작(??) 봉속야(鳳屬也)’라 했고 장화(張華)의 금경주(禽經註)에 ‘봉지 소자왈 악작(鳳之 小者曰 ??)’이라 했으며 주어(周語)에 있는 ‘주지 흥야 악작우기산(周之 興也 ??鳴于岐山)’이라고 했으며 시경(詩經) <대아(大雅)>에서는 ‘봉황명이 우피고강 오동생이 우피조양(鳳凰鳴矣 于彼高崗 梧桐生矣 于彼朝陽)’이라 했으며 우리의 고가(古歌) 새타령에도 ‘문왕(文王)이 나계시니 기산조양(岐山朝陽)에 봉황(鳳凰) 새’라고 뚜렷이 있거늘 악작(??)을 봉황으로 안 것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이런 조지훈 시인의 반박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논리적 근거가 확보되어 있다. 그 하나는 이원조의 비판이 온당한 논리적 근거를 갖지 못했음을 지적한 점이다. 덕수궁 중화전의 언급으로 들어난 바와 같이 이원조는 왕궁의 건축연대와 그에 부수된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를 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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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요 항목의 하나에 조지훈 시인과 정지용 시인 사이의 상관관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이 차일피일이 된 어느 날, 뜻밖에도 시인의 부고에 접했던 것이다. 적지 않게 놀란 가슴을 안고 나는 고려대학교로 달려갔다. 거기서 김종길 선생이 쓴 만장(挽章)을 본 기억이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일월산(日月山) 지초(芝草)향기 맑고도 매웁더니/ 쉬흔도 못다 살고 웃으며 떠나는가/ 술익는 강(江)마을에는 오늘도 타는 저녁놀.’
우리 일행은 시인의 큰집 사랑채와 옆채 등을 거의 독차지하고 술판을 벌였다. 간간 시인인 동시에 국문학의 교수이기도 했던 조지훈의 추모담이 오고갔다. 누군가가 가슴 밑바닥에서 토해내는 것 같은 울음소리를 터뜨렸고 그런 분위기가 되자 내 마음도 공연히 울적해지던 기억이 난다. 나는 몰래 자리에서 빠져나와 시인이 태어나서 자란 옛 집터를 둘러보았다(시인이 태어난 집은 6?25 직전의 혼란기에 좌익의 방화로 소실되고 그 후 재건이 되지 않아 지금은 그 자리만이 남아 있다). 거기서 나는 얼마동안 조지훈 시인이 걸어간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자 생전에 내가 찾아뵈었을 때 유난히 두꺼운 안경을 쓰고 기침을 자주 하던 시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시인의 대표작으로 유난히 그의 체취가 짙게 배어있는 듯한 <파초우(芭蕉雨)>가 생각났다. 외로이 흘러간
저녁 으스름
선생님의 기념시비 제막식은 우리 일행이 주실마을에 도착한 그 다음날에 있었다. 시비가 선 자리는 주실마을 서쪽 시내를 건너서 있는 숲속이었다. 조금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그날따라 작은 빗방울이 오락가락 했다. 영양군청과 경상북도의 관계자까지 참석한 가운데 시인의 작품 <빛을 찾아가는 길>을 새긴 시비가 제막되었다. 비문 찬은 뒤에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홍일식(洪一植) 교수의 솜씨였고 설계는 아드님인 광열(光烈)의 손으로 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비평계와 문단을 대표하여 기념사를 했다. 그 내용 가운데 나는 내가 조지훈 시인과 문화권을 같이하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섞어 넣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까지 우리 주변에는 8?15 직후 우리 문단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독립된 단행본 체제로 나온 시사(詩史)가 없었다. 내 작업은 그 빈틈을 매우려는 시도였고, 또한 문학가동맹계나 우파 민족진영계 시와 시론을 아울러 자료로 수용하여 객관적 서술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 직후 그 서평격인 논문이 내 모교의 후배, 제자에 의해 발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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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시사를 진행시키는 가운데 나는 내 담론이 고전문학기(古典文學期)의 한국문학과 문화에 대한 소양 부족으로 부실한 구석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되었다. 그 보완책으로 나는 한시 창작 모임에 나갔다. 한시를 짓기 시작하고부터 나는 동양고전의 주류가 되는 이 문학 양식의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밑천으로 하여 몇 개의 현대시론을 만들어 보았다. 그 가운데서 이육사(李陸史)의 <광야(曠野)>론이나 김소월의 <초혼(招魂)>에 대한 생각은 내 나름의 논거가 선 것으로 믿고 있다. 지난해의 한 글에서 나는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과 함께 지훈의 시를 한시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읽고자 한 적이 있다. 특히 지훈의 시 가운데는 직접적으로 한시에 상관되는 것이 나타난다. ≪유수집(流水集)≫(지훈의 미간행 한시집)에 포함된 한 편인 <송행(送行)>은 다음과 같다. 送子靑山路 이 작품에 대비될 지훈의 한시 <송인(送人)>은 다음과 같다. 그대를 보내노니
이들 두 작품에 대해서 나는 한글과 순 한문이라는 표현 매체가 다를 뿐 내용에 있어서는 일란성(一卵性)에 속한다고 보았다. 이런 내 견해 자체에는 별로 이의가 제기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정작 문제는 조지훈 시인의 다른 한시에 대한 내 해석을 두고 제기되었다. 이것은 널리 알려진 지훈의 오언률시 <불국사도중(佛國寺途中)>의 3·4행이다. 율시의 대우적 성격을 말하면서 나는 벽장(碧藏)과 대가 된 홍로(紅露)를 문제삼았다. ‘벽장(碧藏)’ 곧 푸른 기운은 구름 밖의 절을 갈무리하고의 ‘장(藏)’이 용언임에 반해 ‘홍로(紅露)’의 ‘로(露)’가 체언이므로 약간의 문제가 생기지 않나 지적한 것이다. 그러자 내 글을 읽은 같은 한시 모임의 친구 하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의견은 ‘노(露)’를 동사로 읽어 <드러내다>로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벽장(碧藏)’과 ‘홍로(紅露)’가 짝이 되고 작품의 형태가 제대로 파악이 가능하다는 의견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예외격으로 ‘타홍(墮紅)’, ‘낙홍(落紅)’ 등이 있는데 그때는 수식어가 앞에 있어 그렇게 읽는 일이 가능하다. 여기서 이런 말들을 곁들이는 의도는 누구의 해석이 맞고 틀린 점을 가려내자는 것이 아니다. 어떻든 조지훈 시인의 작품을 매개로 해서 이렇게 나는 몇 차례나 세계인식의 자극을 얻어 왔음을 밝히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회보 2008, 제4호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