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루카 15,1-3.11ㄴ-32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꿈을 결정해줘도 될까?
세레나 윌리엄스(Serena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23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73회, 더블스 23회 우승을 하였고, 언니 비너스 윌리엄스(Venus Williams)는 그랜드슬램 대회 7회 우승(여자 단식), 올림픽 금메달 4회, WTA 투어 우승 49회, 더블스 14회 우승을 하였습니다.
두 자매가 나란히 세계 랭킹 1위와 2위를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세레나 윌리엄스는 여자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는 한 집안에서 두 명의 모차르트가 태어난 것과 같은 일이라고 합니다.
이 두 위대한 자매를 키워낸 아버지가 리차드 윌리엄스입니다.
리처드는 두 자매가 태어나기 전부터 위대한 스포츠 스타로 만들 꿈을 가졌습니다.
자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래도 되는 걸까요?
심한 인종차별을 겪고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던 리처드는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두 딸을 믿고 둘 다 최고의 선수로 키워냈습니다.
이는 인종차별에 막힌 흑인들에게 자신의 딸들이 희망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렇다고 역 인종차별자라 볼 수 없습니다.
두 자매가 승리를 거듭하며 자신들이 이긴 백인 선수들을 조롱하자 아버지는 엄하게 야단칩니다. 그리고 항상 겸손을 강조하고 두 자매가 경쟁하되
서로 가족임을 잊지 않도록 교육합니다.
두 자매의 지금 심정은 어떨까요? 자신들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테니스를 시킨 것에 후회하고 있을까요?
자신들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명예, 그리고 모든 흑인들에게 희망이 된 두 자매는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꿈을 꾼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할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인생을 선택하여 살았다면 지금처럼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도 아버지에게 보이는 존경과 사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딸들을 이용하였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자신처럼 힘들게만 살아야 할 것이라고 여기면 더 나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들이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믿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테니스라고 정한 것은 큰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세 자매를 모두 위대한 체스 그랜드마스터로 키운 아버지 라슬로 폴가의 예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천재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들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꿈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은 뒤로 미뤄두고 싶습니다.
적어도 자녀들은 아버지의 믿음대로 큰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믿워줘야 합니다.
그것이 방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어쨌거나 자녀를 인도해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무시하면 자녀는 올바르게 클 수 없습니다.
이는 부모가 잘못된 표지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는 자녀를 판단하지 않고 자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잘못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보다는 표지판 없는 도로가 낫지만, 표지판 없는 도로보다는 제대로 된 표지판이 있는 도로가 낫습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종교도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어 자녀가 커서 선택하게 하겠다는 부모의 입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믿음은 어쨌거나 자녀의 표지판입니다.
오늘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 대상은 이 비유에 나오는 형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죄인들의 회개를 보고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모라면 자녀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자녀는 낮은 자존감으로 살 수밖에 없고 삶도 그 믿음대로 됩니다.
우리들도 돌아온 탕자를 정죄하지 않고 인정하시는 아버지를 본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인정해주시는 분이시지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죄하는 자는 그것을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죄하지 않음을 넘어서서 아버지처럼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까지 부모가 자녀의 삶의 방향까지 정해주어야 하는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일찍 시작하면 그만큼 잇점이 있기에 빨리 정해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한국 남자 스노보드 이채운(17·군포 수리고) 학생이 한국 설상종목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선수들의 아버지는 어떨까요? 모두 자신보다 자녀가 더 나을 것이란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빨리 캐치하여 자녀를 그 길로 가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저는 ‘부모가 자녀의 미래까지 결정해 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표지판이 잘못된 것보다는 표지판이 있는 것이 낫고 – 이것은 자녀를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
또 남들처럼 똑같이 공부시켜 경쟁시키기 보다는 더 명확한 표지판이 되어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역할은 판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11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루카 15,1-3.11ㄴ-32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서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대목이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말이지 단출합니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전에는 이 비유를 묵상할 때마다, ‘나는 과연 첫째 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안에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동시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죄 없다고 큰소리치며, 돌아온 동생을 손가락질하는 큰아들의 모습과 크게 가슴치며 탄식하는 작은아들의 이미지, 그리고 사랑밖에 모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동시에 들어있습니다.
