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승(最上乘) 활구(活句) 참선
최상승 활구(活句) 참선이란 게 무엇이냐?
참선이면 다 같은 참선이지 최상승이란 게 무엇이며 활구(活句) 참선이란 게 무엇이냐?
참선은 왜 한국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으며 일본에는 없을 것인가?
이것은 너무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져 있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중국은 이미 중공이 짓밟아서 불교는 활발하게 그동안에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일본은 너무 민족성이, 민족성의 탓으로 해서 조급하고 잘고 지나치게 노파심절(老婆心切)해서
어떻게 하든지 좀 더 편리하게 빨리 사람들로하여금 깨닫게 하고자 하는 그러한 생각으로 해서
파설(播說?)을 하고 따지고 분별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을 지도하고 배워오기를
백 년 이백 년 이렇게 해내려 오는 동안에 완전히 활구 참선에 본정신으로부터 이탈해-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아무리 깨달아 봤자 참 깨달음이 아니요
아는 중생의 분별심으로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결과밖에는 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 이조에 와가지고 이삼백 년간 경학이 숭상됨에 따라서
이 활구 참선법이 침체일로에 있었다가 경허선사로 말미암아,
다시 선풍이 진작이 되어 가지고 오늘 우리나라가 정말 세계에 자랑할 만큼 그러한 참선법,
활구 참선법이 남아서 다시 십여 년 이래로 선풍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대단히 반갑고 기뻐할 바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참선하되
행여나 일본식 그러한 참선이 한국에 역수입이 되어서
근자에 많은 학자 간에 이 일본식 참선법이 차츰차츰 번져나가 가지고
지성인들 간에 그러한 참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대단히 가슴 아픈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자리에서 모이신,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과연 그러한 좋지 못한 참선에 들은 분은 아니 계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이 자리를 빌려서 확실히 말씀을 해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활구 참선법과 의리선 어디에 분간이 있느냐 하면,
이론으로 따지고 분별심으로 따져서 이리저리 따져-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참선,
이것이 바로 의리선(義理禪)이요, 죽은 참선,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분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경전에 있는 말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이 참선을 하는 데에 동원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리 따지고 차츰차츰 따져서 더듬어 들어가는 거,
이러한 참선은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분별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분별심이 벗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이요, 생사심(生死心)이요,
따라서 그것은 생사 해탈은 못 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지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분별심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버리는 곳에서 깨달음에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어떻게 하면 버리느냐?
화두 공안, 공안(公案)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일종에 수수께끼 비슷한 것이지만
세상에 수수께끼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해-가지고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맞춰보고 해-가지고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맞힐 수 있는 것은 이것은 수수께낍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화두는, 그러한 분별심으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무조건하고, 거두절미하고 ‘이 뭣 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만 그렇게만 의심해가는 것입니다.
무슨 조건도 필요 없고 이러쿵저러쿵 전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에 경전을 읽은 사람이건 안 읽은 사람이건, 유식한 사람이건 무식한 사람이건,
그저 바보가 되어-가지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무자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 뭣 고’를 하는 분은 ‘이 뭣 고?’
다만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렇게 의심을 일으켜서 그 일으켜진 의심을 관조해갈 뿐입니다.
- 송담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