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있는 분들은 알고 있겠지만, 올해는 마르크스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1818.5.5.생). 과문한 탓으로 국내에서는 대대적 학술행사가 열린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일부 신문이나 간행물에서는 그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기사가 간간히 발표되었다. 그러나 분위기 때문인지, 극도로 조심스럽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과연 마르크스는 무오류의 인물일까. 내가 그에 대해 직접 글을 썼다면, 일부는 읽어 보지도 않고 ‘제까짓 게 무슨’ 이라면서 팽개쳐 버리고말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영국의 잡지 Ecomist 2018.5.5.자 발행분에 실린 기사를 번역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쓴 글이 아니고 외국잡지에 실린 글이라는 얘기다. 인간이 사상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인간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냥 차분히, 뒤로 한발짝 물러서서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 보실 것을 권한다.
1.
마르크스 전기(傳記)의 부제목으로는 “실패한 연구”라는 표현이 적당할 수도 있겠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목적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세상을 더 나쁜 쪽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20세기의 많은 부분을 마르크스 체제하에 산 사람들의 40%는 기아, 집단수용소, 공산독재를 경험해야 했다. 마르크스는 그의 새로운 변증법적 철학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20세기의 두가지 큰 조류 - 파시즘 및 복지국가의 등장을 예견하지 못했고, 공산주의가 가장 선진국에서 뿌리를 내릴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가졌었다. 오늘날 나름대로 성공한 유일한 마르크스주의 국가인 중국은 열광적으로 자본주의를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여전히 기념비적인 거인으로 남아있다.그의 탄생 (1818.5.5.) 200주년을 맞이하여 그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유럽집행위원회 의장인 장 끄로드 융커는 중국 정부가 기증한 마르크스 동상 제막식을 위해 그의 고향인 트리에를 방문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한 영국도서관에서는 전시회와 좌담회가 줄지어 열리고,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책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이중 어느 것도 1939년에 이사야 벌린이 쓴 “칼 마르크스” 보다 뛰어난 소개서는 없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책 숫자가 그의 중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왜 세계는그렇게 많은 고통을 야기했던 사람의 사상에 집착하는 것일까.
2.
그 이유는 첫째 사상 자체의 힘에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과학자가 아닐 수도 있지만, 뛰어난 사상가였다는 점은 분명하다.그는 경제력 - 단순한 생산력이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의해 움직이며, 몇 개의 단계(원시공산사회, 노예제사회, 봉건사회,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거쳐 발전한다고 하는 사회이론을 개발했다. 그는 또 뛰어난 문필가였다. 누가 “역사는 반복된다 첫번째는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화극으로?” 라는 그의 발언을 잊을 수 있을까. 그의 사상은 과학적인 동시에 종교적이다. 심지어 그의 사상전체가 세속시대를 위해 재포장된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상에서의 신의 진군을 묘사한 종말론자이기도했다: 자본주의의 추락은 예정돼 있다. 프로레탈리아트는 그들의 착취자에 항거하여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창조할 것이다.
둘째 그의 인간적 개성의 힘이다. 그는 여러가지 점에서 혐오스러운사람이었다. 평생 경제적으로 엥겔스에 기생하여 살았고, 그 자신 유태인이면서도 완고한 인종주의자였기 때문에 그의 편집자마저 일부 글을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하녀를 임신시켜 그 애를 고아원에 보냈다. 미하일 바쿠닌은 그를 가르켜 “야심만만하고허영심 많으며 논쟁을 좋아하고 관용성이 없으며 미쳤다 싶을 정도로 복수심에 가득 차 있다”고 말한 적있다. 그러나 이런 자기중심주의가 천재와 결합하면 엄청나게 강력한 힘으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했다: 본인은 그동안 철학자들이 간과했던 역사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믿었으므로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이를 밀고 나가려고 했다. 그의 행복은 싸우는 데 있었고, 불행은 항복하는 것이었다.