사실 큰아들은 작은아들보다 더 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판공성사 좀 보라고 외쳐도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판공성사 본 지가 5년,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량한 이웃들을 큰 궁지로 몰아넣는 패악을 저질러놓고도, 반성하기는커녕 큰소리치고, 의기양양하게 활보하는 적반하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 큰아들입니다.
우리는 부단히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큰아들에서 작은아들로 넘어온 이후에 또 한 가지 과제가 생깁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큰 죄인이다.’‘나보다 더 큰 죄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치기만 하면서 살아서는 또 안 될 일입니다.
이제는 작은아들에서 아버지에게로 넘어갈 순간입니다.
죽을죄를 짓고 돌아왔지만, 두 손을 활짝 벌리고 뛰어나와 맞이하신 아버지의 크신 자비를
온몸으로 느낀 작은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보여주신 그 한없는 따뜻함, 그 극진한 환대를 이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할 때입니다.
용서받은 자로서 이제 밥 먹듯이 용서할 때입니다.
치유 받고 구원받은 자로서 이제 틈만 나면 치유와 구원의 손길을 펼칠 때입니다.
탕자의 귀환을 통해 드러난 영적 순환(큰아들☞작은아들☞아버지), 그것은 오늘 우리네 일상생활 안에서 부단히 되풀이되어야 할 아름다운 스토리입니다.
“참된 신앙은 두려움의 집에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계시는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헨리 나우웬 신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엄격함이 아니라 자비의 영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온유하고 참을성 있고 선하고 자비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요한 23세 교황)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월11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5,1-3.11-32: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이 두 아들은 두 백성이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다인이 큰아들,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은 작은 아들이다. 여기서 작은아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달라고 한다. 작은아들은 아들의 자격을 잃어 마땅하였다.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자기 쾌락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13절) 한다. 아버지에게서 떠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떠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장에서 쫓겨난 사람이다. 그는 먼 고장에서 방탕하게 살며, 인자한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주신 재물을 모두 허비하였다. 음탕한 욕정의 세계에 사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 사는 것이며 당신 얼굴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작은아들은 이렇게 아버지를 떠난 삶을 살았다.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식량의 기근이 아니라, 선행과 덕행의 기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은, 방탕한 쾌락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릴 것이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15절) 아버지에게 의탁하지 않고 낯선 사람에게 자신을 넘기는 사람은 가혹한 심판자에게 당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등진 그는 돼지 치는 신세가 되었다. 진흙투성이 돼지우리에 뒹굴며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쓰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의 평화로운 생활을 등지고 떠난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7절) 그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성령께서는 죄를 지은 이에게서도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절)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날마다 드리는 기도에서 교회는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음을 증언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에게 달려간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드러내거나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입맞춤으로 아들의 죄를 용서하고 포옹으로 덮어준다. 그렇게 상처의 흔적 하나 남지 않도록 말끔하게 고쳐 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22절) 가장 좋은 옷은 영원불멸하는 영광을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줌으로써 예전에 지녔던 명예도 되찾아 준다. 신발을 신겨 주는 것은 발도 헐벗지 않게 하고 신발을 신은 채로 옛날의 삶으로 돌아오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23절) 되찾은 작은 아들을 위하여 준비된 송아지다.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는 안에서 울리는 다윗의 수금 소리와 시편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수많은 사람이 어울려 춤추는 것을 본다. 그러나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생 즉, 다른 민족 형제들을 심판한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말한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아버지의 것이 모두가 그의 것인데, 아버지와 함께 살던 모든 삶이 매일의 잔치였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종같이 살아온 큰아들에게는 기쁨이 없었다. 더구나 이제는 시샘 때문에 형제가 파멸하기를 바라니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맛볼 자격이 없다. 작은아들이 사랑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으로 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다면 큰아들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그 잔치에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역시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