셋째 이유는 역설(Paradox)이다. 그의 사상이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데 실패했기 생명이 더 붙어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후(1883년) 엥겔스를 비롯한 추종자들은 그의 이론을 닫힌 체계로 만들었다. 순수의 추구는 변절자, 개혁주의자, 이단자들을 몰아냈고, 궁극적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라는 기괴한, 자칭 무오류의 사상인 과학적 사회주의를 탄생시켰으며, 애매모호한 변증법적 유물론과 마르크스와 레닌에 대한 개인숭배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석화(石化)되었던 정통성의 몰락은 마르크스가 사실은 그의 추종자들의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운 사람이라는 점을 밝혀주었다. 그의 강점은 불확실한 부분에 있었다. 그의 이론의 힘은 끊임없는 '되돌아보기'에 있었다. 생의 마지막에 그는 그가 확신하는 것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이윤율하락의 법칙”이 틀렸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고, 극빈자들이 더 비참해질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 의혹을 느꼈다. 빅토리아 시대(영국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통치기; 영국의 황금기) 빈민들의 사정은 나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사상이 과거보다 더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2차대전후 논의의 중심은 자본에서 노동으로 옮겨졌고, 생활수준에 대한 집착이 줄었었지만, 세계화와 가상경제의 부상은 다시 자본주의가 통제불능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노동에서 자본으로의 권력의 재이동은 결국 포퓰리즘적 반응을 불러왔다. 최근 피켓티가 쓴 '21세기의 자본론'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상할 게 없다.
3.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지대추구(rent-seeking)체제라고 주장했다. 자본가들은 무에서 부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부를 착취할 뿐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생산방법을 통해 부를 창조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한 잘못이 있지만, 관료적 자본주의제에 대해서는 올바른 진단을 내렸다. 오늘날 많은 자본가들은 부의 창조자라기 보다는 연봉을 올릴 궁리나 하는 거대기업의 경영자이다. 그들은 경영 컨설턴트, 직업적 이사회 임원, 은퇴 고위정치인들과 착취를 위해 전지구적으로 손잡고 일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세계적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하고, 뿌리내리고 있으며, 모든 곳을 연결시킨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살았던 빅토리아 시대만큼이나 현재에도 사실이다. 지난 30년간 가장 중요한 변화 두가지는 먼저 생산요소-상품, 자본 그리고 어느 정도 사람-의 이동을 제약하는 요인이 눈에 띠게 사라졌다는 점이고, 다음 개발도상국의 부상이다. 글로벌 기업은 전세계 어느 곳이던 원하는 곳에 사업을 차릴 수 있고, CEO는 어디든 옮겨 다닌다. 스위스 다보스의 경제포럼의 주제를“마르크스가 옳았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최대이윤을 얻기 위해 경쟁자를 밀어내는 독점경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진단은 세계화와 인터넷에 의해 표상되는 현대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으로 보이기도 한다. 세계적 거대기업은 절대적 측면에서도 점점 커지고 있을 뿐 더러 수많은 중소기업을 부속품으로 만들고 있다. 새로운 기업괴물들은 지난 세기 독점이익을 누린 미국의 강도(强盜)부자(robber baron) 이후 사라졌던 시장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Facebook 과 Google은 미국 온라인 광고수익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며, Amazon은 온라인 쇼핑시장의 40%이상을 점유하고 있고, 어떤 나라에서는 Google이 검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이 직업에서 저 직업으로 떠도는 임시노동자를 양산한다고 했지만, 지난 전후의 긴 호황기때에는 이러한 주장은 난센스로 여겨졌다. 족쇄 말고는 잃을 게 없다던 전세계의 노동자들-최소한 선진국 노동자들은 안정된 직장, 교외의 주택, 풍요로운 소유를 누렸다. 마르쿠제와 같은 마르크시스트들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너무 적은 부를 나눠주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부를 보장한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마르크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긱 경제(Gig economy: 산업현장에서 필요에 따라 사람을 구해 임시로 계약을 맺고 일을 맡기는 형태의 경제 방식. 노동자 입장에서는 어딘가에 고용돼 있지 않고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일을 하는 ‘임시직 경제’를 가리킴.)는 인공지능의 통지에 의해 음식배달, 집안청소, 운전기사로 고용되기를 기다리는 원자화된 노동자들의 예비군단을 양산하고 있다.영국 집값은 너무 비싸서 45세 이하의 사람들은 구입할 꿈도 꾸지 못하며, 대부분 미국노동자들은 은행에 단지 몇 백 달러의 예금을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트는 프리케어리아트(precariat; 미래가 불확실한 자)로 재탄생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고 ‘마르크스 되살리기’가 너무 많이 멀리 가도 안될 것이다. 그의 실수는 그의 통찰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최저수준으로 떨어 뜨린다는 그의 완고한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놀라운 점은 끊임없이 소비재의 가격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오늘 날은 노동자들도 지난날 군주나 누릴 수 있었던 사치품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은행은 극빈자가 1990년 18억5천만명에서 2013년 7억67백만명으로 줄었다고 추산했다. 또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전은 진부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그것은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며 저녁에는 소를 키우고, 식사뒤에는 토론을 한다는 식의 빈둥거리는 삶을 미화했다는 점에서 진부하고, 대중을 위해 그런 비전을 실현하려는 자기도취적인 혁명가를 양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가장 큰 실패는 점진적 개혁의 힘 - 드러난 자본주의의 결점을 합리적 토론과 타협을 통해 해결하는 능력 -을 과소평가한데 있다. 그는 역사가 정해진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전차(戰車)이며 탑승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떨어지지 않도록 매달려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가까운 예로 Gladstone(개혁파 영국수상)은 여파가 멀리까지 미친 큰 개혁과 설득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의 결점을 보완해 나감으로서 그가 틀렸다는 점을 증명했으며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바보 같은 의회주의가 프로레탈리아 독재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4.
마르크스 사후 선진세계에 있어 역사의 주요의제는 혁명보다 개혁이었다. 합리적인 정치가들은 노동자 계급의 발언권을 보장하였고, 경제력 집중을 규제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했다. 경기변동과 패닉을 완화할 수 있도록 통제기법을 쇄신했다. 그 결과 마르크스의 사상에 매달려 있는 국가는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후진 독재주의 국가 밖에 없다. 오늘날 가장 큰 질문은 자본주의가 지금과 같이 이루어 낸 성과가 다시 한번 계속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프로레타리아트연대라기 보다는 포퓰리스트적인 분노에 가깝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반동이 점증하고 있다. 슬픈 일이지만 현재 자유주의 개혁가들은 위기대처능력과 해결책을 찾는데 있어 그의 선배들 보다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마르크스를 다시 평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자유주의 개혁가들은 마르크스가 그의 체계에 포함시켰던 치명적인 결함뿐만 아니라, 만약 그들의 개혁이 실패하면 기다리고 있을 재앙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첫댓글 안그래도 읽어 보려고 프린트해놓았는데 친절하게도 번역을 올려주셨군요. 자본의 이윤동기 고삐가 풀릴 때 마르크스를 반면교사로 삼자 그런이야기같군요. 당위 규범에 기초한 경제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 이기심으로 목표로 하는 이상을 달성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심이나 욕망이 나쁘다기보다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남보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려는 인간의 욕망을 정면으로 규제하려는 시도는 전에도 앞으로도 실패할 것으로 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데는 탁월했으나, 정작 새로운 사회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는 식의 욕망을 극복한, 또는 욕망이 없는 공허한 인간들로 채워넣었습니다.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타인을 위해 능력을 다해 일할 용의가 있는 걸 까요?
(자기합리화에 의해) 대외적으로 거창하거나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자신 나름대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고 전 생각합니다 ...
후배가 다녀와서 전해준 사진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제 이윤보다 손실에 민감한 비합리적 인간 심리를 분석하는 행동경제학이 대두되네요..